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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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작가이자 극작가, 연극감독, 철학자, 과학자, 시인이며 한때에는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이었다. 그는 '''근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문인'''으로 여겨진다.
2. 생애
2.1. 유년기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괴테(1710~1781)는 평민 출신이지만 꽤 규모가 큰 세탁업 공장을 한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고등교육을 받아서 왕실고문관까지 올라 평민층으로서는 엄청난 출세를 거둔 사람이었다. 어머니인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르(1731~1808)도 평민층이지만 고향 프랑크푸르트의 시장인 요한 볼프강 텍스토르[3] (1693~1771)의 딸이라서 어린 괴테도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고 덕분에 고등교육도 마음껏 받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를 낳았을 때 나이가 18살이었고 아버지와 나이 차이가 21살이었다...
괴테가 태어나고 이후 태어난 두 남동생은 어린 나이로 일찍 죽어서 어린 괴테를 한때 우울하게 만들었다. 그나마, 누이동생 마르가레타는 무사히 잘 자라서 어린 괴테가 무척 귀여워해줬고 죽을때까지 매우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괴테는 늘그막에 회고하길 "아버진 존경하지만 너무나도 엄격하고 까다로운 면이 많아 어린 나에겐 언제나 엄하고 무서운 분이셨다. 그래도 아버진 책임감이 강하고 약속을 꼭 지키던 분이라 정말 멋진 분이었다. 어머니는 가정적으로 너무나도 훌륭하시고 나에게 자상함을 일깨워주신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문학에 대하여 무척 흥미를 가져서 아들인 요한이 글을 잘 썼으면 했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어릴적에 요한은 무척 글쓰기에 흥미를 보여 작문학교에서 교사에게 높은 점수를 받았고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며 그때마다 용돈을 푸짐하게 주며 칭찬해줬다.
2.2. 문학으로의 입문
이런 풍족함 속에서 아버지는 그가 원하는 대로 부족함 없는 교육을 받게해줬다. 프랑스와 전쟁 와중에 프랑스군이 프로이센이던 당시 독일 일부를 지배할 때, 괴테의 집에 프랑스군 점령군 사령관인 토랑 백작이 머문 적이 있다. 아버지는 무척 그를 싫어했지만, 10대인 괴테는 문학을 위해서라면 프랑스가 수준이 높기에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다고 어머니와 같이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그래서 아들을 위해서 프랑스군 사령관인 백작을 극진히 대접해 친하게 지냈고 백작은 이런 대접에 고마워하며 어린 괴테에게 독일어를 잘하는 프랑스군 부하장교를 시켜 프랑스어를 가르치게 해줬다. 그리고, 나중에 프랑스로 유학 온 괴테를 토랑 백작은 반갑게 맞이하여 머물 숙소를 알선하기도 하며 괴테가 유럽에서 이름을 떨칠때 서로 편지도 보내고 친하게 지낸다.
이 2년동안 열심히 프랑스어를 배우면서도 16살 나이에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입학하여 법학과를 졸업해 22살 때 변호사 사무소를 열기도 했다. 그리고,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도 2년동안 머물면서 법학 공부를 했는데 이 인연으로 지금도 스트라스부르 대학에는 괴테의 길이라는 길과 같이 동상이 세워져있다.
하지만 법학보단 글쓰길 좋아하여 24살때 희곡 <괴츠 폰 베를리힝엔>을 쓰며 문학에 발을 내민다.
그리고 나이 겨우 스물 다섯인 1774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하나로 유럽에 유명세를 떨친다. 심지어 '나를 언제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작가로만 기억한다'고 괴테가 불만을 가질 정도로 이거 하나로 엄청나게 떴다. 심지어 그가 60년에 걸쳐 완성한 필생의 대작이자 세계 문학 사상 최대 걸작 중 하나인 파우스트(거의 60년을 매달리면서 무수한 수정과 편집을 번갈아가며 썼다!)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인기만은 못 따라갔다고 하니...
알려진 거와 달리 작품 자체로는 큰 돈을 벌지 못했다. 출판사가 듣보잡 애송이 작가이던 그에게 인세를 조금 내줬고 유럽 곳곳에 해적판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의 계기가 된 것은 맞고 이 소설을 보고 감탄한 바이마르 공국 고위 귀족인 칼 폰 아우구스트 공작이 그를 초청해 공무원으로 고용했기 때문이다. 공무원으로 3년동안 지내면서 돈은 두둑히 받았지만 괴테는 공무원이 지겨워져 이탈리아 여행간다면서 공작을 속이기도 했다.
하지만, 공작은 그가 공무원을 지겨워한다는 걸 알고 글만 잘 쓴다면 그만큼 돈을 주고 후원하겠다고 그를 이해해주면서 비로소 괴테는 생활에서 불편함이 없게 되었다. 이 때, 나이가 30대였으며 이 아우구스트 공작은 나중에 괴테를 친구같이 여겨 늘그막까지 매우 친하게 지냈다.
이렇게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되면서 그에게 산더미처럼 오는 편지로 자신의 작품을 보여주고 싶다고 오는 예비 작가들도 만나보고 문학에서부터 철학이나 과학이나 여러모로 큰 관심을 보였다. 빌헬름 텔, 군도로 유명한 극작가 프리드리히 폰 실러도 그에게 작품을 보이면서 주목을 받아 괴테의 도움으로 극작가로 대박난 경우.
2.3. 괴테의 여인들
이렇게 곱게 펼쳐진 인생에서 괴테는 무수한 여자와 사귀면서 사랑에 관한 글을 많이 남겼다. 오죽하면 괴테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괴테와 사귀었던 여자들도 같이 연구해야지 괴테를 알 수 있다고 할 정도이다.
괴테는 자신의 연인을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게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대표자가 파우스트의 그레트헨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샤를롯테 부프(1753~1828)이다. 그레트헨은 괴테가 십대 때 첫 눈에 반한 첫사랑의 대상이었고[4] , 샤를롯테는 괴테의 친구의 아내였다(...).[5]
사귀던 여자들과의 나이 차도 엄청나서 19살 때는 26살이나 연상인 주잔네 폰 클레텐베르크(1723~1774)란 여자와 사귀었고 나중에 무려 55살 연하에게 청혼하기까지 한다. 첫 결혼은 16살 연하인 크리스티아네 폰 불피우스(1765~1816/당연히 나중에 성은 괴테)와 했으며 그 여자에게서 아들인 아우구스트 폰 괴테(1789~1830)를 얻었다. 그런데 괴테는 그 여자와와 동거한 지 18년이나 지난 1806년에서야 혼인했고 결혼 9년만에 크리스티아네는 병사했다. 여담으로 크리스티아네는 평민이어서 주변에서는 괴테의 사실혼을 말렸다고 한다. 특히 친하게 지내던 샤를로테 슈타인[6] 과의 관계가 이 일로 인해 잠시 껄끄러워졌다고.
아내 사후에도 여러 여자와 사귀었는데 1823년에는 무려 ''''55살이나 연하'''인 울리케 폰 레베초프(1804~1899)라는 여자에게 청혼했다. 울리케와는 2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이긴 했지만 이런 청혼에 친구이던 공작 칼 폰 아우구스트는 미치도록 웃으면서 "일흔 넷에 19살 여자를 사랑하다니 이건 심하다고!"라면서 놀려댔다. 하지만, 괴테는 진심이라 의사까지 찾아가 이 나이에 혼인해도 되겠냐고 진단받기까지 했다. 의사는 매우 건강하니 걱정 말라고 답변했다고. 그러자 괴테를 놀리던 공작 아우구스트도 괴테의 마음이 진심이라는 걸 깨닫고 괴테의 부탁을 승낙하여 레베초프 부인을 찾아가 괴테를 소개하고 괴테가 부인의 딸을 좋아한다고 이야기해 줬다. 그러자 울리케의 어머니인 레베초프 부인는 "괴테 씨야 너무나도 유명하고 그런 분이 우리 집안과 한 집안이 되는 건 나쁘진 않지만 아무래도..."라며 곤란하다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괴테의 아들인 아우구스트가 결사반대하는 통에 이 혼인은 이뤄지지 못했다. 솔직히 자신보다 '''15살이나 어린''' 여자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용자가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래도 괴테는 이 사랑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 나는 사랑을 하고 그리하여 사랑받으면서 행복했노라 (Hier war ich glücklich, liebend und geliebt)"
2.4. 다재다능
문학가로서도 명성이 높지만 이 외에 여행기도 쓰고 연극 감독으로서 궁정무대를 통솔하기도 했다. 특히, 연극무대 경영·연출·배우 교육에도 재능이 상당해서 자신의 희극들을 유감없이 연극으로 잘 묘사하여 연극으로도 상당한 대박을 거둬들였다. 오죽하면 그의 연극 연출, 경영, 교육을 두고 다른 연극인들이 '이 분야로도 한 우물을 파도 될텐데'라는 말까지 했다.
거기에 식물학에도 관심이 깊어서 전문가급의 연구를 했으며 과학자들을 후원하고 식물학에 대한 책도 집필했다.[7] 이 저서는 식물학자들에게도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오죽하면 식물학자인 베르너 라이히트아젠이란 사람이 괴테에게 "식물학자로 연구하셔도 되겠습니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괴테씨의 열정과 지식을 봐도 그만큼의 가치가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라는 편지까지 썼다. 실제로 괴테의 과학적 업적은 당대 생물학자중에서 최고수준이었다.
다만 식물학과는 별개로 물리학자로는 영 아니었다. 왜냐하면 괴테 본인이 물리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당시 물리학은 아이작 뉴턴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반면, 괴테는 독일의 낭만주의자로서 뉴턴과 대척점에 서있었다. 괴테는 자연을 나누어 수량화하는 뉴턴 역학이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했으며, '자연은 연속적인 것'이라는 유기적 우주관을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사물을 극과 극 간의 조화로 설명하는 자신만의 자연철학까지 시도했었다.[8] 심지어 괴테는 광학에 대한 진실을 아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자신 뿐이라는 개드립까지 했다... 물론 현대의 승자는 뉴턴 쪽이 된다.
더불어 괴테는 바이마르 공국 재상으로 재직할 당시 정치인으로서 재능이 상당함을 보여줬다. 프랑스군과 전쟁을 대비하고 물자비축 및 비상 체제로 들어가 자신이 재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다했다. 발미전투[9] 에서는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브라운슈바이크 공작(1735~1806)의 참모로서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다만 전쟁의 결과에서 나타나듯이 괴테에게 군인이나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없었다. 심지어 주위에서 '참모라고 쓰고 기록 서기관이라고 읽는다.'라는 조롱까지 했다. 그러나 괴테는 글을 잘 쓰는 재능으로 당시 참전 기록에 대하여 세세한 묘사를 했다. 사실 공작부터가 군인으로 유능한 데다 그의 곁에는 이미 화려한 참모진이 있었기에 굳이 괴테가 참모로서 책임을 다 할 필요도 없었다.
또 그는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평생 동안 그림 작품이 1000점이 넘을 정도로 예술에 있어서도 그의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2.5. 말년
괴테는 만 82살까지 장수했지만 아들과 아내 모두를 먼저 여의었기에 이를 늘 서글퍼했다. 10살 밑이던 후배 실러와도 친구처럼 지냈는데 1805년 실러도 46살 한창 나이에 병으로 죽고 말았다. 이 때의 일화로 1805년 새해 연하장을 실러에게 쓰던 괴테는 실수로 새로운 해를 마지막 해라고 잘못 써서 기겁하고 다시 연하장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괴테는 뭔가 느낌이 안 좋다며 실러를 걱정했고 예상대로 실러는 그 해에 사망했다. 괴테는 실러가 죽었단 소식을 듣고 '그래? 어쩐지 예감이 안 좋았어'라고 말하곤 조용히 서재로 들어가 홀로 울며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괴테의 임종 당시 그의 곁을 지킨 식구는 과부가 된 며느리인 옷틸리에 폰 괴테(1796~1872)와 손자인 베르터 폰 괴테(1818~1885), 프라이헤르 폰 괴테(1820~1883), 손녀인 알마 폰 괴테(1827~1844) 이렇게 4명이었다. 괴테는 며느리에게 잘 대해주었으며 당연히 재산을 그녀에게 모두 물려주었다. 살아있을 때에 이미 부와 명예, 모든 것을 누렸기에 괴테의 80살 생일 때는 고향 마을에서 그날을 경축일로 기리며 잔치를 열었을 정도였다. 죽기 전에 온 여러 유명인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며느리 손을 잡으면서 이제 마음껏 살라는 말을 한 다음, 이런 유언을 남겼다.
'''"좀 더 빛을… 조금 더 빛을…"'''[10]
또는 하인에게 "창문을 열어달라고 전해다오… 빛이 더 들어오게…."라고 번역한 것도 있다. 사실은 "오줌이 마려우니. 요강 좀 가져와라"는 게 유언이란 주장도 있지만...
더불어 괴테는 침대에 누워 죽었다고 알려졌는데[11] 이건 사실이 아니다. 독일에 있는 괴테 하우스를 가보면 거기 가이드가 괴테는 의자에 앉아 삶을 마감했다고 이야기한다. 괴테는 안락의자에 앉아서 유언을 남겼고 침대로 모시려는 가족들에게 그냥 여기서 잠들게 해달라고 하여 거기서 숨을 거뒀다. 당연하지만 그 안락의자는 그대로 지금도 괴테 하우스에 남아있다.
그밖에 평생을 쓰던 많은 펜이니 책상이니 무수한 흔적은 200년이 되어간 지금도 엄청 많이 남아있으며 심지어 어릴적 편지에서 어릴적 작문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라든지 일기장 등 무수한 유품들이 넘쳐놔서 지금까지도 괴테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할 정도로 많은 유품들이 소중하게 간직되고 있다. 덕분에 이 항목에 나온 여러 이야기도 카더라가 아니라 대부분이 사실이고 그를 증명하는 것들도 많이 있다.
3. 명언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은,'''
'''울먹이며 다음날을 기약하면서'''
'''캄캄한 절망의 시간을 지내보지 않은 사람은,'''
'''그대 어두운 힘을 모르리.'''
빌헬름마이스터의 수업시대
외국어를 모르는 자는 모국어에 대해서도 모른다. "[원문출처]
어떤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 내포보다는 외연을 살피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나는 인류의 모범을 찾기 위해 역사를 살펴보았고 결국 무함마드에게서 그 모범을 찾았다.
4. 여담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존경한 인물 중의 하나다. 그는 괴테에 대해 역사상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평했다.출처
- 한때 베토벤과도 매우 친하게 지냈었다고 한다. 하지만 각자 성격이 너무 정반대였기 때문인지 트러블도 있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걸으며 산책하던 중에 맞은편에서 황족 및 귀족 몇 명이 걸어오자 자유분방하고 반항적인 기질의 베토벤은 저들에게 길을 비켜주지 말고 이대로 뚫고 가자고 했으나, 괴테는 이에 동의하지 않고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며 모자까지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다. 이에 베토벤은 괴테가 너무 속물이고, 또 비굴하다며 큰 실망을 표했고, 괴테도 베토벤이 너무 교양미가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그 뒤로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않았다. 베토벤 연구가 알렉산더 윌록 세이어에 의하면. 괴테도 나중에 그 일화를 회고하면서 베토벤과 자신은 맞지 않는다고 지인들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즉, 위 일화는 사실에 가깝다.
- 괴테는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12] 음악가 첼터[13] 와 교류하며 오페라제작에 힘쓰기도 했으며 멘델스존이 바흐의 음악을 부활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괴테를 존경하여 그의 시 마왕을 가곡으로 작곡한 슈베르트가 악보와 편지를 보내오자 괴테는 음악은 시와 글보다는 못하다면서 냉정하게 외면했다고 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슈베르트 사후[14] 에 그를 인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차르트에 대해선 높이 평가하였으며 바이마르의 궁정 예술감독 시절엔 모차르트의 작품을 자주 공연하였다. 그 외에도 파우스트를 오페라로 만들 인물로는 모차르트를 뽑았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모차르트는 괴테를 몰랐는데 실제로 둘은 만난적이 있긴하다. 모차르트가 7살쯤에 유럽연주회를 다닐적에 프랑크프루트에서 많은 관객 중에 한사람으로 14살의 괴테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어린 모차르트를 작은 칼을 차고 머리는 땋아내리고 있었다라고 당시 제자였던 요한 페터 에커만에게 말했다고한다. 이러한 그가 최고로 뽑았던 음악은 돈 조반니인듯 하다. 그 외에도 마술피리를 보고 감명받은 그는 마술피리 후속작을 만들기로 하지만 결국 미완성으로 단편으로 남아있다.
- 도플갱어를 봤다는 기록을 남긴 바 있다. 환각인지 몰라도 괴테는 일기장에 홀로 말을 타고 사람이 없는 숲길을 가는데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 반대편에서 말을 타고 가는 걸 보고 놀랐다고 적었다. 그런데 8년뒤에 꿈에서 봤던 길을 걷다가 8년전 자신과 닮은 사람이 입던 재킷을 입고 가는 모습을 목격하고 '설마 8년전에 내가 본 것이 지금 이 모습인가' 하며 신기하다고 일기장에 적었다고 한다. 과거 국내 위인전이나 괴담집에서도 언급되다보니 괴테를 빙자한 카더라 괴담이 아니냐는 사람도 있을 법하지만, 이 이야기는 괴테의 일기장에서도 1808년 3월 8일에 이런 걸 보았다는 기록이 남아있기에 카더라 이야기가 아닌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독일에서도 괴테가 본 것을 안개벽에 반대편의 형상이 거울처럼 비쳐 보이는 브로켄 현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 있다. 실제로 괴테는 안개 낀 아침에 산책하길 매우 즐겼기에 이 분석도 그럴 듯 하다. 일기장에 괴테는 이 이야기에 대해 아리송하다고만 썼을뿐, 깊게 파고들며 분석하거나 생각하려 하지 않았다.
- 초콜릿 광이었다. 집에서 기분이 좋을 때 먹는 초콜릿, 나갈 때 들고 다니는 초콜릿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청혼할 때도 초콜릿으로 했다고(...) 다크 초콜릿 맛의 쾨스트리쳐 슈바르츠비어의 별명도 괴테 맥주. 물론 초콜릿이나 단 걸 먹고 나면 반드시 이를 헹구고 닦았기에 죽을 때까지 이는 꽤 멀쩡했다고 한다. 괴테가 살던 시대에도 치약이 있었지만 그땐 꽤 비쌌다. 하지만, 꽤 부자 집안에서 태어난 괴테에겐 그리 문제 없었다.
- 1912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독일 유명 작가이던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Gerhard Hauptmann,1862~1946)이 작가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 무슨 생각을 하며 공원을 산책하다가 잔디밭으로 들어가 걷고 있었다. 그는 미처 그걸 깨닫지 못하고 계속 걸었는데 공원 관리인이 마구 화내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하우프트만은 자신이 잘못은 했지만 그렇게 큰소리로 망신주는 것이 화가 나서 "내가 누군지 아시오!" 라고 맞받아쳤다. 그러자 관리인이 잠깐 말문이 막히다가 대꾸하길 "아, 당신이 그 유명한 괴테 씨라는 거 압니다만 그래도 지킬건 지켜야 하지 않습니까?" 이 말에 하우프트만은 우울해져서 순순히 바깥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갔고 일기장에 "난 유명하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괴테라는 거인은 죽어도 100년이 되어가도록 내가 따르지 못한다." 라고 적었다고 한다.[15]
- 독일문화원의 명칭에는 괴테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주한 독일문화원을 가면 간판의 독일어 표기가 Goethe Institut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홈페이지 도메인까지 www.goethe.de일 정도다.
- 괴테가 태어나고 많은 세월을 지낸 프랑크푸르트는 괴테가 자랑이다. 괴테가 태어난 집도 괴테 하우스라고 하여 그대로 남아있으며 괴테 박물관에 괴테의 흔적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다. 그가 대학을 다닌 라이프치히도 마찬가지로 괴테 학습 박물관을 세우고 괴테를 많이 홍보한다.
- 알려지지 않은 것이 괴테가 취미로 수석을 무척 모으길 좋아했다는 점이다. 독일 전역 뿐 아니라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해외에서도 마음에 드는 여러 암석을 가져왔고 지금도 그가 평생 모은 6,500여점이나 되는 수석이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괴테 하우스나 괴테 박물관 등등에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당연하지만 책도 많이 읽어서 그가 평생 모으고 읽던 책도 3,000여권이 그대로 전시되어 남아있다.
- 국내에서는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의 저서 등의 영향으로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지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실제로는 잘못 퍼진 명언이다. 괴테 본인이 독일인이니 만큼 정말 괴테가 한 말이라면 독일어 원문도 함께 존재해야 하는데,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괴테가 했다고 실어둔 해외 사이트에서도 독일어 원문만은 발견되지 않는다.
- 와인을 사랑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맛없는 와인을 먹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와인을 사랑했다. 괴테가 직접 그린 그림을 레이블로 사용해 '괴테의 와인'이라 불리는 디히터트라움(Dichtertraum)도 있다. 독일어로 디히터(Dichter)는 시인, 트라움(Traum)은 꿈이라는 뜻이다.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괴테의 팬이었다고 한다. 실제 귀족들 사이에서 크나큰 인기를 들던 '젊은 베르터의 고뇌'를 전쟁터에서도 가지고 다니며 읽었다고. 따로 만남을 가지기도 했었다.
- 교양만두가 올린 유튜브 영상에 나온 위인전 인물 인성에서 말하길, 괴테가 성격이 엄청 지럴같은 유교 꾠대라고 한다. 아들 아우구스트가 만 40살로 요절한 것도 아버지 이런 점으로 받은 스트레스 탓이 컸다고 한다. 다만 교양만두 항목에 있듯이 이 에피소드에 나온 이 이야기들이 출처 불명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5. 작품
5.1.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친화력》
5.2. 희곡
《파우스트》
《오누이》
《에그몬트》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토르콰토 타쏘》
5.3. 시
《프로메테우스》
《산 위에서》
《발견》
《마왕》 - 젊은 날의 시. 이하 출처는 문예출판사 "괴테 시집", 송영택 옮김.
《강가에서》
《봄의 축제》
《매정한 아가씨》
《기쁨》
《슬픔의 기쁨》
《아모르의 무덤》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는》
《이별》
《희망》
《회색으로 흐린 아침》
《채색된 리본》
《사냥꾼의 저녁 노래》
《크리스텔 생각》
《들장미》
《오랑캐꽃》
《물레질하며》
《내 곁을 떠나지 마라》
《호수 위에서》
《새로운 사랑, 새로운 삶》
《벨린데에게》
《산 위에서》
《귀여운 릴리》
《릴리에게》
《목에 걸고 있던 하트 모양의 금메달에게》
《근심》
《용기》
-초기 바이마르 시절의 시
《밤의 생각》
《나그네의 밤 노래》
《나그네의 밤 노래》 - 위의 시와 제목이 같다. 괴테가 마지막 생일날, 키켈한이라는 산장 벽에 젊은 시절 적어둔 이 시를 찾아가 읽으며 눈물지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명심》
《쉴 사이 없는 사랑》
《법정에서》
《달에게》
《인간의 감정》
《훈계》
《물 위의 영혼의 노래》
《간청》
《쌀쌀맞은 아가씨에게》
《잃어버린 첫사랑》
《외롭게 사는 사람은》
《슈타인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슈타인 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코프타의 노래》
《눈물과 함께 빵을》 - 내용은 1연은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수많은 괴로운 밤을 잠자리에서 울면서 새운 적이 없는 사람은 너희들은, 하늘의 힘을 모른다. 2연은 너희들은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고, 불쌍한 자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다. 그러고는 심한 가책을 느끼게 한다.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 세상이니까. 여담으로 위 소개가 이 시를 인용해서 설명하였다.
《그림움을 아는 사람만이》
《신성》
《그대는 아는가》
-이탈리아 여행 이후의 시
《나는 이 곤돌라를》
《사람의 일생》
《소위 자유의 사도라는 것이》
《로마의 비가 V》
《로마의 비가 VIII》
《로마의 비가 IX》
《로마의 비가 X》
《로마의 비가 XVII》
《로마의 비가 XVIII》
《바다의 고요》
《운이 좋은 항해》
《이 새하얀 옷을》
《말하라고 하지 마시라》
《문간마다 가만가만 다가가서》
《필리네》
《사랑하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미뇽에게》
《그것이 참다운 사랑이다》
《저는 왜》
《모든 계층을 통틀어서》
《회상》
《리나에게》
《일찍 찾아온 봄》
《자기기만》
《양치기의 서러운 노래》
《그리움》
《마법사의 제자》
5.4. 여행기
《이탈리아 기행》 : 단순한 여행기를 넘어 문학적, 예술적 가치가 상당하다.
[1] 외래어 표기법대로는 '폰괴테'가 된다. 외래어 표기법상 로망어와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고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이름이 영어로 발음하기 괴랄한 편인데, 영어로는 "거터"라고 읽는다. 프랑스에서는 괴츠라고 부른다고 한다.[3]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괴테 이름은 외할아버지 이름을 그대로 쓴 이름이다.[4] 그레트헨 본인은 괴테를 돌봐주는 동생 정도로 생각했고 그레트헨이 귀항하고서 이것을 알게 된 괴테가 이것을 수치스럽게 여겼기에 끝은 별로 좋지 않았다.[5] 롯데그룹은 이 샤를롯테에서 따 온 이름이다. 롯데시네마의 프리미엄 상영관명도 샤롯데다.[6]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모델이 된 샤를로테 부프가 아니다. 이 쪽은 괴테가 거의 서른이 된 뒤에 친해진 여성 문인이자 고위 귀족이었다.[7] 이 책에서 밝힌 대표적인 사실 중 하나가 바로 '''꽃은 잎이 변한 것이라는 것이다.'''[8] 에른스트 페더 피셔,'또 다른 교양', 김재영 역, 이레,2006[9] 1792년 9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거느리는 7만 8천에 이르는 프로이센 군이 프랑스 파리로 쳐들어간 전투였는데 의용군이 대부분이던 5만여 명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의 침략을 막아낸 전투이다. 사실 병력 수와 달리 전사자는 굉장히 적은 전투로 프로이센군은 겨우 184명이 전사하고 2천 명 정도 부상자를 낳았으며 약 5만 명 가까이가 동원된 프랑스군은 3백 명 정도가 전사했다. 그렇지만 프랑스로선 프로이센의 파리 침공을 막아낸 사실상 승리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전투는 프로이센군이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다. 탐색전 정도로 전투를 벌였기에 사상자가 동원병력에 견주면 매우 적었다. 만일 프로이센군이 죽어라 전력을 다했더라면 양군이 몇 만은 넘는 사망자가 나올 전투였고 프랑스 역사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힘을 다하여 전투를 벌여봐야 오스트리아라든지 다른 나라만 득을 볼 게 뻔할 노릇이기에 그럴 수도 없던 거였다. 프로이센 언론도 그냥 탐색전 벌이다가 우리가 물러났다. 이기지 못했지만 적어도 패배는 아니라고 할 정도였다.[10] 이는 사운드 호라이즌의 천사의 조각상에서 차용되었다.[11] 위인전 만화나 위인전 삽화에서도 침대에 누운 채로 저 유언을 남겼다고 나온 적도 많다.[원문출처] Wer fremde Sprachen nicht kennt, weiß nichts von seiner eigenen.[12] 괴테는 자신이 문학가임에도 음악을 모든 예술 중의 최고로 평했다(!).[13] 카를 프리드리히 첼터, Karl Friedrich Zelter (1758 - 1832). 멘델스존의 스승.[14] 그가 죽고 2년 뒤인 1830년에 그랬다고 한다. 여기에는 다양한 추측들이 있는데 많은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수많은 편지를 받았던 괴테였는데 그 수많은 편지중에 하나였던 무명의 슈베르트편지를 그냥 넘겼을거라는 추측이 있다[15] 이런 일이 은근히 있긴 하다.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가 살아 생전, 자네 유명해졌다고 극찬하던 친구들에게 "아니..전혀."라고 시무룩하게 대꾸했는데...."얼마전에, 한 시골을 지나다가 시골 풍경이 너무 마음에 들고 사람도 안 보이고 해서 성악연습하고 있었지. 그런데, 지나가다가 이걸 듣고 나를 격찬하던 농부가 있었기에 반갑게 이야기하다가 그가 내 이름을 묻더군. 난 이름을 말했더니 그 농부는 엄청 기뻐하더군.날 알아보는 사람이 이런 시골에도 있다니! 난 기뻐했는데 ......그 사람이 당신이 그 유명한 여행자 로빈슨 카루소군요!"(알다시피 로빈슨 크루소로 알았던 것.) 라고 말하는 통에 할 말을 잃었네.... 이런 실화도 있고 카루소가 미국 공연하다가 어느 여성이 시비를 걸어 이게 법적 분쟁이 벌어졌는데 미국 어느 언론은 엔리코 카루소를 여성 소프라노라고 오보 기사를 내서 카루소를 경악하게 하던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