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상주의
''Impressio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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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서 인상주의(impressionism)는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인정받는다. 인상주의와 이전 예술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감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대개 인상주의의 특징을 설명할 때 많은 사람들이 당대 실생활을 그렸다는 것을 주요 특징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것은 인상주의를 절반만 본 해석이다.
카스타냐리의 칼럼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는 인상주의를 "풍경 자체가 아니라 풍경이 낳은 '감각'을 묘사했다"라고 서술했다. 요컨대 인상주의자들은 감각이라는 것을 개념적인 영역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 감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외부를 향해 있지만 감각의 실체라는 것은 내면에 실존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것이 사실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점은 사실주의가 현실의 기계적 재현이라는 말로 폄하되곤 했던 것에 비해 인상주의의 경우 실재를 드러내면서도 (내면에 실존하는 감각을 이용한) 개인의 주관성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상주의가 현대 미술의 시작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바로 이 점, 실물과 일치하는 외양을 창조하면서도 개인의 자유를 발휘하는 것 때문이다.
카스타냐리의 경우 인상주의자들을 '자연주의자'라고 불렀는데 이 용어에 내포된 함의에는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표현을 전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타냐리 스스로도 말했듯이 인상주의자들은 자연주의라는 그의 용어에는 맞지 않았다.
쿠르베의 사실주의에서 실생활의 대상은 노동자, 농부와 같은 하층민이었다. 하지만 인상주의에서 실생활은 부르주아의 삶으로서 나타난다. 실생활을 표현하는 태도 또한 차이가 있었다. 가령 쿠르베의 회화가 정치적인 논쟁을 던질 정도로 도발적이었다면 인상주의자들에게서 이러한 격렬함은 희석되고 오히려 즐거움과 유희가 나타난다. 또한 쿠르베가 지방을 지향했던 것에 반해 인상주의자들은 (일괄적으로 적용이 불가능 하지만) 도회적인 인상을 띄었다.
19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프랑스 미술계는 크게 두 가지 예술 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는 기존의 고전주의적인 양식을 답습하며 제도적으로는 국가 주도의 살롱 체제를 따르는 소위 신고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명실공히 제도권 미술하에서 인정받는 그야말로 '정통'이었고 미술학교의 교육과정과 살롱 심사위원들도 이 정통의 계보를 이어받은 미술가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신고전주의적인 미술 체계를 포함하는 제도권 미술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모인 일군의 진보적인 화가들로 아직 이들을 규정하는 일관된 사조는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사실주의, 자연주의자들로 불렸다. 이들은 오늘날 미술사에서 당당히 한켠을 차지하고 있지만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기반이 매우 약했고 대중들의 지지 또한 약했다. 이처럼 양자의 대립은 흡사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유사한 점이 많다. 19세기 프랑스 화단을 평정하고 있었던 미술은 반세기전에 다비드가 기틀을 잡아놓은 이후 19세기까지 굳건한 토대를 마련해 놓았고 따라서 그 파이가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급진적인 화가 그룹은 길어봐야 20년을 넘기지 못했던 매우 약소한 그룹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반동이 판을 뒤집는 힘을 가지지는 못할 망정 물을 흐려놓을 수는 있었다. 때문에 제도권 미술의 공식적인 출품 경로인 살롱전에서는 이들을 일부 포용하여 전시를 꾸려가는 등의 유동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는 과거의 선례에 기반한 것인데 지난날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라는 상이한 화풍의 대립 속에서 외젠 들라크루아 같은 낭만주의자들의 수장을 심사위원단 자리에 배정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기본 기조는 아직도 보수적이었다.
19세기 중반. 제도권 미술이 소묘에 대한 지나친 강박, 역사화라는 제한된 주제에 매몰되자 이에 반발하는 젊은 화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바르비종 파'''라는 퐁텐블로에서 모인 자연주의자들이 처음이었는데 다만 이들의 태도가 그 이후에 등장하는 여러 운동들에 비해서 덜 전투적이었고 따라서 평행선을 달릴지언정 충돌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귀스타브 쿠르베가 등장하면서 제도권 미술과 비제도권 미술의 대립은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고전적인 규격에 맞지 않는 미술들이 차즘 살롱전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보수적인 심사위원단과 평론가들은 이 작품들에 혹평을 하며 자신들의 예술관을 고수하고자 했다. 이러한 대립속에서 1855년 쿠르베가 사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양자 간의 대립은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게 된다. 이 둘의 대립은 초기에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던 신고전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기존의 미술에 대한 반발은 계속해서 나왔고 점점 더 많은 예술가들이 이러한 운동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망의 1863년. 나폴레옹 3세의 치세하에서 치뤄진 살롱 전시는 과거 그 어떤 것들보다 이례적이었다. 63년의 살롱전 심사위원단은 유난히 보수적이었고 엄격한 심사기준을 적용했는데 그 결과 출품작 5000점 중에서 3000점이 낙선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 이례적인 낙선 비율은 예술계에 엄청난 동요를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동요가 황제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사태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급기야 황제는 인상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하게 되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는 4월 22일 오후 만국박람회장에서 낙선된 작품들을 둘러본 이후 "5월 15일 산업관의 다른 한쪽에서 낙선된 작품들을 전시할 것이다"라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살롱전의 낙선으로 좌절하고 있던 많은 예술가는 이 조치에 한껏 기대감을 품었고 일부는 나폴레옹 3세의 자유주의적 조치에 의구심을 품기도 했지만 쿠르베를 비롯한 전위적인 작가들은 그 조치의 속내가 무엇이던간에 산업관에 걸 작품들을 선별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1863년의 살롱전에는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도 끼어있었다. 그는 비록 그 자신이 쿠르베처럼 논쟁적인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몇몇 급진적인 미술가들이 주장하듯이 '공식미술'이 혁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그의 이러한 관점과는 무관하게 충분히 논쟁적이었다.
낙선 전 당일 수많은 관중들이 이 실패한 작품들을 보러오기 위해 전시장을 찾았다. 관중들의 반응은 대개 일관적이었다. 오늘날에도 많이 전해지듯이 급진적인 낙선 작품들은 실력이 부족한 화가의 작품으로 치부되었고 공개적으로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물론 몇몇 평론가들은 낙선전의 작품에 대해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마호 복장을 한 청년>, <에스파다 옷차림의 V양>, <풀밭위의 점심>을 출품한 마네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다. 그에 대한 비판은 주로 기법적인 측면에서 기인했다. 대다수의 관중과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이 미숙하고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다. 비록 라파엘로의 동판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었지만 그 작품은 당대에 경박하다는 혹평을 피할수가 없었다. 특히 세부묘사에 있어서 붓 자국이 보일정도로 단순하게 처리되고 배경 또한 세부묘사가 적은 것은 기존의 미술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러한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들라크루아, 쿠르베를 잇는 전위적인 화가 그룹의 우두머리로 떠올랐다. 모네, 바지유와 같은 후일 인상주의 운동의 주축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경탄해 마지 않았다. 후일 마네의 형과 결혼을 하게되는 인상주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도 이 전시에 감명을 받고 인상주의의 길로 뛰어들었다. 인상주의자 그룹중에서 후기 인상주의로의 이행을 이루었고 근대와 현대 미술의 분기점을 가르는 실험적 예술 운동을 진행했던 세잔 또한 마네의 작품에 감명받았다. 장장 20년에 걸친 인상주의 운동의 투쟁의 역사가 바로 1863년의 낙선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863년이 인상주의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이유는 마네라는 구심점이 이때를 기준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급진적인 화풍을 배제하기 위한 이례적인 낙선 비율과 뒤이은 화가들의 반발 그리고 낙선전의 출품과 이 전시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은 공교롭게도 인상주의를 집단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인상주의 역사에서 제일 먼저 언급되어야 할 인물은 에두아르 마네이다. 그가 1863년 낙선전에서 선보인 <풀밭 위의 점심>은 단숨에 사람들 입소문을 탔다. '''나쁘게 악명을 타서 문제지만.''' <풀밭 위의 점심>에 가해진 비판의 첫번째 요점은 '너무 사실적'이라는 것, 즉 주제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직접적이라는 것이었다. 과거 역사나 신화와 같은 먼 세계의 교훈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나폴레옹 3세 시대의 평범한 도시인이 소풍 나온 장면 '''따위나''' 그려서 뭐하자는거냐? 이런 식이었다[1][2] .
게다가 불만인 사람들은 '그림을 너무 못그렸다'고도 지적했다. 이전 그림들이 붓자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데 반해, 마네는 붓자국을 그냥 드러냈다. 나중에 가면 이 붓자국 때문에 작가 감정하기가 쉬워져서 도리어 가치가 올라가지만, 이때만 해도 프랑스 사람들은 오늘날 한국 사람들보다도 더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그림이 입체감 없이(쉽게 말해 3D 같은 느낌을 안줬다는 거다) 평평한 것도 지적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일반인들은 이 점을 눈에 거슬리게 볼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평평함이 마네를 혁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이후 클레멘트 그린버그를 위시한 이론가들은 마네가 '그림을 그림답게 그렸다'고 추켜세웠다. 괜히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그렸다, 즉, 2D 주제에 3D 인척 환영을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본 것이다. 이게 나중에 '순수 회화(pure painting)'라는 말의 기원이 된다. 즉, 회화만의 특징 이외에 다른 효과는 배제한 그림이 나오게 된 것이다. 조각처럼 볼륨이 있으면 안되고, 문학처럼 이야기가 있으면 안되고, 건축처럼 공간감이 느껴지면 안 되고, 음악처럼 소리와 시간이 느껴지면 안 된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역으로 이 회화상 추구가 오늘날 추상화를 만든 결과를 낳았고, 일반인이 보기에 미술은 어렵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 것이다.'''
마네는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약간 반항끼가 있었는지, 그는 <올랭피아>에서는 아예 매춘부를 등장시켰다. 서양전통회화에서 아무리 누드를 그려제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여신, 즉 비현실의 존재를 그린 것이었다. 하지만 마네는 그냥 아는 지인을 모델로 세워 그렸다. 모델이 된 빅토린 뫼랑은 화가 지망생이었다.# 문제는 이 여자가 실제 여자라는 것. 그리고 '올랭피아'라는 이름이 매춘부 이름으로 흔한 이름이란 거다. 오늘날 한국 입장에서 따지면 오피에서 성매매하는 여자 같은 이름을 그림에 붙이고는 그린 거나 마찬가지. 앞서 <풀밭 위의 점심>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는 당대 사람들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
게다가 이 그림이 불편한 두 번째 이유는, 그림 속 여자가 거만하게 날 노려다 본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또 후대 학자들에게 큰 평가를 받는 요인이 된다. 왜냐면 이는 연극성을 제거한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가 내 눈을 마주보지 않고 없는 듯이 행동하는 걸 '연극하는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이전 회화에서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마치 관람자가 없는 듯이 행동하는 것처럼 그려졌다. 이건 지금도 그렇다. 광고 속 모델이 당신을 공격할 듯이 나오면 보는 사람은 불안할 것이다. 보는 사람 보기 좋게 그려진 그림은 등장인물을 정면을 노려보도록 그리지 않는다. 화면 밖 먼 곳을 보거나, 화면 속 다른 사람과 눈길을 주고받거나, 정 관객을 바라보도록 그려졌으면 상냥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그려진다. 모나리자를 생각해보자. 이 느낌을 요즘 느낌에 맞게 표현한다면, '''길거리 전광판에 고3 여학생이 벌거벗은 채 나와 날 바라보는 느낌?'''정도라 하겠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당황할 만도 하다.
또 다른 마네 그림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건, 초상화에서 인물의 '내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차적인 요소인 정물에서 테크닉을 보여줄 뿐'이라거나 '인물이 정물화같이' 그려졌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후대 연구자들은 바로 이 부분에서 마네가 새로운 근대성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마네는 오늘날 도시인의 감성 그대로 초상을 그린 것이다. '''오늘날 도시 사람들은 무덤덤하게 그냥 지나치며 가끔 바라볼 뿐, 타인에게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마네는 바로 이 무심함, 냉담함을 그린 것이다.''' 이걸 쿨한 것으로 볼지, 아니면 감정이 결여된 것으로 볼지는 다른 문제지만, 어쨌든 이런 '쿨시크한' 표현은 오늘날 광고에서도 많이 나오는 표현이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쯤부터 나타난 도시의 대중들의 분위기가, 이미 프랑스에서는 1860년대에 있었다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사실 인상주의는 야하고 도발적인 그림만 있는 게 아니다. 대다수 대중들은 흔히 인상파 분위기의 그림에서 보이는 색채나 붓터치를 좋아하는 것이다. 당대에는 그림을 못그렸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사실 이렇게 붓터치가 드러날 정도로 얇게 바르면 색상이 화사해진다. 마네 이후론 아예 칙칙한 밑칠을 안하고 그리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후기인상주의만큼은 아니자만, 인상주의의 붓터치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인상 : 해돋이> 그림도 그렇고 말이다. 저런 그림을 사실적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냥 붓질 슥슥해서 그린 거니까. 하지만 우리는 사실적이라고 느낀다. 말 그대로 일출의 인상을 잘 잡아냈기 때문이다. 해가 떠오를 때 붉게 물든 하늘 색과 아직 새벽처럼 새파란 바다색, 그리고 물결에 일렁이는 표면의 그림자를 말이다.
마네에 영향[3] 을 받아 등장한 소위 인상주의자들은 이 빛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빛과 색채에 하악거린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인간 사진기가 되려고 했다. 이 사람들은 당대의 풍습과 사회상을 마치 사진찍듯 그리려 하다 보니, 야외작업을 많이 했다. 어찌보면 잘 놀았고, 잘 느끼고, 잘 그린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프랑스적인 느낌을 잘 보여주는 화파라고 할까. 뭔가 '''소소한 것에 되게 감격하고 즐거워하는 프랑스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특히 르누아르는 이런 분위기를 제대로 보여주는 화가다. <보트 위의 점심식사>를 보면 정말 즐겁게 잘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부 묘사를 봐도 빛에 따른 살결의 색채 변화를 잘 표현해 행복한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정작 화가 자신은 별로 안 행복하게 살았는데, 그림은 행복해보이는 특이한 경우.(…)
다만 주의할 건 이 소소한 것에 감격하고 즐거워하는 태도도 그냥 원래 그랬던 게 아니라는 거다. 이런 태도도 어찌보면 심심한 도시생활에 적응하며 노력하다보니 만들어진 산물이다. 그리고 이런 행복한 생활은 어디까지나 중상류층이나 가능했다는 걸 기억하자. 같은 인상주의 작가라도 에드가 드가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에서 우울한 당대 서민들의 모습을 그렸다. 압생트는 알콜도수가 40~70도 정도 되는 상당히 도수가 높은 술이다.[4] 이 압생트를 당대 프랑스 서민 노동자들은 정말 소맥을 걸치듯 빨아제꼈을 것이다. 하층민이나 빈민들의 삶은 아무리 문화수도 파리라 해도 별 수 없었다. 축구나 럭비 중계나 텔레비전 방송도 없었던 당시에 여가 활동이란 것도 먹고 마시고 서커스 보고 정도였으니. 게다가 동시대의 프랑스 중상류층은 베트남에서 멀티 돌리며 미네랄을 빨아먹어가며 그런 행복을 유지한 것이다.
이후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새로운 스타일들인 탈인상주의가 등장한다.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았지만 인상주의 써클에 참가하지 않거나 인상주의의 몇 가지 특징에 공감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그려낸 사람들로, 점묘법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로 시작해,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등의 화가들이 있다. 물론 인상주의자들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친분과 미술적 교류가 있었지만, 탈인상주의자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탈인상주의라는 한 미술사조로 묶어 설명하는 데에는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등으로 대표되는 음악사조로, 전통적인 조성이 붕괴되면서 신비롭고 우주적인 느낌을 주며, 선율이 점차 해체되고 파편적음 음향효과로 기능하여 묘사적인 곡이 많다. 일반적으로 낭만주의의 마지막, 또는 현대음악의 서막으로 취급되며, 이후 무조음악등의 더욱 파격적인 음악이 등장하면서 사실상 저 둘 이외에 이렇다 할 작곡가가 없는, 비교적 단명한 음악사조가 되고 말았다.
인상주의 음악에서는 온음음계(Whole tone scale)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 온음음계는 음들간 상대적 간격이 일정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음계와 비교하면 음정의 권력관계가 잘 나타나지 않아서 불안정하고 목적지가 없는 듯한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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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술사조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에 반대하여, 19세기 중후반 프랑스의 사회 모습을 담아내려 한 화파이다. 대략 1863년에서 1890년 사이에 벌어졌다. 현대미술과 모더니즘의 시작을 알린 미술사조이다. 인상파는 이 인상주의의 특징을 가지고 작업한 예술가들을 칭하는 말이다.'''회화는 예술가의 기질을 통해 본 자연의 한 귀퉁이다.'''
- 에밀 졸라
미술에서 인상주의(impressionism)는 현대미술의 시작으로 인정받는다. 인상주의와 이전 예술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감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변화'''가 생겼다는 점이다.
1.1. 특징
대개 인상주의의 특징을 설명할 때 많은 사람들이 당대 실생활을 그렸다는 것을 주요 특징으로 삼는다. 하지만 이것은 인상주의를 절반만 본 해석이다.
카스타냐리의 칼럼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는 인상주의를 "풍경 자체가 아니라 풍경이 낳은 '감각'을 묘사했다"라고 서술했다. 요컨대 인상주의자들은 감각이라는 것을 개념적인 영역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 감각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외부를 향해 있지만 감각의 실체라는 것은 내면에 실존한다고 믿은 것이다. 이것이 사실주의자들과 구별되는 점은 사실주의가 현실의 기계적 재현이라는 말로 폄하되곤 했던 것에 비해 인상주의의 경우 실재를 드러내면서도 (내면에 실존하는 감각을 이용한) 개인의 주관성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상주의가 현대 미술의 시작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바로 이 점, 실물과 일치하는 외양을 창조하면서도 개인의 자유를 발휘하는 것 때문이다.
카스타냐리의 경우 인상주의자들을 '자연주의자'라고 불렀는데 이 용어에 내포된 함의에는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표현을 전제하고 있었다. 하지만 카스타냐리 스스로도 말했듯이 인상주의자들은 자연주의라는 그의 용어에는 맞지 않았다.
쿠르베의 사실주의에서 실생활의 대상은 노동자, 농부와 같은 하층민이었다. 하지만 인상주의에서 실생활은 부르주아의 삶으로서 나타난다. 실생활을 표현하는 태도 또한 차이가 있었다. 가령 쿠르베의 회화가 정치적인 논쟁을 던질 정도로 도발적이었다면 인상주의자들에게서 이러한 격렬함은 희석되고 오히려 즐거움과 유희가 나타난다. 또한 쿠르베가 지방을 지향했던 것에 반해 인상주의자들은 (일괄적으로 적용이 불가능 하지만) 도회적인 인상을 띄었다.
1.2. 전개
19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프랑스 미술계는 크게 두 가지 예술 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하나는 기존의 고전주의적인 양식을 답습하며 제도적으로는 국가 주도의 살롱 체제를 따르는 소위 신고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명실공히 제도권 미술하에서 인정받는 그야말로 '정통'이었고 미술학교의 교육과정과 살롱 심사위원들도 이 정통의 계보를 이어받은 미술가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신고전주의적인 미술 체계를 포함하는 제도권 미술에 대한 반발작용으로 모인 일군의 진보적인 화가들로 아직 이들을 규정하는 일관된 사조는 없었지만 일반적으로 사실주의, 자연주의자들로 불렸다. 이들은 오늘날 미술사에서 당당히 한켠을 차지하고 있지만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기반이 매우 약했고 대중들의 지지 또한 약했다. 이처럼 양자의 대립은 흡사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유사한 점이 많다. 19세기 프랑스 화단을 평정하고 있었던 미술은 반세기전에 다비드가 기틀을 잡아놓은 이후 19세기까지 굳건한 토대를 마련해 놓았고 따라서 그 파이가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급진적인 화가 그룹은 길어봐야 20년을 넘기지 못했던 매우 약소한 그룹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작은 반동이 판을 뒤집는 힘을 가지지는 못할 망정 물을 흐려놓을 수는 있었다. 때문에 제도권 미술의 공식적인 출품 경로인 살롱전에서는 이들을 일부 포용하여 전시를 꾸려가는 등의 유동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는 과거의 선례에 기반한 것인데 지난날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라는 상이한 화풍의 대립 속에서 외젠 들라크루아 같은 낭만주의자들의 수장을 심사위원단 자리에 배정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기본 기조는 아직도 보수적이었다.
19세기 중반. 제도권 미술이 소묘에 대한 지나친 강박, 역사화라는 제한된 주제에 매몰되자 이에 반발하는 젊은 화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바르비종 파'''라는 퐁텐블로에서 모인 자연주의자들이 처음이었는데 다만 이들의 태도가 그 이후에 등장하는 여러 운동들에 비해서 덜 전투적이었고 따라서 평행선을 달릴지언정 충돌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귀스타브 쿠르베가 등장하면서 제도권 미술과 비제도권 미술의 대립은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고전적인 규격에 맞지 않는 미술들이 차즘 살롱전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보수적인 심사위원단과 평론가들은 이 작품들에 혹평을 하며 자신들의 예술관을 고수하고자 했다. 이러한 대립속에서 1855년 쿠르베가 사실주의 선언을 발표하면서 양자 간의 대립은 극단적인 상황에 치닫게 된다. 이 둘의 대립은 초기에는 대중들의 지지를 받았던 신고전주의자들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기존의 미술에 대한 반발은 계속해서 나왔고 점점 더 많은 예술가들이 이러한 운동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망의 1863년. 나폴레옹 3세의 치세하에서 치뤄진 살롱 전시는 과거 그 어떤 것들보다 이례적이었다. 63년의 살롱전 심사위원단은 유난히 보수적이었고 엄격한 심사기준을 적용했는데 그 결과 출품작 5000점 중에서 3000점이 낙선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 이례적인 낙선 비율은 예술계에 엄청난 동요를 불러일으켰고 이러한 동요가 황제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사태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급기야 황제는 인상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을 형성하게 되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는 4월 22일 오후 만국박람회장에서 낙선된 작품들을 둘러본 이후 "5월 15일 산업관의 다른 한쪽에서 낙선된 작품들을 전시할 것이다"라는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살롱전의 낙선으로 좌절하고 있던 많은 예술가는 이 조치에 한껏 기대감을 품었고 일부는 나폴레옹 3세의 자유주의적 조치에 의구심을 품기도 했지만 쿠르베를 비롯한 전위적인 작가들은 그 조치의 속내가 무엇이던간에 산업관에 걸 작품들을 선별해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1863년의 살롱전에는 인상주의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도 끼어있었다. 그는 비록 그 자신이 쿠르베처럼 논쟁적인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몇몇 급진적인 미술가들이 주장하듯이 '공식미술'이 혁파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그의 이러한 관점과는 무관하게 충분히 논쟁적이었다.
낙선 전 당일 수많은 관중들이 이 실패한 작품들을 보러오기 위해 전시장을 찾았다. 관중들의 반응은 대개 일관적이었다. 오늘날에도 많이 전해지듯이 급진적인 낙선 작품들은 실력이 부족한 화가의 작품으로 치부되었고 공개적으로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물론 몇몇 평론가들은 낙선전의 작품에 대해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마호 복장을 한 청년>, <에스파다 옷차림의 V양>, <풀밭위의 점심>을 출품한 마네에 대한 평가는 혹독했다. 그에 대한 비판은 주로 기법적인 측면에서 기인했다. 대다수의 관중과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이 미숙하고 완성되지 않은 것'''이라고 여겼다. 비록 라파엘로의 동판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었지만 그 작품은 당대에 경박하다는 혹평을 피할수가 없었다. 특히 세부묘사에 있어서 붓 자국이 보일정도로 단순하게 처리되고 배경 또한 세부묘사가 적은 것은 기존의 미술에 익숙했던 사람들에게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러한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마네는 들라크루아, 쿠르베를 잇는 전위적인 화가 그룹의 우두머리로 떠올랐다. 모네, 바지유와 같은 후일 인상주의 운동의 주축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 경탄해 마지 않았다. 후일 마네의 형과 결혼을 하게되는 인상주의 화가 베르트 모리조도 이 전시에 감명을 받고 인상주의의 길로 뛰어들었다. 인상주의자 그룹중에서 후기 인상주의로의 이행을 이루었고 근대와 현대 미술의 분기점을 가르는 실험적 예술 운동을 진행했던 세잔 또한 마네의 작품에 감명받았다. 장장 20년에 걸친 인상주의 운동의 투쟁의 역사가 바로 1863년의 낙선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1863년이 인상주의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이유는 마네라는 구심점이 이때를 기준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급진적인 화풍을 배제하기 위한 이례적인 낙선 비율과 뒤이은 화가들의 반발 그리고 낙선전의 출품과 이 전시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은 공교롭게도 인상주의를 집단적인 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이다.
1.2.1. 에두아르 마네
앞서 언급했듯 인상주의 역사에서 제일 먼저 언급되어야 할 인물은 에두아르 마네이다. 그가 1863년 낙선전에서 선보인 <풀밭 위의 점심>은 단숨에 사람들 입소문을 탔다. '''나쁘게 악명을 타서 문제지만.''' <풀밭 위의 점심>에 가해진 비판의 첫번째 요점은 '너무 사실적'이라는 것, 즉 주제가 지나치게 현실적이고 직접적이라는 것이었다. 과거 역사나 신화와 같은 먼 세계의 교훈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나폴레옹 3세 시대의 평범한 도시인이 소풍 나온 장면 '''따위나''' 그려서 뭐하자는거냐? 이런 식이었다[1][2] .
게다가 불만인 사람들은 '그림을 너무 못그렸다'고도 지적했다. 이전 그림들이 붓자국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그리는 것을 목적으로 한 데 반해, 마네는 붓자국을 그냥 드러냈다. 나중에 가면 이 붓자국 때문에 작가 감정하기가 쉬워져서 도리어 가치가 올라가지만, 이때만 해도 프랑스 사람들은 오늘날 한국 사람들보다도 더 보수적이었다.
그리고 그림이 입체감 없이(쉽게 말해 3D 같은 느낌을 안줬다는 거다) 평평한 것도 지적을 받았다. 오늘날에도 일반인들은 이 점을 눈에 거슬리게 볼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평평함이 마네를 혁신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이후 클레멘트 그린버그를 위시한 이론가들은 마네가 '그림을 그림답게 그렸다'고 추켜세웠다. 괜히 거짓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그렸다, 즉, 2D 주제에 3D 인척 환영을 보여주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본 것이다. 이게 나중에 '순수 회화(pure painting)'라는 말의 기원이 된다. 즉, 회화만의 특징 이외에 다른 효과는 배제한 그림이 나오게 된 것이다. 조각처럼 볼륨이 있으면 안되고, 문학처럼 이야기가 있으면 안되고, 건축처럼 공간감이 느껴지면 안 되고, 음악처럼 소리와 시간이 느껴지면 안 된다고 여기게 된 것이다. '''역으로 이 회화상 추구가 오늘날 추상화를 만든 결과를 낳았고, 일반인이 보기에 미술은 어렵다는 인식을 심어주게 된 것이다.'''
마네는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약간 반항끼가 있었는지, 그는 <올랭피아>에서는 아예 매춘부를 등장시켰다. 서양전통회화에서 아무리 누드를 그려제꼈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여신, 즉 비현실의 존재를 그린 것이었다. 하지만 마네는 그냥 아는 지인을 모델로 세워 그렸다. 모델이 된 빅토린 뫼랑은 화가 지망생이었다.# 문제는 이 여자가 실제 여자라는 것. 그리고 '올랭피아'라는 이름이 매춘부 이름으로 흔한 이름이란 거다. 오늘날 한국 입장에서 따지면 오피에서 성매매하는 여자 같은 이름을 그림에 붙이고는 그린 거나 마찬가지. 앞서 <풀밭 위의 점심>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는 당대 사람들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
게다가 이 그림이 불편한 두 번째 이유는, 그림 속 여자가 거만하게 날 노려다 본다는 것이다. 근데 이게 또 후대 학자들에게 큰 평가를 받는 요인이 된다. 왜냐면 이는 연극성을 제거한 것으로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대가 내 눈을 마주보지 않고 없는 듯이 행동하는 걸 '연극하는 것 같다'고 말하곤 한다. 이전 회화에서 그림 속 등장인물들은 마치 관람자가 없는 듯이 행동하는 것처럼 그려졌다. 이건 지금도 그렇다. 광고 속 모델이 당신을 공격할 듯이 나오면 보는 사람은 불안할 것이다. 보는 사람 보기 좋게 그려진 그림은 등장인물을 정면을 노려보도록 그리지 않는다. 화면 밖 먼 곳을 보거나, 화면 속 다른 사람과 눈길을 주고받거나, 정 관객을 바라보도록 그려졌으면 상냥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그려진다. 모나리자를 생각해보자. 이 느낌을 요즘 느낌에 맞게 표현한다면, '''길거리 전광판에 고3 여학생이 벌거벗은 채 나와 날 바라보는 느낌?'''정도라 하겠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이 당황할 만도 하다.
또 다른 마네 그림의 특징으로 여겨지는 건, 초상화에서 인물의 '내면'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차적인 요소인 정물에서 테크닉을 보여줄 뿐'이라거나 '인물이 정물화같이' 그려졌다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후대 연구자들은 바로 이 부분에서 마네가 새로운 근대성을 보여주었다고 말한다. 마네는 오늘날 도시인의 감성 그대로 초상을 그린 것이다. '''오늘날 도시 사람들은 무덤덤하게 그냥 지나치며 가끔 바라볼 뿐, 타인에게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마네는 바로 이 무심함, 냉담함을 그린 것이다.''' 이걸 쿨한 것으로 볼지, 아니면 감정이 결여된 것으로 볼지는 다른 문제지만, 어쨌든 이런 '쿨시크한' 표현은 오늘날 광고에서도 많이 나오는 표현이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쯤부터 나타난 도시의 대중들의 분위기가, 이미 프랑스에서는 1860년대에 있었다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사실 인상주의는 야하고 도발적인 그림만 있는 게 아니다. 대다수 대중들은 흔히 인상파 분위기의 그림에서 보이는 색채나 붓터치를 좋아하는 것이다. 당대에는 그림을 못그렸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사실 이렇게 붓터치가 드러날 정도로 얇게 바르면 색상이 화사해진다. 마네 이후론 아예 칙칙한 밑칠을 안하고 그리기도 했고 말이다. 그리고 후기인상주의만큼은 아니자만, 인상주의의 붓터치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인상 : 해돋이> 그림도 그렇고 말이다. 저런 그림을 사실적이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냥 붓질 슥슥해서 그린 거니까. 하지만 우리는 사실적이라고 느낀다. 말 그대로 일출의 인상을 잘 잡아냈기 때문이다. 해가 떠오를 때 붉게 물든 하늘 색과 아직 새벽처럼 새파란 바다색, 그리고 물결에 일렁이는 표면의 그림자를 말이다.
1.2.2. 마네 이후
마네에 영향[3] 을 받아 등장한 소위 인상주의자들은 이 빛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빛과 색채에 하악거린 이 사람들은, 말 그대로 인간 사진기가 되려고 했다. 이 사람들은 당대의 풍습과 사회상을 마치 사진찍듯 그리려 하다 보니, 야외작업을 많이 했다. 어찌보면 잘 놀았고, 잘 느끼고, 잘 그린 사람들이다. 그야말로 프랑스적인 느낌을 잘 보여주는 화파라고 할까. 뭔가 '''소소한 것에 되게 감격하고 즐거워하는 프랑스인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특히 르누아르는 이런 분위기를 제대로 보여주는 화가다. <보트 위의 점심식사>를 보면 정말 즐겁게 잘 노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부 묘사를 봐도 빛에 따른 살결의 색채 변화를 잘 표현해 행복한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정작 화가 자신은 별로 안 행복하게 살았는데, 그림은 행복해보이는 특이한 경우.(…)
다만 주의할 건 이 소소한 것에 감격하고 즐거워하는 태도도 그냥 원래 그랬던 게 아니라는 거다. 이런 태도도 어찌보면 심심한 도시생활에 적응하며 노력하다보니 만들어진 산물이다. 그리고 이런 행복한 생활은 어디까지나 중상류층이나 가능했다는 걸 기억하자. 같은 인상주의 작가라도 에드가 드가는 <압생트 마시는 사람>에서 우울한 당대 서민들의 모습을 그렸다. 압생트는 알콜도수가 40~70도 정도 되는 상당히 도수가 높은 술이다.[4] 이 압생트를 당대 프랑스 서민 노동자들은 정말 소맥을 걸치듯 빨아제꼈을 것이다. 하층민이나 빈민들의 삶은 아무리 문화수도 파리라 해도 별 수 없었다. 축구나 럭비 중계나 텔레비전 방송도 없었던 당시에 여가 활동이란 것도 먹고 마시고 서커스 보고 정도였으니. 게다가 동시대의 프랑스 중상류층은 베트남에서 멀티 돌리며 미네랄을 빨아먹어가며 그런 행복을 유지한 것이다.
1.3. 영향
이후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은 새로운 스타일들인 탈인상주의가 등장한다.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았지만 인상주의 써클에 참가하지 않거나 인상주의의 몇 가지 특징에 공감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그려낸 사람들로, 점묘법으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로 시작해, 폴 세잔, 폴 고갱, 빈센트 반 고흐 등의 화가들이 있다. 물론 인상주의자들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끼리 친분과 미술적 교류가 있었지만, 탈인상주의자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탈인상주의라는 한 미술사조로 묶어 설명하는 데에는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1.4. 대표 작가
- 귀스타브 카유보트
-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 앙리 팡탱 라투르
- 에두아르 마네(1832-1883)
- 에드가 드가(1834-1917)
- 장 프레데릭 바지유
- 카미유 피사로(1830-1903)
- 클로드 모네(1840-1926)
- 폴 고갱(1848-1903)
- 폴 세잔(1839-1906)
-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1841-1919)
- 오귀스트 로댕
- 베르트 모리조
2. 음악사조
클로드 드뷔시, 모리스 라벨 등으로 대표되는 음악사조로, 전통적인 조성이 붕괴되면서 신비롭고 우주적인 느낌을 주며, 선율이 점차 해체되고 파편적음 음향효과로 기능하여 묘사적인 곡이 많다. 일반적으로 낭만주의의 마지막, 또는 현대음악의 서막으로 취급되며, 이후 무조음악등의 더욱 파격적인 음악이 등장하면서 사실상 저 둘 이외에 이렇다 할 작곡가가 없는, 비교적 단명한 음악사조가 되고 말았다.
인상주의 음악에서는 온음음계(Whole tone scale)가 자주 사용되는데, 이 온음음계는 음들간 상대적 간격이 일정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음계와 비교하면 음정의 권력관계가 잘 나타나지 않아서 불안정하고 목적지가 없는 듯한 느낌을 준다.
[1] 특히, 이러한 '너무 사실적'이라는 비판이 끓어오른 것은 이 그림이 여성의 누드를 다루는 방법이 당시 사회의 도덕적 감정을 건드린 면이 컸기 때문이었다. 여신이나 요정등의 초자연적인 존재, 잘 해야 역사적 인물을 다룬 당시의 다른 누드화들과는 달리 '평범한 도시인이 소풍 나온 장면'에서 미적으로 이상화되지 않은 여성의 누드가 그것도 관객을 빤히 바라보는 구도로 등장하기에 이것이 '현실적인' 여성의 누드로 느껴져 불편한 감정을 자극했다는 것. 좀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도시 근교의 야외로 소풍을 나가면서 매춘부를 데리고 가서 옷을 벗겨놓는 변태성욕자(하지만, 관객 주변에도 흔히 있는 평범한 도시의 소시민)를 묘사한 그림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이후 마네의 작품인 올랭피아가 대놓고 매춘부처럼 묘사된 인물에 당시 매춘부들이 많이 쓰던 가명을 붙여놓음으로써 관객의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것과 비슷한 것.[2] 덤으로, 작품의 배경 상황이 '도시인의 소풍'인것 자체가 상당한 시의성을 가졌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19세기 중후반의 유럽사회는 산업혁명의 성과가 자리잡아 이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이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이로 인한 잉여생산물의 축적이 가능해 진 시기였고, 이 덕분에 여가활동이나 취미생활과 같은 사소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 역시 비약적으로 넓어진 것. 말하자면 이전 시대에는 교외에 별장이라도 가진 귀족이나 부호가 아니면 교외로의 소풍같은 여가활동을 즐기기 힘들었지만, 생산력이 증대되고 도로, 역마차, 철도와 기차등의 교통수단이 널리 보급되면서 도시의 소시민 계층이나 조금 여유있는 노동계층의 사람들도 '가끔 주말에는 도시 교외의 전원지역으로 나가서 소풍을 즐긴다' 는 생활양식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당대의 중간계급에서 소시민 계층에서 폭발적으로 유행한 최신의 세련된 생활습관을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기에 감상자들로써는 이 작품에서 더욱 진득한 현실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던 것.[3] 마네는 사실 인상주의에 넣지 않는 경우가 많다. 화풍에서 분명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하지만 워낙에 관계가 많아서 그냥 넣기도 한다.[4] 한때 압생트의 향쑥 성분 때문에 압생트를 마시면 중독증세를 부르며, 정신착란과 시각장애를 부른다고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제로 압생트는 환각이나 정신착란을 일으킨다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당연히 건강에는 좋을 리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