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률
1. 경산시 출신 독립운동가, 許秉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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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병률(許秉律)은 1885년 2월 2일 경상도 하양현 읍내면 대곡동(현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대곡리)에서 아버지 허참(許傪)과 어머니 청주 한씨 한석도(韓錫道)의 딸 사이의 1남 3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이웃 마을인 부호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1917년 박상진의 조선국권회복단과 채기중의 풍기광복단이 통합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에 가입하였다. 그는 광복회원으로서 처음엔 군자금 수합에 나섰다가 1918년 대한광복회의 조직이 노출되어 동지들이 차례차례 체포되자 은거하던 중이었다. 그러다가 1919년 음력 9월경 양한위와 권태일(權泰鎰)로부터 독립신문, 경고문 등의 문서를 교부받아 자산가와 관공서의 관리들에게 보내며 민족의식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또한 일전에 진행하던 군자금 모집 활동에 다시 힘써 1920년에는 오기수 등과 함께 모금한 8천여원을 소지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였다.
그후 그는 그해 7월 박용선·조한명(趙漢明)·이동찬(李東燦) 등의 동지와 함께 권총과 탄약을 휴대하고 경성부 서린정(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서린동)의 엄홍섭(嚴弘燮)을 설득하여 2만원을 군자금으로 교부받아 즉시 임시정부에 송금하는 등 군자금 수합활동을 계속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1년 6월 2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강도·사기·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정치범죄 처벌령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7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그해 8월 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서대문형무소와 원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5년 1월 23일 만기출옥하였으며# 출옥 당시 일제가 논밭을 주겠다며 회유하였으나 거절하고 다시 상하이로 망명했다. 1929년 언론을 통한 지하운동의 사명을 띠고 귀국하여, 조선일보 대구지국 총무로 근무하며 그해 10월 때마침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영남지방 학생들의 분발을 촉구하는 격문을 집안 조카뻘인 동지 허동상을 시켜 살포하려다가 허동상이 체포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1937년 대한광복회 옛 동지인 우재룡 등과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학생 및 민중 봉기를 계획했지만 이 또한 실패로 돌아갔으며, 1938년 고향인 하양면 대곡동 산속에 은신하여 청소년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진력하던 중 1943년 1월 29일 별세하였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 단천시 출신 독립운동가, 許丙律
허병률(許丙律)은 1890년 함경도 단천군 하다면 하대동(현 함경남도 단천시 연대리)에서 태어났다.
1930년 7월 18일부터 20일까지 함남 단천군에서 삼림조합(森林組合)의 부당한 처우에 대해 단천군청과 단천경찰서 앞에서 시위 중 일제경찰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조직된 삼림조합은 일제의 산림정책의 실행과 삼림자원의 보호 감시적인 성격이 컸다. 특히 삼림조합이 군(郡) 단위조합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경찰력과 행정력 등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 운영되었다. 삼림조합이 농민들에게 끼친 가장 큰 폐해는 조합비의 과다한 부담이었다. 삼림조합비의 과중한 부담은 조합자체를 부인하려는 투쟁으로 이어졌고 단천삼림조합 반대투쟁이 가장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그가 살던 단천군 하다면을 비롯해 이중면·수하면·복귀면은 숯과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지역이었는데, 당시 삼림조합은 일제의 경찰력과 행정력이 동원되어 강제적으로 운영되는 형태였고, 이들에 의한 임산물 채취 금지 및 조합비의 과중한 부담은 생계수단의 박탈과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당시 삼림간수들의 행패는 원성이 높았으며 주민들 사이에 삼림조합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고조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1930년 7월 단천군 하다면 연대리에서 삼림조합 간수가 삼림단속 중 연대리 주민 허달규(許達圭)를 도벌(盜伐:무단벌채) 혐의로 취조하려다 그 부인을 구타하고 감금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에 대항하여 단천농민조합 간부들을 중심으로 하다면민 200여 명이 하다면사무소와 주재소를 습격하게 되었다. 그러나 하다면민들은 이 문제가 면사무소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이 사건을 확대시키기 위해 7월 18일 단천군청으로 항의하러 가던 중 일본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이때 일본 경찰의 "해산하면 좋도록 처리하겠다"는 말을 듣고 면민들은 일단 해산하였는데, 일본 경찰은 그날 밤 주모자 20여 명을 검거하는 등 오히려 면민을 탄압하였다. 이에 격분한 면민 400여 명은 이튿날인 19일 단천군청으로 가서 단천군수와의 면담 및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위협에 일단 해산하였다.
이후 농민들은 다시 하다면·복귀면·파도면을 중심으로 군민대회를 개최하고 삼림조합의 해체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다. 7월 20일 단천군청 앞에 모인 2,000여 명의 단천군민들은 단천군청을 습격하고 단천경찰서로 가서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던 중 일경과 충돌하게 되었다. 일본 경찰은 정세가 점차 어려워지자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발포하였다. 이때 일경의 발포로 허병률을 비롯하여 김계환·최두필·장종형·이선식(李善植)·최종협(崔鐘協)·안경룡·유경을·안길현·김을룡(金乙龍)·김창언(金昌彦)·이원호(李元鎬)·김응철(金應喆)·김득수(金得洙)·심정붕·안병환이 총상을 입고 순국하였고 이 밖에 20여 명의 중상자가 발생하였다.
200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