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역사
1. 개요
필리핀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2. 선사시대
1962년 팔라완 남서부 퀘손에 있는 타본 동굴에서 2만 2천 년에서 2만 4천 년 사이에 보르네오 섬에서 도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타본인 화석이 발견되었고, 2019년 루손 북부 칼라오 동굴에서 발견된 호모 루조넨시스 화석이 6만 년에서 6만 7천 년 사이로 추정됨에 따라 필리핀에 인류가 도착한 것은 필리핀 제도가 인도네시아 반도 및 보르네오 섬과 서로 육지로 연결되어 있던 플라이스토세 때로 추정된다.
3. 식민지배 이전
오스트랄로이드 계열의 네그리토라 불리는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살고 있었지만, 언제부터 살아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후에 여러 이민족이 오고 가다가 7세기부터 일부 섬지역은 근처의 스리위자야 왕국의 지배를 받았고, 그 영향으로 힌두교 문화와 불교 문화가 필리핀으로 전파되었다. 그 영향으로 문자도 전파되어 인도계 문자와 아랍 문자를 개량한 바이바이인 문자도 존재했지만 스페인 식민지배 시기에 로마자로 많이 대체되는 바람에 현재는 실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고, 거의 장식용으로나 쓰는 형편이다. 민다나오의 무슬림들은 아직도 쓴다.[1] 필리핀 내의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자들이나 필리핀 고유문화에 대해 관심있는 사람들은 이들 문자를 상용하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한다. 유니코드에도 포함되어 있다.
처음으로 금속 제련 기술을 들여온 것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이주한 말레이인이었다고 한다.
기록물들이 종종 발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당시 역사적인 문자와 사료들이 패엽으로 기록된 탓에 보존성이 좋지 않아 남아있는 기록이 많지 않고 소실된 경우가 많다.
그러다 라구나 동판이 발견되면서 필리핀 북부 루손지역은 당나라 이전시대 부터 중국과 교역을 했다는 기록이 교차검증되었다. 루손섬은 다양한 국가의 사신들이 중국에 조공 또는 무역을 하러 가는 와중에 경유한 경우도 많아서 자연스레 무역항이 된 경우이다. 당시 남부 민다나오 지역에서 금이 많이 발견되어 특산품이 되었고, 금이 무역의 촉매제가 되었다. 북부와 남부를 망라해서 이미 많은 인종들이 오고갔고 특히 중국인들이 필리핀 제도를 경유해 다른 동남아시아와 인도인, 아랍인 들과 장사를 해서 이익을 얻길 원했기 때문에, 홀로섬, 마닐라에는 당시부터 차이나 타운이 생겼다. 필리핀 화교의 역사는 이 시기가 원조라 할 수 있다. 일본인들도 루손섬 북부와 마닐라에 가게자리를 사들이는 등 소수 존재했다. 문명과 별로 접촉하지 못했던 원주민 집단들도 다양한 출신국가 성분을 가진 상업집단들이 오고가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시간이 흐른 후 11세기가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곳곳에서 정착된 상인 자본을 바탕으로 주권을 가진 국가들이 나타난다. 크게 바랑가이라 불리우는 부족집단 형태의 중소국가 들과, 상업왕국인 톤도(Tondo),마닐라(Manila),술루(Sulu),마긴다나오(Mindanao),부투안(Butuan) 등의 국가들로 나뉘는데 후자의 상업왕국들이 대부분의 주요 국제 무역로를 차지했다. 상업왕국들이 의식주에 있어 좀 더 문명화된 편이였고 좀 다양한 국적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바랑가이 집단도 국내 무역에 종사했으며 군사력 측면에선 상업왕국들과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태풍과 고온다습한 기후로 목조 유물들 대부분이 부패하기 쉬운 특성상 현재 유물들은 무기,화폐 등이 대부분이고 각기 다른 형태의 금화(gold)로 발견되고 있다. 지역별로 만든 금화의 크기와 형태가 다른걸로 보아 기축통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업왕국들이 주변국들의 기록과 고고학적 발견으로 교차검증이 되는데, 주로 해적활동을 동반한 국제무역이 활발하게 나타난다. 주요 무역상대국은 전반기엔 동남아시아 전역과 중국이였고 후기로 가면 이슬람과 포르투갈 상선들도 주요 대상이 된다. 전반기에 많은 인구집단이 문명이 발달되지 못한 원주민 상태에 있는 경우가 많았고, 후반기로 갈수록 대부분의 세력들이 번성해나갔고 강해진다. 자체적으로 금,비취,구슬 등 귀금속을 공예하는 장인들이 존재했고, 또는 이것들을 해적활동으로 얻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금화,귀금속 그리고 해적활동 중 얻은 노예(..)가 대부분의 주요 수익을 차지한 것으로 보이며, 가내 수공업을 통한 면직물 또한 주요 수출품이였다. 대체로 수입품은 도자기,비단,구슬 그리고 철광석을 포함한 금속이였다. 수입한 철광석으로 무기를 자체 제작했으며 후기에 가면 25m짜리 무장상선들을 만들어 화포를 탑재한 후 주변국 해안 또는 외국상선을 타겟으로 해적활동을 자주한 것으로도 나타난다. 스페인이 도래하기 전에는 포르투갈 상선도 털린 기록이 있다. 이 시기에 몇몇 세력들은 총,대포 등의 열병기도 갖추기 시작한다.
바랑가이 소국들의 지배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는 페르디난드 마젤란를 전사시키고 스페인군을 패퇴시킨 세부의 라푸라푸(Lapu-Lapu) 부족장이 있고, 위에 열거한 세력들 중 스페인, 미국에 군사적 저항을 성공하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자치권을 가진 세력은 상업왕국 중 하나인 술루(Sulu) 뿐이다.
필리핀 제도의 부족국가 및 상업왕국들은 문명 주도국이기 보다는 상인 또는 해적 세력들이 소규모 국가화된 형태에 가깝다. 물론 상술했듯 왕이 존재했고 인도 및 아랍계의 문화적 영향이 커서 이들의 문자를 사용했고 역사서를 기록했다. 노예계층 이외에는 읽고 쓰는데 있어 계층적 제한이 없었다. 다만, 기후가 아열대인데다 동아시아만큼 제지기술이 보편화되지 못해 거의 전부가 소실되었고 극소수가 간혹 발견되며 오히려 주변국들의 기록에 더 많이 나타난다.
몇몇 한국 사학자들(이도학 교수가 대표적.)과 환빠들은 백제의 속국이었던 흑치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2] 물론 이는 억지에 가까운 추정이다.
필리핀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접경지역에 있어 주요한 길목에 위치했던 탓에 예로부터 중국인, 아랍인, 인도인, 페르시아인, 크메르인, 태국인, 말레이인, 베트남인, 참파인, 일본인,대만인,류큐인 등 다양한 이방인들이 오고갔으며 이들이 각 섬에 정착하기도 했는데 지배층과 피지배층, 노예간의 인종 구분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대체로 이슬람 출신들이 후기 16세기로 갈수록 우위를 점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한편, 섬 사이를 이어주는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한 강력한 나라가 나오지 않고 각 지역별, 혹은 섬들별로 고만고만한 중소국들이 할거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섬 안에서도 서로 해적질을 자주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들 사이의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전쟁이 있었던 것으로 유추할 수 있고, 이러한 점은 스페인이 도래해서 가톨릭으로 종교적,사상적 구심점을 만들기 전 까지는 개선되지 않는다. 반면에, 필리핀 제도내 각 중소국가간 회의 또는 연합체를 구성 하기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서로 교류를 했고 때론 동맹을 맺기도 했다.
동남아시아의 도서부 지역들은 육로를 통한 내륙간의 용이한 교류를 이어나갔지만, 필리핀 제도 지역은 이런 아시아 내륙의 무역 흐름에 대해서는 많이 소외되어 있었다, 한편으로는 대륙에 속한 국가들의 사이의 지역 패권 경쟁에 대한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운 편이였다.
그러다가 15세기부터 이전에 상인으로 드나들던 아랍인들 소수가 영구정착하면서 이슬람교가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필리핀 남쪽의 술루제도 및 말레이시아 일부에 술루 술탄국도 15세기에 세워졌다. 홀로(Jolo)를 수도로 한 술루 술탄국은 20세기 초까지 명맥을 이어 갔으며 전성기엔 말라카, 브루나이를 위시한 말레이계 국가들과의 해상 교역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게다가 한때 브루네오 섬 일부 지역과 팔라완 남부, 민다나오 섬 일부를 점유할 정도로 영토를 확장해나갔다. 비슷한 시기에 마긴다나오(Maguindanao) 술탄국, 마닐라 왕국 등의 이슬람 도시왕국도 몇몇 나타났다. 이러한 이슬람화의 추세가 계속 이어졌다면 필리핀 역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함께 동남아 도서부처럼 이슬람 지역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필리핀 역사에서 중대한 변수가 생기게 된다.'''
4. 스페인의 식민 지배 (1565~1898)
그렇게 이슬람교를 믿는 국가들의 세가 확장되는 듯했다가, 16세기 중반 들어서 '''스페인이 나타났다.''' 1529년 스페인은 포르투갈과의 사라고사 조약에 의거 필리핀과 괌, 북마리아나 제도, 팔라우를 차지하고 포르투갈은 서쪽의 마카오와 동티모르를 차지하는 걸로 정리되어 필리핀의 영유권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쉬웠던 사라고사 조약 성사와는 달리 생각보다 필리핀 중소국가들은 중남미 정복만큼 호락호락 하진 않았는데, 대략 350명의 스페인 정예로 편성된 마젤란 원정대[3] 는 중부 비사야 제도의 부족국가 중 세부의 맹주였던 라푸라푸 족장에게 몇 번의 전투 후에 마젤란을 포함한 164명 이상이 죽거나 부상을 당한후 나머지는 도주했고, 그 뒤의 서너번의 원정대 또한 모두 실패 또는 패배로 돌아갔다. 그래서 한참을 지배되지 못하다가, 36년 만에 1565년 미겔 로페즈 데 레가스피 장군의 500명의 원정대가 세부 섬 상륙과 전투에 승리[4] 했고 세부 섬에 영구정착지가 마련됨과 동시에, 필리핀 도독령이 설립되었다. 이후 스페인군은 연전연승하여 1571년 마닐라 왕국을 멸망시키면서 스페인이 필리핀 지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특히 남부 민다나오 섬의 이슬람계인 술루왕국은 당시 유럽 육군 1위로 불린 스페인군을 격파했으며, 400년간 스페인의 통치를 하는 동안 많은 전투를 했지만 대체로 승기를 잡고 이겨 영토를 지켜냈다. 당장 유럽에서 스페인군이 오스만 해군을 상대로 승리했던걸 생각해보면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한 건 사실이다. 19세기 미국 식민지가 되고 나서도 미군 상대로 저항을 계속해서 자치권을 결국 지켜냈고 2021년 현재까지도 지방분권화된 필리핀에서 무슬림 세력들은 자치권을 가지고 남아있고 주기적으로 정부군 상대로 교전하고 있다. 이들은 브루나이와 인도네시아계인 무슬림 세력들과 접합점이 깊었던 세력이였다.
이 후 필리핀은 멕시코 총독을 통해 간접 통치를 받았다. 하지만 애초에 지역별로 각자 언어도 다른데다 분권화 되었던 시간이 매우 길었던 관계로 완전한 형태의 통합적이고 통제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기가 어려웠다. 그렇다고 스페인 본국에서 대규모 치안대를 파병해 강압적인 통제를 하기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일단 부분적 통제를 가한 후에 기존 기득권층의 세금을 면제 해주고 부분적인 자치권을 부여하는 형태를 채택했다.[5] 그리고 주기적으로 멕시코 태생의 스페인인(크리요오)과 메스티소들을 이주시켜 장기적으로 스페인 혈통이 많아지게 했다. 이 정책은 세부 섬을 중심으로 중부 비사야 제도에서 실시되었다.
스페인은 애초엔 동남아시아에서 흔한 유럽의 사치품인 향신료를 기대했으나 필리핀에선 향신료가 나지 않았다.
지리적으로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접경지이자 스페인 시각에서 아시아와 아메리카,유럽 사이를 잇는 교차로에 위치했다. 더욱이 인도차이나 반도와 동아시아로 부터 떨어진 섬이라는 점은 충분히 아시아 유교 중앙집권된 국가들로부터의 무역간섭이나 금지를 피하기 쉬웠고 해군만으로도 방어가 매우 용이했다. 더군다나 밀무역을 하기 쉬운 어촌이나 항구들이 도처에 널려있는데다, 당시 포르투갈 령 마카오와 매우 가까웠다. 이러한 이점으로 스페인은 필리핀 제도를 동서무역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갤리온 혹은 갈레온 무역이라 불리는 이것은 특히나 중국과의 교역에서 막대한 수입을 올렸고 필리핀 제도는 스페인 제국의 재정에 한몫하는 대 아시아 무역기지로 쓰이게 되었다.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차를 필두로한 향신료,비단,차를 포함한 여러 아시아의 무역품들은 유럽 전역에서 인기높은 사치품에 속했고, 이미 스페인 항해사들로 인해 유럽에 흔해져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했던 아메리카의 많은 금,은이 중국에 들어왔다. 동시에 아시아 가톨릭 선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는데, 예수회는 필리핀 각지의 식민지인들은 물론, 일본의 일부 다이묘(고니시 유키나가 등)와 중국에서의 선교 또한 할 수 있었다.
스페인은 이곳을 통해 일본과는 상업으로 단기간에 친밀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당시 필리핀 내 경제권을 쥐고 있던 이슬람 세력, 중국인(원조 화교)들과의 갈등이 심했던데다가 이후, 일본은 전국시대를 끝내고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서서 쇄국정책을 취하면서 무역에 타격을 입은 영향이 컸다. 토착 화교와의 문화적 쇼크와 갈등은 심해서 몇 번의 전투까지 겪고 일방적으로 승리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중국과의 교역에 있어서 상술,통역 등으로 중요한 세력들이였고 훗날 필리핀에 정착한 화교들이 가톨릭을 믿게 되고 스페인계 및 토착 기득권층과 통혼을 하면서 완화된다[6] .
필리핀 제도 전역에서 보편화 되었던 카락코아(karakoa)라는 배는 원주민 어선을 대형화해서 25m로 늘린 배였는데, 당시 일본의 세키부네와 비슷한 길이에 속한다. 최소 150명 이상 승선이 가능했고, 돛을 달고 화포들을 탑재하고 다녔다. 폭이 좁으면서도 안정감있는 구조여서 속도가 매우 빠른데다 방향전환이 쉬웠기 때문에 적선이 화포 장전을 끝내고 조준해도 명중하기 상당히 어려웠다. 2층짜리가 대부분이였는데 화살을 막아주는 지붕과 방어자재를 장착했다는 기록이 있고, 길이에 비해 높이가 상당히 낮은 구조로 무게가 적게나갔다. 빠른 속도로 주변 아시아 국가및 유럽 선박에 가까이 접근해서 적 선박 최하단부를 화포로 격발하면 침몰이 100%였기 때문에 매우 위협적인 군선에 속했다. 스페인이 도래하기 전에 포르투갈 배들이 여기에 위협을 꽤나 당했고 그리고 털렸다(..). 한 스페인 관료는 필리핀이 식민지화 되고나서 이를 극찬했던 기록이 있다.
무엇보다 쇠못이 아닌 나무못으로 배를 건조하는 방식과, 톱질을 가능한한 적게해서 나무를 자르지 않고 나무의 모양대로 배의 부품을 선정해 맞추었기 때문에, 유럽의 선박보다 보존성이 뛰어나다고 판단했고, 같은 시기의 일본의 세키부네 같은 배보다 더 빠른속도를 가졌고, 길이가 비슷했다. 화포를 쏘면 배가 갈라지기 시작하는 세키부네 보다 기능적 내구도가 높았으며, 배의 화포용 구멍이 따로없는 데다 배의 폭이 좁아서 화포 조준을 위 아래, 전후좌우로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 있다는 점도 동시대 다른 국가의 군선에 없던 기능에 속한다. 이 배의 단점은 높이가 낮은 만큼 많은 화물을 싣기가 어려웠다는데 있다.
이 배에 대한 설명이 중요한 이유가 있는데, 어쩌면 포르투갈 상선들을 이 배로 전례없이 여러번 털었던 이력때문에 당시 스페인인들에게 꽤나 어그로(..)를 끌었던 것 같다. 실제로 포르투갈 상선 한 척을 상대하는 것도 조선과 일본에서 꽤나 많은 전력과 시간이 걸렸고 이러한 형태의 배가 다른 동남아 국가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동남아의 해상주도권을 얻기 원했던 유럽 1위의 국력을 가진 스페인이였기 때문에 무역의 지리적 이점 또한 가진 필리핀 제도를 정복할 필요는 명확했다. 그랬기 때문에 마젤란 원정대가 크게 패배하고 나서도, 이 후 네 번이나 원정대를 더 보냈던 것이다. 스페인 본국에서 필리핀 까지 원양항해는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였지만 계속 실패하면서까지 보냈던 이유는 아시아 무역로가 그만큼 중요했음을 표현해 준다.
필리핀이 정복되고나서 스페인인들은 꽤나 견고한편인 배를 만드는 목재들을 눈여겨보고 유럽의 목재들 보다 이곳의 나무들이 배를 만들기에 질기고 견고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해마다 태풍에서 살아남는 데다 고온다습한 기후에 자라 습기에 강하고 해안가에 바다물로도 자라서 염분에 강한 나무들을 보고 대규모 조선소를 마닐라만에 건설하여 아웃소싱 하기로 판단, 필리핀인 조선공들을 대거 고용하고 임금을 지불했다. 지불된 화폐는 스페인 제국의 기축통화였다. 물론 당시는 초기 제국주의 시대였기 때문에 착취수준이긴 했지만, 이로써 필리핀 제도는 스페인 제국의 경제권 안에 들어왔으며 분열된 과거와 다르게 같은 기축통화를 사용하는, 경제활동을 하는 신민층이 됨으로써 처음으로 통합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갈레온 무역에 참여한 필리핀인들은 주로 숙련된 선원들이였다. 당시 필리핀인을 비롯한 히스패닉들 역시 식민지민 이였기 때문에 많은 권한이 배제되었다. 뉴올리언스에도 정착촌을 형성했고 여기서는 주로 어부들이 많았고 히스패닉들과 같은 제국의 신민으로써 교류했다. 물론 본토 스페인인들에 비해 저임금이거나 임금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당시의 아메리카 대륙의 흑인 노예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달랐다.
400년 가까이 있었던 갈레온 무역이 쇠퇴해 가면서, 스페인은 이곳에서 플랜테이션을 운영했다. 이렇게 18세기 말 플랜테이션이 시작되면서 스페인인과[7] 현지 혼혈인인 메스티소가 대농장을 경영하게 되었는데, 메스티소 중 부유한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일루스트라도스(ilustrado. 스페인어로 "배운 자들", "지식인들")라고 부르는 지식인층이 생겨나게 됐다. 19세기엔 청나라 사람들이 스페인령 필리핀에 대거 이민오면서 중국계 혼혈이 많이 생겨나기도 했다.
1854년 마닐라가 개항되었고, 이렇게 플랜테이션은 더욱 확대되었다. 일루스트라도스 계층은 자신을 스페인 사람으로 자각한 채 원주민들을 '인디오스'라고 멸시했으며, 자식들을 스페인으로 유학시켜가며 스페인에 대표를 보내 스페인 사람들과 동등한 권리를 요구했으나, 스페인은 한결같이 그들의 의견을 무시할 뿐이었다. 결국 일루스트라도스 계층은 분노하며 '필리피노스'라고 자칭했는데, 이것이 필리핀 민족주의를 대표하는 단어로 썼다.
한편 남부의 무슬림들은 스페인에 지속적으로 저항해 왔다. 초기에는 일부지역에서 저항하였으나 대부분 부실한 연유로 흐지부지 끝났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저항은 조직적으로, 그리고 더 많아졌다. 또한 19세기 앞서 말한 일루스트라도스 등에 의해 필리핀에도 민족주의가 생겼다.
4.1. 필리핀 독립운동: 필리핀 제1공화국
필리핀인 독립운동의 계기가 된 사건으로 곰부르자 사건[8] 이 있다. 1872년 카비테의 산 펠리페 요새에 위치한 무기고에서 강제 노역과 과중한 조세 등에 시달리던 혼혈 메스티소들이 집단 봉기를 일으키자, 스페인 당국이 당시 개혁적 성향의 가톨릭 신부들이었던 마리아노 고메즈, 호세 부르고스, 하신토 자모라에게 반란 사주라는 누명을 씌워 처형한 사건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당시 마닐라 대주교는 반란 혐의로 체포된 신부들의 신부직을 박탈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교회법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라는 이유에서였는데, 사주 혐의 사실 여부와는 별개로 독실한 가톨릭 문화가 지배하는 필리핀에서 스페인 지배에 대한 반란을 대주교가 '신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라고 간접적으로 인증한 셈이 된 것이다. 이 사건을 이후로 필리핀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 필리핀 민족주의의 대표적인 사람으론 호세 리살(Jose Rizal)이 있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곰부르자 사건에 연루된 신부 부르고스와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고 한다. 호세 리살은 지주 출신으로 온건파 단체 필리핀 민족동맹을 조직한 반면, 빈민 출신인 안드레스 보니파시오(1863~1897)는 1892년에 원주민 중심의 급진파 독립운동단체 '카피푸난'[9] 을 결성하여 1896년에 봉기를 일으켰다. 같은 시기 쿠바 같은 스페인 식민지 곳곳에서 독립투쟁이 일어나자 놀란 스페인 정부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카티푸난 중심의 독립운동을 철저히 탄압했다. 심지어 온건자 리살까지 카티푸난과 엮어서 붙잡아 그해 12월 30일 아침에 총살해버렸다. 필리핀에 가면 리살이 사형당할 때를 생생하게 청동으로 만든 게 전시되어 있다. 같은 필리핀인(스페인군 소속 필리핀인들에게 총살)의 총에 죽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며 일부러 등을 돌려 뒤에서 총에 맞아 죽은 게 재현되어 있다. 같은 해 무장투쟁을 하던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하자 그 기회를 노리고[10] 필리핀의 독립을 선언하여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지금 필리핀의 국기도 홍콩(당시에는 영국령)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만들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독립 전쟁을 주도한 크리오요가 현지 상류층임에도 본국에게 차별받자 독립운동을 시작했듯이, 필리핀 민족주의를 주장하고 크게 확대한 계층은 필리핀 원주민과 스페인계 혼혈 상류층 후예인 필리피노스(구 일루스트라도스)였다. 스페인인이라고 자부하고 원주민 필리핀인과 무슬림을 하등하게 보던 이들이 스페인에게 무시당하자 독립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독립전쟁 이후에도 스스로 귀족적으로 모든 기득권을 챙겨 지금까지 무시못할 기득권층이 되었다.
5. 미국의 식민지배
5.1. 미국의 군정기 (1898~1902)
그러나 필리핀 제1공화국의 운명은 허무하게 끝났다. 제대로 된 선거도 아니고 여러 문제를 가지고 있던 기득권이 내세운 민주주의 국가란 대다수 필리핀 인민들에게 그냥 지배자가 달라졌을 뿐 그 이외에는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그리고 민다나오 섬을 비롯한 이슬람 지역은 여전히 무시당하니 분노하여 독립투쟁을 벌였고 온갖 시위와 여러 사회적 문제가 폭발하여 제대로 국정이 이뤄지지 못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은 미군을 필리핀에 보내 저항하는 필리핀인 60만여 명을 학살하고 끝내 필리핀을 차지했다. 민간인들을 한꺼번에 함포 사격으로 학살하는 짓까지 저질렀다. 이러한 일 때문에 미국이 터키에게 오스만 제국 시절 터키가 자행한 아르메니아 학살을 인정하라고 하자 서구 국가에게 욕먹는 터키는 늘 하던 방식대로 외국의 학살을 들먹였는데 그게 미국의 필리핀인 학살이었다. 결국 미국이 주도하던 미 상원의 아르메니아 학살 결의안 통과는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이 사건은 미국에서도 말이 많아서 마크 트웨인은 처음엔 이 전쟁을 지지하다 나중에 돌아가는 꼴에 경악하여 미국 정부를 비판하는 책을 썼다가 출판금지를 당한 전력이 있다.
그리고 1901년 아기날도가 체포된 이래 필리핀은 지배자만 바뀐 채,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5.2. 필리핀 제도 도민정부 (1901~1935)
아기날도 체포를 기점으로 필리핀의 저항은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미국은 필리핀에서 실시하던 군정을 민정으로 전환하여 필리핀 제도 도민정부를 수립하였다.
도민정부가 수립된 이후 미국은 1907년 의회 선거를 실시하고 1914년 양원제 의회를 도입했으며 영어를 널리 보급했다. 그 의도에 관해서는 민족의식 희석을 위한 것이라는 말이 있다. 혀튼 현재 필리핀에서도 스페인어는 거의 안 쓰이는 편이라 한다. 스페인어의 잔재는 사람 이름과 숫자, 지명 정도이다.
1912년 우드로 윌슨이 미합중국 대통령에 당선되고 여러 이익 관계와 세계 정세가 변하면서 필리핀을 대하는 미국의 정책도 변화하게 되었다. 윌슨의 민주당 정권은 필리핀 독립에 긍정적이었다. 필리핀을 관할하는 공공업무를 빠르게 필리핀인들로 대체하는 한편, 필리핀 상원을 발족시켜 입법권한을 나누어주었다. 1918년에는 필리핀 독립위원회가 수립되어 필리핀인들이 미국을 상대로 로비를 벌일 수 있게 되었다. 1934년에 자치법안이 통과되었고, 1935년 필리핀 자치령이 수립되었다. 자치령 대통령 선거에서 첫 대통령인 에밀리오 아기날도와 케손이 맞붙는 구도였는데 선거에서 케손이 압승을 거두었다. 케손은 타갈로그어를 영어와 함께 공동 공용어를 지정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고, 1941년 대선에서 81.7%라는 압승을 거두어 재선에 성공했다.
5.3. 필리핀 자치령과 필리핀 제2공화국 (1935~1946)
1935년 필리핀 자치령이 성립된 이후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독립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고 1941년 일본군이 필리핀을 침략했으며, 일본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다가 괴뢰 정부인 필리핀 제2공화국이 세워졌다. 필리핀 사람들은 일제와 괴뢰정부에 격렬히 저항했지만 전쟁 도중 100만여 명의 필리핀인이 죽었고, 일본군은 마닐라 대학살 등의 참극도 저질렀다. 어쨌거나 이로 인해 필리핀에서는 반일 감정이 상당했지만, 점령기 동안 필리핀인 스스로가 미국인도, 스페인인도 아닌 독립된 민족임을 자각하는 값진 과정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미국이 다시 마닐라를 점령했고, 1946년 필리핀은 미국의 승인 아래 완전 독립에 성공해 4세기간 외세 지배를 끝내고 필리핀 전 지역을 포함한 그들만의 첫 나라를 세웠다. 일제에 투쟁해오던 필리핀의 공산주의 단체인 후크발라합(Hukbalahap)은 이 독립은 독립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토지개혁 등을 요구하고 반미 무장투쟁을 개시해 1950년에는 단원이 무려 7만에 이르렀으나 라몬 막사이사이 대통령에 의해 거의 진압되었다.
6. 독립 이후
6.1. 필리핀 제3공화국(1946~1972)
1945년 10월 24일에 유엔에 가입한 후, 1946년 7월 4일에 독립하여 제3공화국이 수립됐으나 정관계 유착이 심해지면서 민중들이 공산당에 등을 돌렸다. 같은 시기 공산군도 좌익 무장투쟁을 개시하는가 하면 군부세력도 같이 대두해 정치상황은 혼란 일색이었다. 이는 세계적 흐름으로, 전 냉전기 좌우익 투쟁은 당시 많은 국가들이 가지고 있던 공통된 문제 상황에 처해있었다. 이와는 별개로 필리핀만이 가지고 있던 여러 잠재적 악재 요인(산업 구조, 지주 세력, 분열 위험 등)도 많았다.
이 시기는 당시 필리핀계 미국인들이 본인 재산을 가지고 정상적 방법으로 미국에 대규모 이민을 가던 시기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영어를 할줄 알기에 정착하는데 유리한 점이 있었던 것도 대규모 이민에 한몫했다. 물론 필리핀계의 본격적인 이민 시기는 이미 20세기 초반에 시작 되었으므로 1962년 이민법이 개정된 것과는 별개로 이전부터 이민을 가고 있었다.
이때 필리핀의 인구는 1900만명에 조금 못 미쳐 남한보다 50만명 정도 적었고[11] 경제는 동시대 남한에 비해 1차 산업에 좀 더 치중되어 있었으나,[12] 한국의 국민소득이 일본 패망으로 103달러에서 추락함에 따라 명목 소득액은 80달러대로 비슷하였다.[13]
1946년 실질 농업 최종생산량은 1938년에 비해 24%감소하였고, 공업 최종생산량은 1938년의 2/3 수준을 기록하여 1946년 GNI는 1938년의 87%밖에 되지 못했다.[14] . 그러나 많은 국가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종료 후에도 여전히 전쟁과 내전에 여념없거나, 쿠데타, 게릴라에 시달릴 때고[15]
워낙 환율이 비현실적이었던데다 인구조사가 제대로 실시되지 않았던 탓에 당시 필리핀이 잘살았다는 '''오해'''를 하기도 한다. 물론 국민소득이 50달러에서 맴돌던 인도, 파키스탄에 비하면 1인당 소득이 높았던 것은 사실이나(인도와 파키스탄은 1인당 소득이 당시 한국의 절반밖에 되지 못했던 최빈국이었다. 1인당 소득 115루피. 1946년 가치로 환산할 때 45달러. 한국은 1938년 103달러를 찍었는데, 인도는 1954년에야 50달러를 달성.), 50년대의 성장은 50년대에 한국 수준에서 60년대 한국 수준으로 성장한 것 정도.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모든게 작살난 한국보다야 그래도 국가는 멀쩡히 돌아가던 필리핀이 경제가 나아보일 수는 있다. 이후 60년대부터는 말레이시아보다 낮은 1인당 GDP를 기록한다.##
한때 한국이 필리핀을 롤모델로 삼았다는 근거 없는 루머와 함께(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이동원의 회고록을 살펴보면 애초에 박정희는 필리핀을 후진국이라고 무시하였다.), 장충체육관을 지을 기술이 부족했던 한국 대신 필리핀이 지어줬다는 얘기가 이상하게 많이 퍼져있으나 '''거짓이다'''. 장충체육관은 아예 필리핀과는 어떠한 연관도 없다.### 심지어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는 2006년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서 다뤘고, 이명박 전 대통령 또한 사실인줄 알고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얘기한 바 있다.# 잘못된 사실이 사회 각계각층에 뿌리내린 걸 알 수 있는 일화이다.
이외에 미국 대사관, 경제기획원(현 문화관광부) 등의 청사 건설에 필리핀 엔지니어가 참여했다는 '''설'''도 있으나 '''전부 확인되지 않은 추측의 영역'''이다. 그리고 아주 만약에라도 필리핀 엔지니어가 참여했던 게 사실이라고 한들, 몇몇 기술자가 '참여'한 것이 어떻게 '지어줬다'는 게 되고, 돈 주고 고용한 게 어째서 '지어줬다'는 게 되는 건지 의문이다. 애초에 이런 식으로 몇몇 사람이 건설에 참여한 걸로 따진다면 밑도 끝도 없다. 확실하게 검증이 되는 '사실'은 필리핀은 기업 단위로 한국에 건물을 지은 적도 없고 지을 수 있는 역량과 기술도 없었다. 당시 필리핀에서는 건축물을 지을 때 미국 기업에 의뢰하는 게 당연했던 시절이었다.[16]
필리핀의 초대 대통령은 로하스이나 재임 2년만에 사망했다. 그 다음 대통령인 키리노는 원래 필리핀의 정치인으로 항일운동을 지도한 사람이었으며, 대미협조를 근본정책으로 삼고 장제스와 유대하려 했다. 이후 1953년 역시 항일 게릴라 투쟁을 했던 라몬 막사이사이가 대통령이 되었는데, 그는 공산주의 게릴라인 후크발라합을 진압하였으나 195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다.
그 다음엔 카를로스 P. 가르시아가 잠깐 집권했다가 1961년 디오스다도 마카파갈이 뒤를 이었다. 그 역시 반일 운동을 지원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반공을 표방하며 미국과 친하게 지내려 했으나, 그도 1965년 선거에서 패배한다. 그리고 그 때 당선된 사람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이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는 중국(화교) 계통의 필리핀 유력가문 출신으로 전쟁 전에는 정적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판결도 받았었다. 그러다가 최종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으며 석방되었고, 항일 게릴라 활동을 거친 후[17] 마누엘 로하스 대통령의 보좌관으로 지냈고, 이후에 필리핀 자유당원 소속으로 하원의원을 지내고, 마닐라 시장직에도 당선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는 196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려고 했으나, 경선에서 패배한 후에 자유당을 탈당하고 국민당으로 당소속을 바꾸고 1965년 대선에서 51.9%의 득표율을 얻어 대통령이 되는데 성공했다. 재임 초기에는 친미반공 일변도였던 필리핀의 외교노선을 바꾸어서 소련 등 공산 국가들과 수교를 맺었고[18] , 동시에 중소 경공업을 육성하면서 경제도 호황을 누리면서 사회문제들도 어느정도 해결되는 듯 보였다. 때문에 1969년 대선에서 61.5%의 득표율을 얻어 압승을 거두면서 전후 최초의 재선 대통령이 되었다.
6.2. 필리핀 제4공화국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독재정권(1972~1986)
마르코스는 재임 2기 중반부터 점차 막장이 되어 결국 1972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공을 내세워 야당인사들과 만디나오 섬의 무슬림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또 정부 요직에 부인 이멜다 마르코스와 장남 봉봉 등 친인척들에게 요직을 맡기고 개인재산 수억 달러를 국외로 빼돌렸다.
같은 시기 필리핀 곳곳에서 무장세력이 들고일어나 반 마르코스 투쟁을 전개하자, 정부군이 총동원되면서 실질적인 전시체제로 접어들었다. 특히 1968년에 필리핀 공산당이 조직한 신인민군(NPA)과 1969년에 소수민족인 모로족들이 만든 무장 독립투쟁 단체 '모로민족해방전선(MNLF)'이 각각 열대우림 같은 곳에 숨어서 게릴라 작전을 벌여 마르코스를 세게 압박했다. 이에 여론이 악화되자 마르코스는 1981년에 계엄령을 풀지만 부정선거로 3선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1983년에 그의 정적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Benigno Simeon "Ninoy" Aquino Jr.)가 미국 망명 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에 들어서자마자 암살당한 사건을 계기로 국내외로부터 반마르코스 여론이 거세지면서 국민들의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이에 그는 1986년 초에 대통령 선거를 앞당겨 치러, 이 대선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연장할 생각이었는데 제대로 치르면 낙선할 게 뻔하므로 부정선거를 저질러 상대인 니노이 아키노의 부인 코라손 아키노 후보를 이겼다. 그러나 코라손 아키노는 물론 필리핀 국민들도 이에 불복하면서 2월에 전국에서 노란 머리띠를 매고 반마르코스 투쟁을 벌이자, 마르코스는 대통령직을 내놓고 가족들과 하와이로 망명했다.
교양만화가 이원복 교수의 2006년 저서 <가로세로 세계사> 2권에 따르면 마르코스 시절 필리핀 경제가 나빠졌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꾸준히 성장했다. 집권 초기와 비교하면 확실히 성장했다.# 다만 입지가 명백하게 불안해진 1982~1986년에는 경제 성장이 하락세였고, 이는 마르코스가 정권을 유지할 수 없게 만든 큰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필리핀이 마르코스 정권 이전에는 동남아시아에서 경제적으로 잘살았다는 것도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단순히 1960~1965년 1인당 GDP로만 비교해봐도 필리핀은 100달러 중반에서 200달러 중반 정도이지만#, 말레이시아는 이미 그 시기에 200달러 중반에서 300달러 초반이었다.# 심지어 싱가포르는 400달러 초반에서 500달러 초반이었다.# '''1960년대 당시 동남아시아에서도 잘산다고 보기는 어려운 국가였다.'''
6.3. 필리핀 제5공화국 : 마르코스 이후(1986~)
독재자 마르코스가 망명한 후 베니그노 아키노의 아내인 코라손 아키노가 6년을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반정부 인사들을 대거 사면하고 대통령의 임기를 6년 단임제로 제한하였으며 지방분권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등 민주화에 크게 기여했으나, 취임 초기인 1989년에 군부 쿠데타가 터지는 등 정치적으로 불안했고 90년대 이후 민족주의 정치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1992년에 전 국방장관 피델 라모스가 수십년 만에 공정한 자유선거로 당선되어 '필리핀 2000'이라는 산업화 및 경제성장 정책을 추진하여 망가진 경제복구에 주력했고, 집권 초기부터 미군을 철수시키고 NPA 지도자급 인사들을 석방시켜 공산당을 사실상 합법화시킨 후, 1996년에는 MNLF와 평화협정을 맺어 평화정착에도 힘을 썼다.
1998년에 영화배우 출신 조지프 에스트라다가 서민대통령임을 내세워 서민의 지지를 받아 당선됐고, 농업개혁 같은 친서민 정책을 추진하려 했으나 2000년에 도박단 뇌물수수에 연루돼 이듬해 초 탄핵 직전에 사임했다. 이후 글로리아 아로요, 베니그노 아키노 3세 등이 대통령직을 거치며 절차적 민주주의가 점차 정착됐고, 경제성장도 차차 진행됐다. 그러나 마르코스 시절부터 악화된 치안, 내전 문제나 정치계에 만연한 부패, 몇몇 가문의 정치 독점 등은 필리핀의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으며, 같은 시기 민다나오를 기점으로 한 '아부 사야프'란 이슬람 무장단체가 분리독립을 외치며 납치, 유괴 등 온갖 테러를 벌여 필리핀 정부를 위협했다.
2013년 7월 27일에 민다나오섬에서 모로 이슬람 해방 전선이 방사모로 공화국을 건립하였다. 다만 이 미승인국은 동년 9월 28일에 지속적인 전투에서 패배를 기록한 영향으로 멸망해 역사속으로 사라진다. 2014년 4월 28일 미국과 방위협력확대협정(EDCA)을 맺어 미군 주둔을 다시 허용시켰다.
2016년 5월 대선에서 로드리고 두테르테가 당선되어 과격한 방법으로 필리핀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어 전 세계에서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7. 출처
-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지역/주제편): 동남아시아, 천년 문명의 신비에서 21세기 변화와 개혁의 주역으로 - 이원복 글/그림. 김영사. 2018. p172~190.
[1] 이런 일은 꽤 흔해서 같은 동남아의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도 아랍 문자를 개조한 자위문자를 썼지만 비슷한 식으로 로마자로 대체되었고, 베트남도 한자에서 파상된 쯔놈이라는 문자가 있었지만 로마자(쯔꾸옥응으)로 대체되었다. 같은 시기에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던 중앙아메리카도 고유문자가 있었으나 로마자로 대체된 상황.[2] 참고로 이도학 교수는 환단고기는 부정하기 때문에 환빠와 따로 구분해서 쓴 것이다.[3] 지구 한 바퀴를 세계 최초로 일주 한 것으로 알려진 그 원정대이다.[4] 당시 비사야 제도는 민다나오 섬의 무슬림 술루 술탄국과 전쟁중 이였기 때문에 전력이 약해진 탓도 있었다.[5] 점령지의 불만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써 이는 스페인의 먼 조상인 고대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방식이였다.[6] 오늘날 필리핀 대부분의 정치가문들이 이들과 스페인 혈통의 혼혈들이다.[7] 스페인인도 두 종류가 있는데, 본토 출신은 '페닌술라레스', 식민지 출신은 '인술라레스'나 '크리오요'라고 각각 불렸다.[8] Gomburza. 스페인에 의해 희생된 3명의 신부인 Gomez, Burgos, Zamora를 합친 약어다. 문서 첫머리의 동영상 38초쯤에 나온다. 16세기 사람인 라푸라푸 다음으로 나온다는 점에 주목하자. 곰부르자 사건은 필리핀 중세사와 근대사를 가르는 중요한 분기점이다.[9] 약칭 KKK. 미국의 KKK와는 전혀 연관 없다. 지금도 필리핀에서는 국가기념일에 빨간 바탕에 하얀글씨로 KKK가 박혀있는 카티푸난기가 걸린다.[10] 아기날도는 필리핀 독립군을 이끌다가 홍콩으로 망명했었다.[11] 매디슨의 추계에 따르면 북한을 제외한 남한의 인구가 필리핀에게 추월당한 것은 1950년대부터다.[12] 해방무렵 남한의 1차산업 종사자가 전 인구의 80%였는데, 필리핀은 89%. 산업구조의 경우, 1938년 41%의 비중을 보였던 필리핀 경제에서의 농업 비중은 1946년 45%로 늘어나 1953년 남한의 42%보다 3%p 높았다.[13] 필리핀-미국 재정 위원회에 따르면 1946년 필리핀의 명목 GNI는 32억페소, 명목 NNP는 28억페소였고, 1인당 소득은 176페소 정도였다. 필리핀의 고정환율 2페소 1달러. 반면 한국의 고정환율은 수년에 한번 꼴로 변경되어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국민소득( GNI)의 경우 80달러면 6.25 전쟁 이전 수준 내지 1950년대 중반을 넘어서던 시점의 수준이고 70달러대는 60년대 환율을 수배 올릿 탓에 나온 왜곡된 수치다.[14] 미국-필리핀 재정위원회가 보고한 1938년 기준 실질 GNI. 서비스업은 2.7억 페소에서 3.6억페소로 동기간 33% 늘었다. 전산업으로는 11.6억 페소에서 10억페소로 감소(1938 불변가액). 이상 1946 필리핀 연간 통계, 1947, the Bureau of the Census and Statistics in Manila와 필리핀-미국 재정위원회 보고서 참고[15] 아시아에서는 일본 패망 이후부터 중국과 인도네시아는 1949년까지 베트남은 1954년까지 건국전쟁을 치뤘고, 이후 한국이 1950년부터 1953년까지 한국전쟁을, 스리랑카는 1958년부터 내전을 겪었으며, 베트남이 1956년부터 1975년까지 내전을, 라오스는 1953년부터 1973년까지, 태국, 파키스탄, 미얀마 등은 군사쿠데타에 시달렸고, 인도와 파키스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태국과 라오스, 캄보디아 사이에는 국경분쟁이 일어났으며 이외에도 민족, 종교 갈등과 게릴라가 만연하였다.[16] Nation, 1986.4.5 'Minority Report' p478[17]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항목 참조.[18] 물론 그러면서도 베트남에 필리핀군을 보내거나 필리핀 내의 공산반군을 때려잡는 행위는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