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수
1. 개요
한국의 前 농구선수. 포지션은 센터.
"KBL 최고령 현역선수", "자기관리의 달인", "함지훈의 훅슛 스승", "서장훈을 보내버린 깡패농구 콤비(with 박상관)" 등 긴 커리어 만큼이나 다양한 수식어를 가진 KBL 최고의 백업센터.[1]
2. 선수생활
2.1. 고교-대학시절
김유택, 한기범을 제외하곤 180cm 후반만 되어도 센터로 뛰던 80년대 중반, 중3임에도 이미 186cm이던 이창수는 군산고 농구부 코치의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선수제의를 받게 되고 군산고 입학 직후부터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군산고 시절 팀은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지만[2] 이창수는196cm까지 쑥쑥 크면서 역시 고1때 농구를 시작했던 랭킹 1위 마산고 정재근을 비롯, 부산동아고 표필상 등과 함께 고교 센터 상위권을 다투었고 최부영 감독이 이끄는 경희대에 진학하게 된다.
탄력과 스피드가 별로라 '느림보센터'라 불리기도 했지만, 경희대 진학후 최부영 감독의 혹독한 조련 끝에 기량이 점차 올라가면서[3] 3학년 때이던 1990-91 농구대잔치에서 한경기 25 리바운드라는 대기록을 세우면서 김유택을 제치고 농구대잔치 2차대회 리바운드왕을 차지하기도 했고, 4학년에 이르러서는 동기 김영주(G,180cm)와 함께 최명도(1년,G,180cm)-김현국(3년,F,188cm)-장창곤(1년,C,194cm) 등을 이끌며 만년 중위권이던 경희대를 연세대, 중앙대와 함께 대학 3강의 반열에까지 올려놓았다.[4] 졸업반이 되던 해 신생 실업팀 SBS가 창단되면서 연세대, 중앙대의 졸업반 선수들을 싹쓸이함에 따라[5] 나머지 실업팀들에게 있어 이창수는 독보적인 랭킹 1위의 선수였고, 치열한 경합끝에 센터자원의 노쇠에 시달리던 삼성전자에 합류하게 된다.
2.2. 실업무대에서 프로 시기
실업무대 데뷔시즌인 1992-93 농구대잔치에서 기존의 노쇠한 센터진[6] 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삼성전자를 2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올려놓는데 기여한다.[7] 농구대잔치 종료 후 이창수는 정재근, 오성식, 남경원, 표필상 등과 나란히 상무에 입대하여 기존의 김상식 등과 함께 상무팀을 사상 최강 전력으로 만들었고, 이창수 본인은 주전센터로 뛰며 상무를 1993-94 농구대잔치 챔피언 결정전까지 올린다.[8] 1994년 하반기에 제대한 이창수는 삼성전자에 합류하여 명지대 출신 루키 센터 박상관(200cm)과 함께 공포의 더블포스트를 구축, 1994-95 농구대잔치에서 삼성전자를 다시 한 번 결승에 올리면서 3년동안 소속팀을 바꿔가면서 3년 연속 결승전을 경험한 유래없는 선수가 된다.[9]
KBL 출범 직전인 1996년 선수로서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간염 진단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프로 원년시즌 및 1997-1998시즌까지 치료에만 몰두하였다. 프로 초창기 외인 수준이 낮았고 대부분의 팀이 1가드 1센터의 외인을 선발했던 상황이라 이창수 정도의 빅맨이면 충분히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었기에 아쉬움은 더 컸다.[10] 완치 판정을 받고 복귀했을 때(1997-1998 시즌 막판) 나이가 이미 29세로, 주전도 아닌 백업센터로서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지만 이창수의 KBL 커리어는 이 때를 시작으로 무려 2011년까지 달리게 된다. 2002-2003 시즌을 앞두고 울산 모비스로 이적한 후[11] 다른 팀들보다 어린 선수들이 모여있던 모비스의 '삼촌' 역할을 하면서 라커룸 분위기를 이끌었고, 2006-2007 시즌 울산 모비스가 파이널에서 우승하면서 이창수는 기존에 허재가 가지고 있던 "역대 최고령 챔피언"의 타이틀까지 가져오게 된다. 2009-2010 시즌을 앞두고 FA가 되면서[12] 울산 모비스와의 협상이 결렬되었으나 선수 생활을 지속하고자 창원 LG로 이적하였고 두 시즌을 더 뛰고 만 42세의 나이로 은퇴하였다.
2.3. 국가대표
울산 모비스에 합류했던 첫 시즌(02-03) 34세의 나이로 03 하얼빈 아시아선수권 대표팀에 첫선발되어 대한민국을 중국에 이어 준우승으로 이끌었다.[13] 당시 팀에는 골밑자원이 이창수 외에 김주성, 하승진, 이규섭 밖에 없었는데 (하승진은 이때 겨우 고3이라 경험축적 차원에서 데려간 수준이었다.) 이창수는 결승전에서 헌신적인 스크린으로 외곽의 김병철, 이규섭이 엄청난 3점포를 뿜어내며 야오밍이 뛰던 최강 중국과 접전(96-106)을 펼치는데 일조했다.
3. 은퇴 후
은퇴 후 서울 삼성의 스카우트로 활약하다 2016년부터 모교 군산고등학교의 코치를 맡고 있다. 2016년 현재 군산고는 신민석(2학년, F, 200cm), 이정현(2학년, G, 188cm), 서문세찬(1학년, G, 183cm) 청소년대표 트리오[14] 의 활약속에 9월 추계연맹전 우승을 비롯 4월 협회장기 8강, 5월 연맹회장기 4강, 8월 주말리그 왕중왕전 4강, 10월 전국체전 동메달 등 군산고 농구부 창설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이들이 한 학년씩 올라가는 2017년 군산고의 시대가 올 것으로 보였으나... 2017년 경희대 코치로 다시 자리를 옮겨 2018년까지 재직했다.
4. 여담
이창수하면 가장 기억남는 장면은 역시 1994-95 농구대잔치 플레이오프 8강전 삼성전자와 연세대의 대결일 것이다. 정규리그 13전 전승으로 올라온 연세대가 8위 삼성전자[15] 를 무난히 꺾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여기서 이창수-박상관 콤비의 투혼(정말 문자 그대로 싸울 鬪였던)으로 연세대를 2승 1패로 꺾는 업셋을 달성한다.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 당시 농구팬이라면 모두 기억할 만한 서장훈에 대한 두 콤비의 집단 린치수준의 수비는 아직까지도 비판받고 있다. 서장훈에게 피니시 엘보어택을 시전한 건 상관타였지만, 그전까지 골밑슛 막으면서 얼굴을 내리찍고 배로 주먹이 나가고 하면서 서장훈, 구본근을 더 많이 괴롭힌 건 이창수였다.
그러나 경희대 시절 이창수는 성격이 너무 유순해 전쟁터와 같은 골밑을 지키기 위한 투쟁심이 부족했다고 한다. 이에 최부영 감독은 이창수의 투쟁심을 키워주고자 체대생 몇 명을 섭외, 훈련을 마치고 가는 이창수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고 싸우도록 했는데, 이창수가 그걸 그냥 맞고만 있어서 소용이 없었다는 카더라가 있다.
2019년 기준으로 아들인 이원석이 경복고등학교 3학년이며, 아버지를 따라 청소년 농구 국가대표로 뛰고 있다. 2019년 측정 기준으로 205cm. 운동능력과 스피드가 빅맨답지 않게 빠르고 아버지에게 오랫동안 골밑 플레이어로서 스킬을 연마받아 상당한 기대를 모으고 있다. 6월 10일자 KBS joy 예능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출연해 서장훈에게 조언을 들었다. 오래 전 일을 아는 농구팬들은 과거 서장훈의 목을 작살낸 1등 공신들인 박상관, 이창수의 자녀들에게 저렇게 조언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서장훈을 대인배로 칭송할 정도. 이원석은 2020년부터 연세대학교 농구부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16] 입학 후 U-리그에 출전 중이며 키가 2cm 더 자라 현재 207cm이다.
5. 관련 문서
[1] 실제로 외국인 선수 수준이 낮았던 프로 초창기를 포함해 풀타임 주전으로 뛰어본 시즌이 단 한 차례도 없다. 3개 팀에서 백업으로만 14시즌을 보냈다는 것도 그만큼 이창수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다.[2] 1987년 협회장기 4강이 최고 성적이었다.[3] 전매특허인 훅슛도 이 때부터 던지기 시작했다.[4] 이때 경희대의 성적은 춘계/추계연맹전/MBC배 준우승, 전국체전 우승, 농구대잔치 3차대회(8강) 진출 등 모든게 창단이래 역대급 성적이었다.[5] 연세대 정재근, 이상범, 중앙대 남경원, 표필상 등[6] 국가대표팀 출신 김윤호(30세, 192cm)와 서대성(31세, 195cm)이 있었으나 둘다 부상에 시달렸다.[7] 허동택의 기아자동차에 져서 준우승.[8] 서장훈, 문경은, 이상민의 연세대에 져서 또 준우승.[9] 이번에도 허재가 맹활약한 기아자동차에 지면서 3년 연속 준우승.[10] KBL 원년 시즌, 이창수가 빠진 수원 삼성 썬더스는 8팀 중 꼴찌를 차지하였다.[11] 이 때가 33세였다.[12] 이 때가 만 40세.[13] 당시 대표팀은 02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의 주역 서장훈, 현주엽, 전희철이 모두 빠진 상태였다.[14] 2015년 U-16 아시아대회 우승 및 2016년 U-17 세계대회 8강의 주역들이다.[15] 예선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산업은행에 석연치 않은 패배를 당하면서 마지막 날 7위에서 8위로 떨어졌다. 예선전에서 대패를 당했던 2위 고려대를 피하기 위함이란 설이 파다했다.[16] 입학동기로 신가준(광주고,190cm), 유기상(용산고,190cm), 양준석(무룡고,182cm), 정이삭(낙생고,190cm), 김민유(동아고,200cm)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