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 해전

 

'''말레이 해전'''
'''날짜'''
1941년 12월 10일
'''장소'''
남중국해
'''교전국'''
[image] 영국
[image] 일본 제국
'''지휘관'''
[image] 톰 필립스 경
[image] 존 리치
[image] 윌리엄 테넌트
[image] 오자와 지사부로
[image] 미야우치 시치조
[image] 쇼지 하치로
[image] 나카니시 니치
'''전력'''
전함 1척[1]
순양전함 1척[2]
구축함 4척
뇌격기 34기
공격기 51기
정찰기 3기
'''피해 규모'''
전함 1척 침몰
순양전함 1척 침몰
840명 전사
항공기 4기 손실
항공기 28기 손상
수상기 2기 실종
18명 전사
'''결과'''
일본 해군의 승리
'''영향'''
태평양에서 영국 왕립해군의 영향력 상실, 일본의 남중국해 제해권 장악, '''종전 후 대영제국의 붕괴 가속'''
[image]
사진의 왼쪽 중간에 검은 연기를 피우는 배들이 공격받고 있는 프린스 오브 웨일스#s-2.1리펄스. 사진의 앞쪽에 있는 배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이고 뒤의 배가 리펄스다.
1. 개요
2. 명칭에 대해
3. 배경
4. 진행 과정
4.1. 영국 해군의 오판
5. 결과
6. 평가
7. 여담
8. 관련 문서


1. 개요


'''영국 대양해군의 최후'''
Naval Battle of Malaya, マレー沖海戦. 태평양 전쟁 초기인 1941년 12월 10일에 일본군의 남방작전에 대응하고자 출격한 영국 해군 Z기동함대와 이를 요격하기위해 나선 일본군 해군 항공대 사이에 벌어진 해전. 제공권을 잃은 해군이 어떻게 되는지를 확실히 보여준 전투이며, 영국 해군의 흑역사이다.

2. 명칭에 대해


영미권에서는 해전 명칭을 붙이지 않고 'Sinking of Prince of Wales and Repulse(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의 격침)'으로 주로 표현한다.
이렇게 적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 Naval Battle로서 성립하려면 함대함 교전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일본과는 달리 영국은 공군이 독립되어 있었고, 미국 역시 사실상 독립한 상태인데다가 해군 항공 주특기가 주요 분야로 있었기 때문에, 영미권에서 항공모함의 기여도가 없거나 미미한 상태에서의 항공기 VS ETC라면, Air Strike and Result 로 간주된다.[3] 반면 일본은 항공대가 그만한 지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육군 혹은 해군의 것으로 쳐서 '해전'이 된다. 영미권에서 이 문제는 생각보다 까다롭다. 왜냐하면 Naval Battle이라고 하면 '뱃놈'들이 뭘 해줬는지가 있어야하기 때문이고, 그런게 없는데도 해전이라 부른다면, 예나 지금이나 항공 주특기의 독립성에 시비를 거는 것이거나, 파일럿들이 X빠지게 해놓은 성과에 수상함들이 숟가락을 올리는 것이기 때문. 이러한 이유로 해전이라 부를 것 같은데 해전이라 부르지 않는 다른 예시로는 과달카날 해전의 '막간극'이라던가[4], 포클랜드 전쟁의 셰필드 격침을 들 수 있다.[5] 같은 이유로, 노르웨이 침공에서는 해군 함선없이 육상 포격으로 격침시킨 블뤼허의 격침을 해전으로 보지 않는 반면, 구축함 VS 중순양함의 교전에 불과했던 글로웜의 최후는, Final Battle이라고 불러준다.
다른 두번째는 Battle이라는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의 문제다. 즉 Battle은 양자가 교전에 참여한 상태(Engagement)[6]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공방전(Decisive Results)이 되어야 한다. Engagemet만 있고 Decisive Results가 없는 경우, 굳이 이것들을 따로 분류해야 하는 경우에 skirmish라고 부른다. 항공모함에서 발진한 함재기들과는 달리, 잠수함들이 항공모함이나 전함을 격침시켜도 Battle이라는 꼬리표를 절대 안붙여주는 이유는 당연히 격침된 대상이 잠수함을 대상으로 Engagement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침공의 HMS 글로리어스가 격침될때, 호위함이었던 Acasta, Ardent의 교전은 Engagement라고 표현하지만. Glorious는 그냥 Engagement없는 sinking이다.
Decisive Results 의 경우는 어느 정도 가치판단이 있을 수 밖에 없으므로, 이 부분에서 서로의 평가가 다르다면 함선끼리 교전했을지라도 명칭이 다를 수 있다. War가 Decisive Results를 낳는 일련의 Battle로 구성된다고 볼때, 페낭 해전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반면 그 기준이 전과라고 친다면, 일본 기준으로 해전이 될 것이다. 글로웜의 경우는 더 적절한 예시인데, 큰 흐름에 영향이 없다고 보는 입장에서는[7] Action이라고 평가하고, 영국 해군과 독일 해군이 본격적으로 충돌하게 되면서, 어드미랄 히퍼를 강판시키는 바람에 1차 나르빅 해전에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면 Battle로 간주하게 된다.
그 결과, 말레이 해전은 일본 기준으로는 해전이지만, 영미권 기준으로는 영국의 태평양 영향권 상실이라는 Decisive Result가 확실하긴 하나 함대함 교전이 아닌 수상함 VS 항공기의 대결이고, Z부대가 작전 목표를 가지고 일본 항공 세력과 충돌한 것이 아닌 일방적인 공습을 당한 것이므로, 이 전투는 그냥 파일럿들의 Trophy로서의 Sinking이 된다. 서로의 호칭을 바라보는 경우, 일본에서 보기에는 전과를 축소한걸로 보이지만, 영국 기준에서는 일본은 부사관 파일럿들이 해군 장교 지휘 하에 종속되어 있었고 독립성이 없었으니 그렇게 부르겠네... 정도로 생각하게 된다.
덧붙여서 저러한 차이를 잘 알 수 없었던 일부에선 서구 측에서 전투의 결과로 자신들이 당한 일방적인 패배를 정확히 묘사하지 않고 의미축소 했다는 오해가 생긴 적도 있다.

3. 배경


일본군이 서방 국가들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철수하기는 커녕 프랑스인도차이나에 주둔하는 막장 행보를 보여주자 1941년 12월 영국은 일본으로부터 자국 식민지를 보호하기 위해 톰 필립스 경을 사령관으로 Z함대[8]를 싱가포르로 파견했다.
여기서 윈스턴 처칠과 당시 해군참모총장이던 더들리 파운드의 의견이 충돌하였는데, 파운드 경의 계획은 넬슨급 전함인 넬슨과 로드니, 그리고 리나운급 순양전함 리나운리벤지급 전함 4척을 파견하려고 했으며, 이는 최신예 전함인 킹 조지 5세급 전함과 예비용 기동 부대 역할의 리펄스를 독일의 전함 티르피츠샤른호르스트의 2척 및 이탈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본토에 남겨두고, 그를 제외한 영국의 모든 전함을 투입하는 대규모 작전이었다.
처칠은 이에 반대하고 신형 전함인 킹 조지 5세급 1척과 리나운급 순양전함 리펄스, 일러스트리어스급 항공모함 인도미터블로 구성된 최신예 주력함들을 소수 정예로 파견하는 것만으로도, 통상 파괴전을 수행하려고 하는 일본 해군을 상대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이러한 처칠의 주장은 몇가지 잘못된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우선 일본 해군은 수상함 전력에서 독일 해군을 간단히 능가하며 독일 해군처럼 눈치보며 통상파괴전을 수행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일본 해군이 가장 잘 나가던 1941~2년의 경우 일본 해군은 확실히 영국해군을 능가하고 있었다. 특히 항공모함 전력의 경우 영국 함재기는 숫자도 적고 성능도 상당히 떨어져서 제로센과 호각으로 싸울 수 없었다. [9]신형전함 1척과 순양전함 1척과 항공모함 1척을 동반한 영국 함대는 일본 해군에게 다소 긴장을 주는 수준이긴 하지만 그 뿐이며 결정적으로 일본 해군은 독일 해군과는 달리, 6척의 정규항공모함을 필두로 막강한 해군 항공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처칠의 함대 편성은 공고급의 통상 파괴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이었는데, 이는 영국이나 독일 해군의 교리에 따른 판단이었고, 일본군이 바라보는 순양전함의 역할과는 동떨어진 커다란 착각이었다.
또한 일본이 말레이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지 않을거라고도 잘못 판단하고 있었다.
차라리 파운드의 원래 계획대로 비록 구형 전함이 여러척 포함되었어도 다수의 전함들을 보냈다면 오히려 일본군에 대항하는게 여러가지 면에서 효과적으로 대응이 가능했으며, 구형 전함 7척이 한꺼번에 모두 모여 행동하거나 1~2척씩 나뉘어 타이만을 헤집고 다닐 경우 순양전함인 공고와 하루나만으로는 대응할수 없어서 상륙이 사실상 불가능하기에 일본군은 세토 내해에 있던 전함 6척과 남은 항공모함들을 모두 남방에 파견해서 이들을 제거해야만 상륙이 가능했을것이다. 설령 상륙을 허용하는 상황이 발생하여도 일본군은 적의 전함세력을 의식하여 함대를 밀집해서 운용해야 하므로 제공권 문제로 연합군 전함들이 나서는데 제약이 걸려도 이후 실제 역사에서 일본군이 그랬던것처럼 함대를 자유롭게 필요한 규모에 맞춰 사용하거나 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저 강력한 함대가 싱가폴을 모항으로 제해권을 쥐고 있었다면 일본군의 본격적인 남방 유전지대 점령과 자원조달은 진주만 공습함대를 그리로 돌릴 때까지는 지연되었을 것이다. 역사에서도 말레이 해전의 결과 영국 함대가 몰락하면서 영국의 잔존함대는 이 방면 네덜란드함대의 지휘아래 들어가게 되었고, 경험없는 네덜란드 제독의 연이은 삽질의 희생양이 되어 소모되는 결과를 맞았다.
하지만 처칠의 제안은, 일본으로 치자면 야마토급 전함 1척, 항공모함 다이호, 그리고 항공모함과 동행하는 공고급 순양전함 1척을 소수 정예로 보내자는 것과 비슷했으므로, 구형 전함은 최신예 주력 전함에게 질 수 밖에 없는게 상식이던 당시의 관점에서는 일리가 있었다.
그리고 리벤지급 전함과 넬슨급 전함은 속도도 느렸기 때문에 이탈리아가 버티고 있는 지중해를 포기하고 희망봉을 돌아 싱가포르로 간다면, 제때 도착할 수 있을지나 문제였는데, 처칠의 제안을 따르면 훨씬 빠르게 함대를 전개할 수 있었다.
결국 처칠의 계획대로 이루어진 함대가 이동하기 시작하였는데 인도미터블이 암초를 들이박아 노퍽으로 가서 수리를 하는 상황에 처하였으며, 11월 16일에 함대가 희망봉을 통과하면서 보급받기 위해 케이프타운에 입항하였을때 항공모함 허미즈가 별다른 임무가 없는 상태였는데도 영국 해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함대를 이동시켰다.

4. 진행 과정



4.1. 영국 해군의 오판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직후, 8일에 싱가포르의 Z함대도 일본 항공기의 공습을 받았다. 일본군은 말레이시아의 코타바루에 상륙했고, 말레이 반도의 영국 공군기들을 차례로 파괴해 나갔다. 동남아에 주둔중인 영국 공군은 전투기의 주종이 F2A 버팔로로 성능이 제로센보다 낮은데다가 숫자도 부족했고, 조종사들의 실력도 일본에 비해 보잘 것 없었기 때문에 전투의 패배는 자명한 일이었다. 이런 사태가 발생한 것은 영국 본토 항공전북아프리카 전역에서 벌어진 항공전이 워낙 격렬했기 때문에 태평양전쟁이 개전하기 전에는 동남아의 식민지 지역까지 일류급 항공기와 베테랑 조종사를 배치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습부대에 의해 싱가포르에 전함 2척이 정박중이었다는 사실이 보고되자, 당시 남방함대사령장관이었던 오자와 중장은 제22항공전대에 즉시 공격명령을 내린다.
공군으로부터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임에도, 영국 해군은 상황을 너무나 낙관하고 있었다. 영국군은 일본군의 항공기가 대양에서 작전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전투가 벌어진다 해도 함선들이 일본 항공기의 공격 정도는 무난히 막아낼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10] 사실 영국 측의 이러한 오판을 마냥 비난할수도 없는 것이, 말레이 해전 직전까지 "작전 항행 중에 항공기의 공습으로 침몰한 전함"은 단 한척도 없었다. 진주만 기습에서 보듯이 항공기에 의한 전함 공격이 가능하다는 것 까지는 인지하고 있었으나 원양에서 작전 항행할 경우 비행기의 항속거리 등에 따라 공습이 쉽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항공기의 구조와 조종사의 안전을 희생해가면서까지 항속거리에 목숨을 건 데다가 이미 실전경험까지 풍부하게 장착한 일본(...) 결국 이 오판으로 인해 Z함대는 어떠한 항공 엄호도 없이 싱고라에 있을 것이라 예상된 일본 함대를 저지하기 위해 출항하고 말았다.
제22항공전대는 명령에 따라 오전에 바로 정찰기를 출격시켜 Z함대를 찾기 시작했다. 정찰기는 영국 전함이 싱가포르에 정박중이라는 오보를 전했고, 일본 항공대는 그에 따라 폭탄을 장비하고 출격준비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후 3시에 I-65 잠수함이 Z함대를 발견하고는 위치를 보고했고, 항공대는 폭탄 무장을 어뢰로 교체하는데 시간을 낭비하느라 출격했을때는 이미 오후 7시가 넘은 시점이었다. 이때 Z함대는 항공 엄호 없이는 작전수행이 힘들 것이라는 해군 중장 필립스 제독의 판단에 따라 이미 싱고라 공격을 포기하고 싱가포르로 회항하는 중이었다. 한편 오후 5시 30분에 보고를 받은 오자와 중장은 중순양함 5척을 포함한 수뢰전대를 이끌고 Z함대의 요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고 스콜과 같은 날씨때문에 Z함대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밤이 되자 영국 함대는 일본 항공대를 피해 싱가포르로 귀항할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일본 항공대는 자국 중순양함 쵸카이를 프린스 오브 웨일스로 착각하고 조명탄을 발사하는 등 수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11]
10일, 일본군은 새벽이 밝자마자 정찰기를 띄워 Z함대를 찾기 시작하면서 발견되기도 전에 공격대를 미리 발진시켜놓고 영국 함대가 발견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에 Z함대는 일본군 잠수함 I-58에 의해 발각되었으나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 무렵 Z함대는 쿠안탄 해안에 일본군 함대가 있다는 오보를 받았다. 필립스 중장은 무전을 받고는 보고 없이[12] 쿠안탄으로 향했고, 함대가 쿠안탄으로 이동하겠다는 보고를 받지 못한 사령부는 항공엄호를 보내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 추가하자면 필립스 제독은 출항하기 전 10일 낮 동안 싱고라 상공에 전투기 엄호를 요청하였다.

그후 8일에 출항한 Z함대는 5시간후인 오후 10시 43분에 전문을 받았는데 10일에는 전투기에 의한 엄호는 불가능하다는 내용이였으며 여기에는 싱고라 상공이라는 말이 빠져있었고 이를 본 필립스 제독이 상황이 매우 나빠 싱고라 상공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항공엄호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항공엄호를 요청하지 않고 무선침묵을 지켰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프린스 오브 웨일즈가 어뢰에 맞고 나서도 전투기의 엄호를 요청하지 않고 오히려 구축함 파견을 요청한 것을 볼때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히려 교전 1시간후에 리펄스의 함장이 필립스 제독이 아직도 항공지원을 요청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알고 경악하며 긴급히 영국 공군에 항공지원을 요청했지만 벌써 적절한 시기를 놓친후였다.
만약 항공요청이 제대로 되었다면 영국함대는 생존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고 오히려 항속거리 문제로 호위 전투기가 전혀없이 공격기들만 출격했던 일본 해군 항공대가 큰 피해를 입었을 상황이었다. 참고로 일본군 공격기들은 베트남 사이공에서 출격했었다.
이 오인 정보로 인해 해안을 수색하는데 또다시 귀중한 시간을 허비한 Z함대는 쿠안탄에 일본 함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퇴각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쿠안탄을 비행하던 일본군 정찰기가 그들을 발견한 뒤였다.

4.2. '''영국동양함대궤멸'''


12월 10일 오전, 일본군 정찰기 중 1기가 쿠안탄에서 끝내 Z 함대를 발견하여 G3M[13] 폭격기들이 2차례에 걸쳐 출격했고, 오전 10시 및 11시 13분경에 각기 폭격을 실시했다. 이 폭격에서는 단 1발만이 리펄스의 4번 포탑에 명중했으며, 그나마도 별다를 피해를 주지 못했다. 영국 함대는 일제히 대공 전투태세에 들어갔다.
진짜 타격은 뇌격기 편대에 의해 이뤄졌다. 17기의 일본군 G3M 편대가 11시 40분경에 뇌격을 실시했다. 어뢰들 중 1기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B번 엔진실에 명중해 침수됐고, 한쪽 스크류를 잃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의 속력은 30km/h로 떨어졌다. 12시 20분경에 G4M편대가 추가로 뇌격을 실시했다. 상처입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에 어뢰 3기가 적중했고, 리펄스에도 어뢰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리펄스는 우수한 조함 실력으로 어뢰들을 회피했지만 거기까지였다. 1발의 어뢰가 좌현에 명중한 것을 시작으로 3발 이상의 어뢰가 리펄스를 강타했다. 안타깝게도 리펄스는 1차대전때 건조된 노령함인데다가 자매함 리나운과 달리 대개장도 받지 않아서 어뢰공격을 받아도 버텨낼 벌지도 [14], 현대적인 장갑도 갖추지 못했다. 결국 난타당한 리펄스는 6분만에 함수쪽으로 전복되어 침몰했다. [15]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단 하나의 스크류만이 남은채 끈질기게 저항을 계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12시 40분경에 추가로 달려든 일본군 폭격기들이 갑판에 폭탄을 명중시켰고, 부상당해 쓰러져 있던 수많은 영국 승조원들이 목숨을 잃었다. 더 이상의 저항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필립스 제독은 퇴함을 명령했고, 몇분 지나지 않아 영국 해군의 자랑이던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침수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Z함대가 무선침묵을 깨고 모스 부호로 SOS 신호를 타전하자 깜짝 놀란 호주 제453비행중대가 부리나케 달려와 오후 1시 15분에 도착했지만 이미 일본 항공대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물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과 리펄스의 잔해를 구경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다행히 호위구축함들이 신속히 구조작업을 했기 때문에 많은 승조원이 구조될 수 있었다.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구축함 익스프레스가, 리펄스의 승조원들은 구축함 일렉트라와 뱀파이어가 구조했다.
필립스 제독은 만류하는 참모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배를 빠져나가지 않고 배와 운명을 함께 했다. 부하들에게 건낸 필립스의 마지막 유언은 '''"굿바이."''' 함장 존 리치 대령[16]은 마지막까지 퇴함을 지휘하다 최후의 순간 탈출했지만, 함이 침몰하면서 발생한 소용돌이에 휘말렸고 목이 부러져 전사했다.[17]
일본은 1941년 12월 10일 당일 영국동양함대궤멸이라는 군가를 만들어 방송하며 전과를 대대적으로 홍보하였다.

5. 결과


영국 해군이 자신있게 파견했던 함대의 궤멸은 영국 및 연합국에게 충격을, 일본에게는 환희를 안겨줬다. 총리 윈스턴 처칠은 동양함대가 사실상 소멸하였다는 보고를 듣고 충격으로 [18] 입을 열지 못했다고 하며 말레이 해전에서 상실한 2척의 전함 피해 보고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충격을 안긴 일이라고 자신의 회고록에 기록하였다.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서 더이상 의미있는 작전을 펼칠수 없게 되었고, 이어진 자바 해전에서 미국, 영국, 호주, 네덜란드로 이루어진 연합군 해군 함대가 사실상 전멸하면서 태평양의 연합군 해상 세력은 미국이 진주만 공습에서 보전했던 미약한 함대만 남았다. 기세등등해진 일본 해군은 인도양까지 진출해서 실론섬을 공습하기까지 했으며, 이때 영국 해군은 교전을 회피하는 추태까지 보였다. 이 과정에서 영국 항모 허미즈와 순양함 2척이 일본 해군의 공격으로 추가로 침몰했다.
이렇게 해서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서 완전히 축출되었고, 북대서양노르웨이, 그리고 몰타 섬의 사투가 종반전을 치닫은 1943년 겨울이 돼서야, 발등의 불로부터 한숨 돌리고 태평양에 다시 해군력을 투사할 여력이 생겼다.
그리고 1944년 1월, 미군이 트럭 섬에 공습을 하며 중부 태평양을 장악하고, 영연방인 호주군이 뉴기니에서 정글과 사투를 벌이며 남부 태평양을 장악할 무렵,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 복귀했다. 그리고 곧바로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일본군이 벌인 임팔 작전에 맞선다.
대략 2년 뒤에 돌아온 영국 동양함대의 기함으로 스리랑카에 전개된 주력함은 리펄스의 자매함이었던 리나운이었다.[19]

6. 평가


말레이 해전은 진주만 공습, 비스마르크의 침몰과 함께 해전의 주도권이 함선에서 항공기로 완전히 옮겨졌다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준 전투이자 전함으로 대변되는 거함거포주의에 사형선고를 내린 사례로 역사에 남았다.
전함이 항공기의 공격을 받은 사례는 이전에도 있었고, 타란토 공습과 같이 항공공격만으로 전함이 상실되는 전례도 있었지만, 타란토의 경우 정박중인 함대를 급습한 것이었으며, 항해중인 전함이 다른 요소는 일절 배제된 채 오로지 항공기의 공격에 의해서만 대파, 격침된 사례는 이전까지 없었다. 이 때문에 당시 각국의 군 지휘부 상당수는 항공기가 가지는 군사적 가치를 실제보다 낮게 보고 있었고, 정상적인 교전상황에서는 전함을 항공기만으로 격퇴하기는 어렵다는 인식이 강했다.
거기에다 당시 일본의 항공기술에 대한 과소평가는 연합군 지휘관들의 판단을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일본에겐 독일과 이탈리아가 가진 장거리 대함공격능력이 없다는 것이 당시 연합국 지휘관들의 통념이었던 것이었다. 실제로는 추축국 중에서 제일 가는 장거리 대함공격능력, 특히, 뇌격능력을 가진 것은 일본이었지만 연합군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과 편견은 프린스 오브 웨일스 및 리펄스의 격침과 함께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상기한 처칠의 반응은 이러한 인식이 제대로 박살난데 따른 충격이었다. 처칠뿐만 아니라 당시 군부 및 정치계, 나아가 일반 대중에 이르기까지 그 파급력은 매우 컸다. 그럴만한 것이 당시 전함이 가지는 전략병기로서의 가치와 인식은 전후에 핵병기가 가지게 된 그것과 동급이었기 때문이며, 게다가 이러한 전략병기가 '동양인 군대'에게 무력화되었다는 충격이 시너지를 일으켰다.
그 충격에서 벗어난 뒤 각 국 해군 수뇌부들 사이에서는, 해군의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도 효과적인 항공엄호가 필요하며, 각 함선의 대공화기도 대대적으로 증설 및 개량할 필요가 있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함대 상공의 제공권을 쥐지 않으면 함대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양상은 이후에 벌어진 여러 전투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당시 영국함대의 상공 엄호에 투입할수 있었던 항공세력은 호주방면에 배치된 몇기의 F2A 버팔로뿐으로 항속거리에 비해 배치지점이 너무 멀었고, 수량도 모자라니 지속적인 항공엄호는 꿈도 못꾸는 상황이었으나 그래도 싱가포르에 주둔하던 오스트레일리아 공군 소속의 버팔로 전투기들은 쿠안탄까지 항공지원이 가능했다. Z기동함대 투입 초기에 전열에서 이탈해버린 항공모함 인도미터블과 남아프리카에 입항했던 시점에 별다른 임무가 없던 허미즈를 Z함대에 포함시키지 않은것도 아쉬워지는 대목이다. 물론 항공모함이 있다 한들 당시 투입 가능한 영국군 함재기들의 수량과 전투능력 역시 모자라기는 매한가지였으니[20]일본군 항공세력과의 정면대결은 무리였지만, 항공세력을 함대 상공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만큼 적어도 당시에 전투기 엄호가 전혀 없는 일본해군 공격/폭격기 편대에 대한 대응은 훨씬 수월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랬다면 오히려 일본해군 장거리 공격기 편대들이 영국공군에게 걸려서 큰 피해를 입었을게 확실한 상황이었다.
한편, 영국 해군이 자랑하던 대공포폼폼 포는 실제 운용하니 송탄불량이 자주 발생하고, 선회와 부앙 상승이 느려서 빠르게 접근하는 항공기를 쫒아기기 힘든데다가 결정적으로 유효사거리가 짧다는 단점이 드러났다. 대공포 자체의 문제와는 별개로 개별 함정에 배치된 수량이 부족하다는 점까지 겹쳐서 항공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가 없었다. 적기를 저지한 시점에서 이미 적기는 무장을 투하한 뒤였기 때문이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항공기의 성능이 급속히 발달했음과 동시에 기존 함선들의 대공방어능력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사례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각국의 함선, 특히 전함을 비롯한 주력 함선들은 대공포를 최대한 많이 부착하고, 구식 대공포를 몽땅 교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형 함선들은 이후 작전운용에 크게 제약을 받게 되었고, 반대로 대공방어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던 쪽은 이후의 전투에서 주역으로 나서게된다. 특히, 미국의 경우 레이더 관제에 의한 대공사격 집중방식과 VT신관의 조합이 매우 효과적이어서 공격해들어오는 적 항공세력을 대공포화만으로 죄다 잡아버린 사례도 있다.
정치, 군사적으로는 태평양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이 사실상 소멸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41년 말 대서양 전투에서 U보트가 미국 동부해안에 진출하기 시작해 수세에 몰리고 있던 당시의 영국으로서는 태평양 방면에서 적극적으로 나설수 있는 여력이 더 이상 없었다. 위에서 언급된 영국 수상 처칠의 반응은 전함 한두척의 손실에 대한 충격 뿐만 아니라, 태평양에서 더 이상 예전과 같은 위세를 떨칠 수 없음을 알게된 절망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영국의 영향력은 마이너 리그 취급받던 중국-버마(현 미얀마)-인도 전선에 국한되었고, 유럽전선에서 연합군이 확실하게 승기를 잡은 1944년에 이르러서야 영국 태평양 함대 (British Pacific Fleet)를 새로이 조직하여 일선에 뛰어들 수 있었지만 그나마도 미 해군의 연합세력으로서 참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영국 해군은 과거 오대양을 전부 통상 작전영역으로 삼던 대영제국 시절의 위상을 되찾지 못하고 대서양 지역해군으로 남아야 하게 되었다. 물론 이건 영국 자체의 국력 하락과 식민지 상실이 큰 원인이었지만.
이 전투에서 주는 교훈 중 한가지는 적을 무시하기만 해서는 이길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일본군도 이때의 성과를 다 잊고 자만하여 미드웨이 해전에서 같은 실수를 저질러 크게 패하게 된다.'''

7. 여담


  •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의 함장 존 리치 대령은 이 해전에서 전사했는데, 아들은 신참내기 해군 장교로 프린스 오브 웨일즈에서 복무를 시작할 때 함장으로 부임했기 때문에 아들은 HMS 모리셔스로 전보 조치되었다. 아버지가 말레이 해전에서 전사할 당시 싱가포르에 있었던 아들은 2차대전에서 생존했고, 오래오래 복무하며 해군참모총장까지 올랐다.[21] 바로 포클랜드 전쟁기 영국 해군참모총장으로서 마가렛 대처 총리에게 포클랜드 수복 원정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헨리 리치 제독이다. 그리고 그해 해군 원수로 퇴역하였으며 2011년까지 살았다.
  • 이 전투에서 전사한 톰 필립스 제독은 2차 대전에서 전사한 연합군 군인중 가장 높은 계급(Admiral, 해군 대장)의 전사자이다. 영국 공군의 트래퍼드 리맬러리의 경우 사고로 사망한 경우이고 오키나와 전투에서 전사한 미 육군의 시몬 버크너 대장은 사후 추서로 전사할 당시 계급은 중장이었다.
  •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말레이 해전의 결과를 두고 참모와 맥주 내기를 했다는데 야마모토는 리펄스는 격침되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살아 돌아갈 것에 걸었고 참모는 둘 다 격침되는데 걸었다. 결과는 참모의 승리였고 야마모토는 기대 이상의 성과에 기뻐하며 원하는만큼 맥주를 돌리라고 이야기했다.

8. 관련 문서



[1]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2] HMS 리펄스[3] 해군 수상함도 지상군과 교전하면 Bombardment라고만 부른다.[4] 엔터프라이즈의 기여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5] 사실 포클랜드 전쟁 자체가 엄밀한 기준의 Naval Battle은 없는데 해군 함선은 여럿 가라앉은 이상한 전쟁이다.[6] 엄밀히는 사단급 이하, 중대급 이상 규모의 아군과 적군이 작전 목표를 가지고 충돌하여, 어느 한쪽이 목적을 달성하거나 상대의 목적 달성을 좌절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첫번째 Naval Battle과도 이어지는 이야기인데, 일반적으로 수상함이 항공기와 교전하거나, 지상군이 포격중인 수상함과 교전하는 경우는 (어느 일방이 너무 불리한 탓에) 작전 목표가 항공기 혹은 포격중인 수상함을 파괴하는 것인 경우는 거의 없다. 수상함이 지상발진 항공기와 교전하는 경우는 작전 목표를 수행하기 이전에 그냥 생존해야 하기 때문이다.[7] 이것이 주류.[8] 함대 구성은 각각 전함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s-2.1, 순양전함 HMS 리펄스, 구축함 HMS 일렉트라, HMS 익스프레스, HMS 엔카운터, HMS 주피터.[9] 훗날 미국에게 받은 함재기로 채워질때까지 당시 영국 함재기의 성능은 일본에비해 절대 열세였다 전투기뿐아니라 대함공격의 주축인 뇌격기도 소드피쉬 같은걸 굴렸었다. [10] 노르웨이 전역, 진주만 공습 등의 전훈으로 대공포만으로는 공습을 막아내기 어렵다는 전훈은 얻었으나 일본의 장거리 대함공격 능력에 대해서 오판한것.[11] 이때 일본 함대와 영국 함대의 상대거리는 약 10km 정도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본 항공대가 중순양함 쵸카이에 터트린 조명탄은 영국 함대에서도 육안으로 발견했다. 만약 조금만 더 거리가 가까웠으면 정말로 해전이 벌어졌을수도.[12] 위치가 밝혀질까봐 무선침묵을 지켰다고 한다.[13] G4M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본 해군 주력 육상공격기. 96식 육상공격기로 칭하기도 한다.[14] 벌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리나운이 킹 조지 5세급의 출현 전까지 영국의 최강 전함이었던 퀸 엘리자베스급의 벌지를 재생해서 장착한 반면, 리펄스는 퀸 엘리자베스급의 건조 비용에 부담을 느끼고 싼맛에 뽑아낸 리벤지 급의 벌지를 재생해서 달았는데다가, 그나마도 리펄스는 이렇게 해도 되는지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 베이스였다.[15] 당시 리펄스의 함장이었던 윌리엄 테넌트 대령은 살아남아, 서인도 제도 함대 사령관까지 승진한다.[16]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비스마르크의 주포탄이 함교에 명중했을 때도 별다른 부상 없이 살아남았었다.[17] 침몰 후에 얼마지나지 안아서 존 리치 대령의 시신이 발견되었다.[18] HMS 리펄스는 구형이니 그렇다쳐도 HMS 프린스 오브 웨일스는 건조한지 9개월 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군을 얕보고 있던데다 최신예 전함이 있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왔으니...[19] 그러나 말레이 해전과 마찬가지로, 일본과 맞서싸운 주역은 이곳에서도 항공모함이었다.[20] 시파이어는 1942년 11월에 가서야 처음으로 투입되고 그 이전에는 그나마 쓸만한게 시허리케인인데 이 또한 41년 말에나 배치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배치된 함재기들은 페어리 풀머같은 괴작이었다.[21] 대전 중에는 듀크 오브 요크의 승무원으로 노스 케이프 해전에 참전했고 한국 전쟁 막바지에 해군 소령 계급으로 참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