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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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俊基
1927년~2011년 10월 15일
대한민국의 전 철도 공무원. 흔히 알려진 '''경의선 마지막 기관사'''로 유명하다.
1. 연혁
2. 장단역에 멈춰선 마터형 증기기관차
3. 관련된 기사


1. 연혁


1927년 일본 후쿠오카현 출신으로 1943년부터 1945년 10월까지 일본에서 철도 기관사로 근무했다. 당시에는 일본이나 한국 모두 증기 기관차가 운행하던 시점이었던 만큼 귀국 후에도 이 경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해방 후인 1945년 11월에 귀국해 1946년 2월부터 서울철도국 수색기관차사무소(현 한국철도공사 서울본부 수색차량사업소)에서 근무하면서 서울역에서 토성역까지의 80km 경의선 구간을 담당했다. 당시 이 기록은 상당히 빠른 편으로 1946년을 기준으로 봐도 19세. 대한민국 철도 공무원 역사상 최연소 기록이라고 한다. [1]
그러나 1950년에 발생한 6.25 전쟁은 경의선의 운행을 중단시켰고 1950년 12월 31일 한포역에서 내려오던 열차를 마지막으로 경의선 열차에서 내렸다. 경향신문 기사에 의하면 1967년까지 기관사로 근무한 후 행정직으로 전환하셨다고 한다.[2]
이후 1985년 철도청에서 은퇴, 은퇴 후에도 철도 관련 행사에 참가하셨고 2000년 건설교통부에서 만든 경의선 관련 자료집에서 '''경의선 마지막 기관사'''로 공식 인정했다. 당해 경의선 남북연결사업이 진행되었을 경의선 남북연결사업 기공식에서 직접 열차를 시운전했고, 2007년 경의선 시험운전때 초대받은 뒤에 개성을 둘러보기도 했다. 본인으로써는 감개무량했다는 듯.
이후 2009년 마터형 증기기관차 전시식에 참가한 후 노환으로 병원에 있다가 2011년 10월 15일에 별세했다. 장지는 진안군 안천면[3]의 선영이다.

2. 장단역에 멈춰선 마터형 증기기관차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장단역 항목에 있는 장단역과 한국전쟁 부분을 참고하시길 바란다.
장단역에 있다가 지금 임진각으로 옮겨진 열차는 1950년 12월 31일 군수물자로 싣고 북진하던 열차였으나 당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한포역에서 남하하던 상황. 이 이후의 내용은 고인의 인터뷰를 참조하자.

개성역에 도착해 거기서 기차 차량을 정리해 기관차 두 대에 매달아 먼저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도 출발했다. 밤 10시쯤 장단역에 우리 기관차가 도착하자 미군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이미 그 때 북한군이 쓰지 못하게 모든 차량을 불태우라는 명령이 떨어졌던 것이다. 그렇게 장단역에 기관차를 버리고 우리를 태우러 온 다른 기차를 이용해 후퇴했다.

당시 철도 기관사들은 군수물자나 식량을 수송하던 상황이었고 국군의 진군과 후퇴에 따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만큼 위험한 상황에 있었고 병력 수송도 이뤄지고 있었다.[4] 이런 상황에서 움직였으니 볼 거 다 본 셈.

3. 관련된 기사


  • # 경향신문 2000년 기사. 일부가 짤렸다.
  • # 뉴스한국 2009년 기사. 임진각에 생전에 몰던 마터형 증기기관차가 전시될 당시의 인터뷰
  • # 동아일보 2011년 10월 16일 기사
  • # 경인일보 2011년 10월 16일 기사
[1] 증기기관차는 주 기관사 외에도 화부가 1~2명 더 필요하기 때문에 보조원으로 들어가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또한 당시는 중학교나 (구제)고등학교 진학 인원은 사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일부였으며 나머지는 10대 때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또한 이때는 '''전쟁중'''이었다. 태평양전쟁이 격화되며 일본은 일반 농민이나 상점 종업원같은 인력뿐만 아니라 공장 숙련인력까지 뽑아다 전선에 밀어넣기 시작했기 때문에 철도기관사 같은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꾸로 말하자면 철도에 17세 인력까지 써야 할 정도로 막장으로 돌아갔다는 뜻. 북한도 철도인력은 군부에 준하는 조직이자 중요인력으로 군 계급을 주어 대우한다. 한국은 군 계급을 주진 않지만 철도 인력은 별도의 편제가 되어 있으며 예비군 훈련도 면제된다.(정확히는 면제가 아니라 별도의 훈련을 받는다.)[2] 주 근무지는 경의선, 경원선이었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곳 다 남북 분단으로 끊어진 곳이다.[3] 이전 문서에서 충남 금산군 안천면이라 적어뒀는데, 안천면은 전북 진안군에 있는 동네이다.[4] 현재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김재현 기관사는 윌리엄 딘 소장 구출작전에 자원해 특공대원을 수송하고 대전으로 내려갔다가 북한군의 공격을 받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사실 김 기관사는 당시 비번이었으나, 당번이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운송할 기관사가 없자 자원했다고. 결국 구출작전은 수적 열세에 밀려 전원 교전중 사망으로 실패했다. 김 기관사는 후퇴중 죽기 직전까지 기관차 안에서 조작대를 잡다가, 북한군의 총탄에 맞아 조작대를 잡은 채 그대로 주저앉아 유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후에 줄행랑친 당번은 김 기관사의 아들에게 찾아가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다고 한다. 김 기관사는 1983년에 이곳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