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배압
蕭排押 / 蕭巴雅爾
(?~1023)
1. 개요
거란(요나라)의 장군. 여요전쟁 때 고려를 침공했다가 강감찬에게 귀주 대첩에서 패한 걸로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그냥 고려에 처발리고 도망간 적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내치에서도 재능을 발휘했던''' 문무겸비의 베테랑 장수였다. 그러나 말년에 고려에 처참하게 깨지고 간 전적과 사실상 한국과의 접점은 이거 말고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저평가를 받는 장수이다. 사실 송나라에서도 송나라군을 모두 패배시킨 공포의 명장이고 고려에서 강감찬에게 대패하였지만 강조의 군대도 완파한 거란군 최강의 장군이었다.
자는 한은(韓隠). 당시 거란 성종의 중신이자 장수였던 야율사진(耶律斜軫, ?~999)의 자와 같다. 한자도 똑같다. 거란의 1차 침입 때 장수이자 서희에게 낚인 것으로 유명한 소손녕은 바로 소배압의 동생이다.
2. 문무겸비의 백전노장
소배압은 요사에 따르면 소부방의 후손으로 기사술(기마궁술)에 뛰어났으며 요성종이 즉위했을 때(983년) 황제의 친위군인 피살군의 장군인 좌피실상온을 맡아 조복(몽골) 원정에서 공을 세웠고 986년에는 송나라 조빈 등의 군대를 망과에서 격파했다. 이 공으로 또 승진하여 많은 부대를 이끌게 되었고 야율사진과 함께 송나라가 점령했던 산서 지역의 땅들을 탈환했다. 그 해 겨울에는 송 공격의 선봉장으로 남경통군사가 되었다. 이렇게 송과의 전쟁에서 많은 경력을 쌓았고 황실의 딸 위국공주를 아내로 맞아 부마가 되었으며 고위 관직에 임명되었다. 위국공주는 경종과 승천황태후 사이의 딸이었다.
군사적 전공 뿐만 아니라 나름 정치 수완도 있었는데, 995년에는 성종에게 정치의 이해나 부역법과 관련한 의견을 상서하여 성종이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고, 1004년 다시 송나라를 원정했을 때는 또 일군을 통솔하여 송나라 위부(魏府)의 관리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 전쟁에서 남경통군사('통군'은 총사령관 정도의 직위) 소달름(蕭撻凜)이 전사하자 남면의 행정을 전담했고 전연의 맹이 맺어진 후에는 북부재상(北府宰相)이 되었다. 요사 소배압전에 의하면 이 당시 '소배압의 통치는 온후하고 관대해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용 뿐만 아니라 정치 수완도 제법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고려와의 악연
1010년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할 때 통군이 되어 성종의 고려 침공에 참전하여 고려군을 연전연파하는 등 전선에서 맹활약했다. 그러나 이 때 고려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고 현종 역시 나주로 도망쳐 왕도 사로자비 못했던 데다 양규 등의 활약으로 거란군도 꾸준히 피해를 입은 탓에 별 소득 없이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도 이 때의 공을 인정받았는지 귀국 후에 난릉군왕(蘭陵郡王)에 봉해졌고 1013년에는 재상직을 겸직하면서 서남면초토사(西南面招討使)의 직위에 임명되었으며, 1016년에는 다시 동평왕(東平王)에 봉해졌다.
1018년 고려 정벌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흥화진에서 강감찬의 책략에 호되게 당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질풍같이 남하해 진격해 들어갔다. 이 정도 피해면 당연히 물러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고려군은 당연히 이러한 소배압의 맹렬한 진격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추격군을 따로 급파했으나 이미 소배압은 개경 앞 40리 금교역까지 이른 상황이었다. 소배압의 전적으로 볼 때, 전쟁에 대한 잔뼈가 굵었다면 아마 고려에 대한 병력이 모두 강감찬이 있는 곳인 북쪽에 모두 배치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고 개경으로 쏜살같이 진군해 들어갔을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저번 2차 침입 때처럼 왕이 몽진을 떠나게 될 경우 마침 개경 근처에 다다른 상황이므로 곧바로 쫓아가서 잡으면 되었기에 강감찬과 고려군이 아무리 기를 쓰고 추격해온다 한들 그에게는 왕만 잡으면 미션 클리어였다.[1] 하지만 현종이 청야전술을 쓰면서 개경에서 백성들을 모아 거세게 저항했고[2] 소배압 휘하의 군단 역시 개경까지 오는 도중 고려군의 맹추격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던지라 개경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군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귀주에서 고려군 주력과 맞부딪혔고 그 결과는 모두가 잘 아는 '''귀주 대첩'''. 이 전투에서 소배압의 거란군은 전멸당하다시피 대패했고 소배압은 겨우 목숨만 건진 채 거란으로 도망쳤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어쩐 일인지 이 1018년의 공격도 아우인 소손녕이 이끈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소손녕 항목에서 보듯이 이 시점에서 소손녕은 이미 죽은 상황이었고 거란 쪽 사료인 요사와 거란국지에는 분명히 소배압이 사령관이었다고 적고 있다. 아무래도 편집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듯.무술일에 거란의 부마 '''소손녕(蕭遜寧)'''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침략하면서 군사 10만 명이라고 소리쳤다. 왕은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3]
)에 주둔하게 하였다.
《고려사절요》 현종 원문대왕 무오 9년(1018년)
요사에서는 이때의 소배압의 출정에 대해 군사들이 다타이하(茶陀二河)를 건널 즈음에 추격하는 고려군이 쫓아왔는데 여러 장수들이 모두 고려군으로 하여금 두 강물을 건너게 한 다음 공격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 소배압 부대의 도감으로 참전한 야율팔가가 "적들이 만약 두 강물을 건너게 되면 고려군이 배수진을 친 형국이라 결사적으로 싸울 테니 이는 위태로운 방법이므로 두 강물 사이에서 치는 것만 못하다."고 진언했다고 한다. 그러자 소배압이 그 의견에 따라 두 강물 사이에서 싸웠는데 적군이 양쪽에서 화살을 쏘아 대자 거란군은 대패하고 소배압이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고 적고 있다. 이 '다타이하의 전투'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귀주 대첩이다.
“다타이하를 건널 적에 적이 협공해서 활을 쏘자, 소배압이 갑옷과 병장을 버리고 달려왔던 바 이로 인하여 파면되었다.”
《요사》 권88 열전18 소배압고
4. 몰락과 죽음
성종은 소배압의 충격적인 대패를 접했고 목숨만 겨우 건진 채 돌아온 소배압한테 크게 화를 내며 '''"네가 적지에 너무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네가 무슨 낯짝으로 나를 보겠느냐, 너의 얼굴가죽을 벗겨 죽이고 싶다!"'''고 극딜을 퍼붓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황실의 부마이자 사적으로는 외사촌이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던 듯 하다.[4] 그러나 대패의 책임을 물어 모든 관직을 추탈당하고 말았다.
1023년 빈왕(豳王)에 봉해져 다시 재기하나 싶었지만 그 해에 사망했다. 이때 소배압의 도감이었던 야율팔가 역시 소배압과 함께 출전했을 때는 재상직에 있었으나 판단 실수의 책임을 지고 강등당해 서북로도감으로 있다가 사망했다.
5. 행정공무원에게 깨진 소배압?
승승장구하던 나름 베테랑격의 무시 못할 장수였지만 고생만하고 소수의 병력으로 전투에 처음 입문한 20대 청년군주와 전장에 처음 나온 것이나 다름없는 노인[5] 에게 당한 '''단 1번의 치명적 패배''' 때문에 몰락하고 만 셈. 재미있게도 귀주 대첩을 이끈 주역들인 고려군 상원수 강감찬, 부원수 강민첨과 1만 기병대로 거란군의 후방을 강타하여 거란군에게 치명타를 입힌 김종현까지 주요 장수 세명이 모두 '''문신'''이다.
고려는 호족 연합 정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기에 조정에 문관으로 출사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각자 따로 영지를 갖고 있던 사람들이고 휘하에 사병까지 두고 있었다. 즉 조선시대 문관보다는 군에 대해 까막눈이 아닌 사람이 있을 확률이 높았다는 것. 이들은 국가의 최상위 계층이었으므로 전시에도 군의 총사령관으로 내정되었다. 무관들은 관직말고도 신분상 대개 그들의 밑이었으므로 당시 시대상 총사령관 같은 지위를 맡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문관 출신들은 군에 대해 어느정도 아는 경우라도 대개 전문적인 무관보다는 못했으며 실전에서도 이들의 보좌를 받아야 했다. 즉 문관들이 대국적인 면에서 큰 방향을 지시하면 밑의 무관들이 실무를 담당했던 것이다. 총사령관인 강감찬 같은 이들의 역할은 목표를 제시하며 자신들이 필요하다 싶은 영역에서 나서는 것이고,[6] 무관들은 이를 등에 업고 군 병력을 지휘 목표를 완수하는 것이었다. 비단 귀주 대첩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사례이므로 강감찬 같은 케이스가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렇게 뒷받침을 해줘도 그마저도 못해내는 문관들도 많았고 이게 일반적이며 이로 인해 병크가 많았다. 고려말 그 추태라던가 양란에서의 추태가 그 예시. 오죽하면 조방장인 무관이 지휘관인 문관에게 칼을 들이밀며 도망치지 말라고 했을까. 애시당초 그쪽 계열은 그들 전문이 아니긴 했지만.
반면 강감찬과 달리 척준경의 행로는 전형적인 무관의 행보였다. 당장 추밀원만 하더라도 고려 때 왕명의 출납·궁중의 숙위(宿衛)·군기(軍機) 등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별가(別駕)도 향리(鄕吏)의 자손중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사람들에게 주는 이름 뿐인 벼슬이었다. 또한 고려에서 문관과 무관은 둘 다 문산계에 속해있으며 무산계은 말만 무산계이지 노병들 말고는 무관하고는 상관없는 지방향리와 그 자손, 대장장이 같은 장인, 탐라 왕족 같은 이들이 받는 말만 무산계인 루트였다. 나중에야 문관 관직을 맡았지만 무관 관직은 정3품이 끝이었기에 더 출세할려면 당연히 전직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관들이 군사지휘도 다했다는 식의 서술을 하는 건 역사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들 말대로라면 이성계도 나중에는 수문하시중에 문하시중까지 문관관직을 맡았으며 이순신도 정읍 현감을 맡은 적이 있으니 문관이라고 우기는 꼴이다. 기본적으로 동아시아에서는 문관과 무관이 서로 오가는 일이 빈번했다는 것도 모른다.
강민첨 역시 2차 거란전쟁 때부터 활약한 경력이 있었다. 강민첨의 기록인 "본래 서생이었기에 무술은 그의 장기가 아니었다"라는 문구에서 나오듯이 문관이었으나 거란의 2차 침입 때 서경을 지켜내면서 이름을 알렸고 3차 침입 전엔 여진족의 침입도 막아냈다. 후대의 권율과 같은 케이스. 사실 대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이 말단 병사처럼 무술에 소양이 있을 필요는 없었다. 제갈량이 칼들고 장판파를 벌였다는 기록이 없던 것처럼 지휘관은 지휘관의 소양과 업무수행능력이 필요하고 말단 병사는 말단 병사의 소양과 업무수행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무관처럼 검을 능수능란하게 쓰고 활을 자유자재로 쏘며 평생을 전투와 지휘, 통솔같은 군무만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전문도와 숙련도가 떨어지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는 당연한게 문관들은 태어날 때부터 정도는 달라도 지배자들인 호족들이 출사하여 문관으로 등용되는 것이고 무관들은 일종의 전문직 계층이다.
따라서 소배압은 행정공무원에게 진 것은 맞는데 그 행정공무원이 그냥 문관이 아니라 어느 정도 군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 공무원이고, 그가 결정을 내리면 알아서 일처리를 해주는 직업군인들이 보좌하는 총리급 행정공무원에게 깨진 것이다.
[1] 후에 그런 식으로 성공한 전투가 병자호란.[2] 개경은 수도이지만 엄연히 평야에 세워진 평지성이라 전시에 농성하기에는 매우 힘들다. 당장 고구려 때에도 국내성이 평소에 수도였지만, 전란에는 산성인 환도성을 수도로 이용했다.[3] 현재 평안남도 안주시[4] 소배압은 성종의 모후인 예지황후의 조카였다.[5] 그럴만도 한 것이 84년 평생 갑옷을 입고 싸운 적은 귀주 대첩 때의 단 3개월 뿐이라고 한다. 귀족 신분이어서 그렇지, 군복을 입은 기간만으로 따지면 실상 이등병 정도의 경력에 불과한 수준. 사실 2차 침공 때는 전투를 하려 해도 고려 쪽 상황이 개막장이어서 참전은 못했다. 다만 2차 침공 때 청야전술을 세운 것 역시 강감찬이다.[6] 당장 진군로 상의 지방 유력자같이 중앙군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입장에선 전문직 계층보다는 중앙의 높으신 귀족의 한마디가 더 위력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