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94 농구대잔치
1. 개요
1993년 12월 23일부터[1] 1994년 3월 6일까지 펼쳐진 당시 대한민국 농구대회 중 최정상 레벨의 대회. 대학팀들의 선전과 문경은, 이상민, 우지원, 서장훈, 전희철 등의 스타성있는 대학 선수들의 화려한 플레이, 거기에 기름을 부은 드라마 마지막 승부의 흥행 등으로 남자농구의 리즈시절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대회. 소위 '마지막 승부 세대'라고 불리는 이 시대의 실업, 대학 농구스타들의 인기는 이 시즌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프로농구의 설립에 큰 자양분이 되었고, 프로농구 초창기 흥행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남자부 12개팀 (실업 8팀, 대학 4팀)이 참가하였다. 이 항목에서는 남자부 대회에 대해서만 소개한다.
2. 참가팀
- 실업팀 (8팀)
3. 운영방식
- 1차대회: 12개팀이 각각 4팀씩 대학리그, 실업리그, 금융-군리그의 3개 리그로 나뉘어 진행하며, 각각 우승팀을 가렸다.
- 2차대회: 12팀이 1차대회에서의 전적을 가지고 풀리그를 통해 8위까지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부여했다.
- 플레이오프: 2차대회 상위 8팀이 8강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했다. (8강, 4강전은 3전 2선승, 결승전은 5전 3선승제)
4. 대회결과
4.1. 정규리그
1993년 12월 23일 개막하여 1994년 2월 14일까지 총 12팀 (실업 8팀, 대학 4개팀)이 풀리그전을 펼쳤다.
1) 그룹별 리그
그룹별 리그는 프리시즌 개념의 대회로 큰 의미가 없으며, 단지 각 리그별 우승팀이라는 타이틀이 붙기는 했다.
- 대회결과
- 실업리그 우승: 기아자동차
- 군-금융리그 우승: 상무
- 대학리그 우승: 연세대
참가 12팀이 풀리그를 펼쳐 상위 8개 팀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였다. (프리시즌 개념인 그룹별 리그 전적은 상관이 없다. 사실상 여기서부터 본대회.)
- 정규리그 개인부분 시상
- MVP: 허재 (기아)
- 개인기록 순위
- 당시 중계방송되는 경기는 정규방송 시간인 오후 5시 반 이전의 정파시간에 경기를 가졌었는데, 경기당 한시간 반 정도를 배분하곤 했었다. 하루 세 경기면 1시부터 5시 반까지, 두 경기면 2시 반부터 5시 반까지 경기가 잡혀있었는데, 당연히 한시간 반은 한 경기 끝나기 턱도 없는 시간이라서, 마지막 경기는 '정규방송 관계로 중계를 중단합니다' 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쓰곤 했었다. 그게 거의 처음 깨졌던게 이 대회에서 연세대와 고려대의 경기였는데, 승패는 좀 일찍 갈렸지만, 서장훈의 호쾌한 덩크와 문경은의 백덩크, 빠른 공수전환과 속공 등의 화려한 플레이에 시청률이 장난 아니게 나오자 방송사에서는 이례적으로 이 경기 중계를 계속하기 위해서 정규방송을 생략했을 정도.... 이전에 이런 일이 거의 없었다는 데서 이 당시 농구, 특히 주요 대학 농구팀의 인기를 알 수 있다.
- 연세대와 기아자동차의 경기도 연장까지 가서 연세대의 버저비터로 이긴 명경기... 연세대의 승리에 운도 좀 따랐던지라[4] , 결승 토너먼트에서는 기아가 이기리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많았지만, 정작 기아는 8강에서 중앙대에 지는 바람에 복수는 이뤄지지 못했다.
- 전 시즌 첫 창단하여 정재근 등의 활약으로 제법 괜찮은 성적을 거두었던 SBS는 정재근, 표필상 등의 입대와 스카우트 파동 이후 실업으로 가지 못하고 상무로 가게 된 오성식의 일들로 해서 금융팀, 대학팀에게도 동네 북 신세가 되며 전패 꼴등이라는 수모를 겪게 된다. 반면 상무의 경우는 말 그대로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들어온 격이 되었고, 이로 인해 대회 최종 준우승의 호성적으로 이 시즌을 마치게 된다.
4.2. 8강 플레이오프
1994년 2월 16일부터 1994년 3월 6일까지 진행되었다.
- 연세대와 기업은행의 8강전은 예상대로 싱겁게 연세대의 2연승으로 끝났는데, 1차전에서 14개의 3점슛을 성공시키며 50점이 넘는 득점을 기록한 문경은의 활약이 인상적이었다.
- 고려대와 삼성의 경기는 고려대의 우세가 점쳐졌고, 실제로 고려대는 1차전을 어렵지 않게 이겼지만, 2차전에서 삼성의 노련미에 눌려 패한 후, 3차전에서 다 지던 경기를 패기로 후반 막판 역전해놓고도 다시 따라잡혀 지고 말았다.
- 상무와 현대전자의 경기는 1차전 현대전자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2,3차전은 역대급 호화멤버였던 상무의 화력에 당해내지 못하고 패배. 다만 상대적으로 인기 없었던 두 팀이 붙은데다, 다른 경기들이 워낙 역대급 결과들이 나오는 바람에 관심에서는 조금 먼 매치업이었다.
- 기아자동차와 중앙대의 경기는 여러모로 충격을 선사했는데, 1차전 중앙대가 승리야 '그럴수도 있지' 정도의 분위기였고, 실제로 2차전은 기아의 승리, 3차전 전반만도 기아의 리드로 마무리로 이때까지만도 모두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듯 했는데.... 홍사붕이 여기서 엄청난 각성을 해 버린다. 갑자기 후반 초반 3점슛을 미친듯 꽂아넣으며 후반 초반 경기를 뒤집어 놓으며 30 득점으로 이 날의 수훈선수가 된다. 이 대회 최대의 이변... 그런데 이 이변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당시 중앙대 감독이던 강정수(당시 최연소 농구 감독)는 1991-92 농구대잔치를 끝으로 기아자동차에서 은퇴한 선수 출신이었는데, 기아자동차 선수들 대부분이 중앙대 출신이었다. 그래서 강정수 감독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지휘하는 중앙대 선수들 뿐 아니라 상대팀인 기아자동차의 선수들의 성향까지 다 알고 있었으니 자신이 뜻하는 대로 작전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 거기에 체력적으로도 젊은 선수들로 구성된 중앙대가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 연세대와 상무의 결승전은 각각 서장훈과 정재근, 이상민과 오성식의 맞대결로 불꽃튀겼다. 신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연세대 OB들이 주축인 상무의 노련미를 높게치는 전문가들도 있었지만, 결과는 다소 싱겁게 3승 1패로 연세대의 압승으로 끝났다. 연세대는 2차전까지 모두 승리하고 3차전도 경기 시작과 동시에 크게 앞서나가며 농구대잔치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승 우승 일보 직전까지 갔지만, 3차전 후반 10분여를 남겨두고 심판들의 석연치않은 판정으로 이상민이 테크니컬 파울을 받으며 퇴장당한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고 역전패를 당해 전승 우승은 놓쳐버렸지만, 4차전에서 크게 어렵지 않게 승리를 더구며 대학팀 최초로 대회 우승의 위업을 달성했다. 결승전 하이라이트(영상원본: 점프볼 "Classic Basketball")
4.3. 대회 결산
- 최종 순위
- 우승: 연세대[5] / 준우승: 상무 / 3위: 삼성전자 / 4위: 중앙대
- 개인부문 시상
[1] 당시 추계 대학연맹전을 이 대회 참가자격을 가리기 위한 대학부 예선격으로 치르게 되어, 여자부 대회보다 한달여정도 늦게 시작하였다.[2] 원칙적으로 대학리그 성적을 종합하여 6팀정도가 참가하는게 이전 대회까지의 룰이었으나, 국가대표 차출, 대회의 부진 등으로 연세대가 참가하지 못하게 될 상황에서, 추계연맹전의 성적만으로 참가하는 4개팀을 결정하게 되었다. 다만 이 대회에서도 연세대는 중앙대에 계속 패하는 등 4강리그에 턱걸이하다시피하며 성적이 좋지 않았던건 안자랑....[3] 1993 대학농구연맹전 항목 참조[4] 김훈의 버저비터는 사실 오심이었다[5] 대학팀 최초 우승.[6] 이 당시 문경은이 MVP를 받지 못한데 대해서 약간의 논란거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