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병서
1. 개요
북한의 군인이자 정치인. 북한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최룡해와의 권력싸움에서 패하여 직책을 거의 다 잃고 강등당했고, 현재는 사실상 당 내에서 직책이 없는 것으로 보여 은퇴한 것으로 예상된다.
2. 경력
2014년 4월 말 들어 뜬금없이 유명해진 인물이다. 상장에서 차수로 2계급 초고속승진을 하며 최룡해와 쌍벽을 이루는 북한의 실세로 급부상했다.
2005년 5월에 조선로동당 중앙위 조직지도부 부부장에 임명되었고 2010년 9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임되었다. 그 이후 2010년 9월 인민군 중장, 2011년 4월 인민군 상장 칭호가 주어졌다. 2014년 3월,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승진했다. 4월 15일에는 대장으로 승진하더니 같은 달 26일에는 대장 진급 11일 만에 또 차수로 승진했으며, 5월 2일 북한군 제복군인 서열 1위인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에 임명됐다. 기사
최룡해가 총정치국장에서 물러나자 그 자리에 황병서가 들어왔으며 특히 김정은은 장성택을 대신하여 최룡해를 견제하기 위해 황병서를 발탁하고 중용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황병서는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의 총애를 받아왔기 때문에, 김씨 왕조의 외가와 친분이 깊다. 다만 나이는 최룡해보다 많기 때문에 세대교체와는 거리가 멀다.
2014년 7월 27일 한국전쟁 종전기념일 행사에서 조선인민군 최선임 제복군인 자격으로 단상에 올라 "전략핵무기로 미국 백악관을 타격할 것이다"라고 큰소리를 쳤다.
2014년 9월 25일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됐다.
2014년 10월 4일,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에 최룡해, 김양건과 함께 전격적으로 참석하기 위해 인천에 방문하였다. 최룡해, 김양건과 달리 국가체육지도위원회에 연관된 인사가 아니며,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그의 직책과 대동한 호위사령부 소속 경호원들, 그리고 타고 온 비행기가 김정은 전용기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김정은의 특사라고 할만하다. 개인적으로는 생애 처음으로 방남[1]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같이 왔던 최룡해, 김양건이 깍듯이 대했던 것을 생각한다면 확실히 북한 최고 실세라는 점이 맞는 것 같다. 전례로 보면 박근혜 대통령과의 회동은 이뤄질 것으로 보였으나 일정을 이유로 청와대 예방은 하지 못했다.참고기사 오찬회담에서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류길재 통일부장관을 만났으며, 폐회식 전과 마치고 난 후에 정홍원 국무총리를 면담하였다. 또한 수많은 언론들이 김정은의 친서를 전달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으나 친서는 없었고, 김관진 국가안보실장과 정홍원 국무총리를 통해 김정은의 메시지만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2015년 4월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랐다. #
2015년 5월에는 숙청되었다는 설이 돌았으나 이는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숙청된 것이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는 숙청되지 않았다고 국정원이 전했다.#
2015년 8월 22일 서부전선 포격 사건으로 촉발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판문점에서 남북고위급이 회담을 하기로 했는데 북한 대표 두명중 한명으로 나오기로 하였다. 나머지 한 사람은 김양건 당비서. 원래 북한은 김양건만 보내려고 했는데 한국 정부가 황병서를 보낼것을 요구했고 북한이 이를 받아들였다.
2015년 8월 27일 당초 알려진 1949년생이 아니라 1940년생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서울신문 보도
2015년 11월에 서부전선 포격도발 수습하고 대북 확성기방송을 중단시킨 공로로 김양건과 함께 북한 최고 훈장인 공화국영웅 훈장을 받는등 현재 김정은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 북한의 제2인자임을 확실히 했다. 리을설 인민군 원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낭독.
2015년 12월초 싱가포르에서 척추수술을 받았다는 대북 소식통을 인용한 보도가 나왔다.
2016년 5월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과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직을 유지하면서 여전히 최고 실세임을 과시했다.
2016년 6월 새롭게 신설된 국가최고기관인 국무위원회의 부위원장으로 군을 대표해 임명되었다.
2.1. 숙청설
2017년 11월 20일 최룡해 로동당 조직지도부장의 주도로 총정치국에 대한 대대적인 검열에서 적발되어 중대한 처벌을 받았다고 국가정보원이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보고하였다. 김원홍과 함께 부정부패죄(매관매직)로 처벌받아 목숨은 부지했으나 별을 모두 떼이고 모든 직위를 박탈당했다고 알려졌으며 정치적 사망선고인 출당조치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되지 않고 있다. 황병서는 2015년 최룡해를 고발해 처벌받게 한 적이 있어서 이에 대한 보복이나 권력투쟁으로 보고 있다.
다만 당시 기준, 기존의 직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대외적 공식 매체에서 기록말살형에 처해지지 않았고, 17, 18일까지 북한의 언론에서 방영된 프로그램들에서 황병서의 모습이 삭제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한동안 사망설이 돌기도 하였다. 이후 2017년 12월, 김정은이 참석하는 김정일 사망 6주기 참배 등 중요행사에 참석하지 않아서 권좌에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출당, 각종 처벌과 같은 이야기가 일본 쪽 매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데 카더라식 보도가 대부분이고 일단 국가정보원에서 관련 첩보를 입수한 바 없다고 확인하여 주었다.
2017년 12월 18일 처벌됐다는 소식이 있고 난 후, 무려 6계급이 강등되고 모든 직위도 박탈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내부의 권력 투쟁인 걸로 해석됐다.
하지만 2018년 2월 5일, 국정원 국회 정보위 보고에서 해임, 강등당해 혁명화교육을 받고 있다고 언급되었다. 후임 총정치국장은 전 인민무력부 부부장 김정각이 맡았다고 한다.
2018년 2월 16일, 김정일의 생일 행사에 그의 모습이 잡혔다. 중앙보고대회에서 평상복을 입고 로동당 부부장급들과 같이 있는 모습이 보여 혁명화교육후 로동당 부부장급 직책으로 복귀한걸로 추정된다. 김정은이 김정일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 기념궁전을 참배할때도 200여명의 당과 군 간부들 무리중 중간정도에 황병서의 모습이 잡히기도 해서 서열이 상당히 낮아진걸로 보인다.
2018년 4월 11일 국무위원회 부위원장 자리에서 해임당하고, 후임인 김정각이 국무위 위원에 보선되었다고 보도되었다.
2.2. 복권설
그러나, 2018년 5월 18일 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최선임 자리에 앉아 있는 장면이 보도되었다.
2018년 6월 30일에는 김정은을 지근거리에서 수행하며, 수행원 중 가장 먼저 이름을 올렸다. 호칭은 "로동당 중앙위원회 간부들인 황병서 동지". 이런 정황을 보면 권좌에서 밀려났다기 보단 '''만년 2인자'''라는 자리를 인정하지 않은 북한 체제 상 권력 구조의 개편 과정에서 권력 조정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북한 내에서 이런 사례는 예전에는 오극렬, 오진우부터해서 흔하고 최근에는 최룡해, 박봉주 등이 있고, 김정각 역시 좌천당해 있다가 황병서의 후임으로 복권한 케이스이다. 장성택 역시 김정일 시절 이런 종류의 가벼운 숙청을 여러 차례 당하고 복귀하기를 반복했으나 (....) 최룡해가 2인자 자리에서 로동당으로 좌천당해 있다 몇 년 후 다시 복권된 것으로 보아 황병서 역시 이러한 권력의 부침을 겪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완연하게 복권된 것으로 추정된다. 8월 13일 조선중앙통신은 황병서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으로 호명되었고 이후 조직지도부의 군사부분 제1부부장인 것으로 직책이 확인되었다.
하지만 2018년 12월 당 정치국 상임위원에서 제외되었고, 2019년 3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8월에 국내에서 추정되기로는 조직지도부 군사부분 제1부부장 직책에서도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황병서 자체는 완벽한 복귀는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고, 결국 한직을 전전하다 알아서 물러나는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애초에 그는 최룡해의 케이스와 달리 조직지도부 군사부분 제1부부장이라는 정말 멀고도 먼 한직으로 발령받았기 때문에 최룡해와 같은 극적인 복귀는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최룡해는 로동당 좌천 때도 당 비서직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후 숙청 때도 곧바로 복귀해서 역시 당 비서로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황병서는 숙청 당한지 1년이 훨씬 지난 상황에서도 제대로 된 직책을 받지 못하고 사실상 사라진 상황이 되었기 때문에 결국 자연스럽게 물러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3. 비참한 말로?
북한 내부 소식에 정통한 주성하 기자의 칼럼과 유튜브 방송에 따르면, 2019년 초 다시 공식 석상에서 사라진 이후 교화소에 수감되었다는 설과 평양 근교의 노동자로 강등되었다는 설 등이 있으나, 가장 믿을만한 북한 내부 소식통에 의하면 김원홍과 함께 2019년 5~6월 경에 처형되었다고 한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으나 어느 쪽으로 판명나건 비참한 말로를 겪은 것은 분명하다.
다만, 2020년 7월 새로 공개된 리을설 관련 기록 영화(당을 받드는 길에 인생의 영광이 있다)에는 리을설 사망시 조문단 중앙에 황병서가 있는 모습이 편집되지 않고 나타났기 때문에 황병서의 거취를 신중히 판단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북한 공식 선전 사이트에서도 황병서의 여러 저작들이 남아있으며, 뉴스와 각종 기록물에도 남아있는걸 봐서 부침을 겪었다 하더라도 처형 수준의 비참한 말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기록말살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건강상의 문제로 은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