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커민
1. 개요
중화민국의 정치인. 북양정부 초기 재정분야의 전문가로 활동하였으나 중일전쟁 후 일본에 협력하였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청나라 절강성 항저우에서 출생하여 과거에 급제, 거인, 도원이 되었고 일본으로 국비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청국 유학생 감독을 맡기도 했으며 귀국 후 절강성에서 일하다가 외교부에 입사, 주일 청나라 공사관 참찬을 지냈다. 1907년 귀국후 직예총독 밑에서 외교사무를 보았으며 중화민국 설립 후 1913년 프랑스로 파견되었다. 1917년, 장훈복벽이 진압된 후 돤치루이 내각이 출범하자 재정총장 량치차오의 지시에 따라 신임 중국은행 총재로 임명되었다. 베이징의 중국은행 총재로 취임한 왕커민은 베이징의 금융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3가지 방안의 중국은행 정리 방안을 제시했다.
- 1. 중국은행 칙례(則例)의 개수.
- 2. 중국은행의 정부에 대한 일시차입금 제공의 제한.
- 3. 중국은행이 발행한 경초(京鈔)의 정리.
이후 1917년 왕스전 내각이 출범하자 재정총장에 임명되었으나 돤치루이와 쉬수정의 음모로 돤치루이가 총리에 복직하자 사퇴했다. 이후 가오릉웨이와 쑨바오치 내각에서도 재정총장을 각각 역임했다. 천만원의 자본금이 들어간 화신사직공사(華新紡織公司), 200만원의 자본급이 들어간 유대사직공사(裕大紡織公司) 창설에 참여하는 등 상공업 분야에 상당한 투자를 하여 중국의 초기 민족공업의 성장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금융, 재계 쪽에서 활동하였으나 장쭤린과의 관계가 좋지 않아 중국은행 총재에서 사임했다. 국민혁명 과정에서 북양정부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수배령이 떨어져 관동주로 망명했으나 장쉐량에게 의탁하여 무사할 수 있었고 장쉐량의 도움으로 수배령이 해제되었다.
1935년, 하북 사건으로 일본군의 위협이 가해지자 행정원의 명령에 따라 톈진 시장에 임명되었으며 기찰정무위원회가 수립되자 기찰정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경제위원회 주석에 임명되었으나 주석에는 취임하지 않았다. 기찰정무위원회 소속으로 일본 측과 협상에 나섰으나 소득이 없자 공직에서 사임하고 상하이에 은거하였다.
2.2. 한간의 길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명망높은 인물을 옹립하여 장제스의 리더십에 타격을 주려 했다. 이때 물색된 인물이 전 총통 차오쿤, 전 국무총리 진윈펑, 탕사오이, 돤치루이의 아들 단홍업, 마지막 연성공 쿵더청, 직예군벌의 수령이었던 우페이푸, 전 교통총장 조여림 등이었다. 하지만 이들 1939년 9월, 특무부 부장에 키타 세이치 소장이 취임한 후 키타는 상하이에 칩거하고 있던 왕커민을 주목하였다. 왕커민은 총통이나 국무총리 경험이 없어 일본이 원하던 수준의 그릇은 되지 못했지만 재정총장을 역임하는 등 어느 정도 명망은 있던 인물이고 재벌들과 잘 아는 사이라는 장점이 있었다. 일본 측은 왕커민을 이용하여 강절재벌들을 국민정부 지지에서 이탈시키고자 했으며 왕커민도 국민정부 수립 후 정치적으로 소외된 화북을 중심으로 하는 전국통일의 야망을 가지고 일본과 접촉했다.
키타 세이치 소장과의 접촉 끝에 왕읍당, 주심, 동강, 탕이화, 치셰위안 등과 함께 정부주비처를 설립하고 1937년 12월, 난징 전투로 난징이 함락되자 국민정부가 소멸된 것으로 간주하고 12월 14일에 중화민국 임시정부(괴뢰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고 행정위원회 위원장 겸 내정총장에 취임했다. 이날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사변대처요강>을 통과시킴으로 화북의 괴뢰정권을 승인하고 진북자치정부, 찰남자치정부, 지둥방공자치정부의 승인을 취소하고 임시정부에 합병하기로 결정했다. 왕커민은 일본군의 협력조직인 유지회를 기반으로 이를 성정부 조직으로 전환시켜 광범위한 대일 협력 정권을 수립할 수 있었다. 1938년 4월 27일, 북지나 방면군 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와 <정부고문약정>을 체결함으로 임시정부의 정무를 일본군 특무부와 사전 협의를 통해 처리할 것을 약속했고 일본인 고문들을 대대적으로 배치했다.
2.3. 애국적 친일파?
하지만 왕커민은 만주국의 괴뢰황제로 옹립된 선통제나 기동사변을 일으킨 인루겅과 달리 매우 강인한 면모와 강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일본에 협력하지만 동시에 일본군을 멸시하는 '강골기질'과 '항일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도이하라 겐지는 왕커민 옹립을 일찍이 반대했었고 왕커민은 일본군 내부에서 국민정부와 내통하는 배일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었다. 1938년 8월, 화북경제개발을 위해 북지나개발회사가 수립되자 왕커민은 일본이 화북경제를 독점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며 행정위원장에서 사의를 표명, 베이징을 떠나 칭다오로 떠나버렸다. 왕커민이 이 정도로까지 강하게 항의하자 일본 측도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38년 1월, 국민정부를 말살하겠다는 고노에 성명 역시 왕커민이 일본에 로비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후 중화민국 유신정부가 수립되자 유신정부의 대표가 보이는대로 총살해버리겠다고도 했다. 북지나방면군은 이런 왕커민이 불편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관동군과의 경쟁 때문에 왕커민을 용인할수밖에 없었다.
1940년, 왕징웨이 공작에 따라 왕징웨이가 일본으로 투항, 난징에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하려 하자 도이하라 겐지의 공작으로 우페이푸가 옹립되어 자신을 대체하는 것을 경계하여 그를 일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으나 처음부터 왕징웨이에게 주도권을 내줄 생각 따윈 없었다. 1940년 2월, 왕커민은 왕징웨이가 수정삼민주의를 선언하자 이를 두고 화북의 정세에는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왕징웨이 정권 수립 후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해체되어 왕징웨이 정권 산하 화북정무위원회로 재편되었으나 사실상 별개의 국가로 운용되고 있었다. 왕커민은 화북정무위원회 위원장 겸 국민정부 위원에 취임했으나 일본 정부가 왕징웨이 지지로 방향을 결정함에 따라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6월에 왕읍당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왕커민의 후원자인 키타도 일본으로 귀국조치되었다.
왕읍당 역시 1943년 2월에 주심에게 자리를 내주었는데 주심이 급사하자 7월에 다시 왕커민이 위원장에 취임했으나 아편중독으로 애꾸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업무를 볼 수가 없어 1944년 2월에 왕음태에게 자리를 내주고 사임했다. 사실 화북정무위원회 내부의 수장 교체는 왕읍당계, 왕커민계, 치셰위안계 등의 화북 내부의 갈등도 없지 않아 작용한 결과였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관동군과 북지나방면군 특무부대들 간의 알력의 결과였다.(....) 관동군이 강해지면 관동군이 밀어주는 쪽이 떠오르고 북지나방면군이 강해지면 북지나방면군이 미는 쪽이 떠오르는 것. 결국 애국적 친일파니 뭐니 해도 결론적으로 일본의 꼭두각시였음은 변하지 않은 본질이었으며 무엇보다 중일전쟁이 중국의 승리로 끝나면서 망해버렸다.
2.4. 최후
행정위원장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아편중독으로 인하여 건강이 극히 악화되어 한쪽눈이 멀어버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이 때문에 자택에서 요양 중이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왕커민은 다이리의 지시로 인루겅, 치셰위안, 왕음태, 왕읍당 등 화북지역의 한간 260여명과 함께 반역죄로 체포되어 12월 5일에 투옥되었다. 하지만 한간재판 와중에 한간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해 부인하면서 모르쇠로 일관할 때 왕커민은 옥중 자술을 통해 자신이 8년간 일본에 협력한 일을 자세하게 밝히면서 오히려 자신이 일본에 협력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심혈을 기울여 일했고,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다."고 기술한 왕커민은 자신의 공과는 모두 사실이며 화북의 인민이 그것을 알아줄 것이라는 태도로 일관하였다. 재판장이 왕커민에게 자백서를 쓸 것을 요구하자 왕커민은 "화북의 일은 전부 내가 했다. 민국정부가 모든 사람에게 죄를 부과한다면 내가 전부 받아들이겠다. 다른 사람은 관계없다. 나 한사람만 처벌하면 된다. 아무것도 쓸 것은 없다. 이것이 곧 나의 자백이다."라고 맞받아쳤다.
이미 고령이었던 왕커민은 병환이 심해져서 옥중에서 눈이 멀었고 결국 12월 25일, 감옥에서 병사했다. 이를 두고 밀반입한 독극물로 음독자살한 것이라는 설이 돌았으나 입증되진 않았다.
3.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일제의 대륙침략사, 소운서, 이문영, 고려원.
- 중일전쟁기 화북의 대일 '협력자' - 국내정치의 역학관계를 통해 본 협력정권의 형성, 박상수, 아세아연구 49집 4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 북경정부의 태환정지령(1916년 5월)과 상해 중국은행의 대응, 김승욱, 동아문화 36집,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 북양정부시기 군벌관료자본의 상공업에 대한 투자, 임지환, 역사와경계 109집, 부산경남사학회.
- 중국, 대만 친일파재판사, 마스이 야스이치, 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