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부 히데키

 


'''이라부 히데키의 역대 기록/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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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시리즈 우승 반지'''
'''1998'''
'''1999'''

'''1998 아메리칸 리그 이달의 투수 (5월) '''
척 핀리
(캘리포니아 에인절스)

이라부 히데키
(뉴욕 양키스)

바톨로 콜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1999 아메리칸 리그 이달의 투수 (7월) '''
페드로 마르티네즈
(보스턴 레드삭스)

이라부 히데키
(뉴욕 양키스)

마리아노 리베라
(뉴욕 양키스)

'''1994년 퍼시픽리그 최다 승리'''
1993년
노모 히데오
(킨테츠 버팔로즈)
노다 코지
(오릭스 블루웨이브)
17승

'''이라부 히데키'''
'''(치바 롯데 마린즈)'''
'''15승'''

1995년
킵 그로스
(닛폰햄 파이터즈)
16승

'''1994~1995년 퍼시픽리그 최다 탈삼진'''
1993년
노모 히데오
(킨테츠 버팔로즈)
276탈삼진

'''이라부 히데키'''
'''(치바 롯데 마린즈)'''
'''239탈삼진'''

1996년
쿠도 키미야스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
178탈삼진

'''1995~1996년 퍼시픽리그 최우수 방어율'''
1994년
신타니 히로시
(세이부 라이온즈)
2.91

'''이라부 히데키'''
'''(치바 롯데 마린즈)'''
'''2.53(1995년)'''
'''2.40(1996년)'''

1997년
코미야마 사토루
(치바 롯데 마린즈)
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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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양키스 시절
'''이름'''
이라부 히데키(伊良部秀輝)
'''출생'''
1969년 5월 5일, 류큐 열도 미국민정부 코자시[1][2]
'''사망'''
2011년 7월 2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적'''
일본
'''출신지'''
효고현 아마가사키시[3]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 데뷔'''
1987년 드래프트 1위
'''소속팀'''
'''롯데 오리온즈/치바 롯데 마린즈 (1988~1996)'''
'''뉴욕 양키스 (1997~1999)'''
몬트리올 엑스포스 (2000~2001)
텍사스 레인저스 (2002)
한신 타이거스 (2003~2004)
1. 개요
2. 프로 진출 이전
5. 일본프로야구 복귀와 한신 타이거즈, 그리고 은퇴
6. 사망
7. 여담


1. 개요


일본의 전 프로야구 투수. 한때 일본프로야구 최고구속 기록을 보유했던 강속구 투수였지만, 자기관리에 어려움을 겪고 언론이나 구단과도 잦은 마찰을 빚는 등 굴곡이 있는 커리어를 보내다 젊은 나이에 쓸쓸한 최후를 맞은 풍운아.
하지만 '''아시아인 최초로 월드 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야구선수이기도 한다. 거기다 아시아인 최초의 2회 우승, 유일의 '''백투백 우승'''이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2. 프로 진출 이전


성장 과정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안습할 정도로 가정 환경이 불행했다.
주일미군 아버지 스티브 톰슨과 류큐인 어머니 카즈에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베트남으로 전출되고 1년 뒤에 한번 오키나와를 찾은 뒤 카즈에와 만나지 않았다. 이라부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뒤에야 다시 만났다고. 카즈에는 홀로 아들을 기르다가, 오사카 출신의 이라부 이치로라는 사람과 결혼해 효고현 아마가사키시로 이사를 가 이라부는 그곳에서 자라났다.

3. 일본 프로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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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1년차부터 1군에서의 마운드를 경험했다. 입단 2년차인 1989년에는 세이부 라이온스기요하라 가즈히로와 상대하면서 최고 시속 156km/h의 강속구를 기록했는데, 당시 이라부의 구속은 일본프로야구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그러나 강속구 투수들이 으레 그렇듯, 이라부도 제구에 어려움을 겪었고, 볼카운트에 몰리면 자주 난타를 당하는 등 프로 초창기에는 시행착오를 겪었다. 또한 선발과 구원 등을 오가면서 보직도 일정하지 않았다. 1991년 한일 슈퍼게임에 출장해 도쿄돔에서 열린 1차전에서 김성한에게 홈런을 맞기도 했다.
1993년 니혼햄 파이터스오사와 케이지 감독은 언론을 통해 “마쿠하리의 해변에서 이라부 해파리에게 찔렸다, 이테테테…” 라고 말한 것으로부터 "이라부 해파리"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같은 해 5월 3일 세이부의 기요하라와 상대하면서 158km/h의 강속구를 던졌고 이후 기요하라와의 대결은 ‘헤이세이의 명승부’라고 칭해졌다. 이 시기부터 이라부는 안정된 투구를 보여주기 시작하며 선발투수로 고정되었다.
이듬해 1994년, 시즌 15승과 239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면서 다승왕과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동시에 석권했고[4] 바비 발렌타인 감독 시대인 1995년에도 고미야마 사토루, 에릭 힐먼과 함께 선발 투수진의 기둥으로서 만년 최하위였던 팀을 2위로 끌어올리는 데에 기여했다. 같은 해 최고 평균자책점과 2년 연속인 최다탈삼진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했고 4경기 연속 두자릿수 탈삼진을 2년 연속으로 기록했다. 바비 발렌타인히로오카 타츠로 GM과의 갈등으로 사퇴한 다음 해에도 2년 연속으로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지만, 경기 도중 강판하라는 지시에 격노를 하면서 글러브와 모자를 벗어 덕아웃에서 내팽개치는 행동을 하는 등의 말썽을 일으킨 적도 많았다.
1996년 시즌 종료 후 이라부는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롯데 측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구단에 이라부의 보유권을 영구적으로 양도하는 계약을 주고 받았다. 이에 대해 이라부는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의 무게'라고 하는 것은 야구를 경험한 사람밖에 모른다”라고 주장해 어디까지나 뉴욕 양키스의 입단을 고집했는데, 이 과정에서 에이전트로 단 노무라[5]를 고용하기도 했다. 대형 트레이드를 내걸어 최종적으로 ‘삼각 트레이드’라는 형태로 뉴욕 양키스로 방향을 틀었고 아시아인 최초로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였다.

4. 메이저리그 시절



4.1. 뉴욕 양키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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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1997년 5월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면서 메이저리그 첫 등판이자 첫 선발 등판이 된 7월 10일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전에서는 최고 속도 98마일의 속구포크볼을 주무기로 6.2이닝의 5안타 2실점, 9개의 탈삼진을 기록하여 메이저 리그에서의 첫 승리를 거뒀다. 구단주인 조지 스타인브레너로부터 ‘일본제 놀란 라이언’이라고 극찬했다. 하지만 이후 경기에서 처참하게 털리며 메이저 첫 시즌 성적을 53.1이닝 ERA 7.09로 마친다.
메이저리그 생활 2년째인 1998년에는 스프링캠프에서 오른쪽 팔꿈치 부상을 당했으나, 투구수 100개 제한을 조건으로 개막 로스터에 합류, 선발 로테이션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5월 하순에는 평균자책점이 리그 상위권에 들어서면서 5월에는 4승 1패, 평균자책점 1.44, WHIP 1.05의 성적을 기록하여 '''이달의 투수를 수상했다.''' 6월에 컨디션이 떨어지면서 올스타전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전반기에 14경기에 선발 등판해 6승 3패, 평균자책점 2.91, WHIP 1.23의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후반기에서는 1경기에만 구원으로 등판한 것을 포함한 15경기에 등판하여 7승 6패, 평균자책점 5.21, WHIP 1.35를 기록하는 등 전반기보다 성적이 떨어졌다. 그래도 최종 13승을 거두며 무난하게 시즌을 마무리 했다. 포스트 시즌에서의 등판 기회는 없었지만 팀은 월드시리즈를 제패하면서[6] 아시아인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우승을 경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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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98년의 활약으로 본인의 장난감이 나올 정도로 상당한 인기를 얻었다.
1999년 스프링캠프 마지막 날에 있은 경기에서 1루 베이스 커버를 소흘히 했다는 이유로 조지 스타인브레너로부터 “이라부는 살찐 두꺼비다. 1루 베이스 커버를 소흘히 한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개막 초에는 중간계투로 기용되었다. 이후 5월 2일 캔자스시티 로열스전에 선발로 복귀했고 5월 7일 시애틀 매리너스전에서는 스즈키 마코토와의 사상 최초로 일본인간의 맞대결을 펼쳤다. 이 경기에서 이라부는 7이닝 4안타 1실점, 5탈삼진을 기록하여 승리 투수가 된다. 다음 등판경기였던 5월 13일 애너하임전에서는 하세가와 시게토시와의 투수전이 있기도 했다.
7월에는 4승 무패, 평균자책점 2.64, WHIP 1.08의 성적을 나타내며 메이저리그에서 '''2년 연속으로 이달의 투수상을 수상했다.'''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경기에서 1루 베이스 커버에 들어간 아웃을 취했을 때에는 관중석에서 기립 박수가 터져나왔다. 그러나 8월 중순부터는 5연패를 당했고 후반기에서는 1경기에만 구원으로 등판한 것을 포함한 15경기에 등판하여 5승 4패, 평균자책점 5.60, WHIP 1.50의 성적을 남겼다. 그래도 총 11승을 거두며 2년연속 두자리수 승리에 성공했다.
포스트 시즌에서는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챔피언십 시리즈 3차전에서는 3회 무사 1루의 상황에서 등판했지만 4와 2/3이닝을 던져 13개의 안타와 1홈런 8실점을 기록하여 부진했다. 그러나 양키스는 월드 시리즈 2연패에 성공했고, 이라부는 백투백 우승이라는 것도 동시에 2번째 우승반지를 손에 넣었다.
1999년 시즌 종료 후 테드 릴리, 크리스티안 파커, 제이크 웨스트브룩과의 맞트레이드로 몬트리올 엑스포스에 이적하였고, 양키스와 맺은 나머지의 계약에 더하여 1년 250만 달러+인센티브 지급의 계약으로 2001년까지 계약을 연장했다.

4.2. 몬트리올 엑스포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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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는 시즌 개막 이후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4월 26일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전 이후 오른쪽 무릎에 부상을 당하면서 수술을 받았다. 7월 27일 뉴욕 메츠전에서는 복귀했지만 경기 종료 후 오른쪽 팔꿈치의 통증을 일으켜 8월 15일에 수술을 받아 그대로 시즌을 마감했다. 참고로 2000년 4월 5일, LA 다저스와의 경기는 메이저리그 사상 첫 한일 선발 투수 대결로 다저스의 선발투수는 다름아닌 '''박찬호'''. 박찬호가 6이닝 3실점을 기록해 2이닝 6실점을 기록했던 이라부를 꺾고 승리투수가 됐다.
이듬해 2001년에는 스프링 트레이닝 도중 오른쪽 무릎과 오른쪽 팔꿈치에 통증을 호소하여 부상자 명단에 오른 채 시즌 개막을 맞이했다. 5월 31일 필라델피아 필리스전에 복귀하였는데 6월 17일에 팔꿈치 통증이 재발되면서 인대 부분이 파열되었다는 진단을 받아 수술은 피한 채 재활훈련을 계속하고 있었지만 8월 26일에는 원정장소에서 팀 동료와 함께 식사했을 당시 과음한 채 의식불명인 상태로 병원에 입원했다. 이 일로 인해 8월 29일에는 구단 측으로부터 7일간의 근신 처분을 받았고 9월 6일에 방출되었다. 오프 시즌에 푸에르토리코에서 열린 윈터 리그에 참가해 5승 3패, 평균자책점 2.34의 성적을 기록했고, 12월 27일에는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마이너 계약을 맺었다.

4.3. 텍사스 레인저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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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에는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대 선수로서 참가해 중간 계투로서 메이저리그에 합류하였다. 4월 6일 LA 에인절스 전에서는 박찬호의 부진으로 선발로 등판했고, 4월 13일 시애틀 매리너스 전에서는 이치로와 맞대결을 펼쳤다. 4월 17일 LA 에인절스전에서는 3점을 리드하고 있는 9회에 등판하여 본인 경력으로는 1993년 이후 9년 만에, 그리고 메이저리그에서는 처음으로 세이브를 기록했고 그 후 마무리로서는 5월 중순까지 1승 10세이브, 평균자책점 0.64, WHIP 0.92의 호투를 계속하였다. 그러나 6월부터는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평균자책점이 8.44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겼고 7월 15일에 폐혈전이 발견돼 시즌을 마쳤다.

5. 일본프로야구 복귀와 한신 타이거즈, 그리고 은퇴


2002년의 오프시즌에는 일본프로야구에 복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한 한신 타이거스가 이라부와의 입단 교섭을 실시하면서 한신에 입단했다.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애초에 이라부를 중간계투를 맡기고 싶었다고 밝혔지만, 본인의 희망에 의해 선발을 맡았다. 2003년에 13승을 기록하면서 이가와 게이, 시모야나기 츠요시, 트레이 무어 등과 함께 한신의 18년 만의 리그 우승 달성에 기여했고, 동시에 올스타전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후반기에 구위가 떨어지며 뚜렷한 성적을 남길 수 없었고, 2003년 일본시리즈에서도 2차전과 6차전에서의 총 2경기에 선발로 등판했지만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기동력에 농락당하면서 모두 패전 투수가 되었다.
2004년은 개막 이후 일찌감치 전년도 일본시리즈에서 드러낸 세트 포지션에서의 허점(도루를 막는 견제가 서투른 점)을 드러내 3경기의 등판에만 그쳤고 평균자책점도 13.11을 기록할 정도의 부진을 겪다가 오프에 방출 통보를 받았다. 이듬해 2005년 3월 상순에는 현역 은퇴 의사를 밝혔고, 4월 6일에 이 사실이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에 의해서 밝혀졌다.
이후 도미하여 로스앤젤레스에서 우동 사업을 했다. 처음에는 인기리에 팔렸으나, 어느 순간 사업 침체로 폐업했다.

6. 사망


2011년 7월 27일 로스앤젤레스 근처에서 목을 매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사업 실패 및 이혼으로 심각한 스트레스와 우울증 증세를 겪고 있었다고. 유서는 없었다.

이틀 뒤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홈 경기에서 히데키의 추모 행사가 열렸다.

7. 여담


가정사가 매우 불행하다. 친부는 히데키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그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했을 때 비로소 만났다고.
결혼 생활은 더 심각했다. 1997년 당시 재일교포인 카네미츠 쿈스(한국명 김경숙, 결혼과 동시에 일본 국적 취득)과 결혼을 했으나,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사업 실패 이후 부인과의 불화가 있었는데, 아내가 이혼은 거부하면서 두 딸을 데리고 별거를 했고, 그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로 인해 자살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이야기는 더 충격적이다. 일본에서는 대스타라서 여러 야구계 선후배나 관계자가 이라부의 장례식에 참석을 원했지만 부인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일가 친척만으로 이루어져 간소히 진행되었다. 이라부의 누나와 여동생이 동생의 시신을 보고 싶다고 한것마저 거부당하고 시신조차 보지 못했다고 한다. 팬들과 야구관계자 선후배들이 보내온 화환과 편지는 귀찮다며 모조리 버려져 쓰레기장에서 발견되었다.
이라부는 생전 LA의 리틀도쿄에 있는 모 사찰에 분향되기를 원했지만, 부인과 장모에 의해 죽은지 49일도 되기전에 일본으로 보내져 치바현의 모 사찰에 무연고 사체로 맡겨졌다. 이라부의 형제들이 유골의 반환을 노력했지만, 부인이 눈하나 꿈쩍 안했기에 반환을 받기 힘들었다고 전해진다.
생전에 이라부는 혼자 사는 노모를 위해 오사카에 아파트를 사주고 매달 용돈을 보내 줬는데, 부인은 그마저도 싫었는지 이라부가 죽자마자 이라부쪽 가족들과 절연을 선언하면서 용돈도 끊어버렸다고 한다. 일본 상속법에 따르면 이라부의 유산 중 2/3은 부인이 챙긴다.
[1]일본 오키나와현 미야코지마시[2] 당시 미야코지마 섬은 코자시 소속이었다.[3] 태어난 곳은 오키나와현 코자시. 1974년 코자시미사토 촌과 합병하여 탄생한 게 지금의 오키나와시다.[4] 올스타전에서 159km/h를 찍은 것도 이때다.[5] 혹은 돈 노무라, 풀 네임은 도널드 카츠아키 노무라. 노무라 카츠야의 양자로, 어머니 노무라 사치요(개명 전 이토 요시에)가 노무라 카츠야와 재혼하기 전에 미국인 전 남편인 도날드 엥겔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1978년에서 1982년 사이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뛰기도 했지만 선수로서의 실적보다는 일본 야구선수들의 에이전트로서 유명하다. 특히 지금과 같은 포스팅 시스템이나 FA 제도가 확립되기 전 노모 히데오, 알폰소 소리아노, 이라부 등을 메이저리그로 보내는 과정에서 일본 구단과 격렬한 대립을 겪으며 악명(?)을 떨쳤다.[6] 공교롭게도 이라부를 처음 데려가고자 했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 벌인 월드시리즈였다. 이라부가 등판했다면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