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미드 카르자이

 


[image]
'''아프가니스탄의 제 6, 7, 8대 대통령'''
'''본명'''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
'''출생'''
'''1957년 12월 24일, 아프가니스탄 왕국 칸다하르[1]'''
'''국적'''
'''아프가니스탄''' [image]
'''부족'''
'''파슈툰족'''
'''학력'''
'''히마칼 프라데시 대학교'''
'''직업'''
'''정치인'''
'''배우자'''
'''제나트 쿠라이시(Zeenat Quraishi)'''
'''신체'''
'''182cm'''
'''종교'''
'''이슬람'''
'''정당'''
'''무소속'''
'''경력'''
'''아프가니스탄 과도 정부 대표(2001 ~ 2002)'''
'''제6대 아프가니스탄 임시 대통령(2002 ~ 2004)'''
'''제7대 아프가니스탄 대통령(2004 ~ 2009)'''
'''제8대 아프가니스탄 대통령(2009 ~ 2014)'''
'''자녀'''
'''Mirwais'''
'''Malalai'''
'''Howsi'''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반기(1957~1999)
2.2. 아프가니스탄 내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1999~2004)
2.3. 1차 임기(2004~2009)
2.4. 2차 임기(2009~2014)
3. 퇴임
4. 평가
5. 여담


1. 개요


아프가니스탄의 제6, 7, 8대 대통령. 탈레반 정권 붕괴 후,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로 당선된 대통령이다.

2. 생애



2.1. 생애 초반기(1957~1999)


1957년, 아프가니스탄칸다하르 주에서 태어났다. 칸다하르 주는 파슈툰족이 주류인 주이며 카르자이 본인도 파슈툰 계열의 부족 포팔자이족이다.
1976년, 카르자이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인도 교환학생으로 유학을간다. 유학 도중에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카르자이는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으로 가서 무자헤딘 모금활동을 하러 들어간다.
1988년,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간 카르자이는 나지불라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여러 집회를 열고, 결국은 1992년 친소정권을 전복시킨다. 나지불라 정권은 무너지고 아프가니스탄은 나라 꼴은 갖추었지만 그 속은 부족, 무자헤딘 간의 이익관계 등등으로 여러 파벌로 찢겨나가 내전에 휘말리고 있었다. 그 당시 카르자이는 외무부장관으로 있으면서 정부와 군벌 굴부딘 헤크마티아르[2]의 중재를 담당하고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카르자이는 굴부딘의 스파이 혐으로 체포된다. 체포된 카르자이는 굴부딘이 제공한 오토바이를 통해 카불을 도망쳐 나온다. 그 후 계속되는 막장을 바로잡겠다는 탈레반이 등장한다. '''카르자이는 초반에는 탈레반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봤는데 ''' 왜냐하면 이 당시의 탈레반은 내전종식과 부패척결 등 집권 후의 모습과는 '''180도 달랐기 때문이다.''' 탈레반 역시 카르자이에게 대사를 권할 정도로 둘의 사이는 막역했다. 그러나 카르자이는 이 대사직을 거절하는데 그는 ISI(Inter-Services Intelligence-파키스탄 정보부)가 탈레반을 이용하고 있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3] 그 당시 카르자이는 스파이 혐의를 받고 도망친 뒤, 파키스탄의 퀘타에서 왕정복고 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99년에 카르자이의 아버지가 모스크에서 돌아오다 탈레반 암살자에게 암살을 당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카르자이는 탈레반과 완전히 결별하고 아흐마드 샤 마수드북부동맹 계열로 돌아선다.

2.2. 아프가니스탄 내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1999~2004)


'''반 탈레반세력의 핵이되다'''
전향한 카르자이는 2000년~2001년 유럽과 미국을 돌며 반탈레반 세력을 알리며 지지호소를 부탁하였으나 그 당시 유럽과 미국은 '''자기들 나라 밖'''에서의 탈레반의 미친짓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불똥이 자신들에게 튈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마수드와 카르자이는 알카에다탈레반의 커넥션, 그들이 구상하고 있는 테러계획 등을 미국에 경고하지만 상큼하게 씹힌다(...) 그러던 도중 9.11 이틀 전 아흐마드 샤 마수드마저 알카에다 조직원의 자폭테러로 사망하고 만다.[4] 그리고 이틀 후, 탈레반이 대망(大亡)의 꾸란에서 배운걸 엿바꿔 먹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짓을 벌이자 피꺼솟한 미국은 반 탈레반 세력의 중심인물로 카르자이를 선택한다. 사실 카르자이는 이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미국이 점찍어 놨었던 압둘 하크가 탈레반 전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잠입했다가 잡혀서 처형당하면서 떠오르는 총아로 주목을 받게된다.[5][6] 2001년 10월 항구적 자유 작전이 펼쳐지고 있을 때 카르자이는 파키스탄의 퀘타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오는데, 돌아오던 중 미군의 오인사격으로 얼굴에 부상을 입고 미국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해 12월 독일에서 열린 모임에서 아프가니스탄 과도내각을 조직하였고 카르자이는 수반이 된다.

2.3. 1차 임기(2004~2009)


'''이름뿐인 아프가니스탄의 대통령이 되다.'''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아프가니스탄의 정세를 알리고 지지를 호소한 카르자이는 순식간에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스타로 떠올랐다. 덕분에 선거가 치뤄지고 55.4%라는 압도적인 표를 받고 당선이 되었다. 이는 라이벌 후보의 3배 이상을 받은 것이었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국민들과 전세계는 탈레반 광신정권에 종지부를 찍은 카르자이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지지했다. 이렇게 대통령이 된 카르자이였지만 문제는 '''대통령이 되기까지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카르자이가 세계를 돌아다니며 호소를 할 때, 실질적으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을 축출해 낸 것은 북부동맹인데, 이 북부동맹은 탈레반에 대항하기 위해 여러 민족(타지크족, 우즈베크족, 하자라족 / 카르자이는 파슈툰족이다.)이 힘을 합해 만든 단체였다. 이때문에 정부관료 임명과정에 많은 압박을 받고, 굴욕적인 수락을 해야 했는데 '''자신을 스파이 혐의로 감옥에 쳐넣을려고 한 사람을 부통령 겸 국방부 장관 자리에 앉혀야 했던 것이다.'''[7] 사실 이런 카르자이의 낮은 영향력은 예전부터 예상할 수 있었는데 2002~2003년 동안 북부동맹을 중심으로 한 세 번의 쿠데타 미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도만 벗어나도 21세기와 벗어난 생활을 하며 접근하기 조차 쉽지않은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카르자이의 영향력이 카불에만 미치도록 만들었다. 이때문에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아닌 '''카불 대통령'''으로 조롱을 받을 정도로 영향력이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카르자이는 북부동맹 일색인 정부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과 같은 민족인 파슈툰족 관리를 고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또 반발을 불러와 정국운영에 많은 차질을 빚었다. 이와중에 지원금 상당수가 증발하는건 덤이었다. 이렇게 정부는 허둥대고 미군은 이라크에 더 관심을 가지는 동안 탈레반은 은밀하게 세를 불려가고 있었다.

2.4. 2차 임기(2009~2014)


'''친미'''에서 '''반미'''로
카르자이는 재선에는 성공했지만, 이 시기부터 오바마 정부와 카르자이 정부는 서서히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그 이유는 카르자이의 당선이 부정선거였던 것으로 추정되자 아프간 내에서 난리가 났는데[8] 미국이 '승리선언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카르자이에게 경고를 준 것.[9] 이때문에 카르자이는 잠시 국내외적으로 고립되기까지 했었다. 또한 부시 대통령과는 다르게 오바마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무작정 퍼주지를 않고 투명하게 원조를 하려했다. 실제로 아프가니스탄에 지원되는 미국의 지원금의 상당수는 고위층이나 같은 파벌의 정치인들을 몇 번 거치며 엄청난 액수의 금액이 사라져갔다.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자. 심지어 기반시설을 건설할 때 조차 말이다.영문기사 또한 증가하는 마약생산량으로도 디스를 받았는데[10] 클린턴 국무장관이 아예 '''마약국가를 운영하고 있다'''라고 비난했다. 거기다가 미국이 이라크 전쟁으로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서 탈레반이 세력을 키워가며 점점 전쟁이 베트남전처럼 흘러가며 천문학적 금액이 소요되자 미국 국내에서도 철수론이 나오는 등, 카르자이 입장에서는 든든한 빽이었던 미국이 등에 칼을 꽂는 격이었다. 왜냐하면 '''미군이 철수하면 카르자이의 말로는 뻔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무조건적으로 미국에 의지하지 않고 탈레반과 접촉을 하고 대화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성과는 전무했다.[11] 그래도 미국이 철수는 못하고 어찌어찌 손을 잡고 관계는 계속 갔지만 카르자이와 미국의 관계는 점점 틀어져갔다. 2013년 10월 경에는 아예 카르자이 내각과 아프가니스탄 정보기관이 파키스탄 탈레반과 연락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2014년경 미군의 철수 후에 관한 내용이라 한다.[12] 그 당시에 카르자이는 런던에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몰라도 전부터 카르자이 내각을 의심하던 미국으로서는 더더욱 신뢰를 잃고 믿지 못하게 되었다.기사

3. 퇴임


2014년 카르자이는 퇴임 전 마지막 생중계 연설을 하며 '아프간 전쟁은 우리에게 강요된 전쟁이고 우리는 그들(미국)의 이익을 위한 희생양', '미국은 아프간의 평화를 원하지 않았다.'는 초강경 발언을 했다. 또한 순수한 뜻으로 아프간을 지원했던 나라들에 감사하다며 인도, 중국, 한국은 언급하면서도 미국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참고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1000억 달러(105조)를 쏟아부었고 미군 2200명이 전사, 2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아무리 미국과 마찰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런 행위는 심각한 외교적 결례이다. 또한 끝까지 미국과 '''상호안보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는데 미국은 이 조약을 체결함으로 미군과 나토군을 1만 명을 주둔시켜 아프가니스탄 군, 경찰들을 훈련시킬 계획이었다. 이 조약에는 후임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서명했다.
2020년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을 비판하였다.#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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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악''', '''가성비 최악의 아프간 운영체제'''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그나마 나라 꼴을 갖추게 했지만, 문제는 엄청나게 부패했다는 것이다. 말 그대로 탈레반보다 나을 뿐 이들도 막장이다. 매관매직은 매우 당연한 일이라서 승진 한번 하려고 하면 고위층에게 돈을 바쳐야 함은 일상다반사. 카르자이 휘하의 관료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오는 엄청난 원조자금의 대다수를 자기네들 집짓는데 쓰거나, 아니면 외국은행에다 예금하는 식으로 횡령했다. 그러다보니 아프간의 경제는 원조자금이 막대하게 들어온 것에 비하면 획기적으로 나아지지 않았다. 탈레반 통치 시절처럼 각종 문화를 금지시키고 어기면 처형은 예사로 행하던 공포정치기보다는 낫지만 치안은 열악한 데다가, 끝내주게 부패한 사법제도, 그리고 여전히 열악한 경제사정으로 많은 국민들이 고통을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물론 아프간의 전후복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책임을 카르자이 한 명에게 전부 전가하기는 맞지 않지만[13], 아프간 국민 수백만을 먹여살릴 엄청난 예산을 지원받고도 끝내주는 부패로 사라졌는데, 카르지아 본인이 통제하기는커녕 조장했다. 결국 아프간 국민 상당수는 이러한 극심한 부패에 치를 떨면서 냉담자로 돌아서거나, 아니면 정부에게서 등을 돌리고 울며 겨자먹기로 탈레반에게 손을 내미는 데 상당한 일조를 하였다. 테러리스트를 때려잡는 데 쓰는 예산도 횡령해서 탈레반을 설치게 만든다는 말이 나올 지경이다. 결국 미군은 아프간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지만 탈레반의 영향력은 더 커졌다.
이처럼 부정적인 모습이 넘쳐나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부분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의 GDP를 450억 달러, 2배를 끌어올렸으며 초등학교 진학률을 21% 에서 97%까지 끌어올리면서 문맹률을 끌여내리는 데에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것. 그리고 어쨌건 최소한 최악까지 치닫지 않고 현상유지에는 성공했고, 남수단의 마야르디트나 에티오피아의 멜레스 제나위, 또는 멀리 갈 것도 없이 이웃나라 이란의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같이 기존체제 전면붕괴 이후에 흔히 나오는 독재자의 전철을 밟지 않고 정권교체를 인정한 뒤 물러나는 최소한의 민주주의적인 원칙을 지켰다.

5. 여담


  • 아프가니스탄에서 민주주의 선거로 당선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 젊은 시절 카르자이는 탈레반과 우호적으로 지냈지만, 카르자이는 파슈툰 족 계열의 포팔자이 족. 즉, 아프간의 마지막 왕 무함마드 자히르 샤와 같은 부족 출신이다. 실제로 카르자이 가문은 열렬한 왕당파 지지자였고, 아버지와 삼촌이 요직을 지내기도 했다. 본인 역시 탈레반과 척을 지고 활동할 때도 왕정복고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무함마드 자히르 샤의 나이와 건강, 국내 정세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실현할 수 없었다.[14]
  • 영어불어, 파슈토어, 힌디어, 우르두어, 다리어 등 6개 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한다.[15]
  • 구찌(Gucci)의 탐 포드는 그를 '지구상 최고의 멋쟁이 정치인'이라 불렀다.
  • 임기 동안 총 6번 암살시도를 넘겼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생에게 "아프가니스탄이 세계에서 3번째로 부패한..."까지 질문을 받자, "그거 국제 투명성 기구 꺼죠? 걔들 꺼 믿지 마세요."라며 한심하게 현실부정이나 했다. 사실 저 자료 말고도 아프간의 부패를 지적하는 보고서는 발에 채일 만큼 널렸는데 말이다.

  • 카르자이의 이복동생 왈리 카르자이는 칸다하르 주의 의회장이다.

  • 동생 왈리 카르자이가 아프간 마약유통에 상당히 관련이 있다고 한다. 미국은 이전부터 마약시장의 배후에 카르자이의 최측근들이 관련됐다고 의심해왔다. CIA 보고서에도 왈리 카르자이가 배후자로 지목될 정도.
  • 동생 왈리 카르자이는 2011년 7월 12일 암살당했다. 암살범은 왈리 카르자이의 경호원 출신이라고 한다. 그가 탈레반 멤버 혹은 매수된 자인지, 개인적 원한으로 인한 살해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혹은 마약중독자나 그로 인해 가족을 잃은 사람의 복수일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16]
[1] 칸다하르 주의 주도가 칸다하르시이다.[2] 이슬람 원리주의 군벌로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국무총리 시절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아흐마드 샤 마수드에게 털리고, 카불이 빼앗길 위기에 쳐하자 시민 1만명을 학살한다. 그 후 탈레반과 손잡기도 하고 최근에는 IS에 지지선언을 하기도 하는 등 상당히 기회주의자에 박쥐같은 인간의 표본이다.[3] "Profile:Hamid Karzai". United States: Public Broadcasting Service (PBS). December 2001.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16 January 2010. Retrieved 3 October 2010.[4] 도피처가 필요했던 알카에다가 탈레반에게 눈엣가시같던 마수드를 암살해주고 탈레반은 알카에다가 아프간에 은신하는 것을 묵인해줬다.[5] 카르자이가 떠오를 수 있었던 것에는 정치적 계산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카르자이 본인이 아프가니스탄 명문가(왕가의 친척) 출신에다가 고학력에 영어가 되기 때문에 탈레반을 조지고 싶은 미국에게는 최고의 파트너감이고 북부동맹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조율하고 원조를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중재자이기 때문이다. 또 카르자이의 행적을 봐도 그는 모자데디 대통령 하에서 외무차관을 지내본 것 외에는 두각을 드러낼만한 정치인은 아니였다.[6] 이때문에 탈레반이나 카르자이의 정적은 그를 미국의 꼭두각시라고 비난한다.[7] 모하메드 파힘. 타지크계열 아프가니스탄인으로 북부동맹에서 군사령관을 지낸 거물급 인사다.[8] 라이벌이였던 압둘라 압둘라는 아예 선거를 보이콧해버렸다.[9] 단 완전한 부정선거라고 못박지는 않았다.[10] 이당시 아프간에서 생산되는 아편양은 전세계 생산량의 30%였다.[11] 사실 극렬 원리주의 단체 탈레반과 세속주의 무슬림인 아프간 정부가 타협을 본다는게 기적에 가깝다.[12] 카르자이로서는 탈레반의 복귀를 막기 위해 파키스탄 탈레반과 아프간 탈레반의 연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저지해야 하는 입장이며, 파키스탄 정부 상태는 그 카르자이도 신뢰할 수 없으므로 결국 탈레반측에 모종의 급부를 주고 아프간 탈레반과의 연합을 막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트럼프 체제 이후 개입으로 급선회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13] 내 부족 아니면 아몰랑 하는 아프간의 현실도 있다. 게다가 아프간은 발전을 저해하는 이슬람 근본주의가 강한것도 큰 문제다.[14] 하지만 자히르 샤의 아들이나 손자라도 앞세워서 왕정복고를 시도해보자는 의견도 소수나마 있다.[15] 출처는 러시아어 위키백과[16] 아프간의 마약 문제는 파키스탄 측에서도 진지하게 문제삼았을 정도로 매우 심각하다. 오죽하면 카르자이가 재임 중에 파키스탄 측에 탈레반 통제 안 한다고 따지자, 당시 대통령인 페르베즈 무샤라프가 그런 말 할 시간에 당신 동생이나 잘 관리하라고 빈정댔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