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공(신라)

 

'''이름'''
瓠公(호공) / 瓠(호)(?)
'''시대'''
한국 삼국시대의 인물
'''출생'''
기원전 20년 이전 ~ 기원후 58년 이후
'''국적'''
일본신라[1]
왜국 출신의 신라 초기의 재상. 어찌보면 위만과 함께 한국 최초의 귀화인 일지도. 초기 신라의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인물로, 왜국이라는 출신은 보통 일본 열도에서 온 일본인으로 해석되지만 진짜 일본 열도 출신이 아니라 한반도 남부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해상세력을 통틀어 이르는 말로 해석되기도 한다.
'표주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왔기 때문에 '''호공'''으로 불렸다고 한다. 일부에선 호공에 호가 박을 뜻하는 호이기 때문에 박씨족의 분파라고 해석하는 주장도 있으나, 호공이 박씨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서는 한곳도 없으며 애초에 박은 한자 그대로 박이 아닌 밝-의 음차인데다가, 박씨의 시조 혁거세와 같은 시대 인물로 묘사되는데다 두 사람의 출신기록이 혁거세는 난생설화[2], 호공은 왜국에서 바다를 건너온 사람으로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설득력은 떨어지는 편. 오히려 기반이 동일한 이씨일 가능성이 더 높다.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혁거세 거서간 때로, '혁거세왕 38년(기원전 20년) 2월 마한에 사신으로 가서 마한왕의 오만함을 꾸짖는다.' 이는 신라(사로국)의 국력이 옛날보다 신장했다는것을 나타내는 문장이라고 보기도 한다. 반대로 보면 상대적으로 마한의 국력이 약해졌음을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후 탈해 이사금의 속임수로 집을 빼앗기는 굴욕을 겪는다. 석탈해가 호공의 집터가 좋은 것을 보고, 미리 숫돌을 몰래 묻어둔 뒤 호공에게 찾아가 자신의 집안은 원래 대장장이인데 잠시 다른 곳에 간 것이라 주장하고 땅을 파면 숯과 숫돌이 나온다고 말하고 한번 파보라고 했다. 땅을 파보니 숯과 숫돌이 나오자 이를 근거로 호공의 집을 빼앗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훗날 이 집터에 석탈해가 신라의 왕궁이 될 경주 월성을 세웠다고 한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주변보다 땅이 높은 언덕 위고 강줄기도 가까워 집터로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이 동화책이나 위인전등의 판본에서는 이후 석탈해가 왕이 된후에 호공에게 다른 집을 선물했다고도 하며, 석탈해호공의 집을 일방적으로 뺏은 게 아닌, 역시 외국 출신이었던 석탈해가 신라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자 호공의 집에서 살면서 그와 제휴를 맺은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계림(당시는 시림)에서 우는 소리가 나자 탈해왕의 명을 받고 김알지를 주워온 것도 호공이다. 재상으로서 왕의 명령을 받고 나라 밖의 일을 도맡았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는 장수왕급으로 장수한 인물인데, 마한에 사신으로 갔다는 기원전 20년에 최소한 10대 중후반(당시는 활동하는 나이가 현재보다 확실히 낮았기 때문에)이라고 가정하면 마지막 기록인 기원후 58년 대보에 임명된 시점엔 80살에 육박한다.
한편, 그의 거주지였던 양산(楊山)[3]에는 표암봉(瓢嵒峰)이라는 곳이 있는데, 표(瓢)가 호(瓠)와 자형이 비슷하고 뜻이 '''박'''으로 같기 때문에 모종의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정된다. 일단 신라 시조 3명의 탄생에 모두 관여하고, 무엇보다 그의 집터가 훗날 '''월성(月城)'''으로 발전되었다고 전하는 만큼 초기 신라의 정치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음은 틀림없다.
[1] 일본에서 신라로 망명/귀화[2] 현실적으로 해석해보려는 경우에도 보통 신라 건국집단을 북쪽에서 남하한 세력으로 연관지어 주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3] 오늘날의 양산시가 아니라, 사로 6촌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