첸쉐썬
錢學森 (정체) 钱学森 (간체), 전학삼
병음 표기 : Qián Xuésēn, Ch'ien Hsüeh-sên, Tsien Hsue-shen 등
(1911년 12월 11일 ~2009년 10월 31일)
1. 소개
중국의 공학자로, 중국의 핵개발에 기여하고, 둥펑, 실크웜 등의 미사일 개발에 기여하였으며, 창정 1호를 직접 설계하고 중국의 1세대 우주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천재 공학자'''이자, '''매카시즘 최대의 희생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중국으로 돌아간 뒤 대약진 운동에 한몫했을 뿐 아니라, 권력 지향적인 모습을 보여 "과학자가 아니라 정치인"이라는 비판도 받았던 인물.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 JPL연구소의 공동 창립자 중 한명이다.'''"It was the stupidest thing this country ever did. He was no more a Communist than I was, and we forced him to go."'''
'''"미국 역사상 가장 어처구니없는 짓거리다. 그(천쉐썬)는 나만큼이나 공산당이 아닌 사람이었는데 우리 손으로 쫓아내다니..."'''
2. 천재의 젊은 시절
1911년 12월 11일, 첸쉐썬 박사는 청나라[1] 저장성 항저우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5대10국의 하나인 오월국의 시조인 태조(太祖) 전류의 후손으로, 항저우의 명문가였다. 이후 중화민국 북경 정부의 교육부 관리가 된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으로 이주.
어릴 적부터 수재로서 두각을 드러내며 2년을 월반했고, 대학입학시험에서 전국 3등을 했다. 이어 1929년 상하이교통대학에 입학하여 철도공학을 수학하고 수석졸업을 한다.[2] 의화단 운동 후 배상금을 받은 미국은 그 돈으로 중국 학생들을 미국에서 교육시키는 장학재단을 설립하였는데(경자장학회-영문으로는 Boxers Rebellion Indemnity Foundation)[3] , 첸쉐썬 박사는 이 장학금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칭화대학에서 잠시 연수받고, 그 당시 떠오르던 항공공학을 전공하러 미국에 유학했다.
처음에는 MIT에 들어가 기계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나, 중국에서 이론 중심의 교육을 받아온 첸쉐썬 박사는 실험을 중시하는 MIT와 자신의 성향이 잘 안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이론-수학을 중시하던 칼텍으로 옮겼다.[4] 칼텍에서의 지도교수는 당시 미국에서 항공역학의 권위자로 명성을 날리던 헝가리 출신의 '''테오도르 폰 카르만(Theodore von Kármán)'''이었다. 카르만은 대중적으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당시 태동하던 항공공학에 수학적 방법론을 도입한 천재로서, 존 폰 노이만, 유진 위그너, 에드워드 텔러, 레오 실라르드와 마찬가지로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저명한 헝가리-유대계 공학자들 중 한명이었다. 이 공학자들은 나중에 미국의 군사과학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칼텍에서 로켓 동아리에 참가해서 실험용 로켓을 제작했는데 이 동아리는 칼텍과 미 정부 당국이 그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정식 연구소로 편입시켰고, 현재 NASA소속으로 되어 있는 제트추진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의 전신이 된다.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칼텍에서 3년만에 수학과 항공공학 박사학위를 딴 뒤 제트추진연구소의 초창기 연구원으로 활동했다. 이 시기 미국의 국방과학위원회에서 중령 대우의 미사일 연구 주임으로 근무하며 미국의 제2차 세계 대전 승리에 기여했다.
전후에는 독일에 파견되어 독일의 항공공학의 수준을 조사하고 항공공학자들을 심문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런 업적으로 종전 이후 바로 MIT 교수로 채용되었고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테뉴어(정교수승진)를 했으나, 다시 MIT 과지도부와 충돌을 빚고 칼텍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또한 우주비행체에 대한 개념도 제시했는데, 이 연구는 X-20 다이너-소어 프로그램을 거쳐 '''우주왕복선'''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3. 미국에서 수난을 당하다
'''그런데 매카시즘의 광풍이 휘몰아치며 그의 삶은 중대한 고비를 만난다.'''
첸쉐썬 박사의 조국 중국은 중일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 가서 다시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1949년에 공산화되면서 미국의 적국이 된 탓에 이듬해에 FBI에게 체포, 가택연금 상태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에 기밀 연구자료를 누출했다는 간첩 혐의를 받은 것이다. 1940년대 초부터 빨갱이를 때려잡으려고 혈안이던 미국 높으신 분들의 눈에 중국 출신인 첸쉐썬 박사는 그저 눈엣가시이고 간첩일 뿐이었다. 이 혐의는 기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이민국에서 불법체류자로 낙인을 찍었다.
미국 정부는 '''국방부에서는 출국금지자, 이민국에서는 추방대상자로 동시에 모순된 낙인을 찍는 뻘짓을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번이나 체포되었고, 석방되었어도 자택에서 몇 km 외로 나가는 것을 금지당하는 등 제한을 받았다. 자존심이 강했던 첸쉐썬 박사는 이때 겪었던 수모를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지 않았다.
그러나 첸쉐썬 박사는 '''중국인'''이지만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전에 사망한 장인이 중국 국민당에서 장제스의 군사고문으로 일했던 사람'''인지라 항변할 근거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는 미국의 안보에 직결되는 기술에 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던 탓에 결국 5년 동안 틀어박혀 지내야 했다. 이때 미국 정부는 집안에 있는 피아노, 책상 서랍, 책꽂이 등 곳곳에 도청기를 설치해서 감시를 했다고 한다.
4. 중국으로 귀국하다
6.25 전쟁이 일어났다가 휴전한 뒤, 마오쩌둥은 옛날 중화민국이 미국으로 유학보냈던 과학자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 중국은 한국에서 생포했던 미군 포로들을 협상카드로 써먹을 수 있었고, 이들과 과학자들을 맞교환하기로 결정했다. 그 중에는 첸쉐썬 박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미합중국 해군에서는 로켓과 미사일 개발에 있어 능력이 검증되었던 첸을 보내는 것은 너무도 아까운 일[5] 이라며 반대했지만, 매카시즘과 누명으로 미국에 정나미가 떨어진 첸쉐썬 박사는 자신을 홀대한 미국을 떠나 중화인민공화국의 품에 안긴다.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면서 공산당이 없는 대만으로는 가지 않았는데, 대우 문제인지 아니면 자기 능력을 더 크게 펼칠 수 있는 대륙을 택한 것인지는 불명.
이때 미국에 앙금이 강하게 맺혔는지 귀국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에 만난 미국 기자에게 '''"나는 돌아올 계획이 없습니다. 나는 중국 인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국가를 건설하는데 최선을 다해 협조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떠났다고 한다.[6] 첸쉐썬 박사는 귀국 직후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열렬한 환대를 받았다. 이렇게 '''미국은 중국 공산당을 백안시하던 일류 공학자를 허무하게 내쳐 중국 공산당 손에 들려준다.'''
첸쉐썬 박사는 미국이 로켓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우주 경쟁 이전에 미국에서 추방당한데다가, 1950년부터는 위험분자로 분류되어 실질적으로 구금상태였기 때문에 미국의 로켓기술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당시 미국으로 온 베르너 폰 브라운조차도 제대로 된 연구기회가 주어지지 않아 놀고 있었다. 중국의 로켓기술의 씨앗은 굳이 따지자면 미국보다는 소련의 영향이 훨씬 크지만, 소련도 중국에 핵심기술은 전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우주 강국으로 발돋움한 중국의 위상을 만든 공은 미국과 소련에서 교육받은 중국 과학자들의 노력을 가장 크게 쳐야 한다.
5. 중국의 로켓과 핵무기 개발
그리고 첸쉐썬 박사는 소련의 스푸트니크를 부러워하던 마오쩌둥 주석이 '우리도 인공위성 쏠 수 있냐'고 하자, '''15년에 걸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투자를 요구했다.''' 대충 부연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처음 5년은 공교육을 정비하여 기초학문을 가르친다''' → '''그 다음 5년간 응용학문을 가르친다''' → '''그 다음 기계 설계와 제작에 들어가서 5년 내로 발사. 단, 돈이고 인민이고 있는 대로 다 퍼부어 주셔야겠고, 이 15년 동안 성과가 있냐고 중간에 물어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런 제안을 마오는 그대로 들어줬다. 그렇게 마오가 전폭적으로 신뢰를 보내자 그는 같이 귀국한 과학자들과 함께 프로젝트 착수에 들어갔다. 위에 언급된 미래 과학기술 인력의 양성에도 힘을 썼고, 중소결별 이후 소련의 기술자들이 중국에 기술을 전수해 주다가 그냥 가버리고 남겨진 R-2 로켓을 손 봐서 탄도미사일 둥펑을 제작한다. 또한 '''핵개발''' 총괄책임자까지 맡았다. 비록 핵물리학에는 문외한인 그였지만, 국가 단위의 과학기술 발전 프로젝트를 미국에서 체험했던 그의 경험으로 중국은 성공적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완료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소폭탄도 만들어냈다.
1970년 중국은 마침내 창정 로켓으로 '''동방홍 인공위성의 발사'''에 성공했다. 이는 소련, 미국, 프랑스, 일본에 이은 다섯번째 스페이스 클럽 가입이었다. 이렇게 인공위성까지 발사하자 그는 비로소 대외에 존재가 공개되었다. 중국에서는 '''양탄일성 (兩彈一星)'''을 쏘아올렸다며 그의 업적을 대대적으로 선전하고 칭송[7] 했으며 수많은 젊은 인재들이 그를 따르겠다며 이공계에 투신하여 중국의 발전을 이끌었다.
첸쉐썬 박사는 공식적으로는 군소속 공학자로서 계급이 폐지된 인민해방군에서 부사령원(부사령관)급 대우를 받았으며, 이는 중장 계급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중국정부의 과학자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를 알 수 있다.
주로 우주발사체와 탄도 미사일만 개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핵잠수함과 각종 미사일 개발에도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실크웜 미사일이 바로 첸쉐썬 박사가 소련제 스틱스 미사일을 레이저 유도로 개량한 대함 미사일이다.
6. 대약진운동의 대실패 및 중국 공산당 지지
하지만 대약진 운동에서 자신의 수학적인 계산만으로 생물학, 농학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이 농업 개혁을 추진했다가 엄청난 수의 인민을 굶겨죽이는 흑역사도 있었다. 그러니까 식물은 햇빛+물+비료로 성장하는데 햇빛과 물은 충분하니 비료만 많이 대주면 수확량이 엄청나게 증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위해서는 모를 빽빽하게 심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심경밀식' 파종법이다.
문제는 마오쩌둥이 이를 듣고, "MIT-칼텍 교수가 한말인데 당연히 옳겠지"라고 주장하며 전국적으로 시행했다가 파멸적인 결과를 냈었던 것. 물론 대약진의 파멸적 원인은 이뿐만은 아니고, 제사해운동이나 토법고로도 한몫했다. 중국 인민들의 불운은 '''이 세개가 한꺼번에 터졌다는 것'''.
특히 이 부분은 그 누구도 실드쳐주지 못하는 잘못. 기계공업부 부부장과 중국 과학협회 부주석, 중국 역학학회 명예회장,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 등 테크노크라트로서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중국의 과학기술 발전을 이끌었지만, 공산당의 독재에 협력하고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보이기도 했다. 4인방의 횡포에 협력하기도 했고, 문화대혁명에서도 린뱌오와 4인방의 편에 서서 장아이핑 등 여러 인사들을 맹렬히 비난하였다. 4인방이 몰락하자 한동안 한직을 전전하지만, 천안문 사태에서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을 적극 지지해서 다시 지위를 되찾았다.
파룬궁 탄압에 장쩌민 주석을 지지했다는 설이 있으나, 장쩌민(상하이교통대학 후배이다)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이를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문에 첸쉐썬 박사는 문화대혁명때 잠시 홍위병 연구원에 의해 잠시(약 2주간) 연구원 원장에서 물러났고, 4인방에 발맞추다가 덩샤오핑이 집권하고 그의 정적이었던 장아이핑이 제2포병사령관에 오르자 잠시 미사일 책임자에서 물러난 것 이외에는 중국사의 파란만장한 기간을 별다른 어려움 없이 태평하고 무사히 지냈다. 미국에서 고초를 겪어서인지 처세술만큼은 자신의 학문만큼이나 만렙의 경지.
7. 은퇴
이후 1991년에는 공직에서 물러나 서방권과의 접촉을 일체 거절하면서도 이따금씩 학계에 한 목소리를 내며 살았다.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었지만, 병상에서 양리웨이가 탑승한 선저우 5호의 발사를 바라보며 일생의 꿈이 실현됨에 감격했고, 2008년에는 중국 우주개발 역사상 최초의 EVA를 지켜봤다. 그가 병상에 누운 동안에는 수많은 과학계 후배와 제자들은 물론 후진타오 주석과 원자바오 총리 등 공산당의 높으신 분들도 찾아왔고, 그가 2009년 10월 31일 9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날 온 대륙이 울었다. 모교 상하이교통대학에는 추모 물결이 이어졌으며, 공산당에서도 중앙위원회장으로 성대한 장례를 치뤄줬다. 그의 유해는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신들이 묻힌 바바오산 혁명공묘에 안장되었다.
8. 평가
'''중국판 베르너 폰 브라운'''. 하지만 폰 브라운 박사는 자신의 우주덕질을 위해 살았던 것과 달리, 첸쉐썬 박사는 '''중국'''을 위해 살았다.
좋게 보자면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연구와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공학자지만, 독재 정권에서 살아남기 위해 쏟아낸 짓들을 보면 나쁜 평가도 전혀 틀리지 않다. 하지만 대약진 운동 역시 중국인을 위한 시도였다는 점에서 보면 그가 '''애국자'''였음은 인정받는 편. 대약진 운동 뿐만 아니라 공산당의 인권탄압과 독재에 침묵하고 동조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으나, 중국 과학기술 발전의 기틀을 다졌던 중국 과학의 영웅이라는 평가 역시 온당하다. 마오쩌둥에 대한 덩샤오핑의 '''공7과3'''이라는 평가는 그에게도 유효할 것이다.
과학적 능력뿐만 아니라 처세술도 발군.[8] 반우파운동, 문화대혁명 등 중국 현대사의 그 험악한 세월에서도 미국에서 20년간 머물렀기 때문에 반동분자로 몰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으나[9] , 단 한번도 수용소나 감옥에 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권력의 양지에서만 머무르는 경이적인 모습을 보였다.[10] 유일하게 위기에 처했을 때가 4인방을 지지하다가 덩샤오핑이 집권했을 때 미사일 조직의 실세에서 밀려났던 일이다. 하지만 몇년 지난후 덩샤오핑의 천안문 6.4 항쟁 진압을 적극 지지하고, 상하이교통대학 후배 장쩌민이 집권하자 다시 위상을 되찾았다.
이 때문에 민주화 운동가들은 그를 "과학자라기보다는 정치인"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9. 기타
2008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중국계 미국인 과학자 로저 첸 박사는 그의 5촌 조카로, 중국 이름은 첸융젠(錢永健, 전영건)이다. 로저 첸은 첸쉐썬 박사가 매카시즘으로 코렁탕을 먹던 시절인 1952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뉴저지주에서 고등학교를 나오는 등 그냥 미국인으로 자랐고 미국에서 학문 활동에 매진하며 노벨상까지 탔다. 현재는 UC 샌디에이고에서 교수로 재직 중. 이외에도 첸쉐썬 박사의 일가에는 이름을 날린 과학자들이 여럿 있다.
전통, 유사의학인 기공의학의 연구를 (과학적 방법론에 근거한다는 선에서) 지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룬궁에 철퇴를 가하는 장쩌민의 결정을 지지했다.
개인적인 인격은 나쁜 편이 아닌데 자신의 이름에는 돈钱이 들어가지만 돈 욕심은 없다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중국에 돌아와 일반 연구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더 나은 집으로 이사가자고 아내가 보채면 "지금도 충분히 일반 인민들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대답했다고.
미중 국교 정상화 이후 미국에서 과학기술 교류를 위해 그를 미국으로 초청했지만 '''일단 네놈들한테 사과부터 받아야겠다'''며 매몰차게 거절했다. 칼텍 시절 동료들이 얼굴이나 보자고 일부러 만들어서 초청한 자리조차 싸늘하게 씹었을 정도로 그는 미국에 대한 원한을 평생 간직했다. 하여간 미국은 괜히 내쫓았다가 온갖 손해만 다 봤다.
한국에서 무함마드 깐수 간첩사건으로 유명한 정수일하고 생애가 안티테제이다. 정수일은 원래 사회주의 국가에서 인문학을 전공하였고, 첸쉐썬 박사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공학을 전공하였다. 첸쉐썬 박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였는데 매카시즘 피해로 인한 사회주의 국가로 전향하고 미국은 뛰어난 우주 물리 공학자를 중국에 헌납했고, 정수일은 북한의 명령으로 한국에 간첩으로 잠입하다가 들켜서 감옥살이를 하면서 한국으로 전향하여 북한이 아랍 문화와 인문학의 권위자를 헌납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난징 대학살을 다뤄 나중에 유명해진 아이리스 장의 첫번째 저서가 바로 이 양반의 전기이다.
중국에서는 2012년 전기 영화도 나왔다. 대약진운동 때 과오는 살짝 나온다. 꽤 고퀄리티. # 중국의 초기 미사일의 소품을 잘 나타냈다.
[1] 신해혁명으로 선통제가 퇴위한 것이 1912년이었다.[2] 현재 중국의 명문대 하면 수도 베이징에 있는 베이징대와 칭화대지만,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었고, 당연히 난징 근방의 대학의 위상은 현재보다 훨 높았다. 지금도 상하이교통대학은 명문대지만, 당시에는 훨씬 위상이 높았다는 사실. 그러므로 난징대의 전신인 당시 국립 중앙대학이나 난징 인근의 상하이교통대학은 현재 베이징대와 칭화대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3] 이 우스꽝스러운 Boxer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의화단 운동이 영어로는 Boxer's rebellion이기 때문이다. 의화단원들이 무술을 하는 모습이 서구 열강의 눈에는 권투 선수처럼 보였다고. 이 장학재단은 청나라가 미국에 의화단 운동때 지불한 배상금을 바탕으로 미국 측이 만든 것이다.[4] 오늘날 칼텍의 최고 명문 이미지는 이 시절에 유수의 석학들을 모셔오면서 성립되었다.[5] 문서 상단에 인용된 해군부 차관을 지내던 댄 킴볼의 발언이 이때의 말이다. 킴볼은 직접 연금 상태인 그를 만나서 "당신 공산당 아니잖아요. 시민권 줄테니까 그냥 미국에 말뚝 박으세요, 네?" 했지만 "난 중국인이요. 내가 만든 무기로 우리나라 사람을 죽일 수는 없소." 하며 거절했다.[6] 《 인민일보해외판 》 2010년1월6일 제 07 판[7] 세르게이 코롤료프가 죽기 전까지 존재 자체가 1급 기밀로서 꽁꽁 숨겨졌던 것과는 대조되는 부분이다.[8] 물론 뒤집어서 말하자면 그가 줏대없는 기회주의자라는 이야기도 된다. 하지만 어쨌든 그 시절에 전혀 핍박을 안 당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긴 하다. 아마 미국에서 매카시즘 관련된 고초를 겪으면서 여러가지로 배운 게 많았던 듯하다.[9] 첸쉐썬 박사와 비슷하게 해외유학의 배경을 갖은 많은 과학자들은 국가적 과업을 수행했음에도 수없이 감방에 끌려가거나 홍위병의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첸쉐썬 박사와 더불어 3첸으로 불리는 과학자가 첸웨이창(錢偉昌, 전위창) 박사와 첸싼창(錢三強, 전삼강) 박사가 있다. 첸웨이창 박사는 칼텍시절 첸쉐썬 박사의 동료였으나, 백화제방 백가쟁명 시절 공산당 독재를 비판했다가, 시골로 여러번 끌려가 삽질을 했다.[10] 물론 이것은 그가 상당히 국가적 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는 베이징 소재 호화주택을 배정받았으나, 1960-70년대 내내 내몽골의 사막에 머무르며 중국의 미사일 개발을 지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