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근(농구)
1. 소개
대한민국의 전 농구 선수이자 전 지도자. 현역 시절에는 최고의 포워드로 명성을 날렸다. 별명은 저승사자.
2. 고교-대학 시절
중학교 때는 배구와 높이뛰기 선수였으나, 마산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비로소 농구를 시작했다. 상당히 늦게 출발했지만 성장 속도가 빨라 각 대학의 주목을 받았고 결국 연세대학교에 입학했다. 막 감독직을 맡았던 최희암 당시 연세대학교 감독이 엄청 공을 들여 스카우트한 선수라고 한다. 연세대학교에서 대학 최고의 센터 겸 파워 포워드로 활약하며 동기 이상범, 후배 오성식, 문경은, 김재훈, 이상민 등과 함께 연세대학교 전성기의 막을 열었다. 기존까지는 대학부에서도 중앙대에 밀려 다크호스 정도로 여겨지던 연세대가 정재근의 입학 이후 월등히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며, 4학년이던 1991-92 농구대잔치에서는 연세대 농구부 사상 최고 성적인 4위까지 올랐다. 무엇보다 정재근의 연세대 시절이 유명했던 이유는, 정재근 재학시절 정기 연고전 4년 연속 승리를 비롯하여 공식대회에서 고려대에는 단 한 차례도 패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4] 졸업 당시 현대전자행이 거의 확정적이었으나 새로 창단한 서울방송 농구단의 지원 차원에서 서울방송의 창단 멤버로 실업 무대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3. 실업-프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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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 무대에서도 뛰어난 포워드로 인정받았다. 연세대, 중앙대 출신 졸업생들로 구성된 신생팀 서울방송의 확실한 에이스로서 데뷔 첫해부터 팀을 단숨에 돌풍의 중심으로 이끌었고, 1992 코리안리그 실업대회 2차리그에서는 신생팀임에도 준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어 열린 1992-93 농구대잔치에선 서울방송을 최종순위 6위로 이끌었고, 정재근 본인은 농구대잔치 실업부 신인상을 차지했다. 이듬해 서울방송 돌풍의 주역이었던 표필상, 이상범, 남경원을 비롯하여 이창수, 오성식 등과 함께 상무에 입대, 사상최강의 상무팀을 구성하게 된다. 정재근과 오성식이 맹활약한 상무는 1993-94 농구대잔치 결승까지 진출하는 돌풍을 일으키지만, 당시 엄청난 인기와 실력을 자랑하며 '''태풍'''을 일으킨 모교 연세대학교에게 1승 3패로 지면서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제대 후 서울방송으로 돌아와 정상급 포워드로 군림했다. 하지만 오성식-정재근-표필상이 이끄는 서울방송은 매번 우승 문턱에서 삼성전자, 기아자동차, 고려대에 깨지면서 좌절했고, 정재근 복귀 후 서울방송의 최고 성적은 1994-95 농구대잔치에서의 4위가 한계였다.[5]
농구대잔치 당시 정재근은 전희철, 현주엽, 문경은 등과 함께 높은 체공력을 자랑하는 덩커 중 한명으로 유명했는데, '철봉덩크', '작대기덩크'로 불리는 어설픈 덩크만 해도 오빠부대들이 자지러지던 시절, 차원이 다른 탄력을 바탕으로 높게 나는 듯한 덩크를 수차례 보여주었고, 1993-94 농구대잔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연세대 서장훈을 앞에두고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작렬하기도 했다. 거기에 1994-95 농구대잔치 올스타전에선 당시엔 정말 보기힘들었던 원맨 앨리웁을 성공시키기도.
프로 출범 후에도 활약은 이어졌는데, 프로 원년인 1997 시즌에 주전 파워 포워드로 뛰며 평균 21.1점을 넣으면서 그 해 베스트 5에 선정되었다. 이후에는 외국인 선수들의 활용이 본격적으로 늘면서 약간 활약이 줄었지만, 1997-98 시즌과 1998-99 시즌 모두 각각 평균 15점 이상을 넣으며 팀 토종 에이스의 위치는 굳건했다. 하지만, 1999-2000 시즌에 부상과 슬럼프에 빠지며 평균 두 자리 수 득점에 실패했고, 그의 빈 자리는 김성철과 윤영필이 이미 탄탄하게 메워놓은 상태였다. 결국 재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팀의 사정과 재기를 위해 다른 팀에서 기회를 얻고 싶던 정재근의 사정이 맞물려 김재훈과 1:1 트레이드 형식으로 대전 현대 걸리버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사실 이 시점부터 서울 SK 나이츠를 제외한[6] 나머지 9팀이 모두 외인 2명을 포스트맨으로 뽑는 것으로 정책을 바꾸기 시작했고[7] , 이는 KBL에서 국내 4번 선수들의 경쟁력이 더 이상 없음을 나타냈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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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이 당시 대전 현대는 신선우 감독의 지휘 아래 포워드들이 주축이 되어 모두 달리고 1:1을 구사하는 이른바 토털 바스켓볼을 구사하던 시점이었고, 괜찮은 포워드인 정재근의 합류로 포워드 층은 더 두터워졌다. 스몰 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한 정재근은 팀의 믿음 아래 2000-01 시즌 두 자리 수 득점을 올리며 부활했고, 2001-02 시즌 전주 KCC[9] 에서는 식스맨으로 좋은 활약을 보이며 식스맨상을 수상했다. 2002-03 시즌에는 새로 합류한 전희철이 전주 KCC의 시스템 농구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면서 주전급 플레잉 타임을 얻기도 했고, 전희철이 방출되고 조성원이 들어온 2003-04 시즌에는 다시 식스맨으로 돌아가 이-조-추 트리오 및 최강 외인 찰스 민렌드를 보좌하며 전주 KCC의 전신인 대전 현대 시절을 포함해서 통산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한다. 2004-05 시즌 준우승을 끝으로 현역생활을 마쳤다.
4. 국가대표 경력
연세대 3학년 시절이던 1990년 아르헨티나 세계선수권때 처음 국가대표에 발탁되어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까지 9년간 대표팀에서 활약했다. 국대 데뷔 초반에는 뛰어난 탄력을 바탕으로 주로 골밑자원으로 뛰며 레전드 센터 김유택의 파트너 자리를 채웠고, 서장훈, 현주엽, 전희철 등 탄력좋은 후배들이 대거 등장한 이후엔 내외곽을 가리지 않는 전천후 포워드로서 뛰었다. 다만 90년대 한국농구의 전술이 주로 서장훈을 골밑에 박고 -허재(or 이상민)의 투가드와 전문 3점슈터 문경은에, 4번자리에 현주엽, 전희철, 정재근을 돌려막는 전략이다보니, 슛거리도 길고 돌파력도 좋았던 정재근은 국대에서 대부분 골밑 자원으로만 이용되었다. [10] 그러다보니 대 중국전 등에서 하드웨어의 한계가 명확했고, 정재근을 비롯한 꼬꼬마 4번 선수들은 중국의 장신 포스트맨들에게 속절없이 리바운드를 내주곤 했다. 물론 세계선수권 및 올림픽에서는 더 심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출전 도중 주장 허재가 정재근의 생일축하를 위해 마련한 자리에서 한잔 했다가 졸지에 '''"애틀랜타 올림픽 농구팀 음주파동"'''이란 타이틀 하에 가뜩이나 올림픽에서 전패 중이던 대표팀에 대한 여론에 기름을 부으며 귀국 후 농구협회로부터 국가대표 3개월 자격정지를 받기도 했다.[11][12]
그래도 국가대표 정재근도 찬란히 빛났던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1997 리야드 아시아선수권 대회였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서의 7전 전패 굴욕을 갚고자 절치부심한 농구협회는 서장훈을 합류시키면서 -이상민-문경은-현주엽-서장훈이라는 '''그나마''' 최강의 라인업을 가지고 대회에 참가하였으나[13] 불운하게도 한국에서 출국하기 직전 연습경기에서 현주엽이 코뼈가 주저앉는 부상을 입었고, 사우디에 입국해서는 기둥센터 서장훈이 중이염에 걸려 게임을 뛸 상태가 아니라는 판단을 받게 된다. 선수대체를 할만한 상황이 아니다보니 사실상 엔트리 10명만 가지고 경기를 해야만 했고, 특히나 중국에 맞상대할만한 골밑이라던 현주엽-서장훈 콤비가 졸지에 단신(193cm) 4번 정재근에 몸싸움 혐오증(;;) 전희철 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우려는 현실이 되어 8강 2차리그 첫경기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은 한수 아래로 평가했던 일본[14] 에 골밑을 털리며 패배했고, 이바람에 아시아 최강 중국을 4강에서 만나고 만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8강 멤버가 건재한데다 약관의 왕즈즈(215cm)까지 가세한 중국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로 여겨졌으나... 이게 웬일?? 허재가 음주 사고를 내면서 급 구성된 투 가드 , 이상민의 리딩 하에 문경은(or 우지원)-정재근-전희철은 쉴새없이 움직이고 달리고 던지면서, 마치 20년 후인 '''현대 농구의 스몰라인업 시스템에서 장점만을 고스란히 보여주었고''', 키는 크지만 느렸던, 그리고 많이 방심하고 나왔던 중국을 계속 앞서나가며 결국 86:72라는 놀라운 승리를 거둬낸다. 이 경기에서 정재근은 본인의 탄력과 스피드를 활용하여 쉴새없는 컷인과 돌파로 중국의 장신숲을 뚫어내면서 승리의 주역이 된다. (아직 어린 왕즈즈의 허공을 가르는 블록 시도들은 덤) 이후 대표팀은 결승에서 일본과 재격돌하여 78:76 단 두 점차로 신승, 28년만의 아시아선수권 대회 우승이자 현재까지 대한민국 농구대표팀의 단 2개뿐인 타이틀을 가져오게 된다. 4강 중국전까지의 활약만 보면 포인트 가드 와 정재근이 가장 돋보였으나, 결승전에서 일본의 장신센터 야마자키에게 현란한(?) 헐리웃 액션을 과시하며 오펜스 파울 2개를 얻어내며 활약한 전희철이 대회 MVP에 올랐다.
5.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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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을 끝으로 은퇴해 2시즌 동안 전주 KCC 이지스의 코치 생활을 했고 모교인 연세대학교로 옮겨 코치를 거쳐 2011년 11월 15일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감독으로 재임 중인 2014년, 제1회 아시아 퍼시픽 대학농구에서 고려대학교와의 결승전을 치루던 도중, 15점차로 밀리다가 40:35로 따라잡았고, 기어이 3쿼터에 고려대를 겨우 9점으로 봉쇄한 덕에 잠시 16점차로 역관광하여 앞서고 있다가 4쿼터에 13점차를 따라잡히고 동점을 허용하자 작전 타임 와중에 연세대학교 선수들에게 '''쌍욕을 퍼붓는 장면이 KBS의 중계를 타고 고스란히 생방송'''되었다. 연장전에서는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연장전에서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가격하려하다가 밀치고 박치기'''하는 병크를 터뜨렸다.[15][16] 결국 테크니컬 파울로 퇴장을 선언받았으나 코트에서 한동안 나가지 않고 또다시 쌍욕을 퍼부었다(...). 그 바람에 고려대학교가 테크니컬 파울로 인해 자유투 4득점을 했으며, 결국 대회는 라이벌 고려대학교가 87-80으로 우승하면서 종료. 참고기사 다른 참고기사(동영상포함) 그 뒤 모교의 감독직에서 자진 사퇴하였으며, 연세대학교에서는 자체적으로 직무 정지 처분을 내렸다. 이후 농구협회에서 열린 상벌위원회에서 5년 자격정지 처분의 징계를 받아 은희석에게 감독직을 넘기게 됐다.[17] 공교롭게도 은희석 감독이 부임한 이후 연세대는 승승장구하며, 대학리그 5연속 우승을 달성한다.
실력은 정말 빼어났고, 사생활도 깔끔했지만, 코트 안에서의 큼지막한 폭력 사건을 많이 일으킨 점이 아쉬운 농구인이다.
6. 기타
흑역사가 상당히 많은 선수다. 저승사자라는 별명답게 코트에서도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준 선수지만, 다혈질적인 성격 탓인지 사고도 은근히 많이 쳤다. 대학 시절에는 중앙대학교와의 시합 도중에 상대 선수 장일[18] 을 가격했다가 중징계를 먹은 적이 있고,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도중 음주 파동으로 3개월 자격 정지, 1997-98 시즌 SBS와 나래의 경기 도중에 제이슨 윌리포드와 시비가 붙으면서 프로농구 사상 최초의 난투극의 빌미를 제공했던 것,[19] 마지막으로 바로 아래에 서술되어 있는 일명 저승타 사건으로, 2002-03 시즌 도중에 서울 삼성 썬더스 소속인 박성훈의 턱을 가격해 중상을 입힌 사건으로 2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먹은 사건까지.
아들 정호영(190cm)은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와는 달리 고려대로 진학해 농구 선수 생활을 하고 있다. 포지션은 슈팅 가드.
6.1. 박성훈 가격 사건 (2002-0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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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월 9일, 전주 KCC 대 서울 삼성과의 현대-삼성가 라이벌전에서 당시 2년차였던 박성훈(195cm, 경희대 졸)은 신인급 선수답게 패기가 넘치다못해 터져 나올 지경(?)이었는데, 경희대 시절엔 어중간한 신장의 센터자원이었으나 KBL 데뷔 후엔 동급 대비 월등한 스피드로 장신수비수로서 많은 기회를 받으면서 매 경기마다 매치업 상대를 거칠게 수비하고 있었다. 이 날 경기에서도 한참 선배인 정재근, 전희철, 추승균 등을 상대로 쫄지않고 엄청 후려쳐(?)댔고, 경기 중 전희철의 공을 스틸하면서 코피를 터뜨리기도 했다. 게임도 서울 삼성쪽으로 원사이드로 흘러가던 후반 중반, 공을 가지고 있던 박성훈은 매치업이던 정재근을 도발했고 공을 가드에 넘긴 후 스크린을 걸어주러 갔는데, 정재근은 박성훈의 스크린에 걸리는 척하면서 양 팔꿈치를 힘껏 박성훈의 턱에 갈겼고 박성훈은 그대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갔다.
이후 뉴스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턱을 어찌나 세게 맞았는지 박성훈의 윗앞니가 아랫턱에 박히는(...) 하마터면 사람을 정말로 저승 보낼 뻔한 상황이었다. 이 상황 이후가 더 어이없는 게, 같은 팀 선수가 이 정도로 맞았음에도 서울 삼성 선수들이 정재근에게 달려들기는커녕 정재근을 말리고 있었고, 서울 삼성에서 뛰던 박성훈의 친형 박성배도 짬이 안 되는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이후 뉴스나 언론보도 모두 "정재근이 얼마나 착한 선수인데, 그랬겠느냐~"라는 식이었고, 저승사자 정재근은 달랑 2경기 출장정지만 받고 끝났다. 이후 박성훈의 수비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얌전해졌고, 출장시간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7. 관련 문서
[1] 1995년 기준참고.[2] 연세대 3학년 때 첫 선발.[3] 현주엽, 서장훈의 부상으로 인해 전희철과 단 둘이서 포스트를 지켜내며 28년만의 우승을 이끈다.[4] 그러나 1988~1991년 당시 고려대는 중앙대, 연세대에 알짜선수를 다 뺏긴 동네북 수준이었다.정인교, 김상식 정도가 에이스였고 골밑의 높이는 대학부에서도 하위권이었다.[5] 제대 첫해인 94-95 농대 4위(4강에서 삼성전자에 패배), 95-96 농대 5위(8강에서 기아자동차에 패배), 96-97 농대 공동 5위(6강전에서 현주엽의 고려대에 패배)[6] 국보센터 서장훈이 있었다.[7] 이는 초창기 193cm 미만 1명, 205cm 미만 1명이던 외국인 선수 영입 규제가 '''2명의 신장 합계 398.78cm 미만'''으로 완화되면서 195 가량의 외인 2명을 뽑는 실리주의(?)로 트렌드가 바뀐 것이 컸다.[8] 붙박이 국대 4번 멤버들이었던 에어본 전희철, 저승사자 정재근, 매직히포 현주엽 모두 이 시점부터 3번으로 전환했다. 지금 트랜드로 봐도 4번으로 경쟁력 없는 하드웨어이긴 했다.[9] 구단이 KCC로 넘어가고 연고지가 옮겨지면서 팀명이 전주 KCC 이지스가 되었다.[10] 마찬가지로 국내 대회에서는 문경은보다 무서운 공수겸장 스몰포워드였던 김영만은 기회를 많이 얻지 못했다.어차피 193cm의 신장으로 중국의 2m대 스윙맨들을 막을수 없기는 매한가지라..[11] 주동자(;;) 허재는 6개월 자격정지, 막내로 참가했다는 이상민, 현주엽은 각각 근신 3개월씩 받았다.[12]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은 비록 전패했지만 한국이 마지막으로 출전한 올림픽이다. 즉 상당히 좋은 로스터 였고 국내농구인기도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이였다.[13] 애틀랜타 올림픽 당시 음주파동의 주동자(!!) 허재는 징계기간 동안 무려 무면허 음주운전을 저질러 대한농구협회로부터 선수 자격정지 및 국가대표자격 영구박탈의 중징계를 받았다. 정말 여러 의미로 대 단하다.[14] 많은 팬들이 기억하는 혼혈 포워드 마이클 다카하시(198cm)와 NBA 진출을 시도했었던 아키후미 야마자키(216cm)가 지키는 골밑의 높이가 월등했다.[15] 참고로 이 판정은 정심이었다. 연세대의 모 선수가 파울이 아니라면 놓칠 수 없는 이지샷을 놓치는 바람에 파울로 오해했던 측면도 있다. 이 선수는 몇 달 뒤 결승전에서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16] 정재근에게 박치기를 당한 황인태 심판은 이후 아시아 최초로 '''NBA의 초청을 받아''' 2020년 1월부터 Referee Development Program에 참여하게 된다.# 참고로 해당 프로그램을 수료하면 NBA 심판으로 활동할 수 있게 된다.[17] 은희석 감독 취임 이전에는 진상원 코치가 감독 대행직을 맡았다.[18] 중앙대-기업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했던 포워드로 키는 188cm이다. 중앙대의 대승으로 승패가 결정된 상황에서 장일이 드리블 잔재주를 부리자 그대로 날렸다.[19] 이 때는 사실 윌리포드가 먼저 밀쳤지만, 정재근의 수비도 거칠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