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건
1. 개요
북한의 정치인이자 외교관.
2. 생애
북한의 대남정책 전반을 관장하는 통일전선부장이며 로동당 비서, 정치국 위원이였다. 2003년 김용순이 사망한 이래로 북한의 대남 관계, 정책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킨 북쪽 주역으로, 당시 북쪽에서 회담에 유일하게 배석해 김정일 위원장을 단독 보좌했다.
- 2007년 11월에는 통일부 장관과 국정원장의 초청으로 남한을 방문해 노무현 대통령과 면담을 가졌다.
- 2009년 8월 21일부터 23일까지 고 김대중 대통령 조문을 위한 북쪽 사절단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했다.당시 김양건과 면담한 사람들이 회고하기를 "김영남"과 같이 인자하고 부드러운 성격이지만 속은 강하다고 한다.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스타일의 성격이 조문같은 외교활동에서는 잘 나타나는 것.
-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도 2009년 10월 임태희 당시 노동부 장관과 ‘싱가포르 비밀 접촉’을 하는 등 대남정책을 주도해 왔다.
- 2014년 10월 인천아시안게임 폐막식 때에도 황병서 총정치국장 최룡해 당 비서와 함께 남한을 찾은 적이 있다. 당시 황병서 총정치국장은 “이번에 좁은 오솔길을 냈는데 앞으로 대통로로 열어가자”는 말을 남겼다.
- 2015년 8월 DMZ 목함지뢰 매설 사건으로 유발된 서부전선 포격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열린 8·25 남북고위급접촉에서 북한 권력 서열 2위 황병서와 함께 남한을 방문하였다. 이 회담에서 유감 표명, 대북 확성기방송 중단 등 여러 조치에 합의하였다. 그 공로로 11월 황병서와 함께 북한 최고 훈장인 공화국영웅 훈장을 받았다.
3. 사망
북한과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오는 길목에서 군용차량과 충돌하여 2015년 12월 29일 오전 6시 15분(평양시)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향년 73세.
사망이 24시간이나 지난 뒤 공표된 점도 그렇고, 결국은 김정은의 눈 밖에 난 것이 아니냐는 정치적 타살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고위 당국자가 이른 아침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심지어 김양건을 박은 차의 형상이 실제로는 고사포탄이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당장 김양건의 전임자인 김용순 당비서도 운전사는 살았는데 큰 상처 없이 죽었다고 발표가 나서 암살 의혹이 났던 적이 있다.
그리고 사망 일주일 뒤인 2016년 1월 6일, 북한은 기어이 4차 핵실험을 단행하고야 말았다. 게다가 김양건 후임 통전부장으로 '''대남 무력도발 총책임기관'''인 정찰총국 총국장이자 강경파의 대표주자인 김영철 대장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정황을 볼때 앞서 설명한 바를 토대로 김양건은 4차 핵실험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강경파에게 '암살'당했고 교통사고로 위장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의혹 외에는 특별한 증거가 없는데다가, 국가장의위원회가 구성되어 국장으로 치러지는 점, 로동신문에 비교적 크게 부고가 난 점을 보아 정말 사고가 맞다는 시각도 있다. 장례기간이 국장치고는 짧은 3일장이긴 하지만 이것은 연말연시인 점 때문으로 보인다고. 더욱이 북한의 경우 음주운전도 잦은 데다가 도로에 차가 별로 없어 과속도 잦기 때문에 의외로 교통사고가 종종 일어난다고 한다. 또 북한은 파티를 할 때 다른 사람은 참여가 엄격히 금지되어, 이 때문에 본인이 직접 운전해서 가는 경우가 많아 돌아올 때 음주 운전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김양건도 이처럼 사고가 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도 있다.[2]
만약 정말 김정은의 눈 밖에 난 것이라면 김정은의 막장 성격상 그냥 불문곡직하고 장성택이나 현영철처럼 역적으로 몰아 그냥 죽여버리면 간단한데, 굳이 번거롭게 교통사고를 위장해 암살을 할 이유가 없다는 시각도 있다.
북한에서 공개한 장례식 사진을 볼 때, 김정은의 표정이 침울해 있고, 심지어 사진보면 눈물까지 흘린 흔적이 있으며, 허리까지 숙여가며 애도한 것으로 보아 숙청이 아닌 사고사 쪽으로 무게가 기울고 있다. 김정은은 "함께 손잡고 해야할 많은 일들을 앞에 두고 이렇게 간다는 말도 없이 야속하게 떠나갔다"는 말도 남겼다.
한국 정부는 남북 관계를 위해 통일부 장관 명의로 조의를 표명했다.
4. 여담
- 2018년 초부터 이어지는 최근의 남북 화해무드로 인해 그가 재조명되기도 했다. 확실히 북한 내에서 평화적 대화에 대한 유한 입장을 이끌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평. 그러나 2015년에 사망함에 따라 북한 내 대남 온건파가 사라졌다는 점은 외교적으로 매우 아쉬울 나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