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출생주의

 


1. 개요
2. 역사
3. 논리
3.1. 반출생주의는 자살과 학살을 조장한다?
4. 인물
5. 대중매체
6. 관련 문서


1. 개요


"은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방해하는, 이로울 것이 없는 사건으로 여길 수 있다."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내가 스무 살도 되기 전에 알아 버렸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 하나는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결혼, 가족, 더 나아가 모든 사회 규범에 대한 내 두려움은 거기서 온다. 자기 자신의 결함을 자식에게 전달하는 것, 그래서 자신이 겪었던 시련을, 어쩌면 더 지독한 시련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것은 범죄 행위이다. 내 불행과 내 고통을 이어받을 사람을 낳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부모들이란 모두 무책임한 자들이거나 살인자들이다."'''[1]

- 에밀 시오랑

/ Anti(-)natalism
반출생주의는 인간 또는 유적(有情的, sentient)[2] 존재출생부정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철학적 관점이자 사회 운동이다.
반출생주의자는 인간의 출산(procreation) 또는 생식(reproduction)을 도덕적으로 나쁜 행위인식하며, 이를 거부하고 반대한다.[3]

2. 역사


사료(史料)부족에 대한 관찰을 통해, 인류는 과거부터 결혼하고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생각강박에 가깝게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는 성욕번식 욕구 충족 같은 본능적인 면, 노동력 확보와 노후 부양 같은 타산적인 면이 공존한다.
대개 지배층 또는 기득권은 인구 증가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한데, 심한 경우 독신세무자녀세까지 걷었다.[4][5] 무분별한 인구 증가 정책의 부작용으로는 차우셰스쿠의 아이들이 유명하다. 현대에는 차브, 고프닉 등이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인구가 곧 국력이었던 전근대 농업국가들은 출산을 장려했다. 조선의 경우 고을 수령의 임무(수령 7사) 중 하나가 인구를 늘리는 것이었다(戶口增). 관할지의 인구는 이 수령의 위민(爲民)을 가늠하는 지표이기도 했기 때문에, 수령은 혼인하지 못한 노총각이나 노처녀가 있으면 그 부모를 질책하고, 그래도 해결 안 되면 처벌하기도 하며 다른 마을에 수소문해서라도 어떻게든 혼인을 주선했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을 포함한 생물은 번식에 몰두하고 그것에 방해되는 요소를 배척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따라서 인간이 번식을 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당연히 행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출생주의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생각 역시 인류사에서 종종 발견된다.
다음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실린 이야기로, '마이더스의 손'으로 유명한 미다스 왕은 디오니소스의 동반자이자 현자실레노스를 붙잡고 인간에게 가장 좋고 휼륭한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에 실레노스는 이렇게 답한다.

'''가장 좋은 것은 그대에게 불가능하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찍 죽는 것이다.[6]

이 대목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실레노스의 지혜'로 인용한다.
소포클레스희곡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일단 태어났으면 빨리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게 차선적이라네. 청춘의 경박한 어리석음이 지나간들 어느 누가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인생의 무거운 짐에서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질투, 당쟁, 불화, 그리고 전쟁... 그 어느 누가 전쟁의 유혈과 전쟁의 비통함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이가 싫어하는 노령이 찾아온다네. 힘도 없고 친구도 없는 노령이... 황혼에 의지할 곳도 없이 온갖 쓰라린 일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노령이.[후략]

솔로몬이 집필했다는 전승이 있는 전도서(4:1-3)에도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 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그 외에도 여러 문학 작품에서 반출생주의를 내포하는 듯한 대목을 찾을 수 있다.

이 들면 좋지, 죽으면 더 좋고- '''물론 가장 좋은 거야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고'''

하인리히 하이네, <모르핀>

'''태어난 생물에게 생일은 한탄해야 하는 날이다.'''

모든 것은 죄악이다. 내 말은 모든 것이 그러하며 사악하다는 뜻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죄악이다. 모든 것은 사악한 목적을 위해 존재한다. 존재는 사악함이며 사악함을 위한 사제로 임명받았다. 죄악은 그 목적이며 마지막 목적이며 우주다. '''유일하게 좋은 것은 비존재뿐이다.'''

자코모 레오파르디, <아시아에서 방황하는 목동의 야상곡>, <지발도네>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못내 억울하고, 게다가 적반하장 격으로 세상에 내보내준 은혜를 고마와하라고 들입다 강조해대는 사상이 얄밉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식에게 효도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자식은 그저 '애완용'으로 길러야 한다.

마광수, <마광수의 뇌구조>

아니야, 그런 문제가 아니야. 무슨 뜻이냐 하면 '''생명을 만들어내는 일이 정말로 옳은 일인지 어떤지, 그걸 잘 모르겠다는 거야.''' 아이들이 성장하고, 세대가 교체되고,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지? 산을 더 허물어서 바다를 메우고, 더 빨리 달리는 차가 발명되고 '''더 많은 고양이가 치여 죽어. 그뿐 아니겠어?'''

무라카미 하루키, <양을 쫓는 모험>

마루야마 겐지는 그의 산문집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에서 쇼펜하우어와 유사한 염세관을 드러내며, 부모의 이기심과 무책임함, 그리고 이를 미화하는 사회적 세뇌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다.
그 외에도 여러 금욕주의 사상 역시 부분적으로 반출생주의와 통하는 면이 있을 수 있다.[7][8] 반출생주의는 타 개체에게 고통과 죽음강제하지 않으려 한다는 점에서 채식주의와도 일부 접점이 있고, 실제로 알려진 반출생주의자 상당수는 환경주의자 또는 생태주의자이자 채식주의자이기도 하다.
염세주의, 염인주의 역시 반출생주의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9] 현대의 양극화상대적 박탈감 문제, 인간의 수명이 증가하며 발생한 고령화세대 갈등의 심화 문제, 자원 고갈과 환경 문제도 낙관적인 미래 전망을 약화시킨다.
또한 인권 개념대두되면서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10]거부감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아이를 낳으라고 강요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주는 것은 악습이라는 인식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독신무자녀 부부에 대한 부당한 편견도 차츰 바뀌기 시작했다.[11] 그 외에도 여성권리, 아동청소년권리, 동물권, 생명권 개념의 등장과 강화 역시 반출생주의가 구체화될 수 있는 기반을 형성했다.[12]
19세기부터는 콘돔발명되는 등 여러 신뢰성 있는 피임 수단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인공임신중절 기술도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개인이 번식을 피하면서 성욕을 해소하는 일도 수월해지게 되었다.[13]
20세기 후반, 학계에서 메타윤리학이 주춤하고 응용윤리학(실천윤리학)이 부상하기 시작한 것도 반출생주의가 학문적으로 성립하는 배경이 되었다. 비동일성 문제 참고.[14] 반출생주의는 비동일성 문제의 해결책 중 하나로 제시된다.

3. 논리


반출생주의 사상가의 대다수는 의무론적 윤리관을 따른다. 또한 동의(consent) 문제[15][16]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데이비드 베너타는 각기 다른 사상가의 단편적인 주장에 가깝던 반출생주의 통찰을 체계적인 논증으로 이끈 최초의 철학자다. 그는 그의 저서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17]에서 '''고통과 쾌락비대칭성(asymmetry between pain and pleasure)'''을 반출생주의의 핵심 논거로 제시한다.[18]
  • 고통은 나쁘다.
  • 쾌락은 좋다.
  • 고통의 부재는 좋다. 설사 그 좋음이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향유(享有)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다. 그 부재가 박탈(deprivation)이 되는 누군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위 주장을 로 변환하면 다음과 같다.
'''시나리오 A
(X가 존재)'''
'''시나리오 B
(X가 비존재)[19]'''
고통의 존재
(나쁨)
고통의 부재
(좋음)
쾌락의 존재
(좋음)
쾌락의 부재
(나쁘지 않음)[20]
위 표가 옳다면, 존재자 X에게 나쁠 여지가 없는 시나리오(또는 가능세계) B를 택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선택이 된다.[21]
우리는 불행한 사람들을 만들지 않을 도덕적 의무가 있다.[22] 반면 행복한 사람들을 만들 도덕적 의무는 없다. 우리는 고통의 존재가 고통을 경험하는 당사자에게 나쁘고, 고통은 없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설령 고통의 부재를 기뻐할 당사자가 없더라도 말이다. 반면 우리는 쾌락의 존재가 쾌락을 경험할 당사자에게 좋다고 생각하지만, 쾌락의 부재를 경험할 당사자가 없다면 쾌락의 부재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쾌락을 박탈당할 당사자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이를 만드는 근거로 태어날 아이의 이익을 언급하는 것은 이상하다. 반면 우리가 아이를 만들지 않는 이유로 태어날 아이의 이익을 언급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를 만드는 중요한 도덕적 이유가 되지 않는다. 반면 아이가 불행할 수 있다는 것은 아이를 만들지 않는 중요한 도덕적 이유가 된다. 만일 쾌락의 부재를 경험할 당사자가 없는데도 쾌락의 부재가 나쁘다면, 우리는 가능한 한 많은 아이들을 만들어야 하는 중대한 도덕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고통의 부재를 경험할 당사자가 없더라도 고통의 부재가 좋지 않다면, 우리는 아이를 만들지 않을 중대한 도덕적 이유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결정으로 사람을 존재시킬 경우 그 사람이 처할 상황 때문에 결정을 후회할 수 있다. 우리가 창조한 사람은 불행할 수 있고, 고통의 존재는 나쁠 것이다. 반면 우리는 우리의 결정으로 사람을 존재시키지 않을 경우 절대 그 사람이 처할 상황 때문에 후회하진 않는다. 그 사람은 전혀 존재한 적도 존재할 일도 없기 때문에 행복과 쾌락을 박탈당할 일이 없고, 쾌락의 부재는 나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디선가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낀다. 반면 우리는 어디선가 사람이 없어서 행복을 느낄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에 슬퍼하진 않는다. 우리는 어디선가 고통을 겪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면 동정심을 느낀다. 어떤 무인도행성에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아 고통을 겪을 사람도 없다는 사실은 좋다. 왜냐하면 그 좋음을 경험하는 사람이 없더라도 고통의 부재는 좋기 때문이다. 반면 우리는 어떤 무인도나 행성에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아 행복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 때문에 슬픔을 느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쾌락의 부재는 누군가가 존재해 그 좋음을 박탈당할 때에만 나쁘기 때문이다.
사람은 존재하게 됨으로써 존재하지 않았다면 입지 않았을 상당히 심각한 해를 입는다.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면 좋음을 박탈당할 수 없다. 아무리 행복한 삶이더라도 결국 죽음으로 인해 박탈당할 수밖에 없다.[23] 존재하게 되는 것은 순이익 대신 순손해를 낳는다. '''존재하게 되는 것은 항상 심각한 해악이며, 출산은 항상 잘못이다.'''[24]
베너타는 사람들이 삶의 질을 정확하게 평가하지 못하는 이유로 다음과 같은 일상적인 심리 현상을 인용한다.
  • 낙천주의 편향[25]: 우리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긍정적 관점으로 왜곡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 적응: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 적응해서, 상황이 악화되면 좋은 삶의 기대치를 그에 맞춰 낮추고 만족한다. 이는 보통 현실과 유리(遊離)된다.
  • 비교: 우리는 자신의 삶을 평가할 때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판단한다. 그리고 낙천주의 편향에 따라 자신의 행복의 가치를 과대평가하기 위해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한 사람과 비교한다.
베너타는 말한다.

선한 사람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그렇게나 노력하면서, '''아이들의 모든 고통을 예방하는 확실하면서도 유일한 방법이, 그 아이들을 애초에 태어나지 않게끔 하는 것이란 사실까지는 대부분 깨닫지 못한다.''' 그런 이들이 그토록 적다는 점은 매우 유별난 일이다.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결정은 그 아이들의 부모가 될 뻔한 이들의 이익에 반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위해서는 최선의 결정이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은 존재하기 위해 겪어야 하는 치열한 고통을 경험할 필요도 없이,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영원히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베너타, 건터 블레이봄, 제럴드 해리슨, 줄리아 태너 등의 반출생주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제외한 다른 종의 생명체에 대해서도 도의적인 관심을 기울이길 촉구한다. 이들은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중에서 인간만큼 파괴적이고 해로운 생명체는 없다고 주장한다.
인간을 제외한 수십억의 동물 개체는 매년 육식성 식자재 생산을 비롯하여 각종 동물실험에 이용당한 후 아무렇게나 폐기된다. 또한 서식지의 파괴 등 각종 환경 파괴로 인해 무수한 종의 생명체가 학대당하고 학살당하며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 이것은 오직 인류라는 종의 가학적인 쾌락을 위해서 행해진다.
이렇듯 인류 문명이 만들어낸 부조리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그렇기에 위 반출생주의자들은 그저 인간의 이익만을 위해 다른 종에 해를 끼치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동물보호운동가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동물 권익과 환경 보존을 위한 가장 확실한 해결책으로 인구 억제가 거론되는데, 이는 반출생주의와 상통하는 면이 있다. 새롭게 만들어지는 인간이 더 적어지거나 혹은 완전히 없어질 수 있다면, 그들에 의해서 다른 고통을 느끼는 생명체가 겪게 되는 피해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아이를 한 명 덜 낳는 것은 환경을 고려하는 다른 활동보다 20배 가량의 온실가스 감축 효과가 있다. 연구 자료 관련 기사

3.1. 반출생주의는 자살과 학살을 조장한다?


반출생주의자에게 삶이 고통이면 왜 당장 자살하지 않느냐고 묻거나, 반출생주의는 학살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자주 발견된다.[26] 그러나 이와 같은 비판은 반출생주의를 극단적인 '''소극적 공리주의(negative utilitarianism)'''[27][28]나 '''사망주의(pro-mortalism)'''[29]로 오해하는 것에서 비롯된다.[30][31]
소극적 공리주의자나 사망주의자가 반출생주의를 효용적으로 긍정할 수는 있다.[32] 그러나 이들은 주어진 상황에 따라 출산 행위를 옹호할 수도 있다.[33] 반출생주의 사상가들은 대부분 의무론적 입장에서 학살에 반대하고 자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거나 중립적이거나 조건부적으로만 옹호한다. 반출생주의자로서의 이상적인 행동은 자살이나 학살이 아니라, 당장 더 분명하게 선행으로 여겨지는 계몽과 입양이다.

  • 이미 시작된 인생을 중단하는 것과 인생을 시작하지 않게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34]
  • 개인에게 죽음이 생존보다 더 나은 경우도 있지만, 죽음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해악이다.[35]
  • 자살은 고도로 진화한 생존 본능 때문에 매우 괴롭고 힘든 일이며, 안락사 역시 제한적이다. 또한 주변인에게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주기도 한다.
  • 위처럼 죽음이 실제가 어떻든 두려운 해악으로 느껴진다는 것도 필멸자낳으면 안 될 이유가 된다. 이미 죽어가는 중인 자신도 죽기 싫으면서,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새로이 죽을 타인을 만드는 것은 부도덕하다.
  • 심대한 고통이나 자살 충동을 겪는 사람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고통받게 된 개인이 자살하면 그만이니 그럴 위험을 감수하고 낳아도 된다는 것은 부도덕하다.[36]

4. 인물


  •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독일 철학자. 반출생주의로 해석되는 언급 부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결코 채워지지 않는 본능적 욕망으로 인해 고통이 생겨나고, 존재는 고통으로 가득하다. 세상은 쾌락보다 고통이 더 많고, 쾌락이 고통을 배상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종합적으로 봤을 때 인생은 시작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이며, 맹목적인 삶에의 의지[37]에 굴복하여 아이를 만드는 것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하며 부도덕하다. 따라서 삶은 비존재의 축복받은 고요를 방해하는, 이로울 것이 없는 사건으로 여길 수 있다.
  • 에밀 시오랑: 루마니아프랑스 수필가, 철학자. 관련 기사1 기사2
  • 데이비드 베너타: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대학교 철학 교수. 그는 사회철학, 응용윤리학, 법철학, 종교철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그는 생식 윤리 및 의료 윤리, 그리고 인간 조건에 관하여 독특하면서도 정교한 논증을 담은 다수의 논문과 책을 써 왔다. 그는 사상사에서 파편화 상태였던 반출생주의 통찰을 하나의 엄밀한 논증으로 체계화한 최초의 철학자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서인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는 학술지매체에서 진지하면서도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 페테르 베셀 삽페: 노르웨이 작가. 그의 저서 <마지막 메시아>가 그의 반출생주의 사상을 뒷받침한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두 번 결혼하였으나 아이는 갖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의식이 과잉 진화한 탓에 지나친 인식 능력을 지니게 됐고, 그 탓에 존재하지 않는 정의와 의미에 대해 망상하며 버티는 비극적인 존재로 파악했다. 그리고 이런 부자연스러운 현실 왜곡과 인간 초월에 대한 갈구를 끝낼 방법은 출산을 회피하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 훌리오 카브레라: 아르헨티나 출신 브라질 철학자. 그는 비존재를 막연히 나쁘게 보는 긍정적 윤리의 모순을 지적하며, 보다 도덕적 일관성이 있는 '부정적 윤리(negative ethics)'를 제시했다. 그는 인간의 삶은 구조적 부정성으로 인해 여러 고통 요소를 지니고, 살면서 누군가를 조작하고 해를 끼칠 수밖에 없기에 근본적으로 도덕적 실격 상태라고 본다. 또한 사람들이 아이들을 단순히 미적 대상으로 여기며, 아이는 부모를 위해 구조적으로 부정적인 세상에 던져진다고 본다. 그리고 아이를 만드는 행위는 최악의 가해 행위이자 자율성 훼손 행위라고 주장한다.
  • 쇼나 시프린: UCLA 철학 교수. 그녀는 출산이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이익과 해악의 공약불가능성(통약불가능성)과 비대칭성을 들어 논증한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의 생물학적 부모에게 출산의 부정적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물을 도덕적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38]
  • 카림 아케르마: 그는 인간이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으로 선한 창조주를 가정하여, 인위적인 고통 생산으로부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더 이상 무리라고 주장한다. 저서로 <반출생주의 핸드북(Antinatalismus: Ein Handbuch)>이 있다.
  • 테오필 드 지로: 벨기에 작가, 사회운동가. 동지와 함께 '비부모의 날'을 지정해 기념했다. 그는 태어나지 않을 권리, 그리고 이것이 침해될 경우 차선으로 좋은 부모에게서 태어날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아이를 낳는 대신 입양을 권한다.
  • 레스 나이트: 미국 환경운동가. 그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생명들을 위해, 사람들이 자발적 인류 멸종 운동(Voluntary Human Extinction Movement, VHEMT)에 동참하길 원한다. 참여 방법은 그냥 비출산을 다짐하는 것이다.
  • 라파엘 새뮤얼

5. 대중매체


  • 가버나움
  • 트루 디텍티브
  • 프랑켄슈타인[39]

6. 관련 문서



[1] 부모는 자식이 인간인 이상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낳는다는 것을 의미한다.[2] 고락(苦樂)를 감수(感受)하는. 쉽게 말해 고통과 쾌락을 감각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불교와 감각중심주의(sentientism)에서 중요하게 다룬다. 상대적으로 쾌락보다 고통에 더 큰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다.[3] 인공 유산이나 배아를 이용한 연구 등에 대해서는 반출생주의자끼리도 허용 기한 등에 대해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은 단순한 생식 세포에서 도덕적 지위를 갖는 인격체가 되기까지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성장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다.[4] 동성애 탄압도 비슷한 맥락이라는 의견이 있다. 플라톤은 여자와의 사랑은 번식이라는 본능에서 나오는 불순한 사랑이며, 번식이 불가능한 미소년과의 사랑이야말로 본능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하고 진정한 사랑이라고 주장했다.[5] 반대로 중국계획생육정책을 비롯해 한국, 이란, 인도 등에서 산아제한정책을 시행한 적이 있다. 다만 이는 맬서스 트랩을 피하기 위한 정책으로 봐야 할 것이다. 결국 해당 이론에 결함이 발견되고 고령화 문제에 직면하면서 산아제한정책이 폐기되고 출산장려정책으로 전환된다.[6] 이후로도 비슷한 문장이 여럿 제시되지만, 일찍 죽는 것이 낫다는 말은 당장 자살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어느 날 잠든 후 죽는 줄도 모르고 죽는 것과 같이 예기치 못하게 죽는 것, 그렇기에 죽어가는 고통과 공포에 직면하지 않고 편안하게 죽는 것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고통에 시달리지 않는 영생을 누릴 수 있다면 그것이 일찍 죽는 것보다 더 좋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실레노스의 말이나, 노인의 대표적인 거짓말로 알려져 있는 '늙으면 죽어야지' 같은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후략] 이것은 진실이야!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여기 눈 멀고 파멸한 이에게도 마찬가지야. 격동하는 파도가, 사방에서 부는 겨울 강풍 속에서 이리저리 시달리며 흐르는 어느 북쪽의 해안을 생각해 봐라. 그에게도 마찬가지. 그 사나운 잔해가 머리에서 발끝까지 영원히 그를 덮쳐 부서져 내린다. 더러는 해가 지는 곳에서 때로는 해가 뜨는 곳에서, 더러는 한낮의 이글거리는 햇빛 속에서 때로는 한밤 중에 어둠이 내린 북쪽에서.[7] 대부분의 금욕주의 성향 사상이 식욕(특히 육식에 대한)과 성욕의 억제를 요구하며, 의무론적이다. 그리고 에피쿠로스(아타락시아)와 스토아 학파(아파테이아)는 쾌락 역시 결국은 고통으로 화한다는 것에 인식을 같이 했다.[8] 쾌락주의시조 에피쿠로스 역시 쾌락을 적극적으로 획득하기보다는 소극적으로 고통을 줄이는 방향의 안분지족을 중시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등장하는 향연에서 반출생주의로 해석될 수 있는 말을 남긴다. "성교는 인간에게 이득을 준 적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운이 좋다."[9] 기존의 출생주의적 가치관을 부정하고 삶의 고통과 허무함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면 때문에 반출생주의를 허무주의와 연결짓기도 하고, 허무주의적 반출생주의자(nihilistic anti-natalist)도 존재한다. 그런데 허무주의를 말 그대로 모든 가치를 부정하는 것에 한한다면, 허무주의 역시 부정해야 하므로 진정한 허무주의자는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생각을 허무주의라고 말할 때는 기존의 어떤 가치를 부정하는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라고 봐야 이치에 닿을 것이다. 반출생주의는 기존의 도덕관을 준수하는 가운데 출생주의적 편향을 배제한 결과 도출되는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10] 예컨대 장기이식을 위해 복제인간만들거나, 먼저 태어난 형제의 골수이식을 위해 맞춤아기를 낳는 것은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출산 행위는 따지고 보면 그로 인해 태어나는 존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난 다른 존재를 위한 것이다.[11] 현대에는 저소득층, 장애인, 다자녀 부모에 대한 혐오 현상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는 현대에 법제화된 입양 자격 제한, 애니멀 호더 처벌과도 일부 관련이 있을 수 있다.[12] 출산의 위험성을 당연히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취급하고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언제든 출산 과정에서 산모사망사산의 위험이 있으며, 산모나 신생아의 신체 손상과 산후 우울증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다.[13] 피임법이 발달하면서 비로소 성욕과 번식욕이 엄밀하게 구분되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동물의 내장을 콘돔처럼 사용한 기록이 있으나 이는 벌레를 막는 등 용도가 피임과 무관했다. 또한 기근 등을 이유로 아이를 원치 않아 낙태를 원하더라도 그 효능이 의심스럽거나 치명적인 방법만이 존재했으며, 일단 낳은 후에 바로 죽이거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영아 살해도 빈번했다. 과거에는 영아 사망률이 상당히 높았다.[14] 비동일성 문제는 우리에게 부모의 자격과 후손에 대한 도리의 근거와 기준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어떤 부모의 경우 자녀를 낳는 것이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생각된다면, 그 생각이 다른 모든 부모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15] 직접 구체적 정보를 제공하고 확인받는 절차를 거치는 사전 동의(informed consent)와 묵시적 동의(implied consent) 등을 모두 포함한다. 반출생주의가 제기하는 동의 문제에 대해 미성년자제한능력자를 위한 행위는 동의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동의가 꼭 필수적인 건 아니라는 반론이 있다. 하지만 이는 그러지 않을 경우 발생할 피해로부터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없어도 될 피해 가능성을 야기하는 출산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의 자율성을 훼손할 수밖에 없는 현실 역시 반출생주의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16] 동의 개념은 정치학(정치철학), 사회학(사회철학)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계약주의(contractarianism)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계약주의는 홉스, 로크, 칸트, 루소사회계약론에서 스캔론의 계약론(contractualism)에 이르기까지 호혜성(互惠性)의 원리와 묵시적(암묵적) 동의, 원초적 입장(무지의 장막) 이론과 인접 세대 간 계약의 연쇄, 정당화가능성(justifiability) 또는 합당한 거절가능성(reasonable rejectability)을 기반으로 하는 상호정당화 이론 등 많은 보완이 있어 왔고 널리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 세대에 대한 엄밀한 적용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 중이며 미완인 상태다.[17] 옮긴이는 이한(이민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 교수이자 변호사이며 시민교육센터를 운영하고 있다.[18] 2018년도 LEET 언어이해 홀수형 22~25 문항 제시문으로 출제되었다.[19] 여기서 '비존재'는 전혀 존재한 적이 없고 존재할 일도 없음을 의미한다. 즉 존재했다가 없어지는 것과는 다르다.[20]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음)으로 치환할 수 있다. (나쁘지 않음)은 베너타가 보다 선명한 대비를 위해 택한 표현이다.[21] 베너타는 에 걸리고 빨리 낫는 것보다 애초에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하며, 출산 행위를 총알을 가득 채운 으로 행하는 러시안 룰렛에 비유한다.[22] 해악금지(nonmaleficence)의 원칙은 강력한 기본 윤리 원칙이다. 쇼펜하우어는 동정심을 도덕의 기초로 삼아 '누구도 해치지 말고, 가능한 한 모두를 도와라'를 윤리학의 최고 원리로 제시한다. 황금률과도 관계가 있을 수 있다.[23] 박탈주의(deprivationism), 박탈 이론(deprivation account)은 죽음이 나쁜 이유에 대해 죽음이 우리가 살면서 누릴 수 있는 좋은 것들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24] 베너타는 다음과 같은 유대인 속담을 인용하며, 태어난 모든 사람은 극도로 희박한 확률을 뚫고 태어날 정도로 불운하고, 태어나지 않을 정도로 운이 좋았던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삶은 너무나 끔찍해서 아예 태어나지 않았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누가 그렇게 운이 좋은가? 십만 명 중에서 한 명도 찾을 수 없다!"[25] 베너타는 이런 경향을 '낙천주의 망상(optimism delusion)'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인간은 생물학적 욕구에 기대 타자의 고통을 적당히 외면할 때 비로소 인생을 낙관할 수 있고, 다음 세대를 만들어 고통과 낙관을 유전시킬 수 있다.[26]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반출생주의자를 대놓고 조롱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공격적 반응은 본능과 관습으로 인한 인지부조화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이들은 보통 인신공격의 오류자연주의적 오류 등을 범한다. 은연중에 생존번식을 같은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도 보인다.[27] 부정적 공리주의로도 번역된다. 소극적 공리주의는 공리주의의 한 분파로서, "모두의 최소 고통"을 주장하며 고통의 최소화를 추구한다. 칼 포퍼가 소극적 공리주의의 시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가 진지한 의미로 소극적 공리주의를 주장했다고 보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포퍼는 단지 '''그럭저럭 행복한 사람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심각한 불행에 고통받는 사람을 구제하는 게 우선돼야 한다'''는 도덕적 직관을 강조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28] 소극적 공리주의는 수많은 문제점, 특히 수행적 모순과 비일관성을 비판받고 사실상 사장된 상태다. 소극적 공리주의를 사례에 강하게 적용하여 행복의 가치를 무시하면, 상황이 더 악화되거나 고전 공리주의 이상의 끔찍한 결론이 도출된다. 이를 피하기 위해 약화된 형태로 행복의 가치를 인정할수록 고전 공리주의와 구분할 의미가 사라진다.[29] 누구든 되도록 빨리 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반출생주의 이전에 사망주의가 된다. 염세주의 철학자 필립 마인랜더(필립 바츠)는 비존재와 죽음의 무를 숭고하다고 여겼고, 자살을 찬미하며 결국 자살했다. 반면 베너타는 그나마라도 부여할 수 있는 삶의 소소한 개인적 의미마저 박탈하는 죽음 역시 해악이며, 존재하게 되는 것이 해악인 것과 별개로 이미 시작된 삶을 지속하는 것보다 당장 중단하는 게 항상 더 나은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처럼 사망주의는 반출생주의와 별개의 논증이 추가로 요구된다.[30] 소극적 공리주의나 사망주의에 따르면 과정상의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개인은 가능한 한 빨리 자살하는 것이 낫다. 또한 소극적 공리주의에 따르면 인류 또는 생명 전체를 최대한 신속하게, 강제로라도 절멸시키는 것이 옳다.[31] 인터넷을 둘러보면 사회주의공산주의, 자유주의민주주의교집합이 있는 사상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완전히 동일한 사상으로 취급하는 사람들이 흔하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사상과 관련된 주제는 건전한 토론이 안되는 경우가 많다.[32] 통상적으로 공리주의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행복의 최대화를 추구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행복 생산을 멈추게 만들 반출생주의에 동조하기 어렵다. 단 행복의 최대화에 필요한 인구 조절 측면에서 반출생주의를 효용으로 인식할 수는 있다.[33] 예컨대 소극적 공리주의자는 고통의 최소화, 생명의 절멸이라는 목적을 위해 출산 행위라는 수단이 필요하다면 이를 옹호할 수 있다. 반면 반출생주의자는 출산 행위가 옳지 않기 때문에 거부해야 하며, 모두가 이를 따른 결과 멸종하더라도 어쩔 수 없고, 멸종도 사실 나쁜 것은 아니라고 말할 뿐이지, 멸종을 최우선으로 하여 과정상의 희생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설령 출산을 장려하여 인구를 더 증가시켜야 멸종을 앞당길 수 있고, 결과적으로 더 많은 출산을 예방할 수 있다 한들, 그래도 출산을 장려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반출생주의라는 것이다.[34] 베너타는 다양한 비유를 통해 반출생주의가 곧 사망주의는 아님을 밝힌다. 극장에 들어가 상영이 시작된 후에야 지루한 영화인 걸 알고 후회하지만 나가지는 않는 것,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이 끔찍한 식단에 대해 불평하면서도 먹는 것, 대부분의 노예가 자살하지 않았고 노예제에 찬동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 해서 노예제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것 등.[35] 베너타는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을 들며, 어떤 유정적 존재를 그의 동의 없이 죽이는 게 그에게 좋다는 판단이 틀릴 경우 그에게 심각한 해악을 가하게 될 위험이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설사 당사자가 일절 고통과 공포를 느낄 수 없게끔 자는 사이에 몰래 마취시켜 죽일 수 있더라도, 당사자의 동의를 구하지 못한 살해 행위는 정당화가 어렵다.[36] 동의 없이 사람을 납치한 후 납치된 게 불만이면 자살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37] Wille zum Leben(Will to live). 생의지, 생존 의지 등으로도 번역된다. 생의지는 인간이 생식(번식)과 연애에 비이성적으로 집착하게 만든다. 찰스 다윈도 이런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영향을 받았다.[38] 시프린은 부자가 마을 상공에서 금괴를 뿌려 어떤 불운한 사람을 다치게 만들었을 때, 설령 그것이 선의에서 나온 행동이었을지라도 부자는 다친 사람에게 도덕적 책임을 진다는 비유를 든다. 그리고 출산 행위는 새로 가해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행해야 할 더 큰 피해로부터의 구조 행위가 아니며, 하지 않는다고 하여 태어나지 못해 아쉬운 당사자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위 부자의 기행보다도 정당화가 어렵다. 적어도 부자의 기행은 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당장 금괴가 더 아쉬운 당사자들의 존재에 의해 정당화될 여지는 있기 때문이다.[39] 여러 가지 해석이 존재하지만, 생명을 창조하는 행위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다는 해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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