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신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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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信圭
1912년[1] ~ 1986년
1. 개요
2. 생애
3. 연구
3.1. 포플러 개량
3.2. 리기테다소나무
3.3. 은수원사시나무
4. 자녀
5. 평가


1. 개요


본관은 연주(延州), 호는 향산(香山). 대한민국의 임목육종학자로 한국 임학의 대부이자 산림녹화의 선구자로 불린다.
대표적 업적은 리기테다소나무와 은수원사시나무(현사시나무)의 육종을 통해 산림녹화의 초석을 다지고 한국 육종학을 세계적 수준으로 높인 것이다.

2. 생애


1912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안주군수였던 현도철(玄道徹)의 4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본 릿쿄대학 철학과에 유학을 다녀온 형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철학자를 꿈꾸었다. 휘문고보에 재학하면서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였고 일본 야마구치(山口)고등학교[2]에 입학원서를 내기도 하였으나 가세가 기울어 일본 유학을 보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지시로 1930년 수원고등농림학교[3]에 입학했다.
꿈이 좌절되어 1년간 방황하던 그는 일본의 사상가이자 종교가인 우치무라 칸조(內寸鑑三)의 전집을 읽다가 '어떻게 하면 나의 천직을 알 수 있을까?'라는 글[4]을 읽은 것을 계기로 임업이라는 학문에 전념하게 되었다.
수원고농에서 만나 의형제를 맺은 정희섭의 재정적 도움으로 규슈제국대학 임학과에 진학하였고, 1936년 졸업하면서 당시 조선 유일의 임업관련 연구기관이었던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 촉탁으로 취직하였다. 1937년부터 기수로 정식 직원이 되었다.# 이곳에 근무중 50여명의 학자로 구성된 조사대의 일원으로 백두산 생태조사에 참여하였다.
1943년 규슈제대 대학원에 입학하여 연구 중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분위기 속에 어쩔 수 없이 연구를 중단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수원농림전문학교에 조교수로 부임하였다.
해방 후 미군정청의 요청으로 임업시험장을 재건하였고, 수원농전이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개편됨에 따라 서울대 교수가 되었다. 이즈음 규슈대학에서 수행했던 연구 결과를 틈틈이 지도교수였던 사토(佐藤敬二) 교수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학위논문으로 인정되어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임업 분야 제1호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1951년 미 정부의 전후 재건 계획에 따라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에 파견되어 산림유전학을 연구하였다.
1963년 농촌진흥청장을 역임하였다.

3. 연구



3.1. 포플러 개량


포플러는 빨리 자라 헐벗은 산야를 녹화하는데 적합하였다. 1954년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이태리포플러를 도입하여 한국의 기후 풍토에 맞는 품종을 찾아 전국에 보급하였다.

3.2. 리기테다소나무


미국 원산의 리기다소나무와 테다소나무의 새로운 잡종인 리기테다소나무를 만들어 1962년 미국 학회지에 소개되었다. 리기다소나무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지만 생장속도가 느리고 가지가 구불구불하며 송진이 많고 재질이 좋지 않았다. 테다소나무는 곧게 자라고 재질이 좋고 생장속도가 빨랐으나 추위에 약하고 비옥한 땅에서만 자랐다. 이 잡종소나무는 척박한 모래땅에서도 빨리 자라고 곧게 자라며 추위에도 강했다. 이 나무는 유럽의 잡종낙엽송과 에테뉴 라디아타소나무에 이어 교잡육종에 성공한 세계에서 세 번째 사례로 꼽혀 국제적으로 소개되었으며 미국 산림국이 이 품종을 미 북부 탄광지역에 심어 좋은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특히 1962년 미국이 對한국 원조를 삭감하려 하자 리기테다소나무가 대한 원조의 대표적인 성과로 제시되어 삭감안을 부결시킨 바 있었다.
그러나 리기다소나무와 테다소나무의 개화 시기가 달라 자연적인 잡종 교배가 불가능하여[5], 일일이 수작업으로 교잡을 시켜야 하기 때문에 종자 생산 효율이 좋지 않아 녹화사업 당시에도 많이 식재되지 못하였다.[6] 산림녹화가 완료된 현재는 힘들게 리기테다소나무의 종자를 생산할 이유가 없으므로 추가로 심고 있지 않고 있다.

3.3. 은수원사시나무


유럽 원산의 은백양과 한국 원산의 수원사시나무를 교배하여 은수원사시나무를 만들었다. 이 나무는 평지 뿐 아니라 산지에서도 잘 자라 1973년 치산녹화10개년계획에 따라 전국에 대량으로 심어졌으며, 1979년 박정희대통령의 권유로 육종을 한 현신규 박사의 성을 붙여 현사시나무라고도 명명하였다. 국내 뿐만 아니라 포퓰러나무의 나무녹병으로 골머리를 앓던 뉴질랜드에서도 1976년부터 이 나무를 대거 수입해 전국적으로 심었다. 뉴질랜드에서는 이 나무를 수원사시나무의 서식지였던 수원 여기산의 이름을 따 'Yeogi'라고 부른다.

4. 자녀




5. 평가


흔히 리기테다 소나무의 육종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가시적인 성과 외에도 1호 임학박사로서 서울대 교수직을 맡아 수많은 제자들을 육성하고 신품종의 육종, 종자의 채취 보관, 정책 수립 측면에서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이러한 업적으로 과학 명예의 전당과 임업 명예의 전당에 모두 올려진 유일한 인물이다.
[1] 대한민국인물연감에는 1911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중등교육기관인 현재의 고등학교와는 다르다. 구제고등학교 참조[3]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의 전신으로 당시는 대학이 아닌 전문학교였다.[4] "누구든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고, 그리고 그 사명대로 사는 길은 지금 자기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5] 작은 관목도 아니고, 키가 큰 소나무 상층부에 있는 수꽃과 암꽃을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수분시켜야 한다.[6] 약 6000만 본이 식재되었는데, 많은 양처럼 보이지만 1차, 2차 치산녹화 사업 통틀어 약 50~60억 그루의 묘목이 식재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리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