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규
1. 개요
고려시대 여요전쟁 때 활약한 문관이자 무장.[3] 거란 성종이 직접 침입했을 때 소수 정예 병력을 이끌고 각지에서 거란군을 격파하며 포로로 잡혀가던 백성들을 구출해낸 명장이다. 고려사에서 척준경, 김경손 등과 함께 소수 정예 병력을 이끌고 전과를 올린 고려의 용장 중 1명. 후술했듯이 조선의 충무공 이순신과 최후가 비슷하다."'''내 임금의 명을 받고 오노니, 조의 명은 받지 아니하노라.'''"
"我受王命而來, 非受兆命."
거란 성종이 강조의 편지를 위조해 항복하라 하자 답한 말. 이후 서북을 사수하며 고려의 승리를 뒷받침한다. 고려사 양규 열전서 발췌.
'중군사 서희'가 거란의 공세를 이겨낼 기틀을 마련했고 '상원수 강감찬'이 길었던 전쟁을 대승리로 끝냈다면 '도순검사 양규'는 둘 사이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고려의 멸망을 막아낸 불세출의 명장이라 할 수 있다.[4]
《고려사》 양규 열전을 보면 초년의 기록이 거의 없고 거란 요성종의 침입 때인 1010년 11월부터 1011년 1월 말 사이의 활약상만이 존재하지만 3개월간의 활약이 매우 굵직하다. 암울했던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 양규의 활약상은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과 같고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장렬한 최후를 맞은 부분까지 완벽히 일치한다.
2. 생애
2.1. 초기
대(對)거란 전쟁 이전 초년기의 양규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목종 때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형부 낭중이 되었다는 기록만이 존재하는데 이로 미뤄 보면 성종 말년이나 목종 재위기에 관직에 나섰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강조의 정변으로 목종이 폐위되고 현종이 즉위하자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고려를 침공했다. 이 무렵 양규가 도순검사가 되어 흥화진[5] 에서 흥화진사 정성, 흥화진부사 이수화, 판관 장호 등과 함께 흥화진을 지켰다.
양규의 전임 도순검사가 바로 '강조'다. 양규는 강조의 후임으로 흥화진에 부임한 것인데 아무래도 정변 직후의 군 인사는 민감한 사안인 만큼 강조의 추천이나 승인 없이는 이 지역에 강조의 후임으로 부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에 양규는 어떤 형태로든 강조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2.2. 전초전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고려를 공격했을 때 성종은 1010년 11월 17일부터 1주일간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양규 이하 흥화진 부대는 공격을 막아냈다. 성종은 사로잡은 고려 농민들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요지는 "전왕 왕송[6] 은 우리 거란을 잘 섬겼는데 강조가 목종을 시해했기에 이를 정벌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강조를 잡아보내면 돌아갈 것이고 안 그러면 모두 죽은 목숨이다. 강조에게 협박당해서 어쩔 수 없이 따른 사람들은 용서해준다"는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흥화진의 장수들은 정중한 말로 거절했고 성종이 다시 흥화진 장수들에게 비단옷과 은그릇 등을 보내면서 항복을 권유했지만 흥화진 장수들은 끝내 듣지 않고 정중한 말로 항복을 거부하는 서신을 보냈다.
성종은 항복 권유가 소용없음을 깨닫고 20만 병력을 무로대[7] 에 주둔시키고 자신은 직접 20만 병력을 이끌고 남하했다. 그리고 통주[8] 삼수채에 주둔하던 강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강조까지 포로로 붙잡은 뒤 처형시켰다. 이후 성종은 항복하라는 서신을 작성해 강조의 서신으로 위조하여 흥화진으로 보냈는데 양규는 "우리는 왕의 명을 받고 왔으니 강조의 지시를 받을 수 없다"고 일축했다.
이후 남하하던 거란군은 통주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고 근처의 곽주성[9] 을 함락시켜 6천여 명의 수비군을 남겼다. 곽주를 일종의 중간 기지로 삼기 위함이었고 빠른 직공을 위해 최소한의 중간 기지를 둔 것이다. 이후 거란군은 개경으로 남하하는 길에 서경[10] 까지 공격했으나 서경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양규의 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2.3. 대활약
서경이 거란군의 공격을 받고 있던 1010년 12월, 양규는 흥화진에서 7백의 결사대를 이끌고 통주까지 와서 1천 명의 군사를 수습했다.[11] 특히 흥화진 남쪽이 무로대에 주둔한 20만 거란군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양규는 소수 정예 병력으로 은밀히 부대를 운용해 거란의 포위망을 돌파하고 통주까지 남하한 것이다.[12]전력이 계속 갉아 먹히고, 정체불명의 군대는 계속 뒤에서, 동에서, 서에서 번쩍하고, 병력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고, (이런 상황에서) 거란군은 황제부터 말단 병사들까지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느꼈을 거에요. 어디에서도 이런 군대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 부대를 이끌고 야음을 틈타 거란군이 점령한 곽주로 나아가 '''6천의 거란군이 지키는 곽주를 습격해 거란군을 몰살시키고 성을 탈환해 버렸다.''' 소수의 병력으로 성으로 치고 들어갔다는 의미인데 어떻게 공격했는지 자세하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정공법이었을 가능성은 없고 성내 고려인들의 내응을 이용했거나 뭔가 책략을 써서 성 안으로 잠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곽주를 점령한 양규는 이후 붙잡혀 있던 고려 백성 7천여 명을 통주로 옮겨 통주성의 방비를 강화했다.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곽주 전투야말로 여요전쟁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극적인 승리였다.''' 만약 곽주성이 거란의 손에 남아있었다면 보급로가 확보된 거란군의 공격에 서경이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며, 만약 서경이 거란의 손에 넘어갔다면 고려가 당장의 위기는 넘길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개경이 거란의 공세에 그대로 노출되어 전쟁을 수행할 역량을 상실했을 것이다.
중간 보급기지를 상실한 데다가 서경도 함락시키지 못했던 거란군은 그래도 서경에서 개경 사이의 길에 고려군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서경도 방치한 채 그대로 진군했고 1011년 1월 1일, 요성종은 수도 개경에 입성해 성을 불태웠으나 고려 국왕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을 떠났고 거란군도 꽤 지친 상태였기 때문에 곧 철수를 시작했다. 이들은 고려인 포로 수만 명을 납치해 가며 청천강까지 북상했는데, 1011년 1월 17일, 귀주에 주둔하던 귀주 별장 김숙흥과 중랑장 보량이 이들을 습격해 거란군 1만 명을 죽였다. 그리고 때맞춰 양규도 거란군 예비 병력이 주둔하던 무로대를 습격하여 2천여 명의 수급을 베고, 고려 백성 3천여 명을 구출해 낸다.
양규와 김숙흥은 사전에 서로 연락을 취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김숙흥은 귀주에서 흥화진 방향으로 거란군을 추격했고, 양규는 흥화진에서 귀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며 거란군을 후미에서 계속 공격했다. 계속해서 이수(梨樹)에서 석령(石嶺)까지 추격해 2천 5백여 명의 거란군을 참살하면서 고려인 1천여 명을 탈환했고, 3일 뒤 여리참(余里站)에서 3번의 전투를 벌여 1천여 명을 죽이고 고려인 1천여 명을 탈환했다.귀주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거란군을 습격하여 1만여 급을 베었다. 양규는 거란군을 무로대에서 습격하여 2천여 급을 베었으며 포로가 되었던 남녀 3천여명을 되찾았다. 다시 이수에서 전투를 벌이고 추격하여 석령까지 가서 2천5백여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1천여명을 되찾았다. 3일 후에는 다시 여리참에서 싸워 1천여급을 베었고, 포로가 되었던 1천여명을 되찾았다. 이 날 세 번을 싸워서 모두 이겼고 다시 그들 선봉을 애전에서 맞아 싸워 1천여 급을 베었다.
<<고려사>> <양규 열전>
즉 지친 거란군에게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혀 가며 고려 백성들을 최대한 많이 구출해내는 것'''이 양규의 의도였으며, 양규가 이 전쟁에서 세운 최대의 공적이다. 그리고 이렇게 연속해서 전투를 벌이다가 김숙흥 부대와 합류했다.
이런 양규의 공적은 임경업이 병자호란 때 요퇴를 공격한 것에 비견되어 폄하될 우려가 있는데, 비록 철수하는 병력을 공격한 것은 동일하지만 실제 상황은 전혀 다르다. 임경업은 '''이미 화의가 다 끝난 상태에서 공격'''한 것이고, 양규는 엄연히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전 의사가 있는 적을 공격하여 전과를 거둔 것이다. 단순히 철수 중인 적을 쳤다고 폄하된다면 살수대첩이나 귀주 대첩 역시 철수하는 수(隋)군과 요군을 공격한 것이며 노량해전도 철퇴하는 왜군을 공격한 것이니 별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13] 결정적으로 양규의 게릴라전은 언제 요 성종이 친정하는 거란 본대와 맞딱뜨려 전멸할지 알 수 없는 목숨을 건 싸움이었고,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2.4. 장렬한 최후
1011년 1월 28일, 양규와 김숙흥은 애전(艾田)[14] 에 거란군 한 부대가 접근한다는 정보를 받고 애전에서 이 부대를 요격해 1천여명의 수급을 벤다. 그런데 이 애전에 성종이 직접 이끄는 거란군 본대가 나타난다. 거란 황제의 친위군이었던만큼 꽤 많은 병력이 양규 부대를 포위했다.
양규와 김숙흥은 성종의 친위군을 맞아 화살이 떨어지고 병사들이 다 쓰러질 때까지 말 그대로 처절하게 싸웠고, 마침내 힘이 다해 양규와 김숙흥 이하 고려군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만다. 양규의 최후 분전은 철수하는 거란군에게 최대한 타격을 입히려고 한 것도 있었을 것이고 구출한 고려 백성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15]
양규 부대는 전멸했지만 거란군도 그 공격에 입은 피해가 너무나도 컸던 데다가 큰 비까지 내려서 군마와 낙타가 쇠약해지고 무기가 상했을 지경이었다. 겨우 국경인 압록강 일대에 이르렀지만 여기서 양규의 임지였던 흥화진의 수비대장 정성이 흥화진에서 뛰쳐나와 거란군이 반쯤 압록강을 건널 때 그 후위를 '''맹렬하게''' 습격했다. 이 공격으로 물에 빠져 익사한 거란군이 매우 많았다. 당시 반쯤 건넜다는 말을 보면 이미 요 성종이 건너고 후미 부대가 아직 건너지 않은 상황에서 정성을 비롯한 고려군이 습격하자 지칠대로 지친 요 성종 직속군조차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강을 건너느라 빠져 죽을 가능성이 높았을 것이다.[16]
양규는 원군도 없이 1달 사이에 모두 7번을 싸워 많은 적군의 목을 베었고, 그가 구출한 고려인 포로는 무려 '''3만'''에 이르렀다. 또한 그가 노획한 군마와 낙타, 병장기도 무수했다고 고려사는 기록하고 있다. 양규를 비롯한 서북군의 피나는 분투는 요군에게 무려 400km에 달하는 고립을 강요했고, 초반에 통주의 주력군이 털려 파죽지세로 개경을 잃은 고려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주었다. 이들의 전공이 아니었다면 거란이 다 이긴 전쟁을 고려의 친조 '''수락'''이라는 어정쩡한 조건으로 대충 마무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17] 그토록 탐냈던 노른자위 강동 6주를 어영부영 놔두지도 않았을 것이며 고려는 무수한 노동력의 손실과 추가적인 배상 등에 시달리면서 파탄을 맞이했을 것이다.[18] 이들의 희생으로 고려는 비록 국토가 초토화되긴 했지만 막대한 노동력을 보전하고 배상을 면하는 등 추가적인 손실을 최소화함으로써 이후 제3차 여요전쟁에서 완벽한 복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
2.5. 후일담
사후 양규는 그 대활약에 걸맞게 국가유공자의 대우를 받았다. 현종은 양규를 공부상서로 추증했고, 양규의 아내 홍씨에게 '''직접''' 조서를 써서[19] 죽을 때까지 매년 쌀 1백 섬을 지급하게 했으며 양규의 아들인 양대춘에게는 교서랑 벼슬을 내렸다.[20]
여요전쟁이 완전히 끝난 현종 10년(1019년)에 현종은 양규와 김숙흥을 공신으로 삼았고 1024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이라는 공신호를 추증했다. '삼한벽상공신'은 태조 왕건이 건국공신들에게 내려준 공신호이니 건국공신과 다름없는 공신이라는 의미인 셈. 뒷날 고려 문종은 두 사람의 초상화를 신흥사 공신각에 봉안하게 했다.
양규의 아들 양대춘은 아버지의 공도 있었겠지만 그 자신도 문무를 겸비한 인재로 평가받았으며, 이후로 크게 출세해서 안북대도호부사를 거쳐 재상까지 지냈다.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는 평을 받았지만, 양대춘이 활약할 무렵에는 고려도 평화기에 접어들어서 장수로서 활약할 기회는 없었다고 한다.[21]
고려사 예종 세가 재위 4년 2월엔 양규의 증손자 양제보(楊齊寶)가 등장한다. 별무반 신기군(神騎軍) 직장(直長) 직위를 지니고 있었고 예종에게 은가구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세월이 흐른 뒤 양규와 비슷한 행적을 걷는 장수가 나오는데 바로 여몽전쟁 시기의 명장 김경손이다. 양규가 소수의 병력으로 거란군을 격파하거나 김숙흥 같은 유능한 동료와 함께 적을 무찔렀는데 김경손 역시 여몽전쟁 시기 고작 12명의 소수의 병력으로 몽골군을 격파하거나 게릴라 전술을 썼고 박서와 함께하며 귀주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도 하는 장면들이 양규와 매우 흡사하다.
3. 현대 매체에서
어째 여요전쟁이 전쟁의 중요도에 비해 비교적 현대 매체에서 소외받는 경향이 있어서인지, 이런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용장도 현대 매체에서는 다뤄진 적이 거의 없다.
그나마 KBS 천추태후가 이 시기를 다뤘던 만큼 여기서 등장했었다. 배우는 홍일권. 그래도 용장의 면모를 보여준다.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인간흉기(...), 강조를 2번이나 제압한[22] 야율적로를 원샷원킬로 베어버렸고, 웬만한 장수 여러 명은 상큼하게 웃으며 베어버리는 실력을 가지고 있으며, 에이스급 장수들과 싸울 때 당연히 진적이 없다.[23] 심지어 말과 교감이 가능해서(...) 마음대로 말을 다룰 수 있다. 최후에는 그는 김숙흥과 함께 화살을 맞고 선 채로 죽는 최후의 순간에도 도망가는 거란군을 노려본다.[24] 죽기 전에 이제 갈 때가 되었다고 말하고 김숙흥이 "장군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다" 라고 말하는 장면은 상당히 멋있는 장면. 그를 죽여야 했던 성종도 적의 용맹에 대해서는 인정했는지 쳐다보는 눈빛이 뭔가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이다.
고려사를 다루는 학습 만화에서도 이들을 빼놓지 않으며 당연히 이들의 최후가 가히 무협지를 뺨치게 한다. 양규와 김숙흥이 돌아오는 요 성종의 군사와 마주치자 김숙흥이 "저승에서 뵙겠습니다, 장군."라고 같이 결의를 다짐하고 함께 싸우다 전사하기 직전에 김숙흥이 "먼저 쉬겠소, 장군." 라며 먼저 쓰러지고 양규도 같이 싸워준 김숙흥에게 "수... 수고하셨소." 와 같은 말을 한 뒤에 자신도 전사한다. 고려사 학습만화 장면 중 가장 가슴이 찡한 장면이라고.
2019년 JT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평화전쟁 1019에서 그동안의 소외를 씻어버리듯 진주인공으로 등장했다. 임진왜란 1592에서 가토 기요마사 역을 맡았던 배우 이우승이 연기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무쌍을 펼친 끝에 자신의 결사대도, 거란군도 모두 쓰러지고 홀로 서서 요 성종을 쏘아보다 거란군이 멀리서 쏘아대는 화살비를 정면으로 받아내고 쓰러지는 모습은 간지폭풍 그 자체.
[1] 지금으로 치면 야전군사령관 또는 합창의장 격 정도 되는 군 총사령관 정도 된다.[2] 상서성 소속 공부의 장관.[3] 양규는 정식 무관직을 역임한 적이 없다. 하지만 전쟁 중 후방에서 지휘 뿐만 아니라 전장에 나가 직접 싸우기도 하는 등 무장의 모습을 보였다.[4] 아쉽게도 교육 과정에서는 비중이 적어서 기껏해야 '양규의 선전'이라는 표현으로 뭉뚱 그려지기도 한다. 실제로는 마지막 순간까지 거란군의 후방을 괴롭혀서 철수하게 만든 양규가 없었다면 거란이 승리하는 것을 넘어서 고려가 거란의 2차 침공 때 끝장났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거란의 3차 침공에서 다시 한 번 무너졌을 수도 있다.[5] 오늘날의 평안북도 의주군.[6] 목종 선양대왕의 휘.[7] 오늘날의 의주 남쪽 부근.[8] 오늘날의 평안북도 선천군.[9] 평안북도 곽산군.[10] 옛 고구려 수도이자 고려 제2수도 평양.[11] 통주에서 1천의 병사들이 합류해 1700의 병력이 되었다는 의미인지, 통주에서 수습된 병사들까지 합쳐 1천의 병사가 되었다는 의미인지 확실하지 않다. ‘JTBC 창사기획 평화전쟁 1019’에서는 1700명으로 소개하였다.[12] 다만 무로대에 위치한 20만 거란군을 뻥카로 보는 의견도 있다. 아무리 당시 요나라가 전성기였다고 하더라도, 송나라가 배후에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 중국 제국조차 동원하기 힘든 40만 원정군을 동원할 역량이 있었는지는 다소 의문이며, 우리나라에 20만이란 군세를 주둔시킬 거점이 있는지도 문제되며, 이후 전쟁에서 무로대에 남았다는 20만 대군은 종적이 묘연해진다. 물론 무로대에 주둔한 거란군이 20만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보급로를 유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병력은 남겨두었을 것이다.[13] 철수 중인 군대가 약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집에 갈 일만 남겨둔 상태에선 안 죽으려고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심리를 읽고 '''일부러 길을 터주는''' 전술도 있을 정도인데 더 설명이 필요한가? [14] 공교롭게도 지명이 '쑥 애'에 '밭 전'이라서 '''쑥밭'''이라는 의미가 된다. 오늘날의 위치는 정확하지 않지만 실향민 출신 전원곤 장로의 말에 의하면 고향인 평안북도 선천군 태산면 길성동 전촌(전씨 집성촌) 부락 근방에 양규가 전사한 고개가 있었고 거란군과의 전투 이후 마을이 페허가 되어 인적이 끊긴 이후로 쑥만 무성한 쑥밭이 되어서 애전현으로 불렀다고 한다.[15] 이건 양규와 김숙흥에게 엄청난 전공인데 과거 사람의 노동력이 가장 중요하던 시기를 생각해보면 양규와 김숙흥은 그야말로 고려가 나중에 3차 침입에 대비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이다. 잡혀갔다가 풀려난 백성들이 나중에 군사나 전쟁 시에 일어날 군량미 등을 보충해 줄 수 있으며 고려는 양규와 김숙흥 덕분에 어느 정도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고, 더불어 요나라 성종에게 굴욕감을 준 셈이다. 명색이 황제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왔는데 항복을 받아내기는 커녕 양규가 후방에서 계속 찌르자 후방 포위라는 위기에 그렇다고 자존심 때문에 물러날 수 없으니 수락이라는 어정쩡한 조건에서 물러났다.[16] 살수대첩의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수나라 군대가 강을 건널 무렵에 고구려군이 후미에서 신나게 두들겨 패서 쾌거를 이루었다는 사례와 비슷하다. 다만 압록강 동쪽 흥화진 앞에 거란이 쌓은 '보주'라는 성이 있는데, 이곳의 위치를 생각하면 살수나 귀주에서와 같은 피해를 입었을지는 알 수 없다.[17] 즉 병자호란처럼 "직접 왕이 나와서 무릎꿇으면 화친해줄게"도 아니고, '''"나중에 오긴 온다 이거지? 강동 6주도 나중에 돌려줄거라 이거지? 알았어, 일단 돌아갈게 나중에 진짜 강동 6주 들고 꼭 와서 화친해야 돼?"'''라며 생색만 내고 끝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고립을 감수한 수도로의 전격전 및 수도 점령 성공이나 국왕이 적에게 사로잡힐뻔했다는 점 등 여러모로 병자호란을 연상시키는 것이 2차 여요전쟁이다.[18] 병자호란 당시에 조선이 재기하려고 얼마나 피땀들여 노력했는지 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만큼 노동력의 중심인 많은 백성들을 잃고, 국토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당장 인조가 숭덕제에게 항복하고 돌아올 때, 많은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서 갇힌 와중에 왕을 부르며 울부짖었으며 수많은 백성들이 청에 끌려갔다는 기록도 있다.[19]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임금의 조서라고 왕이 일일이 작성하진 않는다. 내용을 대략 정해주면, 실제로 글을 쓰는 건 한림원에서 한다(한석봉이 바로 이런 작업을 맡던 사람이었다). 워낙 큰 공로를 세웠기 때문에 현종이 일부러 직접 글을 쓴 것이고, 그래서 고려사에서도 '직접 썼다'고 강조한다.[20] 양규와 함께 전사한 김숙흥에게도 장군직을 추증했고 그 어머니에게 매년 쌀 50섬을 지급하게 했다.[21] 다만, 재상직에 왕과 신하들의 신뢰가 두터웠다면 그것도 자신의 아버지와 비견될만한 공은 맞다. 일단은 나라를 안정시키는 것도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과 같이 전쟁을 막는 것이기도 하며 국가의 부흥의 제일 요소는 바로 서로 간의 응집력인 것을 보면 비록, 전쟁이라는 자극적인 요소에 묻혔지만 그도 아버지의 이름에 걸맞게 노력해 나라를 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리 요에게 승리했어도 전운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과거였는지라 아버지인 양규가 고려를 구한 영웅이었다면 아들인 양대춘은 고려의 황금기를 이끌도록 도운 영웅으로도 볼 수 있다.[22] 물론 진짜 실력으로 베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기습이거나 무방비 상태이기는 했다. 강조가 정상적인 상태에서 겨뤘으면 야율적로가 질 가능성이 높다.[23] 황제를 죽일 순간까지 이르렀지만 순간 구하러 나온 소배압이 막는 바람에 아쉽게 황제를 죽이지 못했다.[24] 그때까지 두 사람 모두 밤새도록 한대도 맞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하다 못해서 성종과 소배압이 궁수부대를 부른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