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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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SBS 스타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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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생활의 마지막인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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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동호인 농구에서 뛰고 있는 前 국가대표 센터.
'''이름'''
표필상(表必尚)
'''생년월일'''
1968년 2월 17일 (56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학교'''
아미초등학교 -건국중학교-동아고등학교-중앙대학교
'''포지션'''
센터
'''신체 사이즈'''
2m[1]
'''실업입단'''
1992년 SBS 입단[2]
'''소속팀'''
SBS/안양 SBS 스타즈 (1992~2002)
창원 LG 세이커스 (2002~2003)
서울 삼성 썬더스 (2003~2004)
인천 전자랜드 블랙슬래머 (2004~2007)
'''등번호'''
33[3], 00[4], 0[5]
'''국가대표팀'''
1990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 / 베이징 아시안게임[6]
1991 고베 ABC
'''수상내역'''
농구대잔치 리바운드상 1회 (1993)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 동메달
1991 고베 ABC 준우승
1. 선수 시절
2. 은퇴 후
3. 여담


1. 선수 시절


부산 동아고 시절부터 하드웨어는 좋으나 같은학년의 마산고 정재근, 군산고 이창수, 광주고 채명석 등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 센터였다. 장신 센터 덕후(?)였던 중앙대 정봉섭 감독의 스카웃으로 중앙대에 입단한 후 혹독한 조련끝에 본인의 하드웨어를 활용할줄 알게 되면서 중앙대의 주전센터로 자리잡았고, 3학년이던 1990년 중앙대를 대학 3관왕[7]으로 이끌며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2m의 신장임에도 기존의 국가대표 센터들과 달리 빼빼 말랐거나(ex> 김유택, 한기범) 부상에 시달리지(ex> 서대성, 김윤호) 않는 탄탄한 체격을 가지고 있어, 국가대표팀에서 중국의 장신센터들을 상대로 맹활약 해줄것이라며 떠들썩 했었다. 많은 기대를 받으며 1990년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과 1990 베이징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라이벌 정재근과 함께 국가대표에 선발되었으나.... 체격은 탄탄했으나 일단 너무 느렸고, 팔이 짧고 점프력은 거의 없다시피하여 중국의 장신 센터들은 물론 가드진의 돌파에 대해서도 림 프로텍션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8] 결국 대표팀의 골밑은 또다시 88kg밖에 안나가는 김유택 혼자 애쓰면서 막아야만 했고 , 이후 더 크고 빠른데다 잘하기까지 하는 서장훈이 등장하면서 표필상은 1991 고베 ABC를 끝으로 다시 국대에 선발되지 못했다.[9]
중앙대 졸업 후 연세대 정재근, 이상범, 중앙대 동기 남경원과 함께 신생팀 서울방송(SBS)의 창단멤버로 합류 1992-93 농구대잔치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SBS를 6위에 올려놓았고, 다음시즌엔 상무 소속으로 팀을 1993-94 농구대잔치 결승까지 진출시키는데 기여한다. 제대 후에도 오성식, 정재근 등과 함께 실업팀 SBS의 주전센터로 뛰며 팀을 강호의 반열에 올려놓았으나, 우승까지는 매번 한뼘차이로 모자라곤 했다.[10]
KBL 출범 원년, 안양 SBS 스타즈는 데이먼 존슨(196cm)을 시작으로 찰스 메이컨(195cm), 데릴 프루(200cm) 등 센터 포지션의 외인을 선발하였고, 실업시절 주전센터였던 표필상은 수비용 백업선수가 되었다. 00-01 시즌 팀이 데니스 에드워즈(192cm)-리온 데릭스(205cm)-표필상의 트리플 포스트 전략을 내세워 돌풍을 일으킬 때[11] 잠시나마 주역으로 복귀하였으나, 이후 출장시간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창원 LG, 서울 삼성, 인천 전자랜드에서 벤치멤버이자 라커룸 리더 역할로서 뛰다 은퇴했다.
KBL 출범 당시 29세였던 선수가 39세까지 무려 '''11시즌'''을 뛰었다는 것만 보아도, 단순히 느리고 몸빵밖에 없는 선수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특히 2000-01 시즌 안양 SBS 스타즈의 트리플 포스트 시스템은 가드 은희석, 슈터 김성철 외에 빅맨 포지션을 볼수있는 선수 세명을 동시에 투입하며 수비력 강화 및 느린 템포의 패턴 플레이가 중심이 되는 전략이었는데, 이때 표필상은 수비시엔 리온 데릭스를 대신해 상대 장신센터들을 마크하는 것은 물론, 공격시에도 "포인트센터" 리온 데릭스[12]에 못지 않은 의외의 패싱 센스를 보여주며 팀의 패턴 플레이의 한 축이 되기도 했다.

2. 은퇴 후


현재 은평구에서 농구교실을 운영하면서 은평구 농구연합회 회장을 맡는 등 동호회 농구계에서 활동 중이다. 은평구에 위치한 불광중학교에서 스포츠클럽 선생님을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3. 여담


선수 시절 국내 선수들 중 몇 안 되는 "훅슛을 던지는 왼손잡이 센터"였다. 사실 지금의 함지훈 같이 주무기로 쓴다고 말하기엔 모자랐고, 파워로 골밑까지 몸싸움해서 들어간 후 왼손으로 "올려놓는 듯한" 훅슛을 자주 구사했다. 당연히 국내선수들 상대로만 통했고, KBL 출범 후엔... 상술했던 00-01 시즌 "트리플 포스트" 시절에는 중거리슛도 자주 던졌는데 성공률이 꽤 높았다.
아들 표경도(F, 193cm)가 명지대에서 선수생활을 하고 있다. 아빠보다 키가 작지만 명지대의 팀 사정상 4-5번을 맡고 있다. 하지만 묵직하고 팔이 짧은 체형의 표필상과 달리 팔이 길고(윙 스팬 2m 1) 날렵한(193cm, 83kg) 체형이다. 그러나 2018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낙방하면서 부자(父子) 프로농구 선수의 꿈은 이루지 못할 듯 싶다.
실업팀 SBS 시절, 팀의 특성상 SBS 방송출연이 잦았다. 당시 "TV 전파왕국"이란 주말 예능프로가 있었는데, 주장이었던 표필상이 나와 농구를 소개하는 코너에서 덩크 슛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자, 이번에는 덩크슛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덩크슛이란 블라블라~~ 한번 보시죠." 하고는 2m의 신장이 무색하게 덩크 슛을 정말 아주 간발의 차이로 성공(이라기엔 레이업 후 림 잡기)시켜 당시 센터라면 샤킬 오닐만 보던 꼬맹이 농구팬들에게 참 멋없던 기억을 심어주었다.
[1] 착화신장. 실제 키는 198cm 정도라고 한다. 당시는 2m 2cm이상이면 면제였는데, 표필상은 상무에서 18개월 간 병역을 이행했다. 이게 1973년생부터 196cm이상 면제로 바뀌었다가 1980년생 이후부터 면제가 없어졌다. 표필상과 동시대에 활동하던 선수 중,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서장훈은 실제 키도 2m가 넘어서 당시 면제되었다. 다만 두 사람이 서로 기준이 다른 시대에 신검을 받기는 했다. 참고로 현재는 2m가 넘으면 보충역이라 사회복무(공익근무)를 해야한다.(다른 질병이나 사유가 없을때)[2] 정재근, 이상범, 남경원과 함께 창단멤버였다.[3] 97 시즌~98-99 시즌 안양 SBS 시절, 창원 LG 시절, 서울 삼성 시절, 인천 전자랜드 시절[4] 99-00 시즌 안양 SBS 시절[5] 00-01 시즌~01-02 시즌 안양 SBS 시절[6] 중앙대 3학년때 첫 선발[7] 춘계/추계연맹전, 전국체전. 1990 대학농구연맹전 항목 참조[8] 후배 정경호는 표필상보다 더 발전한 블록을 보여주었다.[9] 단신(193cm)이었으나 운동능력이 탈아시아급으로 좋고 슛거리도 길어 3,4번까지 소화가 가능했던 정재근은 이후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때까지 꾸준히 국가대표로 뽑힌 반면, 이들과 함께 1990~91년 대표팀의 일원이자 힘만 엄청 세고 느렸던 최병식(193cm, 현대전자 센터)은 전희철, 현주엽 등이 가세한 이후 국대에 뽑히는 일이 없었다.[10] 94-95 농대 4강, 95-96 농대 8강, 96-97 농대 6강[11] 플레이오프 4강까지 올라 주희정-아티머스 맥클래리-무스타파 호프의 수원 삼성에 1승 3패로 탈락했다. 수원 삼성은 해당 시즌 우승을 차지했다.[12] 00-01 시즌 평균 5.8 어시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