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루겅
1. 개요
중화민국의 외교관. 1935년 기동사변을 계기로 일본 제국과 결탁한 매국노이다. 지둥방공자치정부를 수립하여 그 수괴가 되었으나 1937년 통주 사건으로 몰락하였고 중일전쟁이 끝난 후 국민정부에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5년 절강성 온주부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부유하여 1902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어를 공부한 후 1905년 도쿄제국대학 산하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가고시마 7고교를 거쳐 젊은 나이에 동맹회에 가입하였으며 일본 여자와 결혼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발생하자 황싱의 지시에 따라 귀국하여 형 인루리(殷汝驪)와 함께 혁명활동에 참가하였으며 1912년 중화민국이 설립된 이후 국민당에 가입했다.
1913년 계축전쟁이 발생하자 다시 혁명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한 후 일본으로 돌아가 와세다대학에 입학, 법학을 공부하였다. 이때 그의 누이가 일본군 헌병대 장교와 결혼하였는데 덕분에 인루겅은 일본군 군부와 정계의 여러 인사들과 두루 인맥을 맺을 수 있었다. 이러한 이력 때문에 인루겅은 매우 친일적인 성향을 띠고 있었다. 대학 졸업 이후 한동안 형 인루리와 함께 구사연구회의 발기인으로 참가, 역사를 연구했다.
1916년 중국으로 돌아간 인루겅은 북양정부 재무부에서 일하다가 호법운동이 벌어지자 참가했다. 1920년 안직전쟁이 끝난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 1921년 11월, 대창사창의 경영자 장요약과 함께 신농간식공사(新農墾植公司)를 설립하고 일본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차관계약을 체결하는 등 사업을 하였다.
1925년 봉천군벌의 궈쑹링이 장쭤린과 양위팅 타도를 외치며 반봉사건을 일으키자 인루겅은 여기에 가담, 취임을 거부한 외교처장 왕정연을 대신하여 제세영과 함께 외교처장을 대리하여 일본 측에 자신들이 공산당과 펑위샹과 제휴하지 않는다고 밝히며 일본의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했으나 관동군의 개입으로 궈쑹링이 체포되어 처형되자 인루겅은 일본 조계지로 도주했다.
2.2. 국민정부 합류
1926년 장제스가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자, 인루겅은 중국 국민당에 가입, 국민혁명군의 난창 공략에 참가하였으며 국민혁명군 외교특파원에 임명되어 일본군과 협상했다.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외교부장 겸 상하이 시장 황푸의 비서가 되어 상하이시 정부에서 일본과의 협상을 맡았다. 1928년 제남 사건이 일어나자 5월에서 7월 사이, 황푸의 지시로 일본 측과의 교섭에 참여했다. 허나 일본의 포악한 태도에 실망한 국민정부가 외교부장을 지일파인 황푸에서 구미에 인맥이 많은 왕정팅으로 교체하면서 배제되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하자 인루겅은 상하이시 참사를 지내고 있었는데 상하이 시장 우톄청의 대표로 일본 측의 시오자와 고이치 제독, 시게미츠 마모루 공사와 담판하였다. 1933년 열하사변 발생 이후 당고의 회담장에서도 참여하였다. 1933년 당고정전협정이 체결되자 베이핑 평정회의의 일원이 되어 당고정전협정 이후 뒷처리를 위한 선후회담에 여럿 참여했다. 일본은 일찍이 인루겅을 눈여겨보며 일부러 그를 크게 칭찬하며 그를 부추기곤 했다. 6월 29일, 국민정부는 협정에 따라 우학충을 위원장으로 하는 정전구 접수 위원회를 수립하였는데 이에 따라 기동 지역은 22개현으로 나뉘어졌으며 10월 8일, 베이핑 평정회의의 결정에 따라 인루겅은 도상명과 함께 란유, 계밀 두 지역의 행정독찰전원에 임명되었다.
2.3. 매국의 길
일본은 화북 지역에서 밀무역을 행했는데 다롄에서 출발하여 진황도로 들어가는 일본 물품에 대해 인루겅은 검사비 명목으로 상징적인 적은 관세만을 징수하면서 일본인들의 환심을 샀다. 일본은 인루겅을 더욱 눈여겨보고 그에게 정전구 행정독찰전원을 담당하라고 부추겼고 인루겅은 기동 지역의 지배권에 욕심을 내면서 상관들에게 아첨하면서 자신이 기동 지역의 행정권을 담당하게 해달라고 로비했다. 결국 1935년 7월 27일, 도상명은 베이핑 평정회의 참의로 전근을 감에 따라 인루겅은 란유 지역의 대권을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었다. 이에 관동군 특무 도이하라 겐지는 인루겅을 부추겨 지방자치의 기치를 세우라고 종용했고 인루겅은 일본 측이 자신에게 큰 기대를 거는 것에 크게 기뻐하며 대담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1935년 11월 23일, 톈진의 호텔에서 일본 측과 담판한 인루겅은 11월 25일 기동방공자치위원회를 설립함으로 기동사변을 일으켰다. 국민정부는 격노하여 11월 26일, 행정원 부원장 쿵샹시의[4] 주재 하에 회의를 소집, 인루겅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하였으나 11월 27일 난징 총영사 슈마 야키치로가 "여론을 무시하는 수단을 취한다면 일본 정부도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고 위협하고 일본군 화북주두군 사령부도 성명을 발표해 국민정부를 위협하자 실질적인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다. 더욱 기세등등해진 인루겅은 12월 25일, 기동방공자차위원회를 기동방공자치정부로 발전시켜 정무장관에 앉았다. 이후 중일전쟁이 벌어지는 1937년까지 괴뢰정부의 수괴로 거들먹거리며 밀무역, 아편 매매를 통해 부를 취했다.
2.4. 토사구팽
그러나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전쟁이 폭발하면서 인루겅에게 위기가 닥쳤다. 일본군이 베이핑-톈진 전투를 벌이며 쑹저위안과 교전하던 중 인루겅에 불만을 품고 있던 기동방공자치정부 소속 보안대가 7월 29일 새벽, 통주 사건이라 불리는 봉기를 일으켰다. 인루겅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1만명 규모의 보안대를 양성한 상태였는데 이들은 일본군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일본인들의 만행에 평소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그러다가 일본군의 오폭으로 보안대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는 것으로 이들의 분노가 폭발, 보안대는 인루겅을 체포하고 2백명의 일본인과 조선인을 학살한 다음에 인루겅을 국민정부에 바치려 했다. 인루겅은 집무실 찬장에 숨어서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해보려 했으나 보안군이 인루겅의 하인을 붙잡아 인루겅에게 구원군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게 했고 속은 인루겅은 기어나왔다가 그대로 체포되었다. 일본군은 이를 국민정부의 사주로 인한 폭동이라고 발표하는 한편, 1개 연대를 급파하여 통주 사건을 진압했다.
인루겅은 일본군의 도움으로 구출되었으나 많은 일본인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의 원인을 제공한 혐의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인루겅은 통주 사건에 책임을 지고 사형을 당하느니 마니 하는 위기에 처했으나 도야마 미쓰루를 비롯한 일본 정객들의 구명운동으로 목숨만은 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중국의 광대한 영토를 점령한 일본에게 있어 기동 지역의 작은 괴뢰정부 수장에 불과한 인루겅은 더 이상 이용가치가 없었고 일본으로 사실상 유배를 떠났다. 1939년에는 조선인 독립운동가 성만리(1911~1974)와 김병인이 인루겅 암살을 기도(지청천이 밀명한 것)하기도 했다. 둘은 인루겅이 탄 열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김병인은 사살당하고 만다. 성만리는 겨우 달아나서 이후 국민당군에 입대하여 일본군과 싸우기도 한다.
1940년 왕징웨이 공작이 성공하여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자 인루겅은 5년 만에 귀국, 1942년 왕징웨이에게 합류하였으나 산서성의 말단 자리를 얻었을 뿐이었다. 1944년 1월, 인루겅은 왕징웨이 정권 법무부에 자리를 얻었으나 자리에 불만을 품고 6월에 사직하여 베이징에 칩거하여 통주 사건 때 희생당한 260여명의 일본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경을 읊으며 경전을 필사하는 것으로 소일을 보냈다.
2.5. 참혹한 최후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인루겅은 12월 5일, 왕커민, 왕읍당, 왕음태, 치셰위안 등 260명의 화북 한간들과 함께 불시에 국민혁명군에게 체포되었다. 1946년 5월 26일, 인루겅은 왕음태 등 13명의 화북의 거물 한간들과 함께 난징으로 압송되었다. 체포된 후 인루겅은 <10년 회고록>이라는 이름의 회고록을 집필하였고 6월 27일, 재판을 받았는데 2천명의 방청객이 몰려왔다. 인루겅과 그의 변호인 장문백은 기동사변에 대해 쑹저위안의 양해를 구한 일이었으며 자신이 젊을 적에 혁명에 참여한 애국자였음을 강조했다. 그리고 자신이 일본과의 악연을 청산하려고 애썼다고 하는 등 열심히 혐의를 부인했다. 9월 28일의 2차 공판 이후 재판정은 그의 주장을 기각하고 그가 중일전쟁 이전에도 국체파괴, 국토폭동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기동사변의 주모자 노릇한 것에 대해서는 무기징역과 종신공권박탈을 선언했고 중일전쟁 이후의 일본 부역에 대해서는 적국통모, 본국반항죄로 사형, 종신공권박탈, 전재산 몰수를 선언했다. 인루겅은 이를 납득하지 못하고 항소하여 1947년 7월 31일, 다시 법정에 섰는데 역시 사형이 확정되었다. 인루겅의 마지막 모습들을 확인하려면 이곳으로.
인루겅은 체포에 항의하며 자신은 애국을 위해 일본에 협조한 것이라 주장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때 도쿄에서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열렸는데 연합국은 하매 협정 체결 과정에 있어 인루겅의 증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인루겅을 도쿄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중국 정부는 이를 거절하였다. 인루겅은 마지막으로 7통의 유서를 남긴 후 12월 1일, 난징 우화대의 형장으로 끌려갔다. 인루겅은 눈가리개를 거부하고 자신은 불교도이므로 앉은 채로 죽게 해달라고 요구했고 큰 소리로 경문을 읽다가 총을 맞고 절명했다.
3. 매체에서
호이4의 모드인 8년 항전 모드에서 지둥방공자치정부의 수장으로 등장한다. 쑹저위안이 일본에 합류하거나 중일전쟁으로 화북이 함락당한다면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 정부)로 흡수되어서 딱히 중요한 역할은 없다. 바닐라에서는 지둥방공자치정부가 구현되지 않아서 등장이 없다.
4. 참고문헌
- 만주사변기 중일외교사, 유신순, 고려원.
- 일제의 대륙침략사,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중국근현대사 3권 혁명과 내셔널리즘(1925~1945), 이시카와 요시히로, 삼천리.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일본 군사사 상, 후지와라 아키라, 제이앤씨.
- 히로히토 평전, 허버트 빅스, 삼인.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일본 근현대사 시리즈 5권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가토 요코, 어문학사.
- 태평양 전쟁사 1권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일본역사연구회, 채륜.
- 중일외교사연구, 구정승미, 선인.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 대만 친일파재판사, 마스이 야스이치, 한울.
- 北伐時期 蔣介石과 反帝問題 : 濟南事件(1928.5)의 解決交涉 過程과 反日運動에의 對應을 중심으로, 배경한, 역사와경계 25-26호, 경남사학회.
- 郭松齡의 '反奉事件', 송한용, 역사학연구 19권, 호남사학회.
[1] 은(殷)자와 단(段)자가 비슷하여 단여경으로 잘못 읽는 경우도 있다.[2] 영어권에는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인 Yin Ju-keng이 유명하여 인쥬컹이란 정체불명의 번역도 보인다.[3] 1883년 출생설도 있다.[4] 왕징웨이 저격 사건으로 인하여 부원장인 그가 행정원장을 대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