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
1. 개요
후안 스키아피노는 우루과이의 前 축구선수 출신 감독으로, 현역시절 포지션은 인사이드 포워드(현대의 공격형 미드필더, 쉐도우 스트라이커와 비슷한 포지션)이다. 조국의 극적인 2번째 월드컵 우승을 이끈 선수이며, 우루과이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는다.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와 훌리오 세사르 아바디에는 적 팀인 페냐롤에서 뛰고 있었다. 나는 나시오날의 열렬한 팬으로서 그들을 증오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다 했었다. 그러나 '엘 페페' 스키아피노는 마치 스타디움 맨 꼭대기에서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매우 훌륭한 패스워크로 경기를 잘 이끌어 나갔다. (...) 그런 이유로 나는 그들에 대해 감탄하는 것 외에는 다른 묘책이 없었고, 심지어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기기까지 했다.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축구, 그 빛과 그림자》 중
2. 생애
2.1. 어린 시절
스키아피노의 아버지는 마로냐스 경기장에서 일하던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파라과이 이민자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이탈리아 카몰리에서 대대로 살아온 토박이였는데 20세기 초에 우루과이로 이민을 가서 정육점 일을 했었다.
스키아피노는 어린 시절 몬테비데오의 포시토스 근교[1] 에서 살았는데 이 당시에는 축구도 축구지만 형편이 어려워져 빵집, 알루미늄 공장에서 일을 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형 라울이 페냐롤에서 뛰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 역시 형을 따라 축구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담갔다.
2.2. 선수 생활
2.2.1. 우루과이
처음에는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축구를 시작했고,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그러다 형의 소속팀 페냐롤에서 입단 테스트를 개최했고, 여기에서 두각을 보여 페냐롤에 들어갔다. 그는 페냐롤 초창기의 전설적인 인사이드 포워드 호세 피엔디베네와 플레이 스타일 면에서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렇게 그의 별명은 작은 마법사가 되었다.
형 라울 역시 우루과이 리그에서 득점왕을 할 정도의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었지만 후안의 실력이 더 뛰어났다. 라울은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일찍 접은 반면[2] 후안은 옵둘리오 바렐라, 로케 마스폴리, 알시데스 기지아, 오스카 미게스 등과 함께 페냐롤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다.
2.3. 1950년 월드컵
초대 월드컵의 우승 이후 20년 만에 월드컵 나들이에 나선 우루과이 대표팀. 예선에서 그들은 같은 조에 속해 있던 에콰도르와 페루가 기권하는 바람에 파라과이와 함께 무혈입성하였고 4조에 배치되었다.
하지만 4조에서도 두 팀이나 기권해버리는 바람에 볼리비아와 우루과이만 남게 되었고, 예상대로 우루과이는 볼리비아를 8대 0으로 떡실신시키며 결승 리그에 진출하였다. 스키아피노는 이 경기에서 두 골을 기록하였다.
결승 리그에서는 스페인, 스웨덴, 브라질과 우승을 다투게 되었다. 스키아피노는 앞선 2경기에 인사이드 레프트로 출전하였고, 여기에서는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최종전은 개최국 브라질과의 시합. 브라질은 비겨도 우승이 확정되는지라 누구도 우루과이의 우승을 예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우루과이 감독인 훌리오 로페스와 선수들까지도... 예상대로 시합 초반에는 브라질의 맹공이 계속되었다. 게다가 후반이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아 브라질의 프리아사에게 선제골을 허용하였다. 바렐라의 포효와 함께 다시 정신을 다잡은 우루과이 선수들은 다시 경기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결국 스키아피노가 일을 냈다. 기지아의 땅볼 크로스를 오른발 논스톱 슈팅으로 연결하여 동점골을 만들어낸 것. 결국 기지아의 역전골을 묶어서 우루과이는 브라질을 상대로 역전의 드라마를 써냈다.
스키아피노가 모든 우리의 열정에 찬물을 끼얹으리라고 예상하지 못했었다.
플라비우 코스타(1950년 월드컵 당시 브라질 대표팀 감독)
우리는 상대가 패배의 쓰라림에 눈물 흘릴 동안 처음 이 시합에 관련된 여러 근심들을 기쁨의 눈물과 함께 내려놓았어요. 우루과이의 가족들도 생각났죠. 순간 여기에서 13분간 일어난 일에 대한 미안함도 느껴졌어요. 한 편의 드라마가 브라질 국토를 통해 확실히 느껴지더군요. 그것을 경기장 안에서, 마지막 순간에 다시 느꼈습니다. 불리한 결과를 예감했던 브라질 선수들이 짓던 절망적인 표정, 어디에서도 본 적 없던 침묵하던 관중들과 함께 말이죠. 이건 구체화하기에는 비극이었죠.
후안 스키아피노
2.4. 1954년 월드컵
우루과이는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스위스 월드컵에 참가하였다. 조별 예선 첫 경기인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 스키아피노는 쐐기골을 넣으며 2대 0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그리고 다음 스코틀랜드와의 경기에서 우루과이는 화력쇼를 선보이며 7대 0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우루과이는 조 1위로 8강에 진출하였고 상대는 축구 종주국 잉글랜드였다. 이 경기에서 스키아피노는 우루과이의 3번째 골을 넣었고, 우루과이는 4대 2로 승리를 챙겼다. 다음 상대는 당대 최강팀인 매직 마자르 헝가리였다. 여기에서 승리를 거두면 월드컵 2연패를 노릴 수 있는 상황. 푸스카스와의 에이스 대결인 동시에 남미와 유럽의 또 다른 자존심 대결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시합을 세기의 대결이라 칭했을 정도였고, 그 당시까지 벌어진 모든 A매치 중에서 가장 관심도가 높을만한 시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헝가리와 우루과이의 시합은 내가 그 때까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시합이었다. 내가 20여 년 동안 축구를 본 것보다 두 시간의 경기에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
지안니 브레라
2.5. 이탈리아
두 차례의 월드컵에서 스키아피노는 훌륭한 기량을 선보였고, 특히 이탈리아의 프로팀들이 큰 관심을 보였다. 월드컵 전에 처음 스키아피노의 영입 시도를 한 팀은 제노아였는데 스키아피노의 몸값이 너무 비싸서 포기하고 말았다. AC 밀란은 월드컵이 열리던 스위스에까지 찾아가 스키아피노를 설득했고 스키아피노를 위해 큰 이적료까지 아낌없이 지불했다. 결국 스키아피노는 월드컵이 끝난 후 7만 2천 파운드에 AC 밀란으로 이적하였다.[3]
스키아피노가 AC 밀란에 입단했을 때의 나이는 29살. 거의 서른 가까운 선수가 유럽 리그에 새로 적응할 것이냐는 의문에 스키아피노는 데뷔전에서의 2골로 답했다. 그리고 데뷔 시즌에서 기존 AC 밀란 선수들에 쉽게 적응하며 우승을 따냈다. 1956년에 새로운 밀란의 감독 지포 비아니와는 축구에 대한 견해의 차이[4] 때문에 다소 껄끄러운 관계였지만 출전은 계속 했다. 하지만 결국 이 때문에 6년간의 밀라노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다.축구공의 신이 떠났다. 이것은 메울 수 없는 손실.
스키아피노의 이적을 다룬 우루과이 신문
스키아피노가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기로 택한 곳은 AS 로마였다. 하지만 계약상의 문제 때문에 백지화될 뻔했는데 1957년의 여름 이적 시장에서 로마의 회장 레나토 사체르도티가 스키아피노의 이적을 발표했지만 밀란 회장과의 이야기가 완전히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로마로 이적하는데 성공했고 2년간의 로마 생활을 정리한 후 은퇴하였다.
한 편 AC 밀란으로 이적한 이후에는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활동하기도 했는데 할아버지가 이탈리아인이었기 때문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대표팀에서의 출전은 단 4경기에 그쳤고, 이탈리아 역시 1958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함으로서 스키아피노의 이탈리아 대표팀 경력은 별 볼 일없이 끝나고 말았다.
2.6. 이후
축구 선수로서 은퇴한 이후에는 몬테비데오에 돌아가서 부동산업에 종사했다. 1974년에는 잠시 우루과이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고 친정팀 페냐롤의 감독을 맡기도 하였다. 하지만 별로 좋은 결과를 보지 못했고, 사업가로서 남은 인생을 보냈다.
2002년 11월 13일에 사망했는데, 의회에서 잠시 추모를 했다.
3. 플레이 스타일&평가
스키아피노는 다소 내성적이고 배타적인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이 성격으로 인해 자신의 세계에서 훈련만 열심히 하고 긴장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아마도 이런 가치를 가진 지휘자는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스키아피노는 발에 손전등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위대함의 대표격인 단순함으로 게임을 밝히고 풀어나갔다. 그는 기하학에 선천적인 재능이 있어서 거의 본능적으로 위치를 파악해냈다.
지안니 브레라
우루과이 역대 최고를 다투는 선수이고 탁월한 기술과 시야, 패스 능력을 보유했다. 또한 뛰어난 창조성으로 게임을 뒤집을 수 있는 선수였다.
4. 뒷 이야기
- 1954-55시즌, 스키아피노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음에도 심판에게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다른 심판의 증언에 따르면 코랄로 심판은 스키아피노 앞에서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네 놈은 모든 이탈리아 심판들을 매수했냐라고 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심판은 5일간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5. 수상
5.1. 클럽
- 우루과이안 프리메라 디비시온 우승 4회: 1949, 1951, 1953, 1954(이상 페냐롤)
- 세리에 A 우승 3회: 1954-55, 1956-57, 1958-59(이상 AC 밀란)
- 라틴 컵 우승 1회: 1956(AC 밀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