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호(농구)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선수. 포지션은 센터.
190cm대의 선수도 센터를 맡곤 했던 20년 전 농구계에서 202cm 장신이라는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지만, 다소 아쉬운 기량으로 농구대잔치 시절엔 만년 유망주 취급을 받았으며, 한국프로농구 출범 이후엔 빅맨 백업요원으로 지냈다.
참고로 중앙대 시절에는 205cm라고 소개되었다. 205면 한기범과 서장훈의 사이에 낀 초 빅맨 2미터로 줄이면 같은 팀 선배 표필상도 있었다.
2. 선수생활
2.1. 고교-대학시절
한기범 이후 오랜만에 나온 2m대 센터다보니 휘문고 시절 고교 랭킹 1위로 불렸다. 연-고대와의 치열한 스카웃 전쟁끝에 정봉섭 감독[2] 에 의해 중앙대로 진학,[3] 1년 선배 표필상(200cm)과 쌍돛대 시즌 2가 될 것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김유택-한기범에 비해 기본기와 운동능력이 턱없이 부족하여 2학년때까지 벤치만 주로 지켰다.
대학 3학년 시절 어느정도 기량 성장을 이루어, 주전센터 표필상이 국대차출 등으로 자리를 비울때[4] 주전으로 뛰기 시작했고, 덕분에 이창수, 김재훈 등과 함께 대학선발팀 빅맨으로 뽑히기도 했다. 정경호의 활약 덕분에 당시 중앙대는 장신군단으로서의 팀컬러를 유지하여, 허-동-택 시절만은 못했어도 연세대[5] 와 함께 당시 대학농구를 양분하였다. 그러나 랭킹 1위의 타이틀은 이미 연세대 오성식[6] 으로 넘어간 후였다.
2.2. 실업무대에서 프로 시기
나름 치열했던 스카웃 전쟁을 겪고 현대전자에 입단, 최병식(193cm), 이호근(193cm)이 지키던 골밑에 큰 힘이 되....는줄 알았으나 판을 바꿀만한 실력까지는 가지지 못했고, 연세대 서장훈, 고려대 전희철, SBS 정재근 등과의 맞대결에서 안습한 모습만 보인다. 다만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고 리바운드와 수비 등 궂은 일에 집중하는 장신 블루워커 역할이다보니[7] 주목을 못 받은 탓도 있다. 장신에 슛거리도 어느정도 있어서 아주 가끔 더블더블급 활약을 덜컥 하기도 했으나, 너무 가끔이었다는 거...
KBL 출범 원년, 정경호의 현대전자 팀은 대전 현대 다이냇이라는 이름으로 프로 팀으로서 첫발을 떼고, 라펠 맥길버리190[8] 와 토드 버나드193[9] 라는 기량미달의 외인콤비[10] 를 뽑아 프로 원년 시즌 대전 현대는 8팀중 7위에 머문다. (8위는 수원 삼성 썬더스) 허나 원년 시즌 정경호의 출전시간은 경기당 5분 45초가 전부였다. 다음 시즌에는 조니 맥도웰-제이 웹이라는 슈퍼 외인들까지 가세하면서, 아예 자리가 없어진 정경호는 광주 나산 플라망스로 트레이드, 한 시즌 후 다시 원주 TG 엑서스로 이적한다.
이적 첫 시즌인 98-99 시즌, 원주 TG가 장신 센터 데릭 존슨-가드 토니 해리스 조합을 선택하면서 상대적으로 정경호가 백업 빅맨으로서 기회를 많이 얻게 된다. 주로 미스매치가 발생하던 4번(수비 시 양경민, 토니 해리스가 번갈아가며 담당) 자리에서 열심히 수비하면서 프로데뷔 이후 가장 긴 14분 2초의 평균 출전시간을 얻는다. 이 활약으로 99년 후쿠오카 아시아선수권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린다. 이후 원주 TG도 외인선수 선발을 파워포워드-센터 조합으로 하게 되면서 귀신같이 출전시간이 줄고 어느새 서른줄에 접어들면서 가비지 타임에나 나오는 선수로 커리어를 마감하나 싶었으나, 01-02 시즌 안드레 페리라는 걸출한 외인 빅맨을 뽑았지만 그 파트너가 줄줄이 함량미달 시리즈였던 관계로[11] 시즌 중반에 은공바가 합류한 시점부터는 거의 주전으로 뛰었다. (시즌 평균 출전시간 16분 10초. 찰스 멘트가 퇴출된 12월 23일 이후부터는 평균 25분을 넘게 뛰는 확실한 주전 빅맨이었다.)
02-03 시즌 드래프트 1위 김주성이 가세하면서 원주 TG는 일약 우승권 팀이 되고, 정경호의 출장시간도 급감한다. 그러나 정규리그 3위 종료 후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체력이 눈에띄게 저하된 루키 김주성의 백업으로 나와 나이를 잊은듯한 허슬을 보여주었고, 허재가 갈비뼈 부상으로 이탈한 파이널 5차전 이후 팀의 최고참으로서 팀원들을 다독이는 리더십으로 대구 오리온스를 꺾고 원주 프랜차이즈 사상 첫 우승을 가져오는데 크게 기여한다. 파이널에서 루키 김주성을 그야말로 털던 오리온스의 마르커스 힉스를 교묘한 반칙과 신경전을 통해 도발하고, 심지어 블록머신 힉스를 앞에 두고 연이어 엉거주춤 훅슛을 성공시켜 힉스를 멘붕시키는 명장면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후 03-04시즌 팀을 한 번 더 KBL 챔피언결정전으로 이끌었으나 전주 KCC에게 패하면서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그 뒤, 04-05 시즌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정규리그와 파이널에서 단 한 경기도 출장하지 못하고 은퇴하였다.
2.3. 국가대표 센터 정경호
94-95 농구대잔치가 끝나고 홈에서 열리는 서울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을 위해 농구협회는 자칭 "사상 최강의 드림팀"을 구성한다. (가드: , 허재, 이상민, 오성식, 포워드: 문경은, 김영만, 우지원, 현주엽, 정재근, 센터: 서장훈, 전희철, 조동기)
그러나 농구대잔치 8강전 연세대-삼성전자의 경기에서 상대팀의 지나친 파울로 선수생명의 위기를 겪었던 서장훈이 돌연 미국 NCAA 편입을 시도하고 이로인해 국가대표팀 소집에도 응하지 않는 사태가 벌어진다.[12] 부랴부랴 서장훈의 대타를 찾던 이인표 감독과 농구협회는 그래도 한때는 주목받던 202cm의 장신 유망주(이때 이미 만 25세였다) 정경호를 긴급 소집하고 정경호는 얼떨결에 성인 국대 데뷔전을 갖는다. 당시 국대는 -허재-문경은-현주엽-전희철을 주축으로 구성된 3점 & 속공 농구였고,[13] 발도 느리고 공격력도 없는 정경호의 자리는 없었다.
대표팀은 4강에서 일본을 꺾고 결승에 올라 아시아 최강 중국팀을 만난다. 순준(SF, 198)-공샤오빈(PF, 200)-샨타오(C, 212)로 이루어진 초장신 프론트코트에 대항하기 위해, 이인표 감독은 대회 개막 후 처음으로 정경호를 주전 센터로 투입, 초반에 팀 수비력을 높이고 후반에 속공으로 승부하려는 작전을 들고 나오지만.....
점프볼 직후 샨타오, 공샤오빈에게 인유어페이스 덩크를 연이어 얻어맞고, 이후 바스켓카운트를 내주는 파울을 잇따라 범하면서 정경호가 4반칙에 걸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단 1분'''!!! 경기장의 관중들, 벤치의 코치진, TV를 보던 팬들 모두 사상 초유의 상황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장면이었다. 결국 이 날 경기는 허재의 맹활약에도 불구, 4쿼터 후반 현주엽, 전희철 등 빅맨들이 줄줄이 퇴장당하면서 9점차로 석패, 홈에서 26년만에 아시아선수권 우승 트로피를 노리던 대표팀으로선 서장훈의 공백이 다시금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1년 후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때에도 서장훈은 복귀하지 않았고, 정경호는 다시 한 번 국가대표로 소집되는데, 1년 전과 별반 다르지 않는 멤버의 대표팀은[14] 세계무대에서 7전 전패 최하위를 기록한다. (아시아선수권 결승전에서 우리와 접전을 벌였던 중국은 세계 8강에 오른다;;) 이 때도 역시 서장훈이 없는 꼬꼬마 포스트진이 문제였는데, 에어본 전희철!!!, 한국의 바클리 현주엽!!!, 저승사자 정재근!!! 등 국내에서 최고 스타로 칭송받던 오빠들이 세계대회에서 별 푸에르토리코, 앙골라 등 듣보잡(이라고 국내팬들만 생각하던) 팀들에게조차 연이어 털리는 모습이 국내 팬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 와중에도 여전히 후보센터로 들어와 엄청난 파울들을 보여주며 조기 퇴장당하던 정경호가 차라리 제일 열심히 뛰는 선수로 보였었다.(정경호를 제외하고는 포스트에서 수비 존재감이 있는 선수가 없었다.)
98-99 시즌 원주 나래에서의 깜짝 활약으로 인해 99년 후쿠오카 아시아선수권 대표팀에 다시 한 번 이름을 올린다.[15]
3. 은퇴 후
은퇴하고 나선 베트남 쌀국수 등의 외식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image]
2019년 12월 30일에 방송된 MBN 자연스럽게에서 허재와의 친분으로 신기성, 김승기, 김상준과 함께 출연했다.
4. 여담
허재의 선수 은퇴 후 인터뷰에서 "가장 아쉬운 후배"로 정경호를 꼽았다. 하드웨어도 좋고 재능도 있지만 '''사람이 너무 착해서 투쟁심이 다소 부족했던 후배'''라고 했다.
송창무, 김봉수, 주태수 등과 묘하게 이미지가 겹쳤다.
예전 루키라는 농구잡지에 그 당시 잘 나가던 선수들의 브로마이드를 부록으로 준 적이 있는데 정경호의 사진은 콧털이 심하게 삐져나와 자라나는 농구 팬층에게 충격과 공포를 선사한 적이 있다.
팬클럽 이름이 '정결추'다. 정경호 결혼 추진위원회(…).
5. 관련 문서
[1] 당시 미국 산호세 대학으로 유학간 서장훈의 대타로 선발되었다.[2] 허재, 강동희, 김유택, 한기범을 등을 이끌고 중앙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92년 추계연맹전을 끝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 중앙대 운동부를 총괄하는 체육부장으로 재직했으며 대학농구연맹 회장을 역임했다.[3] 정경호의 중앙대 입학이 아침마당(!!)에서 다뤄질 정도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4] 당시 한기범을 제외하고 최장신이었던 표필상은 대학 3, 4학년 시절 2년 동안 국대에 뽑혔다. 1년후 더 장신인 서장훈이 등장한 이후 다시는 뽑히지 못했다.[5] 어디까지나 서장훈 입학 전까지의 연세대를 말한다. 이상민-오성식-문경은-정재근-김재훈-우지원 등 센터진의 신장만 빼고는 (연세대: 정재근193-김재훈193 vs. 중앙대: 표필상200-정경호202-조동기197) 중앙대에 밀릴것이 없었다.[6] 대학 3학년때부터 국가대표였다.[7] 94-95 농구대잔치 정규리그 리바운드 5위, 블록 1위였다.[8] NCAA 디비전 2 시애틀 퍼시픽 대학 출신. 이승준-이동준의 대학 선배다.[9] NCAA 디비전 1 프레스노 주립대 출신. 00-01 시즌 오리온스 소속으로 복귀하여 해당 시즌 꼴찌에 기여한다.-_-;; 애초에 포워드 보던 선수가 와서 센터로 뛰고 있으니..[10] 기량미달이라곤 하나, 원년 시즌 토드 버나드는 27.8 득점-11.5리바-1.3어시를 기록했다;;; MVP급 시즌을 보냈던 전희철의 스탯이 23.1-6.9-1.7, 최우수 외인선수였던 제이슨 윌리포드가 27.9-12.8-2.7 였다. 다만 토드 버나드는 수비에서의 존재감이 낮아, 매치업에서 그만큼 점수를 주는 선수였다.[11] 해리 리브즈(11.6 득점-8.9리바 → 찰스 멘트(9.8-5.8) → 패트릭 은공바(7.4-7.7). (득점-리바가 새 선수를 뽑을 때마다 줄어든다. -_-) 허재의 꿀패스를 토해내던 은공바는 거의 농구 초보자 수준이었으며 시즌 종료 후 선수생활을 접었다고 한다.[12] 유학은 핑계고, 한국 농구에 염증이 났다는 설이 파다했다.[13] 슬램덩크(만화)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풍전 농구부의 모델이 90년대 한국 농구대표팀이라고 인터뷰한 바 있다.[14] 김영만만이 부상으로 양희승으로 대체되었다.[15] 전희철이 공익근무로 인해 국대차출이 안되어, 역시 대체 선발로 합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