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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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이자 現 SK 나이츠 코치. 대학농구의 최고 인기 시대를 이끈 선수 중 한 명이다. 프로 시절에도 초창기에는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아쉽게도 대학 시절의 명성만큼은 아니었다.
2. 선수 생활
2.1. 고교-대학 시절
경복고에서 1학년 때부터 팀의 주전 센터를 맡아 한 경기에 31득점 20리바운드를 기록하는 등 신입생 때부터 초고교급 기량을 선보이며 경복고를 일약 강호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당시 최강팀이던 용산고[2] 에 밀려 여름까지 2차례 준우승에만 머물다가, 마침내 8월 종별선수권 우승을 차지하며 경복고에게 19년만의 우승트로피를 안겨주었다. 이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 198cm니 앞으로 더 크면 얼마나 굉장하겠냐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키는 결국 저 때 키에서 하나도 안 컸다.
2학년때는 새롭게 강호로 떠오른 이상민의 홍대부고와 골리앗 신입생 서장훈이 입학한 휘문고에 밀리면서 경복고는 춘계연맹전 준우승 한번에 그쳤지만, 전희철은 고교 최강의 센터로 인정받으며 동창 우지원과 함께 아시아 청소년대회 대표팀에 선발된다.[3]
3학년때는 서장훈-현주엽 1,2학년 콤비가 이끄는 휘문고의 아성에 밀리면서도 2번의 우승(쌍용기, 전국체전)을 더 따낸다. 특히 쌍용기 결승에서 전희철은 휘문고 떡대들과 치열한 골밑 다툼을 벌이면서 무려 29점을 올리며 우승의 주역이 되었고, 92학번 전체 랭킹 1위[4] 로 꼽히며 엄청난 스카웃 경쟁끝에 고려대로 진학한다.
고려대 신문방송학과 입학 후 초등학교 동창이자 라이벌 용산고의 에이스였던 김병철과 함께 1학년때부터 주전멤버로 출전하지만, 당시 대학농구를 양분하던 연세대[5] 와 중앙대[6] 에 밀리면서 고교시절에 비해 별로 주목받지 못한다. 이때 고려대 농구부는 아직 고교생 티도 못벗은 전희철-김병철이 곧바로 에이스 역할을 해야할 정도로 선배 멤버들이 부실[7] 했고, 특히 라이벌 연세대에게는 MBC배, 춘계, 추계 대학연맹전 및 정기연고전까지 연패를 거듭하다 1학년 마지막에 열린 1992-93 농구대잔치에서야 겨우 한번 이겼을 정도였다.[8] 농구대잔치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했고, 산업은행, 경희대 등에게 패하며 예선 9위(5승 8패)에 그쳐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9]
2학년때 고려대가 또한번의 싹쓸이 스카웃으로 양희승, 박재헌, 박훈근, 박규현 등을 데려오면서, 전희철은 골밑 부담에서 벗어나 좀더 전방위적인 활약을 펼치며 오빠 부대를 이끄는 대학 농구 스타 중 한 명이 된다. 겨우 대학 1,2학년들인 전-희-철 트리오(;;;)의 맹활약으로 고려대는 대학연맹전 1,2차대회를 모두 제패하며 2관왕에 오르면서 수년간 이어진 연세대-중앙대의 양강구도를 3강구도로 재편했고, 전희철 개인은 아시아선수권대회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며 생애 첫 국가대표팀 발탁의 영광을 누린다. 1993-94 농구대잔치에서도 고려대는 전대회 우승팀 삼성전자와 실업강호 현대전자를 연이어 꺾으며 정규리그 12팀 중 4위의 호성적을 거두지만, 이어진 8강 플레이오프에서 김현준, 김진의 노련미에 말리며 리그 5위 삼성전자에게 1승 2패로 역전패 당하고 만다.[10] 같은 대회에서 라이벌 연세대가 대학팀 최초 농구대잔치 우승을 차지하는 바람에[11] 오랜만의 8강진출에도 불구, 전희철과 고려대 모두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물이었다.
전희철이 3학년때, 슈퍼루키 현주엽-신기성이 가세하면서 고려대는 MBC배에서 이상민, 서장훈이 건재한 연세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한다.[12] 이후 전희철은 현주엽과 함께 대표팀에 불려다니느라 자리를 비우는 시간이 많았는데, 이때 고려대 선수단 뎁스가 장난이 아니었던지라[13] 고려대는 이어진 연맹전 1,2차대회를 모두 석권하며 시즌 3관왕을 달성한다. (후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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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5 농구대잔치에서도 고려대는 내로라하는 실업팀들을 연파하며 정규리그 2위[14] 에 오르며 농구대잔치 우승을 거머쥘 강력한 후보로 꼽혔다. 8강에서 중앙대를 가볍게 꺾고 플레이오프 4강에서 만난 상대는 전 대회 8강에서 중앙대에 패했던 왕년의 강호 기아자동차로, 전대회에서 허-동-택 트리오의 노쇠화로 무너졌던 이력이 있었고, 때문에 고려대가 기아를 물리치고 농구대잔치 결승전에 나가리라 예상한 사람이 많았다.
전희철은 기아와의 이 시리즈에서 유독 높은 필드골 성공률을 자랑하며 고군분투했고 2차전에서 통렬한 드라이브인 덩크를 터뜨리는 등 임팩트를 남기긴 했지만,[15] 골밑을 장악하지 못하고 계속 자유투라인 근방의 2점슛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대학시절 내내 전희철의 이런 중거리 2점슛 성공률은 실로 엄청났고 이 시리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현주엽도 골밑을 돌다가 계속 외곽으로 빼주며 김병철-양희승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이 둘이 결론적으로 김유택-한기범에게 밀려나는 모습이었다. 문제는 이 외곽이 다 터지는 날은 기아나 연세대나 노답인 팀이 고려대였으나, 모든 선수가 한날 다 터질 수는 없는 일. 2차전은 26점의 김병철을 비롯해 양희승 전희철이 모두 터지며 기아를 격파했으나, 결국 고려대는 기아에 1승 2패로 패하며 결승진출에 실패했고, 역시 패배의 원흉으로는 전성기를 지난 김유택-한기범 앞에서 정규 시즌의 위력을 보이지 못한 전희철-현주엽이 함께 꼽혔다.
4학년이 된 전희철은 한살씩 더먹은 베스트 5 신기성-김병철-양희승-현주엽과 함께 고려대 농구부를 거의 사기 수준의 강함으로 이끌면서 대학 농구를 제패했고,[16] 이어진 1995-96 농구대잔치에서는 2년전 대회의 연세대에 이어 사상 2번째 정규시즌 전승의 위업을 달성한다. 특히 정규리그 서울방송과의 경기에서, 앞서가던 경기가 서서히 쫓기자 혼자 힘으로 드라이브인 2번, 덩크슛, 3점슛까지 혼자 9점을 몰아넣으면서 승기를 가져오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명장면으로 꼽힌다.
정규리그에서의 모습이 너무나 막강한 나머지 당시 고려대는 농구대잔치 우승 후보 1순위였다. 특히 백코트 김병철(대회 3점슛 1위, 성공률 1위) 양희승 신기성의 외곽포는 전년보다 더욱 위력적이었고 전희철 또한 위에 기술된 바와 같이 커리어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4강에서 또다시 만난 허동택 트리오의 실력과 관록은 여전히 대한민국 최강이었고 여기에 역대급 스포인 김영만까지 가세한 상태였다. 이들의 위력 앞에 전희철을 비롯한 고려대 선수들은 정규 시즌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였고, 결국 기아자동차에게 1승 2패로 허무하게 탈락하고 만다. 특히 매 경기 접전이었던 전년 시리즈보다 더욱 김빠진 것이 3차전은 무기력 그 자체로 후반에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노장 듀오 김유택-한기범을 상대로 전희철-현주엽 콤비는 해설자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화려한 플레이를 연이어 선보였으나, 김유택에게 계속 손쉽게 득점을 내주는 한편 결정적인 순간에 김유택을 상대로 공격자 파울을 유도하다 손쉬운 골밑 점수를 헌납하는 장면을 여러차례 보여주는 등 정작 실속이 떨어졌다.
2.2. 동양제과 시절 (1996-1997)
프로농구 출범이 기정사실이던 1996년, 신생팀 동양제과 농구팀은 고려대를 창단 연고지명팀으로 선택하고 전희철, 김병철, 박준영(F,195cm), 김승민(G,182cm) 등 고려대 92학번 4명과 경희대 가드 김광운(181cm), 한양대 센터 이흥섭(200cm) 등으로 선수단을 꾸린다. 계약금 4억 5천만원을 받고 동양제과에 입단한 전희철은, 프로화를 앞두고 열린 마지막 실업농구대회인 코리안 리그에서 화끈한 인게임 덩크를 포함해 내외곽을 넘나드는 전방위 공격력을 과시하며 지난 농구대잔치 준우승팀 상무[17] 를 비롯한 기존실업팀들을 연파한 끝에 신생팀 동양을 우승시키며 대회 MVP에 오른다.
이후 프로출범전 마지막 농구대잔치에선 발목부상으로 빠진 김병철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며 실업부 6위에 그치며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지만, 전희철은 대회평균 29.3점을 올리며 대회 득점 2위[18] 및 신인상(실업부)을 차지한다.
2.3. 대구 동양 오리온스 (1997-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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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출범한 KBL 원년시즌, 대구 동양 오리온스로 이름을 바꾼 팀의 주전 파워 포워드로 나선 전희철은 교체 없이 풀타임으로 경기를 소화하다시피 하며[19] 시즌 평균 23.1점[20] -6.9 리바운드를 기록, 외인 가드 토니 매디슨(평균 29.1점), 김병철과 함께 팀을 리그 4위에 올려놓는다 .비록 팀은 플레이오프 4강에서 만난 부산 기아에 전력차를 실감하며 물러났지만[21] 전희철은 프로 원년시즌 베스트 5에 오르며 외인들이 점령한 KBL에서 토종의 희망 같은 최고의 스타 반열로 올라선다.
두번째 시즌(1997-98), 새 외국인 선수 키넌 조던, 키이스 그레이를 파트너로 맞은 전희철은 평균 18.2점-5.0 리바운드로 기록이 다소 줄었지만 여전히 팀내 2옵션 역할을 유지하며, 대구 동양을 리그 5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킨다. 6강 플옵에서 전희철은 평균 19.2점을 올리는 활약으로 원주나래를 격파, 2년 연속 4강 진출에 성공하지만, 이후 4강전에서 전희철이 무릎부상으로 골골대면서 리그 1위팀 대전 현대를 상대로 아무것도 하지못한 채 3패로 광탈하고 만다. 시즌 후 전희철은 공익근무로 병역을 치렀다.[22]
소집해제 후 맞이한 1999-00시즌, 세계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도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의 패배를 쌓았던 오리온스에 복귀한 전희철은, 개막 2번째 게임이었던 대전 현대와의 원정경기에서, 대전 현대의 센터 로렌조 홀(203cm)의 팔꿈치에 맞아 이마가 찢어진 와중에도 그대로 붕대를 감고 뛰며 덩크슛을 터뜨리는 인상적인 활약으로 KBL 컴백을 알린다. 하지만 이 시즌 전희철은 192cm의 떡대 루이스 로프튼에게 골밑을 맡기고 외곽에 나와 3점을 쏴대는 일이 잦아지면서[23] 토종 파워 포워드로서의 면모가 사라졌고, 팀은 시즌내내 포인트 가드 부재로 골머리를 앓다 결국 1게임 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한다.
00-01 시즌. 김병철, 김광운, 그리고 중고신인 박재일까지 상무에서 제대하면서 전희철은 비로소 오리온스를 플레이오프로 이끌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외려 팀은 이전 시즌보다 더욱 총체적 난국에 빠져들고 말았으며, 전희철은 평균 15점 5리바운드라는 준수한 활약을 보이긴 했지만 외국인 선수들로만 채워진 다른 팀들의 골밑을 공격하는데 버거워하는 모습도 보였고 또 한번 부상을 당하며 시즌 중에 전력에서 이탈하기도 했다. 결국 팀을 나락에서 구해내지는 못 했다.
01-02시즌. 김승현과 마르커스 힉스-라이언 페리맨이 합류한 오리온스는 그야말로 승승장구하며 지난날의 오욕을 털어냈고, 전희철은 스몰 포워드와 파워 포워드를 오가며 14점 4리바운드를 기록, 단짝 김병철과 함께 오리온스 팀의 사상 첫 번째 우승을 이뤄낸 공신 중 한 명이 된다. 상대팀 스몰 포워드와 매치업 시 신장차를 이용해 1:1 포스트업으로 올리는 골밑 득점은 대구 동양의 대표적인 세트오펜스 옵션이었고, "Not 스몰 포워드" 전희철을 막기 위해 챔프전 상대팀 서울 SK는 한양대 센터 출신인 김종학(197cm)을 3번 자리에 내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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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전까지 가는 접전끝에 전희철은 프로 커리어 첫 우승을 달성하지만, 김승현과 힉스의 존재로 인해 좁아지는 자신의 팀 내 역할을 납득하지 못하고[24]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 결국 2년차 포워드 이현준(193cm)과 현금 6억원을 받는 조건에 전주 KCC 이지스로 트레이드 된다.
2.4. 전주 KCC 이지스 (2002-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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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03 시즌. 앞선 시즌에서 이상민을 필두로 추승균, 양희승, 정재근, 제런 콥, 재키 존스 등 장신선수들의 1:1 공격과 속공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토탈 바스켓볼의 위용을 보인 전주 KCC 이지스로선, 골밑 공격과 외곽 공격이 전부 가능한 전희철의 합류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게 될 것만 같아 보였다. 하지만 전희철은 KCC이지스의 복잡한 패턴 플레이에 전혀 적응 못 하고 그냥 3점 덜 들어가는 슈터로 전락,[25] 평균 10점 2.9리바운드의 식스맨급 기록만 남겼고, 팀은 9연패를 당하는 등 나락으로 떨어지며 최종순위 9위로 추락한다. 시즌 후반부터 전희철은 노장 정재근에게도 밀려 아예 벤치멤버가 되는 굴욕을 겪고, 이는 03-04 시즌까지 계속된다.
새 시즌에도 전희철이 3번으로서 경쟁력을 보여주지 못한 탓에 신선우 감독은 이상민-추승균-찰스 민렌드-무스타파 호프의 주전 4명 고정에, 남은 한자리를 로테이션으로 기용하는 정책을 썼고, 이에 전희철은 다시 트레이드를 요청, 역시 새팀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던 조성원과 트레이드로 서울 SK 나이츠의 일원이 된다.
2.5. 서울 SK 나이츠 (2003-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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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SK에서 전희철은 주전 스몰 포워드로 출장해 평균 14.7점 4.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살아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이시즌 전희철은 하이포스트를 파고 들다 두 빅맨 아비 스토리-스테판 브래포드에게 뿌려주는 패스로 커리어 하이인 평균 3.5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색다른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나, 팀은 6위와 압도적인 승차로 7위에 머물고 만다.
04-05 시즌부터 몰려든 자유계약출신 외국인선수들의 강력함에 전희철을 비롯한 토종 빅맨들은 대거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전희철은 출장시간이 매년 급격히 줄어들며 완전히 벤치멤버, 나중엔 '''2쿼터의 사나이'''로 불리는 굴욕을 맛본다. 나이가 먹으면서 이런 저런 잔부상까지 당하며, 한시즌 한시즌 지날수록 예전의 위력은 사라져 갔다.
07-08 시즌을 평균 3.7점 2.3 리바운드의 기록으로 끝내고 FA자격을 얻은 상태에서 현역 생활을 이어가려 했지만, 다른 팀들 중 전희철을 원하는 팀은 없었다. 원 소속팀인 SK 나이츠에선 1억을 제시했지만 전희철은 1억 2천을 요구하며 제의를 거부, 현역에서 은퇴했다.
은퇴 이후 서울 SK 나이츠에서 영구결번이 되었지만, 문경은과 더불어 논란이 되고 있는 영구결번 선정이다. 많은 농구팬들 사이에서 전희철은 서울 SK가 아니라 대구 동양의 레전드로 일컬어지기 때문.[26] 하지만 이후 12년이 넘게 SK에서 선수, 코치로 일했고 끝내 문경은과 함께 2018년 우승을 해내면서 영구결번으로서의 가치를 증명했다.
3. 선수로서의 특징
착화신장 198cm의 국내에선 사이즈가 꿀리지 않는 빅맨 키에 단단한 체격임에도 스피드와 탄력이 한국 선수들 중에는 동급 최고 수준이었다. 이런 운등능력을 이용해 골밑을 헤집고 다닐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한 시즌에 평균 40퍼센트 확률로 3점슛을 넣은 일도 있을 정도[27] 로 슛 능력도 좋았다. 특히 중거리에서 넣는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는 전희철의 특기였다.[28] 운동능력을 살린 덩크도 멋지게 잘 넣었으며, 리바운드를 잡자마자 곧바로 꽂아넣는 팔로우업 덩크도 잘 했다.
한편으로는 골밑 몸싸움과 리바운드 같은 궂은일을 꺼린다는 비판도 대학 때부터 받았고, 팀플레이에 능숙하지 못하다는 비판도 좀 있었다. 지나치게 운동능력에 의존하며 공격 기술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키가 더 큰 서장훈이 타고난 유연성을 보여주는 데 반해 전희철의 플레이는 뻣뻣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BL에서 골밑에 있는 외국인 선수가 한 명 뿐일 때는 훌륭한 활약을 보였다. 그러나 공익근무를 마친 후에는 잔부상 속에 이전에 비해 운동능력이 많이 줄어들었고, 그렇게 줄어든 운동능력과 외국인 선수들의 골밑 장악 속에 장점은 줄어들고 약점은 더욱 부각되어 결국 위력을 잃어갔다.
원년 시즌의 활약과 이에 대비되는 이후 시즌의 모습들 때문에 KBL에서 외국인 선수 제도로 인한 희생양 하면 항상 꼽히는 선수. 한편으로는 공익근무 이후 급격히 늘어난 부상들 때문에 공익근무 당시 몸 관리가 부족했던 거 아닌가 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29] , 계속된 부상만 아니었다면 센터나 파워 포워드가 아니라 스몰 포워드로서 계속해서 좋은 활약을 했을 수 있다고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사실 김영만이나 문경은에 비하면 포변 후 포텐은 가장 높았지만 고려대의 애매한 토털 바스켓볼(…)+그놈의 서장훈(…)때문에 현주엽과 마찬가지로 내츄럴 포지션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계속 상대 2m대 센터 상대용 언더사이즈 빅맨으로 남은 케이스라 가장 아쉬운 쪽.
4. 국제 대회에서의 전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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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권에서 항상 한국 팀의 벽이었던 중국전을 보면 파워 포워드로 나섰을 때는 딱히 팀플레이로 만들어내는 효과도 없고 중국의 상대 선수와 비교해 우위에 있는 게 전혀 없는 상태에서 수비 구멍만 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전희철하면 모든 국대 농구팬들이 인정하는 명경기가 2개 있다. 대표적인 경기가 1997년 ABC. 아시아선수권에서는 대표팀의 센터로 출전[30] , 준결승에서 중국[31] 을 상대로 이전에도 이후에도 다시 없던 육탄전을 마다하지 않는 허슬 만땅 골밑 수비로 중국의 거대한 선수들과 맞서고, 센터 포지션임에도 정확한 외곽슛으로 중국팀의 센터를 끌어내 다른 한국 선수들이 골밑을 돌파할 공간을 만들고, 중국이 지역방어로 나오자 냅다 3점슛을 꽂아 비수를 꽂기까지 하는 등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중국전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일본[32] 을 상대한 결승전에서도 훌륭한 활약을 보였으며[33] , 대한민국 대표팀은 우승. 대회 MVP는 당연히 전희철의 몫이었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선 스몰 포워드 자리로 출장, 중국 선수에게 밀리지 않는 높이로 외곽슛을 연달아 꽂으며 팀 승리의 공신 중 한 명이 되었으며, 이렇게 전희철은 아시아 정상을 두 번이나 차지한 몇 안 되는 한국 선수 중 한명이 되었다.
5. 지도자 경력
현역 은퇴 후 SK 나이츠에서 2군 감독을 맡았다가, 2009년 1군 코치직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구단 운영팀장, NBA 산하 D 리그 연수, 구단 전력분석원 등 다양한 경험을 쌓은 후 2011년 4월부터 현재의 보직인 1군 코치직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다.
문경은 감독의 뒤를 받치는 수석코치직을 맡으면서 포워드 라인의 기량향상에 공헌을 했다.
김민수와 최부경 그리고 최준용을 담당했다.
12년 동안 함께 팀에서 고생하며 끝내는 문경은과 함께 17-18 시즌 팀을 18년만에 플레이오프 정상에 올려놓았다. 이후에도 계속 코치직을 수행중이다.
한 때,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 후보군에 동양 오리온스 시절 스승이었던 김진 후임 및 현주엽의 성적부진으로 인한 사퇴 이후에도 후임으로 거론되었으나 인연이 닿지 못했다.
6. 기타
고려대 농구부에 있던 시절 박한 감독의 무작전 농구 때문에 술자리에서 제대로 작전 짜인 농구 하고 싶다고 울부짖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하지만 전희철은 작전 농구의 극한인 신선우 감독 밑에서 전혀 적응 못 하는 모습만 보이고 말았다.
현역 시절에 유난히 부상을 많이 당해서 유리몸의 이미지가 있는데, 경기 중 불의의 부상도 있기는 하지만 상대 용병의 거친 플레이나 운이 억수로 나쁘게 부상을 당한 경우도 많아서 전희철 입장에서는 억울한 면이 많기도 하다. 그 예로 과거 전주 KCC 이지스의 전신인 현대의 용병이었던 로렌조 홀에게 대놓고 '''얼굴을 파리채 블록으로 얻어맞는다든가''' 상대 선수와 같이 넘어지는데 '''안면에 니킥으로 얻어맞는다든가''' 오리온스 시절 리바운드를 잡으려고 라이언 페리맨 뒤에서 점프해서 착지하다가 '''치아로 페리맨의 머리에 정통으로 찍어버려서''' 치아 부상을 당한다든가 여러 가지로 불운한 경우도 많았다. 이 때 전희철도 그렇지만 페리맨의 머리 윗부분이 심하게 찢어진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기도 했다.[34]
은퇴식과 함께 등번호 13번이 SK 나이츠에서 '''영구결번'''이 되었다.[35] SK 나이츠에서 별다른 활약을 못 해준 전희철이 영구결번이 되었다는 사실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 한편, 팀에서의 활약을 떠나서 한국 농구의 전설인 선수에게 나이츠에서 좋은 예우를 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전희철은 문경은과 함께 12년 동안 선수와 코치로 SK에서 고생하면서 끝내 우승까지 해내면서 이러한 팀의 예우에 보답했다.
김승현이 대구 동양 오리온스에 입단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김승현의 플레이를 보고 어머니한테 끝내주는 놈(…)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36]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인데, 대구 동양 시절이었던 2001-2002 시즌 챔피언결정전 7차전 종료 당시 우승에 너무 기쁜 나머지 농구공을 심판에게 주지 않고 관중석에 던지는(…) 해프닝이 한번 있었다.
청주/서울 SK 나이츠의 역사상 첫 영구결번 선수다.
7. 관련 문서
[1] 이는 실제 신장으로 프로필 신장은 착화신장으로 198cm. 이로 인해 병역을 면제받지 못했다.[2] 김승기(3학년)-김병철(1학년)-양경민(2학년)-김재훈(3학년)을 주축으로 1989년 4관왕(춘계, 대통령기, 쌍용기, 전국체전)에 올랐었다.[3] 하지만 김승기(주장), 문경은, 이상민, 서장훈 등이 포함되어 호화멤버로 불렸던 당시 대표팀은 협회의 어수선한 운영 속에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에 2연패를 당하며 예선에서 광탈하며 역대 최악의 성적을 거둔다;;[4] 2위 겸 가드 1위가 용산고 김병철 3위 겸 포워드 1위가 휘문고 박준영(195cm). 고려대가 이들 1~3위 모두를 싹쓸이하면서 스카웃 시장을 뒤엎어놓는다. 전희철의 중고교 동창이자, 쌍용기 MVP였던 우지원은 휘문고 석주일과 포워드 랭킹 2~3위권으로 불렸다.[5] 이상민(2학년)-김훈(1학년)-문경은(3학년)-우지원(1학년)-김재훈(3학년) 등 대학올스타급 라인업을 구축하고 있었다. 국가대표에도 선발되었던 오성식은 스카웃 파동으로 인해 춘계연맹전 이후 연세대 자체 출장정지를 먹고 4학년 한해를 통으로 쉬었다.[6] 김승기-홍사붕-김영만-양경민-정경호-조동기-안병익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특히 정경호(202cm)-조동기(197cm)-안병익(196cm)으로 구성된 센터진은 당시 대학농구팀 중 최고의 높이를 자랑했다. (이때는 아직 서장훈 입학하기 전이다.)[7] 이들 외에 주전멤버로 포인트 가드 윤호영(180cm, 4학년), 포워드 진현구(190cm, 3학년), 전문수비수 이지승(188cm, 2학년)이 나섰고, 이밖에 빅맨 박권우(4학년), 전수훈(2학년) 등이 있었다. 전년도까지 팀의 득점을 책임지던 정인교는 정작 4학년때 내내 부상으로 신음하느라 양철 콤비와 많이 뛰지 못했다.[8] 더군다나 이때 승리가 고려대의 연세대 전 공식경기 4년만의 첫 승이었다.[9] 같은 대회에서 라이벌 연세대는 4강, 중앙대는 6강에까지 올랐다. 우승은 허-동-택 트리오의 기아자동차, 준우승은 김현준-김진 콤비의 삼성전자.[10] 이때 만약 4강에 진출했다면 연세대와 재대결이 가능했다. 당시 4강은 연세대-삼성전자, 상무-중앙대[11] 또다른 라이벌 중앙대도 전대회 우승팀 기아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4강에 올랐다.[12] 사실 이 우승은 신입생 현주엽의 센세이셔널한 활약과 김병철의 미친 연속 3점포 덕분이긴 했다. 특히 포스트에서는 현주엽의 존재감이 너무 엄청나, 이미 국가대표 센터였던 전희철이 안보일 정도였다.[13] 기존 베스트 5 중 신기성-김병철-양희승이 그대로였고, 박재헌, 박훈근, 이지승 등 전희철-현주엽의 대타로 나오는 선수들도 대학 올스타 수준이었다.[14] 기아자동차, 연세대에게만 패하며 11승 2패로, 13전 전승의 연세대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3위는 10승 3패의 기아자동차.[15] 골밑에서 제자리높이뛰기 덩크만 하던 토종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명장면으로, 한동안 SBS 농구 중계방송 타이틀 화면을 장식하기도 했다.[16] 1995년 한해 열린 대학농구 5개 대회를 모두 석권하는 전대미문의 5관왕을 달성했다. 심지어 2개 대회는 전희철-현주엽이 국대 차출로 없이 치렀다.[17] 이상민-김승기-조성원-문경은-김재훈-조동기 등이 주축이었다.[18] 1위는 나래이동통신 정인교[19] 평균 출장시간 39분 40초;;;[20] 리그 득점순위 9위. 득점 10위권 안에 든 유일한 한국인 선수였다.[21] 대학시절부터 이어진 전희철의 기아 징크스;;;[22] 공익근무로 간 덕분에 상무에 입대한 김병철, 김광운 보다 한시즌 빨리 복귀할 수 있었다. 다만 소재지이탈이 안되는 특성상, 복무기간동안 국가대표 차출이 안되어 1998 방콕 아시안게임과 1999 아시아선수권대회 대표팀에는 참가할 수 없었다.[23] 커리어 중 가장 많은 3점슛을 시도(경기당 6.58개 시도. 성공률 37.5%)한 시즌이다.[24] 팀의 최고 슈퍼스타는 김승현에게 넘어간 데다, 원래 강했던 프라이드 탓에 3옵션으로 남는걸 만족할 전희철이 아니었다.[25] 꽤 좋았던 3점슛도 이 시즌엔 32%에도 못미친다.[26] 실제로 전희철은 대구 동양을 떠난 이후 단 한 차례도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은 적이 없다. 현역 마지막 시즌인 2007-08 시즌에 SK는 오랜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첫 판에 2연패를 당하며 시즌을 끝냈고 전희철은 두 경기 모두 1초도 뛰지 못했다.[27] 3점슛 성공률은 30%는 평균, 40%는 리그 최상, 50%는 전설이다. 파워 포워드에 센터까지 볼 수 있는 선수가 이 정도의 성공률을 보이는 건 엄청난 것이다. [28] 이걸로 90년대 농대 리즈시절에는 주말 예능 방송에 출연해 도전 미션을 하기도 했다.[29] 사실, 전희철은 공식신장 198cm에 신발 벗고 196cm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당시 병역법상 면제기준인 196cm에 아슬아슬하게 걸쳤으며 자신은 면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신검 때 소수점차인 195.6cm가 나오면서 상무 지원가능이 되었다. 당시 상무가 병역법 때문에 196cm이상 선수 입대가 안돼서 살짝 조정했으며 이 때문에 당시 군의관과 싸웠다는 카더라도 있었을 정도.(비공식적으로 상무 측에서 농구쪽 선수 충원을 위해 196cm 이상 선수의 입대를 원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전희철은 현역이 아니라 우지원과 함께 이른바 마지막 방위라 불리는 18개월 방위 판정이 나왔고, 이후 방위 폐지와 공익요원 신설로 인해 당시 병역법상 상무 입대보다 8개월 빠른 18개월 복무면 끝나는 공익요원을 선택해 병역을 해결한다. 그런데 문제는 공익근무 이전에는 88kg의 호리호리하다 못해 마른 체형이었는데, 공익근무 시기에 체중이 무려 10kg(!)나 늘어 98kg가 되면서 신체 밸런스가 망가져서 무릎을 비롯한 하체쪽에 부상을 달고 다니게 된 것. 프로선수로서 1년 빠른 팀 복귀가 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입장에선 당연한 선택이지만, 공익복무로 인한 몸관리 실패에 대해선 스스로의 책임이 있다.[30] 당시 주전센터였던 서장훈은 중이염이 심하게 걸려 경기를 뛸 수 없는 수준이었고, 현주엽마저 출국 직전 연습게임에서 코뼈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대회 내내 벤치에만 있었다. 엔트리를 교체하기엔 너무 늦었다. 이로 인해 대표팀 골밑은 193cm의 정재근과 전희철 뿐이었고, 3번치고는 나름 장신이던 양희승(195cm), 우지원(193cm) 등이 헬프하는 수준이었다.[31] 왕즈즈(211cm)-공샤오빈(205cm)가 포스트를 지키고 후웨이동(198cm)이 3점을 팡팡 날리던 그 팀이다. 1년 전 애틀랜타 올림픽 8강팀;;;[32] 217cm의 노장센터 야마자키와 황흑혼혈선수 마이클 다카하시(198cm)가 있었다.[33] 결승전에서 야마자키를 맞아, 전희철은 엄청난 할리우드 액션(;;)으로 2연속 공격자 파울을 유도 야마자키를 위축시킨다.[34] 2002년 1월 8일 코리아텐더와의 홈경기에서 일어난 일이다.[35] 다른 영구결번은 문경은 10번.[36] 여담이지만 전희철의 어머니의 생각이 엄청난데, '쟤가 다른 선수 이야기 하면서 저렇게 신이 난 적 없는데...' 라고 생각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