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뉴재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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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도 치요다구에 있었던, 지금은 없어진 호텔. 사토 타케오(佐藤 武夫)가 설계하고 1960년에 완공했다. 주식회사 호텔 뉴재팬(株式会社ホテルニユージヤパン)이 운영을 시작했다. 지하 2층에서 지상 10층까지 높이에 걸쳐 513개의 방이 있었다. 연면적은 46,697㎡(약 14,126평).
본래는 고급 아파트로 계획했으나 호텔로 변경했다. 당시는 1964 도쿄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호텔 붐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했다.
호텔이 개업하면서 아름다운 외관과 더불어 호텔 내부에 레스토랑, 오픈 카페, 쇼핑 아케이드 등을 세우는 획기적 아이디어로 일본 최초의 도시형 다기능 호텔의 모델케이스가 되면서 도쿄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정·재계, 연예계 등 각계의 유명인들이 이 호텔을 많이 이용했고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고급 호텔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가운데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계속되는 적자로 도산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일본 주식계의 거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실업가 요코이 히데키[1] 가 호텔을 매수하고 2년도 안돼서 정상급 호텔로 부활시켰다.
호텔 뉴재팬 화재 사고
일본어 : ホテルニュージャパン火災 (か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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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업한 지 22년만인 1982년에 사고가 터졌다.
2월 8일 오전 3시 24분에 갑자기 불이 났다. 불은 9층과 10층을 중심으로 번졌으며, 같은 날 12시 30분이 지나서까지 9시간에 걸쳐 진압이 이루어졌다.
사망자 33명, 부상자 34명이 발생한 대참사였다. 화재 원인은 9층 938호실에 투숙해 있던 영국인 남성[2] 이 담배를 피우다가 그대로 잠드는 바람에 꺼지지 않고 남은 담뱃불로, 이것이 큰 불로 번진 것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직접적인 화재로 인해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유독가스를 피해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죽은 사람도 있었고, 결과적으로 사망자 33명 중 13명이 추락사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렇게 추락사한 사망자들과 달리, 침착하게 시트로 밧줄을 만들고 내려가서 대피하고 심지어 다른 투숙객의 피난까지 유도한 생존자도 있었다. 이 생존자는 국내 최초의 일본식 돈가스집인 명동돈가스의 창업자 윤종근 회장이다. 당시 10층에 묵던 그는 연기가 들어차고, 붉은 화마가 넘실대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침대 시트를 여러 장 묶어서 탈출에 성공하여 일본 각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또 다른 층에 있던 일본인 신혼부부를 구해서 의인으로 더 유명세를 탔다. 이후 보상 협상과 수습 단장을 맡았는데 이과정에서 그와 함께 동행한 한국인 8명의 시신을 확인해야 했고 이로 인해 한동안 큰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창문을 보면 대낮임에도 죽은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연기만 봐도 불안해 잠을 못잤다고 한다.
사망자 중 일본인은 11명이었고, 한국인 8명[3] 과 대만인 12명[4] , 미국인 1명, 영국인 1명이 사망자 안에 포함되었다. 일본인이 아닌 사망자들은 당시에 있었던 축제 관광 등의 이유로 입국한 사람들이었다. 화재를 키운 원인으로 소방설비 미비와 허술한 초동 대응 등이 지목되었다. 한 마디로 이 사건 또한 안전 불감증이 피해를 키운 셈이다.
이후 호텔 뉴재팬의 각종 불법 운영이 밝혀져 당시 사장이었던 요코이 히데키(横井英樹)는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금고 3년의 실형 판결을 받았다. 이 사장은 매우 막장스러운 인물로, 계속되는 소방청의 경고에도 단지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호텔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고 있다가, 영업정지를 시킨다니까 그제서야 눈에 띄는 곳에만 몇 개를 설치했는데, 그것조차도 건성으로 설치해서 대부분 수도배관조차 연결되지 않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소방교육도 돈이 든다는 이유로 전혀 실시하지 않아서, '''직원 중 단 한 명도 화재시에 경보기를 울리는 방법이나, 소화전을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한다.'''
또한 겨울에는 난방을 가동할 때 공기가 지나치게 건조해지지 않게 가습기를 같이 틀어줘야 하는데, 전기세가 아깝다고 가습기의 전원을 꺼놓는 바람에 공기가 너무 건조해져 화재가 더 쉽게 번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정상이었던 소방설비가 화재를 감지하면 자동으로 닫히는 방화문이었는데, 소방점검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보니 문앞에 두툼한 카페트를 깔아놓는 바람에 방화문이 카페트에 걸려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단열재를 사용해야 하는 호텔 벽도 경비절감을 위해서 콘크리트의 일부를 덜어내고 목재로 때운 후, 베니어 합판으로 덮고 그 위에 값이 싸다는 이유로 가연성 벽지로 마감을 하였다. 게다가 배선이나 공사를 위해서 뚫었던 구멍들도 경비 절감을 위해서 메우지 않은 채로 벽지로 덮어버리는 바람에 호텔 전역으로 원활히 불이 번질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화재 당시에도 인명 구조보다 고급 가구를 먼저 빼낼 것을 지시했고, 사건 현장에 그야말로 헬게이트가 열렸는데 보도진에게 확성기로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아무렇지도 않은듯 인사를 하고는 '그나마 9층, 10층 밖에 안타서 다행이다'라는 황당한 발언을 했고 '화재의 원인을 제공한 투숙객이 잘못한 거다'며 모든 책임을 투숙객에게 떠넘기는 망언을 했다.[5] 안전 불감증으로 큰 피해를 내고 망한 것도 모자라 사장까지 막장이었으니 완전 흑역사 인증이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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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후 호텔 뉴재팬은 영업 금지 처분이 내려져 2월 10일부로 영업을 중단했으며, 건물은 '''14년간 흉물스럽게 방치'''되다가 1996년이 되어서야 해체되었다. 해체된 자리는 현재 푸르덴셜타워(2002년 12월 16일 완공)가 들어서 있다.
정말로 있었다! 저주의 비디오라는 심령영상 프로에서 이 뉴재팬 사고와 관련된 유령 목격담과 관련 영상자료가 방영되기도 했다. 투고자는 그 지역을 운행하는 택시기사.
화재 당시 임시 합동 분향소가 있었던 도쿄의 조죠지(増上寺)에는 사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관음상이 건립되어있다. 이 관음상은 사고발생 5년 후에 요코이가 직접 세운 것이다.
지하층에 뉴재팬과 별개로 영업되는 고급 나이트 클럽 '뉴라틴 쿼터'(ニューラテンクォーター)[7] 는 호텔 폐쇄 후에도 1989년까지는 영업을 계속했다.
이 사고가 일어난 지 다음날엔 하네다 공항에서 일본항공 350편 추락사고가 있었고, 19년만인 2001년 9월 1일에는 도쿄도 신주쿠구 가부키초의 묘조 56 빌딩(明星56ビル)에서 화재가 일어나 44명이 사망하는 대 참사가 일어났다.
요코이는 이 화재로 엄청난 욕을 먹었고 관련 재판은 10년 가까이나 질질 끌었다. 그 와중에 1991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사들였다. 그러나, 정작 빌딩을 사들인지 몇년 안가 손해를 보고 되팔아야 했다. 그리고 1992년 3년 금고형에 보상금을 내놓으란 판결이 나와 막대한 재산을 헐값에 처분해야 했다. 늘그막에는 다이에이 히몬냐라는 대형 상가랑 볼링장 1개만 남았으며 그는 몰락한 신세를 한탄하며 술을 자주 들이켰다고 한다. 1998년 11월 30일 볼링장을 둘러보던 중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병원에서 85세로 사망했다.
심지어 사장 일가도 그야말로 파탄이 났다. 장남 쿠니히코는 이혼 및 파산으로 술에 미쳤다가 2008년 동맥을 끊고 자살했다. 둘째도 파산 및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배다른 3째 아들도 사기혐의로 입건되는 등 여러 논란을 벌여 일본에서 달아나 하와이에서 칩거하고 있다. 이 외에도 외손자인 ZEEBRA도 양자로 삼았는데 그는 이들과는 다른 길을 걷기는 했다.
1. 개요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에 있었던, 지금은 없어진 호텔. 사토 타케오(佐藤 武夫)가 설계하고 1960년에 완공했다. 주식회사 호텔 뉴재팬(株式会社ホテルニユージヤパン)이 운영을 시작했다. 지하 2층에서 지상 10층까지 높이에 걸쳐 513개의 방이 있었다. 연면적은 46,697㎡(약 14,126평).
본래는 고급 아파트로 계획했으나 호텔로 변경했다. 당시는 1964 도쿄 올림픽 유치를 계기로 호텔 붐이 일어났던 시기이기도 했다.
호텔이 개업하면서 아름다운 외관과 더불어 호텔 내부에 레스토랑, 오픈 카페, 쇼핑 아케이드 등을 세우는 획기적 아이디어로 일본 최초의 도시형 다기능 호텔의 모델케이스가 되면서 도쿄의 명물로 자리잡았다. 그리하여 정·재계, 연예계 등 각계의 유명인들이 이 호텔을 많이 이용했고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들에게도 인기가 있었다.
하지만 고급 호텔이 계속해서 늘어나는 가운데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계속되는 적자로 도산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일본 주식계의 거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실업가 요코이 히데키[1] 가 호텔을 매수하고 2년도 안돼서 정상급 호텔로 부활시켰다.
2. 사고
호텔 뉴재팬 화재 사고
일본어 : ホテルニュージャパン火災 (か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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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업한 지 22년만인 1982년에 사고가 터졌다.
2월 8일 오전 3시 24분에 갑자기 불이 났다. 불은 9층과 10층을 중심으로 번졌으며, 같은 날 12시 30분이 지나서까지 9시간에 걸쳐 진압이 이루어졌다.
사망자 33명, 부상자 34명이 발생한 대참사였다. 화재 원인은 9층 938호실에 투숙해 있던 영국인 남성[2] 이 담배를 피우다가 그대로 잠드는 바람에 꺼지지 않고 남은 담뱃불로, 이것이 큰 불로 번진 것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직접적인 화재로 인해 죽은 사람도 있었지만 유독가스를 피해 창문에서 뛰어내리다 죽은 사람도 있었고, 결과적으로 사망자 33명 중 13명이 추락사로 유명을 달리했다. 이렇게 추락사한 사망자들과 달리, 침착하게 시트로 밧줄을 만들고 내려가서 대피하고 심지어 다른 투숙객의 피난까지 유도한 생존자도 있었다. 이 생존자는 국내 최초의 일본식 돈가스집인 명동돈가스의 창업자 윤종근 회장이다. 당시 10층에 묵던 그는 연기가 들어차고, 붉은 화마가 넘실대는 와중에도 침착하게 침대 시트를 여러 장 묶어서 탈출에 성공하여 일본 각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또 다른 층에 있던 일본인 신혼부부를 구해서 의인으로 더 유명세를 탔다. 이후 보상 협상과 수습 단장을 맡았는데 이과정에서 그와 함께 동행한 한국인 8명의 시신을 확인해야 했고 이로 인해 한동안 큰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고 한다. 창문을 보면 대낮임에도 죽은 동료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연기만 봐도 불안해 잠을 못잤다고 한다.
사망자 중 일본인은 11명이었고, 한국인 8명[3] 과 대만인 12명[4] , 미국인 1명, 영국인 1명이 사망자 안에 포함되었다. 일본인이 아닌 사망자들은 당시에 있었던 축제 관광 등의 이유로 입국한 사람들이었다. 화재를 키운 원인으로 소방설비 미비와 허술한 초동 대응 등이 지목되었다. 한 마디로 이 사건 또한 안전 불감증이 피해를 키운 셈이다.
이후 호텔 뉴재팬의 각종 불법 운영이 밝혀져 당시 사장이었던 요코이 히데키(横井英樹)는 업무상 과실치사죄로 금고 3년의 실형 판결을 받았다. 이 사장은 매우 막장스러운 인물로, 계속되는 소방청의 경고에도 단지 돈이 아깝다는 이유로 호텔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지 않고 있다가, 영업정지를 시킨다니까 그제서야 눈에 띄는 곳에만 몇 개를 설치했는데, 그것조차도 건성으로 설치해서 대부분 수도배관조차 연결되지 않은 장식품에 불과했다. 소방교육도 돈이 든다는 이유로 전혀 실시하지 않아서, '''직원 중 단 한 명도 화재시에 경보기를 울리는 방법이나, 소화전을 사용하는 방법을 몰랐다고 한다.'''
또한 겨울에는 난방을 가동할 때 공기가 지나치게 건조해지지 않게 가습기를 같이 틀어줘야 하는데, 전기세가 아깝다고 가습기의 전원을 꺼놓는 바람에 공기가 너무 건조해져 화재가 더 쉽게 번지는 원인을 제공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정상이었던 소방설비가 화재를 감지하면 자동으로 닫히는 방화문이었는데, 소방점검이라는 개념 자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보니 문앞에 두툼한 카페트를 깔아놓는 바람에 방화문이 카페트에 걸려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단열재를 사용해야 하는 호텔 벽도 경비절감을 위해서 콘크리트의 일부를 덜어내고 목재로 때운 후, 베니어 합판으로 덮고 그 위에 값이 싸다는 이유로 가연성 벽지로 마감을 하였다. 게다가 배선이나 공사를 위해서 뚫었던 구멍들도 경비 절감을 위해서 메우지 않은 채로 벽지로 덮어버리는 바람에 호텔 전역으로 원활히 불이 번질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는 결과를 낳았다.
화재 당시에도 인명 구조보다 고급 가구를 먼저 빼낼 것을 지시했고, 사건 현장에 그야말로 헬게이트가 열렸는데 보도진에게 확성기로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모여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아무렇지도 않은듯 인사를 하고는 '그나마 9층, 10층 밖에 안타서 다행이다'라는 황당한 발언을 했고 '화재의 원인을 제공한 투숙객이 잘못한 거다'며 모든 책임을 투숙객에게 떠넘기는 망언을 했다.[5] 안전 불감증으로 큰 피해를 내고 망한 것도 모자라 사장까지 막장이었으니 완전 흑역사 인증이다. [6]
3. 사고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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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후 호텔 뉴재팬은 영업 금지 처분이 내려져 2월 10일부로 영업을 중단했으며, 건물은 '''14년간 흉물스럽게 방치'''되다가 1996년이 되어서야 해체되었다. 해체된 자리는 현재 푸르덴셜타워(2002년 12월 16일 완공)가 들어서 있다.
정말로 있었다! 저주의 비디오라는 심령영상 프로에서 이 뉴재팬 사고와 관련된 유령 목격담과 관련 영상자료가 방영되기도 했다. 투고자는 그 지역을 운행하는 택시기사.
화재 당시 임시 합동 분향소가 있었던 도쿄의 조죠지(増上寺)에는 사망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관음상이 건립되어있다. 이 관음상은 사고발생 5년 후에 요코이가 직접 세운 것이다.
지하층에 뉴재팬과 별개로 영업되는 고급 나이트 클럽 '뉴라틴 쿼터'(ニューラテンクォーター)[7] 는 호텔 폐쇄 후에도 1989년까지는 영업을 계속했다.
이 사고가 일어난 지 다음날엔 하네다 공항에서 일본항공 350편 추락사고가 있었고, 19년만인 2001년 9월 1일에는 도쿄도 신주쿠구 가부키초의 묘조 56 빌딩(明星56ビル)에서 화재가 일어나 44명이 사망하는 대 참사가 일어났다.
요코이는 이 화재로 엄청난 욕을 먹었고 관련 재판은 10년 가까이나 질질 끌었다. 그 와중에 1991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사들였다. 그러나, 정작 빌딩을 사들인지 몇년 안가 손해를 보고 되팔아야 했다. 그리고 1992년 3년 금고형에 보상금을 내놓으란 판결이 나와 막대한 재산을 헐값에 처분해야 했다. 늘그막에는 다이에이 히몬냐라는 대형 상가랑 볼링장 1개만 남았으며 그는 몰락한 신세를 한탄하며 술을 자주 들이켰다고 한다. 1998년 11월 30일 볼링장을 둘러보던 중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병원에서 85세로 사망했다.
심지어 사장 일가도 그야말로 파탄이 났다. 장남 쿠니히코는 이혼 및 파산으로 술에 미쳤다가 2008년 동맥을 끊고 자살했다. 둘째도 파산 및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으며 배다른 3째 아들도 사기혐의로 입건되는 등 여러 논란을 벌여 일본에서 달아나 하와이에서 칩거하고 있다. 이 외에도 외손자인 ZEEBRA도 양자로 삼았는데 그는 이들과는 다른 길을 걷기는 했다.
4. 여담
- 도쿄 소방 역사상 단 두 번 뿐인 "제4출동"(도내 모든 소방서가 진압을 지원)이 바로 뉴재팬 화재였다.[8]
- 소년탐정 김전일의 에피소드 중 장미 십자관 살인사건의 배경이 이 사고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작중에 나오는 호텔 화재 사고에서 스프링클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점과 호텔 화재 사고에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내용이 비슷한 내용.
- 따개비 한문숙어에서도 언급된다. 아비규환 편에서 당시 사건이 나던 국내 신문에 실린 흑백사진을 보여주며 쪼달 선생이 일본에서 화재가 나 많이 죽었다고 말한다.[9] 이를 본 따개비는 안타까워하며 '사람에게 날개가 있더라면 이렇게 불이 나도 떨어져 추락해 죽지 않을 텐데.'라고 말한다.
- 일본 힙합계의 거물 뮤지션 ZEEBRA는 요코이 히데키의 외손자이다. [10] 요코이 히데키가 사망 시 재산이 빚밖에 남지 않은 상태라 상속 포기를 신청했다고 한다. 따라서 ZEEBRA의 딸인 요코이 리마는 히데키의 증손녀이다.
[1] 横井英樹 (よこい ひでき), 1913~1998.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17살에 집을 나와서 회사를 일으키고, 29살에 3000명의 사원을 이끌었으며 일본이 전국적으로 빈곤에 허덕이던 패전 직후에도 총자산 20억엔을 소유했을 정도로 대성했었다. 일시적으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매수한 적도 있을 정도로 상당한 수완가였었다.[2] 이 인물도 사망했다.[3] 윤종근 회장과 함께 경영기법을 베우러 온 사람들이었다.[4] 희생자 대부분은 한국, 일본, 대만 세 나라의 국민들이다. 한국인 희생자 중에는 전 보사부,체신부 장관이었던 김태동, 안무정 도성상사 사장, 서동금 롯데칠성음료 상무, 이주흥 금성사 상무와 같은 고위 엘리트층 인사들도 있었다.[5] 물론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화재가 9층이 아닌 저층에서 일어났으면 호텔이 타는건 둘째치더라도 희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을 것이고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투숙객도 분명 잘못은 있다. 하지만 직원들은 비상 사태 때 사람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킬 수 있는 역할도 해야 되는데, 이를 못한 것이다. 당장 세월호 침몰 사고만 봐도 왜 선박을 불법 개조한 청해진해운보다 이준석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욕을 더 많이 먹었는지 생각해보자. 그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6] 종합적으로 따지면, 대연각 호텔 화재 사고의 사고 대비 미흡과,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경영진의 적반하장식 태도가 결합된 사건으로 봐도 무방하다. [7] 역도산의 피습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유명하다[8] 다른 하나는 시나가와 가츠시마 창고 화재.[9] 사건도 사건이고, 전술했다시피 희생자중에 한국인도 상당수 포함된 까닭에 국내에서도 크게 보도가 되었다.[10] 아들 말고도 장녀가 있는데 이 사람이 ZEEBRA의 어머니.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이 인물을 히데키의 양자로 입적하여, 아들인 것도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