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퀀트 윈드 작전
Operation Frequent Wind
미군과 한국군이 남베트남에서 벌인 마지막 작전.
국지적인 의미의 프리퀀트 윈드 작전이란 사이공의 함락이 눈 앞에 다가오자, 1975년 4월 29일에서 30일에 걸쳐서 약 24시간 동안 체류 미국 시민 1373명, 남베트남 시민과 기타 국적자 5595명을 탈출시킨 작전이다. 헬기 있는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사진이 바로 당시 사진이다.
하지만 당연히 이 날만 탈출시킨 것은 아니므로 이 항목에서는 베트남 탈출 과정을 모두 서술한다.
당시 미국은 총 4개의 옵션을 구상했다.
1975년 1월, 북베트남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1] 남베트남군은 패배와 붕괴를 거듭했다.
3월 25일, 남베트남 북부의 후에시가 함락되었다. 3월 27일, 남베트남과 미 해군은 다낭에 수송선을 보내 3일에 걸쳐서 약 3만명의 민간인과 군인을 해상으로 철수시켰다. 수송선을 이용한 해상 철수는 계속되었지만 북베트남군의 진격이 너무 빠르고 민간인을 피난시킬 곳도 마땅치 않았다.
3월 31일, 달랏 원자력 연구소(DNRI) 원자로에 있던 우라늄을 수송기 C-130으로 이동시켰다.
4월 1일부터는 본격적인 철수가 시작되었다. 항공기로 약 5만 7천명을 실어날랐는데, "베이비 리프트" 작전을 병행하여 2천 5백명의 전쟁고아들을 데려갔다. 이 와중 탄손누트 C-5 추락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4월 7일에는 캄보디아가 크메르 루주 공산군에 함락되었고, 미군은 캄보디아에서도 탈출 작전을 수행했다. 4월 8일에는 남베트남군의 F-5가 대통령궁을 폭격하고 도주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파일럿이 이미 오래 전에 북베트남이 심어둔 첩자였던 것이다.[2]
4월 21일, 사이공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 쑤언록이 함락되었다. 쑤언록은 레민다오 준장의 남베트남18사단이 격전을 치르며 4월 9일부터 4월21일까지 12일 간 버텨내고 있었다. 18사단은 남베트남군에서도 최약체로 평가되고 병력이 부족했음에도 필사적으로 버텨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몇 개 사단의 합동 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서 사이공의 함락이 대세라는 것이 드러났다.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미국을 비난하며 사퇴하였고, 가족을 해외로 피신시키고 25일 측근들과 함께 대만으로 망명했다.
4월 26일, 사이공 외곽의 촐롱 지구에 북베트남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4월 28일에는 북베트남군이 노획한 드래곤 플라이 공격기를 사용하여 떤선녓 비행장을 공습했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비행장을 이용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미군은 작전 옵션1의 사용을 취소하고, 옵션4로 이행했다. 민간 여객기나 군수송기를 이용한 수송 작전은 28일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종료되었다.
29일 오전 11시 부터 프리퀀트 윈드 작전개시 명령이 하달되었다. 최종단계인 옵션 4가 발동
여전히 북베트남 군의 포격이 떤선녓 비행장에 떨어지는 가운데, 경비병력으로 미해병 제9여단 병력이 투입되어 공항의 질서를 유지했다. 그리고 공항 내 DAO 및 미 대사관의 LZ(Landing Zone) 등 사전에 선정된 LZ를 통해 미국인과 동맹국가 시민의 탈출이 개시된다.
29일 저녁까지 사전 탈출대상자로 지정된 5,000명의 사람이 전원 탈출을 완료하고, DAO를 비롯한 시내의 LZ가 폐쇄되었다.
마지막 탈출구는 이제 미 대사관 옥상만이 남았다.[3] 미국대사관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하려는 미국인들과 주로 유산계층이나 남베트남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베트남인 및 소수의 일반 베트남인들이 몰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이 모든 공중탈출 피난민을 받아주는 항공모함의 갑판도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예정에 없던 F-5 전투기나, 남베트남에서 임의로 탈출한 항공기까지 수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무단으로 착함한 헬리콥터는 탑승 인원만 수용한 후 바다에 밀어버리는 과감한 조치를 감행해야 했다.[4]
오전 5시, 그레이엄 마틴 미국대사가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성조기를 내리고 철수했다.[5] 이와 함께 2100명의 미국인과 탈출심사를 통과한 베트남인들이 탈출했다. 2시간 뒤, 대사관을 수비하던 미 해병대도 뒤따라서 철수하였다. 해병대가 나갈 때가 되자 베트남어를 말하며 지상에서 피난민들을 통제하던 해병은 "화장실에 가야겠다"라는 변명을 하고 어둠을 이용해 몰래 대사관 옥상으로 갔고 마지막까지 지상에 있던 해병 3여명도 오전이 되자 자신들을 태울 헬기가 오지 않아 혼란스러워 하는 피난민들을 피해서 대사관안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옥상으로 갔다.[6] 대사관을 수비하던 해병대가 헬기들을 타고 빠져나가고, 마지막에는 11명의 해병들이 헬기를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들을 태울 헬기가 안와서 북베트남이 점령한 사이공에서 못나올뻔했다.[7] 이들은 해군에 무전으로 구조요청을 한 뒤 몰려드는 피난민을 막기 위해서 옥상 문 앞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버티다가 구조요청을 듣고 해군이 보낸 마지막 헬기를 타고 탈출했다.[8]
이 뒤에도 미 대사관은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아수라장이었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이들 중 남베트남인은 강제 억류되었고, 나머지 외국인은 북베트남의 방침에 따라 일부를 제외하고는[9] 대부분 조건 없이 석방됐다.
1975년 4월 30일, 오전 10시 24분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북베트남군이 진입하였다.
이와 함께 "보트 피플"이 시작되었다. 미군 함대가 해안을 벗어나자 피난민들의 보트가 해안을 덮었다. 미군은 예인선을 동원하여 피난민 선박을 모았고, 피난민들은 즉시 분류되고 무장해제 되었다. 간단한 의료검진을 마친 다음, 미리 준비된 수송선에 수용되었다. 난민의 수는 4만 4천명에 달했다.
남베트남 해군은 운용가능한 함정을 모조리 붕타우 해안에 집결시켰다. 26척의 남베트남 함정에 장병과 그 가족, 도합 3만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 역시 미군을 따라 남베트남 해역을 벗어났다. 해상의 피난민 선박수송작업은 5월 2일 까지 이어졌다.
4월 26일, 한국 해군은 LST 2척을 보냈고 2척의 LST(LST-810 계봉함[10] , LST-815 북한함[11] )에 한국인 교민과 소수의 남베트남 주민을 싣고 떠났다. 훗날 십자성작전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LST를 이용한 대피는 공식적으로는 소개 목적이 아니라 구호품 전달 목적이였다. 그래서 도착하여 구호품 전달식도 거하게 치루고 사진도 찍었다. 상황이 안 좋아지자 해군 본부에서는 다 내던지고 LST선만 탈출하라고 시간단위로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LST 전대장의 독단으로 교민 철수 작전을 지시한다. 문제는 교민들 상당수가 돈을 벌기 위한 불법체류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베트남측에서 한국 대사관에 뜻밖의 제안을 했는데, 남베트남의 VIP 500명을 수송해주면 비자 검사 안하고 한국 사람들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결국 동의하고 수송작전을 시작하였다. 한국 교민들은 웬만큼 다 태웠는데 남베트남의 VIP는 가족을 제외하고 본인만 150명밖에 안왔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여 한밤중에 그냥 출발하였는데 먼저 출발한 LST는 한밤중에 불을 전부 켜두고 베트남 사람들을 전부 위에 올려 너희 나라 사람들이니 죽일 테면 죽여라! 하는 식으로 월맹군들이 장악한 수로를 통과하여 나왔고 3시간뒤에 출발한 두번째 수송선은 반대로 불을 다 끄고 후레쉬 하나로 물길을 보면서 탈출하였다. 남베트남측에서는 VIP를 다 안 태웠다고 정선하라! 안 그러면 나포하겠다! 하며 협박했지만 무시당했다. 철수하는 도중 남베트남 해군의 YTL이 위협적으로 LST에 접근하여 갑판의 중기관총을 사격해 쫓아내기도 했다. 이들이 출발한 항구는 다음날 폭격당하였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 15명은 본국의 훈령을 어기고 탈출을 거부하여 남았다.
한국의 LST 탈출 작전이 끝나고 한국 대사관 직원 15명들은 미국의 군용기를 기다리며 대사관에 있었다. 그런데 미국 측에서 금일 비행기 탈출 계획은 취소됐으니 내일로 연기된다고 전화가 온다. 그러자 어린 직원 한명이 지금부터 각개약진을 할 때이니 나 혼자 민항기 타고 도망가겠다고 대사에게 말했다. 대사는 어이가 없었겠지만 "가는 길에 내 골프채 태국 대사관에 갔다 주게"라고 말하며 보내준다. 이 직원은 비행기 타러 떤선녓 공군기지로 갔고, 월맹군이 공황 활주로를 폭격하기 시작한다. 이때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직원은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떤선녓 기지는 활주로가 파괴되어 이용할 수 없게 된다.
본래 대사관 직원들은 미국의 항공편으로 탈출할 예정이었지만, 이렇게 일이 꼬이면서 미국 대사관에서도 남는 자리를 찾지 못했고 애초에 진입조차 하지 못해서 결국 탈출에 실패했다.
이 당시 탈출하지 못한 한국 교민 100여명과 한국 대사관 직원들 대부분은 그냥 풀려나 귀국했지만 이대용 공사 등 3명만은 억류되어 북한의 전향 강요 등으로 고생하다가 1980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참고로 이대용 공사는 당시 현역 육군 준장이며 무엇보다''' 중앙정보부'''소속이었다. 즉 이대용은 공사 직함을 가지고 베트남에 파견나온 중앙정보부 직원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70년대 한국의 핵심 권력기관인 중정 소속의 현역 장성이 북한으로 전향한다? 북한입장에서는 선전효과도 크고 실질적으로 빼낼 수 있는 정보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이대용을 북으로 데려오려고 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대용과 함께 억류된 3인 중 2인은 비교적 빨리 풀려났으나, 이대용은 5년을 베트남의 감옥에 머물러야 했다. 1979년 베트남-중국 전쟁에서 북한이 중국 편을 들자 빡친 베트남 정부의 태도 변화가 배경이 되어 이대용은 귀국할 수 있었다.
탈출하지 못한 이대용 공사 등 주월한국대사관 직원들과, 갈 곳이 없어 대사관에 몰려든 교민들이 대사관 내 식량이 떨어지자 외부에서 구매해 올 계획을 세웠는데, 한국 국적자임이 탄로나면 사로잡힐 것을 우려하여 고민하던 중 누군가가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인들한테 하도 당해서, 지금도 프랑스인들을 무서워 한다. 트럭에 프랑스 국기를 꽂고 다니면 아무도 손을 못 댈 것이다."라는 제안을 했고, 실제로 프랑스 국기를 단 트럭이 지나가자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고 순순히 비켜 주어, 무사히 식량을 구매해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대용 공사는 2017년 11월 14일 작고했다.
1. 개요
미군과 한국군이 남베트남에서 벌인 마지막 작전.
국지적인 의미의 프리퀀트 윈드 작전이란 사이공의 함락이 눈 앞에 다가오자, 1975년 4월 29일에서 30일에 걸쳐서 약 24시간 동안 체류 미국 시민 1373명, 남베트남 시민과 기타 국적자 5595명을 탈출시킨 작전이다. 헬기 있는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있는 사진이 바로 당시 사진이다.
하지만 당연히 이 날만 탈출시킨 것은 아니므로 이 항목에서는 베트남 탈출 과정을 모두 서술한다.
1.1. 작전 옵션
당시 미국은 총 4개의 옵션을 구상했다.
- 옵션 1은 떤선녓 공군기지 및 남베트남의 다른 공항을 통해서 민항기로 공중수송하는 방안이다.
- 옵션 2는 군용기로 공중수송하는 것이었다.
- 옵션 3은 사이공 항만을 통해서 해상수송하는 것이었다.
- 옵션 4는 최종계획으로서 헬리콥터로 공중수송하여 근해 항공모함으로 보내는 것이다.
2. 전개
2.1. 북베트남의 침공
1975년 1월, 북베트남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되었다. 미국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1] 남베트남군은 패배와 붕괴를 거듭했다.
3월 25일, 남베트남 북부의 후에시가 함락되었다. 3월 27일, 남베트남과 미 해군은 다낭에 수송선을 보내 3일에 걸쳐서 약 3만명의 민간인과 군인을 해상으로 철수시켰다. 수송선을 이용한 해상 철수는 계속되었지만 북베트남군의 진격이 너무 빠르고 민간인을 피난시킬 곳도 마땅치 않았다.
3월 31일, 달랏 원자력 연구소(DNRI) 원자로에 있던 우라늄을 수송기 C-130으로 이동시켰다.
2.2. 4월
4월 1일부터는 본격적인 철수가 시작되었다. 항공기로 약 5만 7천명을 실어날랐는데, "베이비 리프트" 작전을 병행하여 2천 5백명의 전쟁고아들을 데려갔다. 이 와중 탄손누트 C-5 추락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4월 7일에는 캄보디아가 크메르 루주 공산군에 함락되었고, 미군은 캄보디아에서도 탈출 작전을 수행했다. 4월 8일에는 남베트남군의 F-5가 대통령궁을 폭격하고 도주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파일럿이 이미 오래 전에 북베트남이 심어둔 첩자였던 것이다.[2]
4월 21일, 사이공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 쑤언록이 함락되었다. 쑤언록은 레민다오 준장의 남베트남18사단이 격전을 치르며 4월 9일부터 4월21일까지 12일 간 버텨내고 있었다. 18사단은 남베트남군에서도 최약체로 평가되고 병력이 부족했음에도 필사적으로 버텨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몇 개 사단의 합동 공격에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서 사이공의 함락이 대세라는 것이 드러났다.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미국을 비난하며 사퇴하였고, 가족을 해외로 피신시키고 25일 측근들과 함께 대만으로 망명했다.
4월 26일, 사이공 외곽의 촐롱 지구에 북베트남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4월 28일에는 북베트남군이 노획한 드래곤 플라이 공격기를 사용하여 떤선녓 비행장을 공습했다. 큰 피해는 없었지만 비행장을 이용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미군은 작전 옵션1의 사용을 취소하고, 옵션4로 이행했다. 민간 여객기나 군수송기를 이용한 수송 작전은 28일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종료되었다.
2.3. 29일: 프리퀀트 윈드
29일 오전 11시 부터 프리퀀트 윈드 작전개시 명령이 하달되었다. 최종단계인 옵션 4가 발동
여전히 북베트남 군의 포격이 떤선녓 비행장에 떨어지는 가운데, 경비병력으로 미해병 제9여단 병력이 투입되어 공항의 질서를 유지했다. 그리고 공항 내 DAO 및 미 대사관의 LZ(Landing Zone) 등 사전에 선정된 LZ를 통해 미국인과 동맹국가 시민의 탈출이 개시된다.
29일 저녁까지 사전 탈출대상자로 지정된 5,000명의 사람이 전원 탈출을 완료하고, DAO를 비롯한 시내의 LZ가 폐쇄되었다.
마지막 탈출구는 이제 미 대사관 옥상만이 남았다.[3] 미국대사관으로 헬리콥터를 타고 탈출하려는 미국인들과 주로 유산계층이나 남베트남에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 베트남인 및 소수의 일반 베트남인들이 몰려들어 아비규환을 이루었다.
이 모든 공중탈출 피난민을 받아주는 항공모함의 갑판도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예정에 없던 F-5 전투기나, 남베트남에서 임의로 탈출한 항공기까지 수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무단으로 착함한 헬리콥터는 탑승 인원만 수용한 후 바다에 밀어버리는 과감한 조치를 감행해야 했다.[4]
2.4. 30일: 마지막
오전 5시, 그레이엄 마틴 미국대사가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성조기를 내리고 철수했다.[5] 이와 함께 2100명의 미국인과 탈출심사를 통과한 베트남인들이 탈출했다. 2시간 뒤, 대사관을 수비하던 미 해병대도 뒤따라서 철수하였다. 해병대가 나갈 때가 되자 베트남어를 말하며 지상에서 피난민들을 통제하던 해병은 "화장실에 가야겠다"라는 변명을 하고 어둠을 이용해 몰래 대사관 옥상으로 갔고 마지막까지 지상에 있던 해병 3여명도 오전이 되자 자신들을 태울 헬기가 오지 않아 혼란스러워 하는 피난민들을 피해서 대사관안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옥상으로 갔다.[6] 대사관을 수비하던 해병대가 헬기들을 타고 빠져나가고, 마지막에는 11명의 해병들이 헬기를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이들을 태울 헬기가 안와서 북베트남이 점령한 사이공에서 못나올뻔했다.[7] 이들은 해군에 무전으로 구조요청을 한 뒤 몰려드는 피난민을 막기 위해서 옥상 문 앞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버티다가 구조요청을 듣고 해군이 보낸 마지막 헬기를 타고 탈출했다.[8]
이 뒤에도 미 대사관은 도망치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아수라장이었지만 이젠 어쩔 수 없었다. 이들 중 남베트남인은 강제 억류되었고, 나머지 외국인은 북베트남의 방침에 따라 일부를 제외하고는[9] 대부분 조건 없이 석방됐다.
1975년 4월 30일, 오전 10시 24분 남베트남 대통령궁에 북베트남군이 진입하였다.
2.5. 보트피플
이와 함께 "보트 피플"이 시작되었다. 미군 함대가 해안을 벗어나자 피난민들의 보트가 해안을 덮었다. 미군은 예인선을 동원하여 피난민 선박을 모았고, 피난민들은 즉시 분류되고 무장해제 되었다. 간단한 의료검진을 마친 다음, 미리 준비된 수송선에 수용되었다. 난민의 수는 4만 4천명에 달했다.
남베트남 해군은 운용가능한 함정을 모조리 붕타우 해안에 집결시켰다. 26척의 남베트남 함정에 장병과 그 가족, 도합 3만명이 수용되어 있었다. 이들 역시 미군을 따라 남베트남 해역을 벗어났다. 해상의 피난민 선박수송작업은 5월 2일 까지 이어졌다.
3. 한국의 철수
4월 26일, 한국 해군은 LST 2척을 보냈고 2척의 LST(LST-810 계봉함[10] , LST-815 북한함[11] )에 한국인 교민과 소수의 남베트남 주민을 싣고 떠났다. 훗날 십자성작전으로 기록된다.
그런데 LST를 이용한 대피는 공식적으로는 소개 목적이 아니라 구호품 전달 목적이였다. 그래서 도착하여 구호품 전달식도 거하게 치루고 사진도 찍었다. 상황이 안 좋아지자 해군 본부에서는 다 내던지고 LST선만 탈출하라고 시간단위로 전보를 보냈다.
그러나 LST 전대장의 독단으로 교민 철수 작전을 지시한다. 문제는 교민들 상당수가 돈을 벌기 위한 불법체류자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베트남측에서 한국 대사관에 뜻밖의 제안을 했는데, 남베트남의 VIP 500명을 수송해주면 비자 검사 안하고 한국 사람들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결국 동의하고 수송작전을 시작하였다. 한국 교민들은 웬만큼 다 태웠는데 남베트남의 VIP는 가족을 제외하고 본인만 150명밖에 안왔다. 상황이 너무 급박하여 한밤중에 그냥 출발하였는데 먼저 출발한 LST는 한밤중에 불을 전부 켜두고 베트남 사람들을 전부 위에 올려 너희 나라 사람들이니 죽일 테면 죽여라! 하는 식으로 월맹군들이 장악한 수로를 통과하여 나왔고 3시간뒤에 출발한 두번째 수송선은 반대로 불을 다 끄고 후레쉬 하나로 물길을 보면서 탈출하였다. 남베트남측에서는 VIP를 다 안 태웠다고 정선하라! 안 그러면 나포하겠다! 하며 협박했지만 무시당했다. 철수하는 도중 남베트남 해군의 YTL이 위협적으로 LST에 접근하여 갑판의 중기관총을 사격해 쫓아내기도 했다. 이들이 출발한 항구는 다음날 폭격당하였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 15명은 본국의 훈령을 어기고 탈출을 거부하여 남았다.
한국의 LST 탈출 작전이 끝나고 한국 대사관 직원 15명들은 미국의 군용기를 기다리며 대사관에 있었다. 그런데 미국 측에서 금일 비행기 탈출 계획은 취소됐으니 내일로 연기된다고 전화가 온다. 그러자 어린 직원 한명이 지금부터 각개약진을 할 때이니 나 혼자 민항기 타고 도망가겠다고 대사에게 말했다. 대사는 어이가 없었겠지만 "가는 길에 내 골프채 태국 대사관에 갔다 주게"라고 말하며 보내준다. 이 직원은 비행기 타러 떤선녓 공군기지로 갔고, 월맹군이 공황 활주로를 폭격하기 시작한다. 이때 마지막으로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직원은 탈출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떤선녓 기지는 활주로가 파괴되어 이용할 수 없게 된다.
본래 대사관 직원들은 미국의 항공편으로 탈출할 예정이었지만, 이렇게 일이 꼬이면서 미국 대사관에서도 남는 자리를 찾지 못했고 애초에 진입조차 하지 못해서 결국 탈출에 실패했다.
이 당시 탈출하지 못한 한국 교민 100여명과 한국 대사관 직원들 대부분은 그냥 풀려나 귀국했지만 이대용 공사 등 3명만은 억류되어 북한의 전향 강요 등으로 고생하다가 1980년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참고로 이대용 공사는 당시 현역 육군 준장이며 무엇보다''' 중앙정보부'''소속이었다. 즉 이대용은 공사 직함을 가지고 베트남에 파견나온 중앙정보부 직원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70년대 한국의 핵심 권력기관인 중정 소속의 현역 장성이 북한으로 전향한다? 북한입장에서는 선전효과도 크고 실질적으로 빼낼 수 있는 정보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이대용을 북으로 데려오려고 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대용과 함께 억류된 3인 중 2인은 비교적 빨리 풀려났으나, 이대용은 5년을 베트남의 감옥에 머물러야 했다. 1979년 베트남-중국 전쟁에서 북한이 중국 편을 들자 빡친 베트남 정부의 태도 변화가 배경이 되어 이대용은 귀국할 수 있었다.
탈출하지 못한 이대용 공사 등 주월한국대사관 직원들과, 갈 곳이 없어 대사관에 몰려든 교민들이 대사관 내 식량이 떨어지자 외부에서 구매해 올 계획을 세웠는데, 한국 국적자임이 탄로나면 사로잡힐 것을 우려하여 고민하던 중 누군가가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인들한테 하도 당해서, 지금도 프랑스인들을 무서워 한다. 트럭에 프랑스 국기를 꽂고 다니면 아무도 손을 못 댈 것이다."라는 제안을 했고, 실제로 프랑스 국기를 단 트럭이 지나가자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고 순순히 비켜 주어, 무사히 식량을 구매해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대용 공사는 2017년 11월 14일 작고했다.
4. 여담
- 한국 대사관 건물은 고아원으로 사용되다가,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하면서 호치민시 주재 총영사관으로 바뀌었다. 한국 대사관은 수도인 하노이에 설치됐다.
- 2006년, 이 때 탈출했던 김영관 대사는 기독교 선교 단체의 고문으로서 18년 만에 베트남을 다시 방문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재직 당시 그가 타던 캐딜락 자동차는 어찌어찌 구르다 보니 택시로 사용되고 있었다.기사
- 2014년, 이 작전 때 탈출한 베트남인 소년 중 한 명으로 미 육군 장교가 됐던 르엉쑤언비엣(Lương Xuân Việt)이 육군 준장으로 진급했다. 비엣은 10살 때 9명의 가족과 함께 베트남을 탈출하였다.[12] 미군 최초의 베트남인 장성인 르엉 장군은 현재 소장까지 진급했다.
- 이 작전에서 미 해군 F-14가 처음으로 실전에 데뷔했다.
[1] 제럴드 포드는 남베트남을 도와야한다고 했는데 의회에서 막았다.[2] 이 파일럿은 이후에도 몇 번 더 폭격했고, 전쟁이 끝난 다음에는 민항기 파일럿이 된다.[3] 실제로는 미 대사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강에 정박된 배들를 통해 탈출 할 수 있는 선택지도 있었다. 강줄기를 북베트남군이 점거하기 전이라 일단 어느 종류의 배든 타서 탈출하면 해상의 미해군이 구조해 줬는데, 헬기에만 목맨 사람들중 대다수는 버려졌다. 대사관 내로 밀고 들어온 민간인들이 헬기를 타지 못할 것을 직감한 한 미군 부사관이 트럭을 운전해 민간인 몇 십 명을 배를 탈 수 있는 강가의 부두로 보내 배를 탈 수 있게 한 경우도 있었다.[4] 조종사들의 가족을 싣고 온 한 헬기는 착함할 공간이 없는 군함 옆에 붙어서 가족들을 내리게 한 뒤에 바다에 불시착했다. 조종사는 무사히 구조되었다.[5] 마틴 대사는 건강이 매우 나쁜 상태였지만 마지막까지 남아 있으려 했다. 하지만 포드 대통령이 간곡하게 돌아오라고 부탁해서 결국 헬기에 올랐다. 그가 탑승하자 조종사는 항모쪽으로 그의 탈출을 의미하는 코드 '타이거(Tiger)'를 연발했다.[6] 치사하게 보이지만 이렇게 안하면 소수의 해병으론 상대하기 힘든 수천명의 피난민들이 난동을 일으켜 정작 해병대가 못나왔을 것이다[7] 정부에서 대사관 인원들이 다 나온 걸로 착각해서 헬기 수송을 중단했다.[8] 마지막으로 탄 사람은 탑승하다가 미끄러졌는데 조종사가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이륙해버렸다! 램프도어를 붙잡고 버티다가 다행히 인원수가 맞지 않아서 후방 출입구를 살펴보던 동료가 구해줬다.[9] 그 일부가 북한의 요구로 억류된 이대용 공사 등 3명이다.[10] 이후 LST-675로 함번 변경[11] 이후 LST-678로 함번 변경[12] 경력이 꽤나 화려한데 제101공수사단에서 영관급 장교를 지내며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에 참전했고 준장으로 진급하면서 주한미군의 미8군 부사령관을 역임하고 소장(계급)으로 진급하여 현재는 주일미군 육군의 사령관으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