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 해전

 

'''페낭 해전'''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 전쟁의 일부
'''날짜'''
1945년 5월 15일 ~ 1945년 5월 16일
'''장소'''
말라카 해협
'''교전국'''
[image] 영국
[image] 일본 제국
'''지휘관'''
[image] 맨리 로렌스 파워 경
[image] 후쿠도메 시게루
[image] 하시모토 신타로[1]
[image] 스기우라 카즈[2]
'''병력'''
구축함 5척
구축함 1척
중순양함 1척

'''피해 규모'''
구축함 1척 손상
2명 사망
3명 부상
중순양함 1척 침몰
구축함 1척 손상
927명 사망
'''결과'''
영국의 승리
'''기타'''
일본의 해군 수상함대 전력 소멸, 영국군의 완승
1. 개요
2. 배경
3. 전투
3.1. 출항과 요격
3.2. 교전
4. 결과


1. 개요


1945년 5월 16일 벌어진 태평양 전쟁 '''최후의 해전'''. 한때 잠시나마 하와이 서쪽의 태평양과 인도양을 제패했던 일본 제국 연합함대는 이 해전 이후로 바다로 나오지도 못했다.
영어권에서는 말라카 해협 해전(Battle of the Malacca)으로 부르고, 일본측에서는 페낭 해전으로 부른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 페낭 해전(Battle of Penang)으로 검색해서 나오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경순양함 엠덴에 의한 페낭 습격전. 사실 전투라 칭하기에 규모도 작아서 그냥 하구로 격침(Sinking of the Haguro)으로 표현하는 영문 사이트도 많은 편이다.

2. 배경


무타구치 렌야임팔 작전으로 버마 전선을 말아먹어 방위력이 급감한 것을 눈치챈 영국군은 1945년 초부터 대대적인 반격작전을 단행하여 약 3개월만에 버마 대부분을 탈환하고, 5월 2일에는 버마 총독부가 있던 랭군까지 탈환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국군은 버마 남쪽에 있는 인도 제국령 안다만 제도와 니코바르 제도는 무시하고 있었는데, 어차피 함선이나 항공세력이 없어 영국군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 덕분에 일본군은 이 두 제도를 점령은 하고 있었지만 문제는 보급이었다. 이들의 보급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버마의 버마 방면군이 맡았는데 버마 방면군이 영국군에게 털리고 붕괴되는 와중에 보급이 가능할 리가….
이에 일본 육군은 해군에게 안다만 제도까지 어떻게든 보급물자를 보내주면 안되겠냐는 부탁을 했고, 일본 해군은 이 부탁을 받아들여 위험천만한 안다만 제도 보급작전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매의 눈으로 노리고 있는 영국 해군이 있었다.

3. 전투



3.1. 출항과 요격


당시 싱가포르에 있던 일본 해군은 제10방면함대로, 후쿠도메 시게루(福留繁) 중장 지휘하에 중순양함 타카오, 묘코, 하구로, 아시가라 4척과 구축함 카미카제만이 남아 있었고 나머지 함정은 모두 본토 결전을 위해 본국으로 돌려보낸 상태였다. 그나마 타카오와 묘코는 연합군의 공격으로 대파되어 항행불능 상태였기에[3] 항행가능한 함정은 3척뿐이었는데 그나마 하구로도 레이테 만 해전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지 못하여 스크류와 2번 주포가 손상된 상태로 화력과 속도가 모두 떨어져 있었다.
후쿠도메 중장은 결국 기함을 하구로로 하고 호위함으로 카미카제를 붙인 5전대를 구성, 하시모토 신타로(橋本信太郎) 소장을 전대장으로 임명하여 안다만 보급작전을 실시했다. 보급이 주임무였던만큼 두 함정은 무장을 일부 철거하고 여유공간마다 탄약과 식량 등을 가득 채웠는데, 이는 안그래도 빈약한 화력과 속도를 더 늦추는 결과를 초래했다. 애당초 전투임무로 출격한 것은 아니었지만….
5월 12일, 5전대가 싱가포르를 출항했다. 그러나 출항 당일에 이미 싱가포르 주변에서 초계중이던 영국 해군 잠수함 HMS 스테이츠맨, HMS 새틀이 이를 포착했고, 이들은 이를 무리하게 직접 격침시키는 대신 사령부로 연락을 취했다.
당시 영국 해군은 1945년부터 주력 대부분을 인도양에 모조리 투입하여 동양함대를 증강함으로써 과거의 말레이 해전, 엔다우해전[4], 2차 자바해전[5] 등에 대한 패배의 복수를 벼르고 있었는데, 일본 제국 연합함대는 이미 미국이 보이는 족족 박살낸 뒤라 잡을만한 대형함이 없는 상태였다. 이 상태에서 중순양함 한 척이 인도양쪽으로 온다는 정보는 작게나마 복수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고, 즉시 공격 명령이 떨어졌다. 13~14일에 걸친 소규모 급강하폭격이 시도되었으나 피해는 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급강하폭격은 연합군이 자신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음을 일본군에게 알려준 증거였다. 다음날인 15일에는 육군항공대 초계기가 접근 중인 영국 동양함대 61기동부대를 발견하고 이를 5전대에 통보했다.
61기동부대는 본래 육군의 버마 탈환을 지원하던 함대였으나 버마 전선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이라 5전대 공격을 위해 움직이는데 지장이 없었다. 전함 '''퀸 엘리자베스'''와 '''리슐리외'''[6]가 속해있던 61기동부대의 움직임은 하시모토 소장에게 즉시 회항이라는 결단을 내리게 하기 충분했다. 5전대는 즉시 회항하여 싱가포르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안그래도 스크류 고장에 만재 상태여서 고속기동이 불가능했던 하구로에게는 후퇴조차 버거운 일이었다.

3.2. 교전


결국 후퇴하기 시작한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16일 자정경 61기동부대에서 하구로 추격을 위해 S급 구축함 사우말레즈와 V급 구축함 베룰람, 비너스, 비질란트, 비라고로 구성된 제26구축함대가 레이더로 하구로를 포착하고 맹렬히 추격했다. 하구로도 레이더를 탑재하고 있었으나 성능도 안 좋았던 데다 접근중인 영국 함정들이 모두 구축함으로 소형이었기에 발견이 늦어 구축함들의 접근을 확인한 건 새벽 1시의 일이었다.
5전대는 계속 도망치려 했으나 결국 느린 속도가 발목을 잡아 새벽 1시 5분 교전이 시작되었다. 구축함들이 하구로와 카미카제를 향해 40mm 기관포를 집중사격하였다.
물론 제26구축함대는 구축함으로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중순양함인 하구로가 함포 화력으로는 상당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크류 손상으로 포의 안정성까지 떨어져서 명중탄을 내지 못하는 비참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이미 함내와 함 외부에 주렁주렁 달아놓은 보급품들이 피탄으로 인해 불이 붙으면서 화재가 발생하여 하구로의 화력은 초반부터 완전히 봉쇄된 상태였다.
구축함인 카미카제의 경우도 보급작전을 위해 철거한 무장 중에 카미카제의 어뢰발사대까지 있어서 일본 해군의 특기인 수뢰전조차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만약 어뢰가 있었다고 해도 기동성이 좋은 구축함들을 상대로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도 의문이다. 여기에 카미카제도 만만치않게 물자를 적재한 상태라서 속도가 크게 느려진 상태였다.
그 와중에도 카미카제가 연막탄을 뿌리고 격렬하게 기동하면서 영국 구축함들이 하구로를 포위하는 걸 막으려 애썼으나 숫적 열세는 극복하지 못했고, 1시 25분, 어뢰 1발이 먼저 하구로에 명중하면서 침몰이 시작되었고, 이후 2발이 추가로 명중하면서 최종적으로 2시 9분에 하구로가 격침되었다.
하구로가 격침되는 와중에도 카미카제는 분투하며 생존자 구조에 총력을 다했고, 영국군도 목표였던 하구로를 격침시켰기에 카미카제는 방치하고 귀환하는 것으로 약 2시간여의 짧은 해전이 끝났다.

4. 결과


말할 것도 없는 영국군의 완승이었다. 영국군은 구축함 1척이 경미한 손상을 입고 2명이 전사했을 뿐이지만, 일본군은 중순양함 하구로가 격침되고 구축함 카미카제도 손상을 입었으며 전대장 하시모토 신타로 소장을 포함하여 927명이 전사했다. 당연히 안다만 제도에 대한 보급작전은 취소되었으나, 일본군 입장에선 다행히도 영국군은 종전시까지 안다만 제도를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안다만 제도의 일본군도 종전 후 무사히 본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물론 귀환하는게 무사했다는 거지 위에서 언급한 보급이 끊기는 바람에 안다만 제도의 일본군은 쫄쫄 굶다가 주민들의 식량까지 빼앗아가며 겨우 목숨을 연명했다.
이 해전의 의의는 마지막 남은 일본 해군 수상함대 전력이 소멸하고, 해상작전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데 있다. 전투임무도 아니고 단순 보급임무를 위해 출항한 함대의 위치마저 시시각각 들통나고, 출항 며칠만에 공격받아 격침당했다. 단순히 중순양함 1척의 격침이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일본 본토나 동남아 점령지에 항행가능한 다수 대형함이 남아 있었으나 페낭 해전을 마지막으로 모든 수상함정의 원양항해가 중단된 채 점령지 간 수송임무에만 투입되었다.
이후로도 일본 해군의 피해는 계속 발생하지만 모두 공습이나 기뢰, 혹은 항해 중 잠수함에 의한 격침으로 해전이라 부를 만한 건 전무하다. 이미 일본 해군에게는 최소한의 해상작전을 펼칠 전력과 의지 둘 다 사라진 상태였다. 결국 군항에 짱박혀 있던 일본 해군 연합함대는 이후 미군의 구레 군항 공습으로 완전히 아작이 나고(...) 해군 전력 대부분을 완전히 망실하고 만다.

[1] 작전중 사망[2] 작전중 사망[3] 타카오와 묘코는 결국 종전 때까지 다시 바다로 나오지 못했고, 그대로 영국군에게 접수되고서 그냥 말라카 해협에 침몰시켜버렸다.[4] 1942년 1월 말레이시아 남동부의 항구도시 엔다우(Endau) 근해에서 벌어진 일본 vs 영·호 연합군 간의 해전. S급 구축함 사넷(Thanet)의 격침으로 일본 해군 승리[5] 1차 자바해전의 연합군 함대 지휘관은 네덜란드 해군의 카렐 도르만[6] 프랑스 해군 전함 리슐리외 맞다. 1945년 당시에는 영국이 빌려가서 동양함대 소속으로 운용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