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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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현상건(玄尙健)
이명
현상건(玄相健)
생몰
1875년 2월 15일 ~ 1926년 5월 22일
출생지
한성부
사망지
중국 상하이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2.1. 대한제국의 통역관 겸 외교관
2.2. 고종의 최측근
2.3. 상하이에서의 활동
2.4. 말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통역관, 외교관, 정치인, 사업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대한제국의 통역관 겸 외교관


현상건은 1875년 2월 15일 한성부에서 태어났다[1]. 그는 효령대군의 부마이자 조선 중종 때 도승지 및 형조판서를 지낸 현석규(玄錫圭)의 16대 손으로서 그가 속한 가문은 조선 중기 이후 대대로 역관을 배출한 집안이었다. 6대조 현태형(玄泰衡), 5대조 현상윤(玄商尹), 4대조 현시석(玄時錫) 모두 역과에 합격하여 역관을 역임했고, 조부 현학주(玄學周) 역시 1813년 증광시에 한학으로 합격해 중국어 역관으로 활동했다. 또한 현상건의 부친 현명운(玄明運)은 1861년 식년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한학 역관으로 활동하였으며 동래 감리를 거쳐 현재 부산 시장격인 정3품 동래부윤(東萊府尹)를 역임하였고, 동래부윤시절 경부철도 건설을 주도한 바 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역관 출신인 풍기 진씨 진계환(秦繼煥)의 딸과 결혼해 현상건을 낳았다. 현상건은 빙허 현진건의 재종형이며, 초기에는 근왕파에 속하다가 한일합방 이후 친일파가 된 군령부 총장을 지낸 현영운(玄暎運)[2]은 그의 숙부이다. 당시 역관들은 무역업에도 동시에 종사하고 있었기에, 현상건의 집안은 큰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상건은 부친과는 달리 역관의 길을 택하지 않고 1888년 14살의 나이로 전보국 주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4년 이상 근무하다가 1898년 7월 외부 번역관보로 전속되었다. 이 시기 번역관은 서양 언어 통역관으로, 현상건의 집안이 대대로 종사했던 한학이나 일본어학과와는 생소한 분야였다. 현상건의 처질 (妻姪)인 역사학자 겸 영문학자이고, 구인회 멤버였던 고려대햑교 교수 고(故) 조용만 (趙容萬)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현상건은 1895년 외국어학교 관제 발표 이후 설립된 법어학교(法語學校)에서 에밀 마르텔(Emile Martel)으로부터 프랑스어를 배웠다고 한다.
현상건이 프랑스어를 선택한 동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 동래 왜관을 관리하며 서양 문물에 자주 접할 수 있었던 부친의 영향 및 조선의 친프랑스적 기류에 편승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조선에서는 1885년 프랑스가 청불전쟁에서 승리한 뒤 청나라의 간섭을 탈피하려면 프랑스와 가까워져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었다. 프랑스도 189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삼국간섭 이래 프랑스 자본의 대한제국 경제 진출을 도모하는 등 적극적인 진출 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처럼 양국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은 대한제국 내에서 프랑스어에 대한 선호도를 높여 주었다. 1898년(광무 2)부터 1903년(광무 7)까지 법어학교 입학생 수는 영어학교보다도 많았다.
물론 현상건 스스로의 성취에 대한 야심도 있었을 것이다.[3] 개항 이후 현상건의 가문이 주로 진출했던 역관직은 사실상 그 의미가 축소되는 데 비해, 외국어학교를 졸업하면 번역관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게 된다. 그때까지 프랑스어 번역관의 희소성이 컸기 때문에, 그의 선택은 탁월한 것이었다. 게다가 번역관은 고종이나 고위 관료 가까이에서 통역하면서 권력의 핵심에 다가갈 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프랑스어로만 그치지 않고, 러시아어영어까지 능통했다.
1899년, 현상건은 궁내부 고문관 윌리엄 F. 샌즈의 통역관이 되었다. 샌즈는 현상건이 "수려한 용모에 옷차림도 맵시가 있었고, 완벽하지는 않으나 비교적 유창한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다"고 평가했다. 이후 그는 1899년에 설립된 법규교정소에 가담해 대한국국제의 제정위원을 맡아 르장드르(C.W. Le Gendre), 브라운(J. McLeavy Brown) 등 외국인 의정관의 법률자문 통역을 담당했다. 그러면서 고종의 황제권 강화 작업에 참여하면서, 권력 가까이에 나아갈 기회를 얻었다.

2.2. 고종의 최측근


현상건은 1899년 궁내부 번역과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번역과가 폐지되고 예식원이 새로 도입된 뒤에도 1904년까지 정삼품에 해당하는 외무과장, 번역과장을 역임하였는데, 그의 당시 나이에 비하여 고속 출세를 한 셈이다. 그는 고종의 시종무관으로서 고종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면서, 외교 교섭에 필요한 외국인 면담 통역이나 외교문서 번역 등을 관장했다. 또한 고종이 열강을 상대로 비밀 외교를 본격화할 때, 그는 유창한 언어 능력을 갖추고 있어서 자연히 밀사로 활용되었다.
한편, 현상건은 원수부에 속한 기록국의 국원을 맡아 군사에 관한 조칙과 주요 문서, 서적 및 기록을 관리하였으며, 군제상 육군참령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광무학교, 광학국, 박문원 등 고종이 추진하는 식산흥업정책(殖産興業政策)에 기반하여 설립된 기구들에게 관여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초대 광무학교장, 초대 광학국장을 역임했으며, 황실이 직접 광산을 경영해 하나의 산업으로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1900년 고종의 명으로 이채연(李采淵)과 함께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을 설립하고 부사장으로 부임한[4] 현상건은 이용익과 함께 황실의 이익을 위해 미국인 사업가이자 한성전기회사의 주주인 해리 콜브란의 이권 확장 시도를 저지했다. 또한 1901년 최초의 근대 해운회사인 인천 통운사(通運社)의 사장을 맡아 일본인이 한강 수운에 사용하고 있던 50급 기선 스미노에환(住の江丸)을 구입하여 주장호(注江號)로 바꾼 후, 인천-강화 월곶-황해도 해주 용당포-송도 당호 간을 격일 운항하였다. 회사 설립과 주강호의 운항계획 등을 광고한 <황성신문>에 따르면, 현상건은 경영성적에 따라 기선 추가 구입, 항로 확장 등까지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고종의 신임을 받으며 외국인 통역, 외교문서 번역, 정부의 재원 확충 등 여러 업무를 수행하던 현상건은 러시아일본의 대립이 심화될 무렵 고종의 뜻에 따라 대한제국의 중립국 선언을 추진했다. 그는 미국인 공사 샌즈와 고종 사이를 왕래하며 대한제국의 중립화안을 마련한 뒤 주한 프랑스 공사 플랑시에게 이를 제시했고, 플랑시는 이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고종은 프랑스가 대한제국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여기고 현상건, 이용익 등에게 프랑스와의 두터운 관계 수립을 추진할 것을 주문했다.
1903년 러일전쟁이 임박하자, 고종은 유럽 지역에서 대한제국의 중립을 인정받기 위해 현상건을 밀사로 파견했다. 그는 1903년 8월 프랑스에 도착한 뒤 주프랑스공사 민영찬(閔泳瓚)과 함께 프랑스 외무대신 델카세(Théophile Delcassé)를 만났다. 이후 델카세의 친서를 받고 10월 하순 파리를 떠난 그는 만국평화회의, 헤이그 상설국제재판소를 잇달아 방문하여 대한제국의 영세중립을 제의하기 위해 네덜란드로 향했다. 그러나 평화회의는 개최되지 않았고, 재판소는 휴정중이었기에 결국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네덜란드를 떠나 11월 14일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현상건은 주러시아 공사 이범진과 함께 중립문제를 상의했다. 이때 그는 고종의 친서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한 뒤 베베르(Karl Ivanovich Weber)를 만나 역시 고종의 밀서를 전달하였다. 이후에는 뤼순으로 출발하여 러시아 극동 총독 알렉세예프(Evgenil Ivanovich Alekseev)와 회견해 알렉세예프로부터 유사시 러시아 병사 2,000명을 서울에 파견하여 궁성을 보호해 줄 것을 약속받았다. 이후 그는 1904년 1월 러시아 군함 바리야크 호를 타고 귀국했다.
귀국 직후인 1904년 1월 21일, 고종은 전시국외중립을 선언했다. 전시국외중립선언은 러·일간에 전쟁이 일어나도 대한제국은 전쟁에 가담하지 않고 엄정 중립을 지키겠다는 의미였다. 그간 대한제국이 추진해온 열강 공동 보증 하의 중립국화와는 달리 러·일 양국간의 전시에 한해서 중립을 추진하는 것으로, 한반도가 직접적인 전장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임시적인 방편이었다.
일본공사관의 조사에 따르면, 중립 선언의 주동인물은 이용익·현상건 외에 강석호(姜錫鎬)·이학균(李學均)·이인영(李寅榮) 등이었다. ‘중립파’로 불린 이들은 일본의 행동을 제약하면서 동시에 러시아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그들은 일제가 대한제국에 대해 야욕을 드러내는 것을 견제하려 했지만, 그러면서도 러시아와의 동맹 체결 역시 일본의 침략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간파하고 러시아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두기를 시도했다.
현상건은 이용익과 함께 중립화 논의를 이끌었고, 선언 준비작업을 주도했다. 그는 비밀리에 벨기에 고문, 법어, 덕어학교 외국어 교사들과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전시국외중립선언문을 작성하는 한편, 주한 프랑스공사관의 퐁트네(Vicomte de Fontenay)에게 번역을 의뢰하였다. 그리고 1904년 1월 21일 프랑스 공사관의 협조 하에 중국 즈푸에서 전격적으로 전시국외중립선언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중립선언에 대한 열강의 반응은 냉담했다. 영국,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덴마크, 청나라 공사들은 선언문을 받았다는 회신을 보내왔을 뿐, 공식적으로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다. 고종이 대한제국의 중립보증에 가장 중요한 3국으로 생각해온 일본, 러시아, 미국으로부터는 아무런 회답이나 인정을 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현상건은 포기하지 않고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대한제국과 공수동맹(攻守同盟)을 체결할 것을 권유한 것에 대해 반대했다.
그러나 1904년 2월 23일 양국간 동맹을 위한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은 실패했다. 의정서 체결에 반대했던 고종 측근세력들은 일본의 제거대상이 되었다. 일본은 이용익을 일본으로 납치하는 한편, 현상건에 대해서는 군기밀 누설죄를 씌워 체포하거나 제거하려 들었다. 이에 현상건은 손탁(Sontag)이 운영하였던 정동의 손탁호텔에 임시로 숨어있다가 이학균과 함께 미국 군함 신시내티호를 타고 중국 상하이로 탈출하여 후일을 도모하였다.

2.3. 상하이에서의 활동


현상건은 상하이로 망명한 후에도 고종이 퇴위하기 직전까지 황실로부터 월급을 받았다. 또한 황실이 직접 투자한 관영기업인 용동회사에 고용되어 매달 월급을 받았다. 그는 천진에 있는 대한제국 영사관 부지가 용동이 경영하는 대풍양행(大豊洋行)의 소유로 넘어가도록 유도해, 을사조약 체결 후 영사관 부지 소유권이 일본으로 귀속되는 걸 저지했다.
한편 그는 상하이에서 활동 중이던 러시아 정보국의 수장 파블로프와 접촉하여 그와 고종 간 비밀접촉을 담당했다. 그는 고종의 러시아 망명을 추진하기도 하였는데, 고종이 해외망명정부 수립을 구상하였을 때, 현상건은 상하이 정보국에 이 사실을 알리고 협조를 요청하였다. 또한 현상건은 한반도 북부에 러시아 정보망을 구축하는 작업에서 한인정보원들과 블라디보스토크 군사령부를 매개하는 채널 역할을 담당하였고, 홍콩에 보관되어 있던 한국의 무기들을 이송하는 데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고종의 해외 비자금을 관리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현상건은 상하이에서 한국의 사정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애썼다. 1905년 2월 고종의 국서 반출 사건은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 현상건이 상해에서 일본의 위압을 받고 있는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구미 열강에 사절을 보내야 할 것을 주장하자, 고종은 국서 5통을 작성하여 외국인의 손을 빌려 상하이로 반출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을사조약 체결 후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상건은 이용익, 이학균 등과 함께 영국 <트리뷴>지 종군 기자인 더글라스 스토리와 만나 고종 황제를 도와 일본의 침략상을 세계 언론에 알릴 것을 권고하였다.
스토리 기자는 한국에 관한 조사를 하는 한편, 고종을 직접 알현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고종은 스토리에게 일본의 침략의도를 알리면서, 국서를 작성하여 을사조약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전 세계에 알려주도록 요청하였다. 스토리 기자는 자신이 받은 국서의 내용을 외신을 통해 보도하게 하였는데, 이는 고종이 대외적으로 열강의 공동 보호를 요청한 첫 공식문서가 되었다.
1907년경, 현상건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를 조직해 상하이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일본 상품을 사지 말 것을 호소했고, 일본을 배척하고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으며, 미국과의 관계 및 지원을 중시하였다. 이 단체는 교육에도 힘써서, 대동보국학교(大同保國學校)를 세워 상하이에 온 한국인들을 입학시켜 교육시켰다. 현상건은 대동보국회의 초대 회장을 지냈고, 대동보국회의 국권 회복운동을 위한 의연금 모집에도 앞장섰다.
1907년 허위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군자금을 지원했으며, 1909년경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이범진, 연해주이상설, 전명운, 만주유인석 등과 함께 만국평화회의 밀사파견운동을 전개하여 한국이 자주독립 국가임과 일제의 만행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고자 노력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현상건은 안중근의 변호 비용 1만원을 모금해 영국 변호사에 변호를 의뢰했지만 거절당했다.

2.4. 말년


당시 조선인들은 현상건을 대표적인 항일 투사로 여겼고, 1919년 13도 대표가 소집한 국민대회에서 한성정부 조직시 18인 평정관[5] 중 1인으로 그를 선임하기도 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경기도 개성군 조사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런데 1916년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에서 본국 외무성에 밀보한 자료에 따르면, 현상건은 종래 강경한 배일주의자였지만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원조'를 받은 뒤 2, 3년 이래 영사관에 출입하면서 배일운동자 내지 미국으로 망명한 조선인 등에 관해 참고할 만한 정보를 누차 제출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배경의 이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단 현상건은 당시 생존하여 있던 고종과 수시로 연락을 취하고 있으면서 지속적으로 고종의 망명을 추진하였었는데, 이에 대하여 상해의 반근왕파 세력들과 미주의 공화파 조선인들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고종의 해외 망명에 대하여 강한 적대적 입장이었고 특히 고종의 해외 자산을 둘러싼 갈등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그들과 현상건 등의 근왕파와의 알력이 컸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지속적으로 한성정부 요인들과의 갈등은 상존하였기에[6] 일본밀정의 일본 외무성 보고에 따르면 특히 고종의 서거 후에는 현상건은 한성정부와의 접촉이 없었고, 상하이의 불란서 회사의 사장 겸 자신의 사업만을 하고 있었다고 하며, 사업이 융성하여 어느 정도는 재산을 축적하였다고도 전해진다.[7] 그러던 중 1926년 5월 22일 상하이에서 병고로 사망하였다고만 전해 지는데, 그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지속적으로 고종의 비자금을 회수하려고 노력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어떠한 가시적인 결과는 없었던 것 같으며 그의 죽음과 함께 고종의 비자금은 더욱 비밀에 묻혀버리게 되었고, 여러가지 추측만 존재할 뿐이다.
현상건의 직계 자손으로는 7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故) 현정주 (玄正柱), 상해탄 시대 당대의 유명한 경극 예술가인 매란방 (梅蘭芳), 문인 서지마 (徐志摩)등과 교우하며, 당대 최고의 동양 수목화 작가인 장대천 (張大千)의 제자인 진종주 (陳從周)으로부터 장대천의 동양화 화법을 전수받은 저명한 중국의 동양화가 현채미(玄采薇)등이 있다 (현재도 상하이에 생존 중[8]). 그는 서화 등을 수집하였는데, 일부는 딸인 현채미에 의하여 상하이 한국 영사관에 기증되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현상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기록에는 개성사람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가 상하이로 망명한 후 일제의 간섭을 피하기 위하여 한성에 남아있던 가족들이 일부러 잠시 개성으로 이사하였기에 혼동이 기인한다.[2] 원래 일본어 역관 출신이며, 배정자의 남편으로 더 유명하다.[3] <조선비망록>의 저자이자 미국공사로서 고종의 고문을 역임했던 윌리엄.F.샌즈는 현상건이 야심만만했으며, 그것이 그를 파멸로 이끌었다는 평을 내렸다.[4] 초대 사장은 이채연이었다.[5] 단재 신채호, 박은식, 조성환 등이 포함된다.[6] 특히 이승만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7] 그가 거부가 되었다는 것은 단지 세간의 추측에 불과하며, 실제로 그의 사후 남은 재산은 많지 않았다. 그 집안이 원래 가지고 있던 많은 재산 또한 독립운동을 위하여 상당수 사용되었다고 한다.[8] 1912년생으로 현재 상하이의 최고령 여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