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원/생애

 



1. 개요
2. 유년 시절
3. 강사로서의 발돋움
4. 티치미 설립
5. 대성마이맥 피인수


1. 개요


대성마이맥수학 영역 대표강사인 한석원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이다.

2. 유년 시절


제주도 출신이며 제주 오현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설계학과(83학번)[1] 에 입학 후, 운동권 활동을 하다가 감옥을 다녀왔기 때문에 수형의 사유가 적용되어 전시근로역 판정을 받았다.

3. 강사로서의 발돋움


수학 강사 입문 계기는 1991년, 선배의 요청으로 학원 학생 두 명 가르치는 역할 빵꾸를 메워야 하는 상황이 오고 한석원이 수락하였고, 두 명을 모두 서울대 의대, 서울대 전자공학을 보내면서 자신이 수학 강의에 소질이 있음을 깨달아 그때부터 수학 강사의 길을 걷게 된다. 1997년 운동권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던 김찬휘가 노량진에서 단과 강사를 하다 잘린 후 같이 학원을 차리자고 제안해 서울시 지도를 펼쳐놓고 고민하다 가장 비싼 아파트들이 몰려 있는 대치동에 학원을 세우기로 하고 1997년 대치동에 깊은생각 학원을 설립하여 공동 원장이 되었다.

4. 티치미 설립


이후 2002년 메가스터디가 처음으로 인강을 론칭하며 인강 산업이 태동했고[2], 2004년 김찬휘, 한석원은 같은 운동권 동료이자 역시 영어학원을 운영하던 최인호를 끌어들여 '티치미'를 공동 설립했다.[3] 당시 티치미는 "'''교육의 평준화'''"를 기치로 전강의를 무료를 선언했고, 각종 매스컴의 화제가 되며 단숨에 유명 인강 회사가 되었다. 처음에 수학에 한석원, 한석만 형제, 그리고 영어에 최인호, 김찬휘 4명의 강사로 시작했다. 설립 당시에는 최인호만 인지도가 있었을 뿐 김찬휘, 한석원, 한석만의 인지도는 제로였다. 최인호는 "맑스 · 앵겔스 저작선집" 등을 책임 번역하여 운동권에서 전설적인 인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영어 강사를 하면서 90년대말 영문법책을 펴내 대중적으로도 인지도가 있었다. 당시 신문 기사들을 봐도 한석원, 김찬휘는 언급도 없고 유명 영어 강사 최인호씨가 무료 인강 사이트를 만들었다는 식으로만 나온다. 이들이 설립한 티치미는 전강의 무료라는 파격적인 마케팅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되었다. 전국의 수많은 수험생들이 호기심으로라도 가입해서 들어보게 되었고, 나쁘지 않은 수업 퀼리티 및 발빠른 강의 업로드로 호평을 받았다. 게다가 심지어 교재까지 pdf로 무료 다운로드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다. 티치미가 돌풍을 일으키면서 한석원의 인지도도 덩달아 상승하였고, 강남의 많고 많은 평범한 수학 강사에서 유명 인강 강사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손주은, 이범, 이현, 김찬휘, 정지웅 등과 함께 학원계에서는 운동권 1세대 강사로 꼽히고 있으며 지금도 운동권 출신 강사들 사이에서는 추앙을 받고 있다고 한다.[4]
당시 무료 강의를 하던 한석원은 메가스터디를 엄청나게 깠는데, 당시 메가스터디를 "요망한 장사치"라고 깐 건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아울러 수학의 정석을 엄청나게 비판했고 서울대 선배인 홍성대를 홍가라고 부르며 대차게 깠다. 그리고 수학의 정석의 폐단을 뿌리뽑고 "수학의 본질과 원리를 학생들에게 전달하여 수학의 새로운 질서를 세우겠다"면서 동생 한석만과 함께 수학 개념서인 <수학의 원리>를 야심차게 발간했으나 학생들에게 외면받고 절판되면서 한석원의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5][6]
2006년 1월, 티치미 설립 2년에 돌연 유료화를 선언하면서 많은 파문이 일었다. 당시 김찬휘는 장문의 글을 올리며 "무료로 강의하면 메가스터디가 망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커졌다. 그래서 메가스터디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유료화를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는 납득하기 힘든 변명을 했다. 많은 학생들이 배신감을 느끼며 이탈했고, 유료화를 둘러싼 내부 갈등 끝에 티치미 설립 일등 공신인 최인호가 탈퇴하기도 했다. 특히 유료화 전환 후 한석원 프리패스가 50만원이 넘는 고가로 책정되면서 학생들은 한석원을 "요망한 장사치"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석원의 이런 행보 때문에 현재까지도 안티가 존재한다.
하지만 당시 메가스터디 말고는 대안도 별로 없었고, 한석원이나 김찬휘 강의가 돈 주고 들을 만한 값어치는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았기에 유료화 선언 후에도 티치미는 망하지 않고 계속 살아남았다. 하지만 한석원과 김찬휘 2인외에 기존에 있던 대부분의 무료 강사들은 대부분 망했다. 심지어 한석원의 동생이었던 한석만도 유료화 이후에는 망했다. 한석원과 김찬휘도 유료화 이후에는 많이 고전하게 되었고, 대성마이맥에 합병될 때까지 2010년대 중반까지 삽자루, 신승범, 정승제, 박승동 등이 수학 인강 시장을 장악했다. 한석원은 상위권 강의 시장에서 신승범과 함께 양강 체제를 이루며 명맥을 이어오다가 2010년대 중반에 화려하게 재기했지만 김찬휘는 김기훈, 로즈리, 이충권, 김정호, 정지웅 등에게 밀리며 서서히 몰락하다가 결국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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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화 후 티치미는 박승동 메가스터디 강의교재를 택배로 보내면 한석원의 강의를 50% 할인해주고, 김기훈 메가스터디 강의 교재를 택배로 보내면 김찬휘 강의를 50% 할인해주는 저질 마케팅까지 펼쳤지만 여전히 실적이 좋지 않았고 결국 티치미 강사진을 데리고 오프라인 재수학원으로 진출하기로 결정했다. 그리하여 2010년에 김찬휘와 함께 강남구 도곡동에 재수학원인 티치미 대입학원을 설립하여 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각종 특강을 강제하면서 특강비와 특강 교재비를 추가 징수하는 등 갖가지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돈을 뜯어내어 강남 학생들 사이에서 '''장사치 학원'''으로 악명이 높았다. 결국 학생들이 외면하게 되었고 2년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5. 대성마이맥 피인수


2011년 당시 한창 몸집을 불리며 공격적인 M&A를 시도하고 있던 대성마이맥에게 적지 않은 액수에 티치미 지분을 팔았고, 이후 지금까지 대성마이맥 소속을 유지하고 있다.
[1]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물리학과 출신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강필과 같이 학교를 다녔다는 것이 와전된 것이고 기계설계학과 출신이 맞다.[2] 메가스터디는 2000년에 설립되었지만 한동안 학원 내에서 시범적인 자체 강의를 업로드했고, 2002년부터 본격적인 인강 사업을 시작했다.[3] 2003년 말에 설립되었고, 인강은 2004년부터 시작되었다.[4] 소위 말하는 386세대 운동권 명문대생들은 졸업 후 사교육 업계에 뛰어든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인터넷 강의 1세대 유명 강사들 중에는 운동권 출신이 상당히 많다. 당장 한석원과 티치미를 함께 만든 최인호(영어), 김찬휘(영어)가 운동권때부터 함께 했던 동지들이었고, 메가스터디 역시 설립자인 손주은(사회)이 운동권이었던 관계로 이범(과학), 고종훈(역사), 이종길(역사) 등 운동권이 적지 않았다. 메가스터디에서 별로 실력이 없어 보이는데 계속 이름이 걸려 있던 강사들은 알고보면 운동권인 경우가 많았다. 그밖에도 정지웅(영어), 이현(사회) 등 인강 최초의 스타들은 대부분은 운동권이었다. 거의 유일한 예외가 수학 실력에 있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던 EBS 출신 스타 박승동 정도. 인강이 막 생기던 시절 학원계에서 압도적인 1타이며 비운동권이었던 한석현은 노량진에서 그 명성이 독보적이었지만 손주은과 관계가 껄끄러워 메가스터디에 합류하지 못하기도 했다. 초기에 이렇게 운동권 위주로 인강 시장이 탄생했고 이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며 손쉽게 1타 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후 2000년대 후반부터 삽자루, 신승범, 로즈리, 이충권, 정승제 등 비운동권 강사들이 운동권과 거리가 있는 후발 인강 업체인 이투스, 비타에듀에서 스스로의 실력에 의해 점점 떠오르기 시작했고, 곧 운동권 출신 스타 강사들의 자리를 대체했다. 2010년대 이후에는 한석원만 살아남고 나머지 운동권 출신 강사들은 거의 도태되었다.[5] 현재 동생 한석만 단독 저자로 수학의 원리라는 책이 나오기는 하는데 이 책은 한석원이 공저자일 때의 개념서와는 완전히 다른 책이다. 사실상 이름만 이어받고 컨셉은 완전히 바꾼 책.[6] 수학의 원리는 연구원들이 지은 책이고 자기는 이름만 빌려준 것이라고 변명을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