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전쟁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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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에서 창사특집으로 제작되어 2019년 11월 23일, 24일 방송된 다큐멘터리. 고려와 동북아의 운명을 갈랐던 여요전쟁 중 제2차, 제3차 전쟁을 다뤘다. 내래이션을 담당한 분은 배우 김명수.[1]
귀주대첩으로 대중들에게 유명하면서도 그동안 천추태후(드라마) 같은 사극에서만 부분적으로 다뤄졌던 여요전쟁에 대해 오랜만에 심층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여서 역덕후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대부분의 장면을 몽골에서 로케이션해서 찍었으며, 거란인들 역할(및 엑스트라 대부분)을 전부 몽골인 연기자들에게 맡겼다. 거란인 대사도 사실 전부 몽골어.[2]
한국사에서 묻혀진 명장이자 끝까지 백성들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양규에 대한 재조명이 크다. 1부는 사실상 주연이고, 2부도 전반부를 장식하며 강감찬급 비중을 보이는 진주인공급. 또한 현종의 리더십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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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지가 초목이 우거지고 산이 많은 한반도가 아니라 메마르고 넓은 몽골 평원이어서 약간 어색한 감이 들지만 그 외의 고증은 최대한 신경을 썼다. 거란과 고려 기병들이 그동안 한국 사극에서 보던 다리 길고 키 큰 서양 말이 아니라 다리 짧고 머리 큰 몽골 조랑말을 타고 내달리는 모습은 신선한 느낌을 준다. 고려군 갑옷은 현종이 송나라풍 갑옷을 입은 것을 제외하면, 고려 경번갑이나 고구려군 갑옷 소품을 입혔는데, 일반 한국 사극처럼 판타지 갑옷이나 조선시대 두정갑을 입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결정이었다.[4] 거란군 연기자들은 전쟁의 시기가 겨울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몽골식으로 두텁게 털이 달린 갑옷을 입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는데, 학계의 정설은 제3차 여요전쟁 때 거란군이 흥화진에서 개경까지 계속 고려군에게 요격당하며 피해가 누적되었기 때문에 막상 개경 근처 신은현에 도달했을 때 공세종말점에 도달, 300명의 기병 기습부대로 개경을 한번 찔러본 후 실패하자 회군한 것으로 보는 반면에,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흥화진에서 개경까지 고려군에게 당한 거란군은 소배압이 내보낸 미끼부대였고, 주력군은 산길을 통해 고려군에게 포착당하지 않고 신은현까지 왔다고 해석하고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또 제작 여건상의 문제였겠지만 고려군의 대 기병 저지 주력무기인 '검차(劍車)'가 나무 쪼가리로만 너무 허접하게 만들어져 등장한다거나, 강조가 현종에게 부월을 수여받을때 현종에게 썩소를 짓는 등 지나치게 권신의 이미지로만 등장했고, 통주 전투에서 적을 얕보다 패했다는 설명과 참수된 머리만 보여줄 뿐 요성종의 회유를 거부하고 고려의 충신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은 부분은 보여주지 않아 강조를 상당히 푸대접했다는 느낌도 든다.
그 외에 양규의 전공을 이순신과 비교한 것도 어느 정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고려거란전기"의 저자인 길승수 작가는 이순신에게는 배가 장비가 있었기 때문에 양규의 여건이 더 좋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판옥선은 일본의 안택선이나 세키부네 같은 배들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숫자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밀렸고, 정점을 찍은 것이 한산도 대첩. 그런데 란체스터 법칙은 육군보다 해전에서, 해전보다 공군에서 더 강하게 작용하는 데다, 양규의 활약은 1010년 겨울부터 11년 봄까지 뿐이었으나, 이순신 장군의 분투는 임진왜란 초기부터 정유재란의 최후까지 6년 6개월 간이었으니, 관점에 따라서는 이순신 쪽이 훨씬 불리했다 평가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에서 쓰인 bgm을 자세히 들으면 Dinosaur Planet의 OST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양규전에서 잘 들리는 편이다.
1. 개요
JTBC에서 창사특집으로 제작되어 2019년 11월 23일, 24일 방송된 다큐멘터리. 고려와 동북아의 운명을 갈랐던 여요전쟁 중 제2차, 제3차 전쟁을 다뤘다. 내래이션을 담당한 분은 배우 김명수.[1]
2. 출연
2.1. 역사학자
- 임용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길승수 - 고려거란전기 저자
- 최형국 - 한국전통무예연구소 소장
- 정명섭 - 고려전쟁생중계 저자
- 김위현 - 명지대 명예교수
- 정해은 -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 마이크 로즈 - 전쟁사학자
- 마이클 스티븐슨 - 전쟁사학자, 작가
등등.
2.2. 연기자
- 현종 - 권영민
- 양규 - 이우승
- 강조 - 문종영
- 지채문 - 임우철
- 강감찬 - 전지학
- 강민첨 - 박종수
- 김종현 - 주상현
- 야율융서 - Uuganbayar Enkhbayar
- 소배압 - Bayaraa Khasbazar
- 야율팔가 - Erdenebileg Indernaa
- 나레이션(해설) - 김명수
3. 평가
귀주대첩으로 대중들에게 유명하면서도 그동안 천추태후(드라마) 같은 사극에서만 부분적으로 다뤄졌던 여요전쟁에 대해 오랜만에 심층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여서 역덕후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대부분의 장면을 몽골에서 로케이션해서 찍었으며, 거란인들 역할(및 엑스트라 대부분)을 전부 몽골인 연기자들에게 맡겼다. 거란인 대사도 사실 전부 몽골어.[2]
한국사에서 묻혀진 명장이자 끝까지 백성들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양규에 대한 재조명이 크다. 1부는 사실상 주연이고, 2부도 전반부를 장식하며 강감찬급 비중을 보이는 진주인공급. 또한 현종의 리더십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하고 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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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지가 초목이 우거지고 산이 많은 한반도가 아니라 메마르고 넓은 몽골 평원이어서 약간 어색한 감이 들지만 그 외의 고증은 최대한 신경을 썼다. 거란과 고려 기병들이 그동안 한국 사극에서 보던 다리 길고 키 큰 서양 말이 아니라 다리 짧고 머리 큰 몽골 조랑말을 타고 내달리는 모습은 신선한 느낌을 준다. 고려군 갑옷은 현종이 송나라풍 갑옷을 입은 것을 제외하면, 고려 경번갑이나 고구려군 갑옷 소품을 입혔는데, 일반 한국 사극처럼 판타지 갑옷이나 조선시대 두정갑을 입는 것보다는 훨씬 좋은 결정이었다.[4] 거란군 연기자들은 전쟁의 시기가 겨울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몽골식으로 두텁게 털이 달린 갑옷을 입었다.
3.1. 아쉬운 점
다만 아쉬운 점도 있는데, 학계의 정설은 제3차 여요전쟁 때 거란군이 흥화진에서 개경까지 계속 고려군에게 요격당하며 피해가 누적되었기 때문에 막상 개경 근처 신은현에 도달했을 때 공세종말점에 도달, 300명의 기병 기습부대로 개경을 한번 찔러본 후 실패하자 회군한 것으로 보는 반면에,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흥화진에서 개경까지 고려군에게 당한 거란군은 소배압이 내보낸 미끼부대였고, 주력군은 산길을 통해 고려군에게 포착당하지 않고 신은현까지 왔다고 해석하고 있어 논쟁의 여지가 있다. 또 제작 여건상의 문제였겠지만 고려군의 대 기병 저지 주력무기인 '검차(劍車)'가 나무 쪼가리로만 너무 허접하게 만들어져 등장한다거나, 강조가 현종에게 부월을 수여받을때 현종에게 썩소를 짓는 등 지나치게 권신의 이미지로만 등장했고, 통주 전투에서 적을 얕보다 패했다는 설명과 참수된 머리만 보여줄 뿐 요성종의 회유를 거부하고 고려의 충신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은 부분은 보여주지 않아 강조를 상당히 푸대접했다는 느낌도 든다.
그 외에 양규의 전공을 이순신과 비교한 것도 어느 정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고려거란전기"의 저자인 길승수 작가는 이순신에게는 배가 장비가 있었기 때문에 양규의 여건이 더 좋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판옥선은 일본의 안택선이나 세키부네 같은 배들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숫자에서는 어마어마하게 밀렸고, 정점을 찍은 것이 한산도 대첩. 그런데 란체스터 법칙은 육군보다 해전에서, 해전보다 공군에서 더 강하게 작용하는 데다, 양규의 활약은 1010년 겨울부터 11년 봄까지 뿐이었으나, 이순신 장군의 분투는 임진왜란 초기부터 정유재란의 최후까지 6년 6개월 간이었으니, 관점에 따라서는 이순신 쪽이 훨씬 불리했다 평가할 수 있다.
4. 기타
다큐멘터리에서 쓰인 bgm을 자세히 들으면 Dinosaur Planet의 OST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양규전에서 잘 들리는 편이다.
[1] 여담으로 김명수는 천추태후에서 고려 6대 왕인 성종을 연기했고 천추태후의 시대적 배경이 고려 초기 여요전쟁을 배경으로 극이 진행됐는데 다큐를 생각하면 참으로 절묘한 부분이다. [2] 물론 거란족의 직계후손인 다우르족의 다우르어로 나왔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의견도 있겠지만 몽골 출연자들 또한 숙련된 연기자들이며 소수민족 중의 소수민족인 다우르족 중 연기자를 가려 뽑는건 현실적으로 어렵기도 하다.[3]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였던 길승수 작가는 나무위키 현종 문서를 참조하였다고 블로그에 밝혔다. jtbc 귀주대첩-현종(顯宗, 왕순) [4] 위에 각주로 달린 길승수 작가 블로그 글에 보면 현종도 고구려 갑옷 소품을 입히려 했으나 문제가 생겨 어쩔수 없이 송나라풍 갑옷을 입었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송나라풍 갑옷을 입은건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서긍의 고려도경이나 불교미술품을 참고하면 전부는 아니더라도 중앙군 상당수는 송나라 갑옷과 유사한 형태의 찰갑을 착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고려 후기부터 확인되는 경번갑이 고증 오류인데 길승수 작가가 밝힌바에 의하면 시대상 맞지 않음은 알고 있었으나 고려시대 갑옷 하면 경번갑이라는 인식이 강해 일부러 경번갑을 골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