타카오(중순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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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雄. 일본 해군 타카오급 중순양함의 1번함.
'''타카오급 중순양함'''
타카오
아타고
마야
초카이
1. 제원
2. 함생


1. 제원


타카오급 중순양함 1번함 타카오의 제원
구분
취역시(1930년)
대개장시(1939년)
최종사양(1944년, 마야)
기준배수량
11,350t
13,400t
15,159t
전장
203.76m
유지
유지
전폭
19m
20.73m
유지
흘수선
6.11m
6.32m
유지
보일러
로호함본식 중유보일러 12기
개량(명칭은 동일)
유지
추진기
함본식 기어드 증기터빈 4조 4축
개량(명칭은 동일)
유지
출력
130,000shp
132,830shp
유지
연료
중유 2,645t
중유 2,318t
유지
속도
35.5knot(65.746km/h)
34.6knot(64.0972km/h)
유지
항속거리
14knot(25.928km/h)에서 8,000해리(14,816km)
18knot(33.336km/h)에서 5,000해리(9,260km)
유지
승무원
727명
835명
996명
주포
3년식 2호 20cm 50구경장
2연장 주포탑 5기
(총 10문)
유지
3년식 2호 20cm 50구경장
2연장 주포탑 4기
(총 8문)
대공포
10년식 12cm 45구경장
단장 대공포좌 4기
(총 4문)
89식 12.7cm 40구경장
2연장 대공포탑 4기
(총 8문)
89식 12.7cm 40구경장
2연장 대공포탑 6기
(총 12문)
대공기관포
비커스식(毘式) 40mm 62구경장
단장 기관포좌 2기
(총 2문)
96식 25mm
2연장 기관포좌 4기
(총 8문)
96식 25mm
3연장 기관포좌 13기
(총 39문)
96식 25mm
단장 기관포좌 9기
(총 9문)
대공기관총
7.7mm 루이스 기관총 2정
93식 13mm
2연장 기관총좌 2기
(총 4문)
93식 13mm
단장 기관총좌 36기
(총 36문)
어뢰
61cm 2연장 수상어뢰발사관 4기
(총 8문)
90식 어뢰 16개 탑재
61cm 4연장 수상어뢰발사관 4기
(총 16문)
93식 산소어뢰 24개 탑재
유지
장갑
측면주장갑 102mm (탄약고 부위는 127mm)
갑판장갑 34mm - 46mm
2연장 주포탑 전면 25mm, 측면 25mm,
후면 25mm, 천장 25mm
주포탑 바벳 갑판돌출상부 38mm, 갑판하부 25mm
탄약고 측면 38mm - 76mm, 천장 47mm
유지
유지
함재기
수상기 3기, 캐터펄트 2기
수상기 4기, 캐터펄트 2기
수상기 2기, 캐터펄트 2기
레이더
없음
없음
2호 1형 1기
2호 2형 2기
1호 3형 1기

2. 함생


[image]
타카오는 1927년 요코스카 조선소에서 건조되고 1930년 5월 12일 진수되었다. 그리고 2년뒤 정식으로 취역했다. 원래 타카오는 아마기급 순양전함의 4번함의 이름으로 사용되려다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이 체결되자 건조되지는 못하고, 이 함명은 타카오급 중순양함 1번함 타카오가 이어받았다.
1932년에 타카오는 요코스카 진수부에 소속되며, 제2함대의 4전대에 소속되었다. 타카오가 소속된 뒤 나구모 주이치가 1934년까지 타카오의 함장을 맡았다.
그러나 타카오는 '''함교가 너무 커서''' 배의 안정성에 문제가 생긴 이유로 1938년과 1939년 사이 아타고와 함깨 대개장을 받았다. 그 이후, 1940년에 아타고와 함께 중국 해역을 순찰하러 다녔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의 결정적 신호탄인 진주만 공습이 시작된후 아타고, 마야와 함께 필리핀의 상륙작전에 지원을 나갔고, 곤도 노부타레(近藤 信竹)의 지휘 하에 동인도제도의 해역을 봉쇄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래저래 활약을 한 타카오는 태평양에 배치되었다.
5월 2일에는 수상기모함 미즈호 구출 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8월이후 남부의 트럭 섬으로 배치된 후, 11월 과달카날 해전에 참전하여 핸더슨 비행장에 포격을 가하여 사용불능으로 만들었고, 이후 야간에 공고급 순양전함 기리시마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다. 같은 날,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사우스다코타와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워싱턴을 발견했다. 그리고 타카오는 사우스다코타에 포격을 가하여 관제장치를 사용불능으로 만들었고, 이후 타카오와 아타고는 워싱턴을 향해 산소어뢰를 발사했지만, 모두 피했다. 하지만 이를 대가로, 워싱턴은 기리시마를 향하여 포격을 가했고, 이후 기리시마는 격침되었다. 타카오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은 채 구레 항에 정박해 있다가, 12월 말 다시 과달카날로 돌아왔다.
1943년, 타카오는 과달카날 철수 작전에서 엄호를 맡았다가 8월 요코스카 항구로 돌아가서 개장을 한뒤 라바울로 갔다. 라바울에 급유를 하던중 타카오는, SBD 돈틀리스 급강하 폭격기 편대의 공격을 받고 중파당했다. 중파된 타카오는 요코스카로 돌아왔고, 1944년 1월 까지 중파된 상태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1944년 1월 이후 요코스카 항에서 방치된 타카오를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수리를 마친 타카오는, 3월에 필리핀에 배치되었다. 4월에 타카오는 잠수함의 공격을 받았지만, 운좋게도 어뢰를 피했다. 이후 6월 13일, 타카오는 필리핀 해 해전에 참가했다. 그러나, '''마리아나 해의 칠면조 사냥'''이라 불릴 정도로 대대적인 참패를 당했다. 하지만 타카오는 살아남아 구레 항에서 대공장비 증설 등의 개장을 받았고. 이후,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image]
4개월 뒤, 일본 해군의 운명을 결정짓는 레이테 만 해전이 발발하자, 타카오는 구리타 타케오의 함대에 재배치를 받은 뒤, 레이테 만으로 이동중 가토급 잠수함 USS 다터에게 공격을 받았다. 갑작스런 기습공격에 중파된 타카오는 간신히 침몰을 막고 USS 다터의 추격을 피하러 브루나이로 이동하다가 싱가포르에 도착했다. 이후 중파된 타카오에 대한 수리가 이루어졌지만, 싱가포르를 방어할 필요성 및 이동능력 복구가 어렵다는 판단이 내려져서 결국 함미를 절단하고 응급방수조치를 시행하여 이동능력을 상실하고 대공포대 신세가 되었다. 이후 1945년 7월 31일에 영국 특수잠수정 XE3의 잠입 및 잠수부를 통한 기뢰 부착공격으로 인해 함체에 손상을 입었으나 결국 싱가포르에 정박한 채 전후까지 살아남았다. 전후인 1946년 10월 29일에 영국 해군은 말라카 해협에서 타카오를 표적함으로 삼아서 침몰시켜 버렸다. 이때 묘코급 중순양함 묘코도 사이좋게 침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