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

 




1. 개요
2. 전개
3. 반전
4. 그 후


1. 개요



당시 대한뉴스의 보도 영상. 물론 이 영상의 내용은 완전 '''거짓말'''이다.
1975년 11월 22일 발생한 재일교포 유학생 간첩 조작 사건으로, 공안사건이다. 당시 언론에 보도된 이 사건의 명칭은 '''학원 침투 북괴 간첩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유신정권 시절 서울과 부산 지역의 대학교 및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학생들 위주로 큰 타격을 가한 대표적인 용공조작 사건으로 평가받는다.[1]
이 사건의 수사 기획자로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 수사국장이던 김기춘이다.[2]
2017년 기준으로 해당 사건에 대해서 비교적 비중있게 다뤘던 최신 미디어 컨텐츠는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자백이 있으며, 2017년 그것이 알고싶다 1060회 김기춘 편에서도 이 사건을 비중있게 다룬 바 있다.

2. 전개


1975년 11월 22일 박정희 정권 하에서 신임받던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 수사 국장이었던 김기춘은 '북괴의 지령에 따라 모국 유학생을 가장하여 국내에 잠입, 암약해 오던 북괴 간첩 일당 21명을 검거하였다.'고 직접 언론에 밝혔다.
이 사건으로 재일동포 10여명을 포함, 21명을 간첩으로 발표하고, 구속, 수감시켰다. 이 중 국내 유학을 위해 한국에 살던 재일 동포 학생들은 대부분 중형 혹은 사형을 받아 장기간 구속 수감 후 일본으로 추방되거나 하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그렇게 사건은 종료되었고 이는 간첩단을 대량으로 검거한 김기춘의 업적으로 남게 되었을 줄 알았다...

3. 반전


사건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2000년대 당시 유죄 판결을 받았던 학생들의 일부가 재심 청구를 하게 된다.
피해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들 대부분은 영문도 모르고 영장도 없이 다짜고짜 경찰에 의해 끌려갔다고 한다. 그리고 끌려간 뒤엔 당연하다는 듯이 거짓 자백할때까지 구타 등의 고문이 이어졌다고 한다.
70년대엔 반공 기조가 지금보다 굉장히 강했던 시절이기에 당연히 국내보다는 일본과 북한의 교류가 더 활발했다. 실제로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들도 북한을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이 꽤 많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당시 일본에서는 민단이건 조총련이건 별로 구분없이 잘 지냈다는 것이다. 물론 간부급에서는 서로 반목하고 싸우는 일이 있었고, 두 단체의 통일을 위해 한민통같은 단체를 만들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재일교포들은 인간적으로는 가까이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중앙정보부는 당시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했다. 조총련 사람을 만난 것, 조선학교에 가본 것, 북한의 선전물을 접해 본 것 등 별의별 사소한 것을 다 엮어서 집어 넣었다. 물론 이러한 재일동포 사회의 분위기때문에 이들의 간첩이고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그렇지만 당시 중앙정보부는 이러한 사실에 착안해서 이들을 미행하는 등 행위를 통해 뭔가 이상하다 싶거나 수상쩍다 싶거나하면 그냥 간첩 혐의를 뒤집어 씌워서 끌고 온 것이다.
끌려온 학생들은 어느 순간 이들도 모르는 사이에 간첩단의 간부가 되있거나 약혼녀와 같이 동시에 끌려와서 둘 다 간첩으로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고문을 통해 거짓 자백으로 이러한 것들이 다 사실이 되어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유학생들은 아무리 명문대생들이었다곤하나 법정에서 능수능란하게 변론하기엔 한국어 실력이 부족하기도 했고 한국 사회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기에 이용당하기 딱 좋은 상황일 수 밖에 없었다.

4. 그 후


2000년대 들어서 재기한 재심 청구에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의 범인이었던 사람들은 줄줄이 무죄판결을 받고 있는 중이다.
2011년 무죄 판결 - #
2012년 무죄 판결 - #
2015년 무죄판결 - #
2016년 무죄 판결 - #
엄밀히 이들이 간첩 활동을 했는지 안했는지 확증은 없지만 이들을 잡아가둘때 영장도 없었고 물증도 없었고 대부분 자백에 의존하여 판결을 내렸고 또한 이들에게 자백을 얻어내는 과정에서 고문 등의 불법적인 행위가 동원되었기에 무죄 판결을 받게 되었다. 게다가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당시 중정의 수사국정이던 김기춘은 이들의 무죄가 밝혀질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은폐하려는 행동을 [3] 기사보기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한 반공기조를 위해 억울한 사람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아쉽게도 억울하게 수감되었지만 무죄판결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정신이 피폐해지고 건강도 좋지 않아 재심 자체를 청구하지 못하는 피해자의 사례도 영화 자백을 통해 알려졌다.
2016년 말 벌어진 최순실 사건 이후 주목받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과거를 보면 이 사건을 비롯해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초원복집 사건 등 그와 연관된 사건들이 대부분 학원 침투 간첩단 사건과 비슷한 양상을 띄는 것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2016년 개봉된 영화 자백에서 뉴스타파최승호 PD는 이 사건에 연류된 사람들이 줄줄이 무죄 판결을 받고 있는데 어떤 심정이냐고 김기춘에게 묻자 그는 이 사건에 대해서 본인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건이라며 오리발을 내미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020년 12월 27일. 간첩 누명을 쓰고 옥살이를 했던 재일 한국인 김승효 씨가 향년 70세로 별세했다.#
[1] 사실 이 부분도 어떤 점에서는 악독하다 할 수 있는데, 7.4 남북 공동 성명 이후 해빙 분위기를 타고 재일교포 유학생들이 많이 늘어났는데, 이것을 이용한 것.[2] 이 사건을 비롯한 여러 각종 공안 사건들 바탕으로 김기춘은 1990년 노태우 정부 시절에 '5.16 민족상' 안보분야에 훈장을 받는다. #[3] 용의자의 알리바이 조작하기 위한 행동을 주일대사관에 요청하는 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