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회의파

 

1. 소개
2. 기원
3. 활동
4. 관련인물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언어별 명칭'''
'''한국어'''
서산회의파
영어
Western Hills Conference Group
일본어
西山会議派
중국어
西山會議派
프랑스어
Groupe des conférence collines occidentales

1. 소개


중국 국민당의 우익 파벌. 쩌우루, 셰츠, 쥐정, 쉬충즈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초기에는 국공합작 파기와 청당 운동을, 후기에는 장제스 독재 타도에 주력했다. 줄여서 서산파라고도 한다.

2. 기원


기원은 1924년의 1차 국공합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쑨원은 소련의 지원을 얻기 위해 중국 공산당 당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하는 것을 허용했다. 국민당 내부에서는 공산당이 국민당을 내부에서 이용하여 적화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와 의혹이 있었기 때문에 국공합작과 연소용공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런 우려를 쑨원이 자기자신이 국민당을 탈퇴하여 공산당에 가입해 혁명활동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국공합작을 포기할 수 없다고 강하게 나오며 일축했기 때문에 쑨원 생전에는 국공합작에 대한 강한 반발이 나올 수 없었다.
하지만 1925년 3월에 쑨원이 사망하고 국민당 전체를 아우를 구심점이 사라지자 국민당 내부의 '좌파'와 '우파'가 충돌하게 되었다. 좌파에는 연소용공과 국공합작에 긍정적인 왕징웨이, 랴오중카이 등이 있었고 우파에는 후한민, 린썬, 쩌우루 등이 있었다.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의 지원을 받은 왕징웨이가 1925년 7월 국민정부 주석에 당선되고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의 약진이 시작되었다. 좌우갈등이 빚어지는 가운데 1925년 8월 20일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후한민, 쉬충즈 등이 숙청되었고 린썬, 쩌우루 등의 원로들도 화북으로 추방당했다. 자세한 것은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문서 참조.
분노한 국민당 원로들은 1925년 11월, 쑨원의 시신이 안치된 베이징 서산 벽운사에 모여 서산회의를 개최하고 국공합작 종결과 왕징웨이와 공산당원들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게 된다. 광저우 당중앙은 이들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결정했고 원로들은 중국 국민당 상하이 지부를 접수하여 상하이 당중앙을 건설함에 따라 국민당은 둘로 갈라지고 서산회의파가 시작되었다.

3. 활동



3.1. 상하이 당중앙 시기



3.1.1. 반제투쟁


서산회의와 상하이 당중앙 설립 전후에 서산회의파는 주로 제국주의와 군벌 타파에 주력했다. 서산회의파는 군벌을 '제국주의자들의 주구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을 뿐,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지키려는 성의를 전혀 갖지 못한' 자들로 간주하고 이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서산회의파는 서산회의 이전부터 2차 직봉전쟁으로 집권한 돤치루이의 임시집정정부 타도에 나섰다. 1925년 11월 11일 린썬과 쩌우루가 베이징의 대학 교수 왕세걸 등과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중국의 관세자주권 회수를 호소하는 관세자주 3원칙을 발표했다. 이후 서산회의는 시국선언문 등 임시집정정부 비판을 이어나갔고 1925년 11월 22일과 28일에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여 돤치루이 퇴진, 집정부 특위대 무장 해제, 국민정부 임시위원회 조직을 요구했다. 11월 29일에도 천안문에서 대규모 시위가 열러 돤치루이 퇴진, 관세회의 해산, 국민정부 임시위원회 조직, 국민회의 소집, 국민군의 호응을 촉구했다.
1925년 11월, 봉천군벌 소속의 궈쑹링반봉사건을 일으키자 서산회의파는 장쭤린 역시 타도 대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즉시 궈쑹링을 옹호했고 관동군이 반봉사건에 개입하자 일본 공사관에 이를 항의하는 뜻을 전달했다. 반봉사건을 후원한 펑위샹도 평민정치 실행, 정치공개, 불평등조약 철폐 등 12개 항의 개혁을 담은 통전을 발표하고 이를 서산회의파에 전달하여 의견을 구함으로 서산회의파와의 관계개선을 꾀했다. 서산회의파도 펑위샹이 장쭤린, 돤치루이와 최소한 경쟁자에 속한다고 판단하여 펑위샹과 우호적 관계를 조성하려고 하였다. 이후 서산회의파는 펑위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반봉사건이 진압되고 직봉풍전쟁에서 펑위샹이 패배하여 소련 외유를 떠나게 되면서 펑위샹과 연계하여 군벌정치를 타도하려는 서산회의파의 구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3.1.2. 국민혁명


그러던 중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 장제스가 국민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장제스는 1926년 7월 1월 국민혁명군 총동원령을 선포하면서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시작하였다. 상하이 당중앙은 북벌의 필요성을 일찍이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절묘하게도 같은날 국민정부에 북벌이 쑨원의 미완의 유업이며 국민당 전체 동지들이 북벌을 완성시키고 진정한 민국을 실현시켜야 한다면서 북벌을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중집위훈령 제4호>를 발표했다. 이 훈령에서 서산회의파는 북벌의 미명을 빌어 사익을 탐하는 자는 '본당의 죄인'이라고 지적하며 공산당에 대한 경계를 여전히 드러냈다. 또한 자신들에 대한 반대를 표명한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에 대해서도 불신의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1926년 7월 9일, 서산회의파는 제2기 2중전회를 개최하여 22일까지 북벌 후의 당무, 정치, 군사 등 각 방면에 대해 토론했다. 이 결과, 상하이 당중앙은 국민혁명군의 북벌은 찬성하지만 다른 문제는 침묵하기로 하고 상하이 당중앙에도 독자적인 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우페이푸, 쑨촨팡 등 군벌들이 북벌은 공산당의 적화 시도라고 북벌을 비난하는 선전을 강화하자 쩌우루는 "군벌들은 인민이 적화를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적화라는 이름을 빌려 북벌과 적화를 동일시하며 반혁명전쟁에 이용하고 있다."라고 군벌들을 맹비난했다. 쩌우루는 공산당이 북벌에 반대했다는 점, 북벌군 군관 대부분이 국민당원이며 공산당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여 북벌과 중국 적화가 별개의 것임을 강조했다. 국민혁명군이 우한을 점령하고 장강까지 진출하자 상하이 당중앙은 호남성 일대의 중앙집행위원, 후보집행위원에게 특별훈령을 내려 공산당이 당무를 장악하고 북벌의 과실을 독차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의하라고 알렸다. 하지만 서산회의파의 우려대로 북벌이 급진전되자 공산당이 국민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 강화되었고 광저우 당중앙의 약진에 기존에 상하이 당중앙에 충성하던 당부와 기관들이 속속 광저우에 합류하면서 상하이 당중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3.2. 영한합작 시기


상하이 당중앙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던 정국은 1927년 4월 12일,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이 고조되던 가운데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급변하게 된다. 장제스는 난징의 친공 부대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공산당원들을 체포한 다음, 상하이의 노동자 규찰대를 무장해제시키고 많은 공산당원들을 체포, 처형하였다. 이어 4월 15일 광저우에서 장제스에게 호응하는 4.15 광저우 쿠데타가 일어났고 우한 국민정부가 장악한 양호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공산당원에 대한 숙청이 단행되었다. 1927년 4월 18일, 장제스는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우한 국민정부는 여전히 국공합작을 유지했지만 1927년 6월 1일, 스탈린으로부터 국민당을 장악하여 개조하라는 '5월 지시'가 내려오고 소련이 우한 국민정부에 대한 지원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펑위샹이 난징의 편에 서자 1927년 7월 15일, 왕징웨이도 분공을 결정하였다. 7월 13일, 공산당이 국민정부에서 선제탈퇴하였고 우한 국민정부도 반공의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8월 13일 통합의 걸림돌인 장제스 하야 이후 두 국민정부가 합쳐지는 영한합작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서산회의파도 합류하여 1927년 9월 16일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를 설립하고 서산회의파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 했지만 광동파, 광서파, 후한민을 비롯한 친장 우파, 장제스 직속 황포계 군사실력자들, 왕징웨이의 개조파 등이 첨예하게 맞물린 상황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고 광동파, 개조파, 장제스가 합작하여 장제스 복귀를 위해 서산회의파가 주도한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를 해체해버리면서 서산회의파는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거기에 서산회의파가 배후로 지목받은 난징 참안이 벌어지면서 서산회의파는 더더욱 궁지에 몰리게 된다. 자세한 것은 영한합작 문서와 국민당의 2차 북벌 문서 참조.

3.3. 국민당의 2차 북벌편견회의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의 와해 이후, 쩌우루, 쥐정, 쉬충즈 등은 외유를 떠났고 국내에 잔류한 셰츠 등도 여기저기 흩어져버렸다. 쥐정은 계속 일본에 머물렀고 일본과 하와이를 거쳐 미국에 도착한 쩌우루는 쉬충즈 등과 연명으로 4중전회 소집 등에 대한 반대의 뜻을 밝히며 광동파의 정통성 주장을 반박했다. 또한 난징에서는 3중 전회가 열린 적이 없고 우한에서 열린 3중 전회는 1927년 4월 17일 장제스의 당적을 박탈하였으므로 현재 난징에서 열리는 4중 전회는 난징을 정통으로 보든, 우한을 정통으로 보든 열릴 수 없는 것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따라서 특위의 취소 등이 모두 정당성이 결여된 결정이라는 것이 서산회의파의 주장이었다. 이후 후한민이 광동파와 장제스의 합작에 불만을 품고 외유를 떠났고 왕징웨이광저우 폭동의 책임을 추궁당해 외유를 떠나야 했다. 이로써 국내의 반장 정치세력들은 순식간에 일소되었다. 하지만 국외의 반장 세력들이 연계할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장제스는 서산회의파 등의 움직임에 여전히 감시를 계속했다. 쩌우루는 후한민과 쑨커를 반장세력에 합류시키려 했지만 후한민과 쑨커 모두 난징과 합작을 결정했고 8월 28일 후한민이 귀국하여 난징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다만 그동안 서산회의파에 우호적이면서도 서산회의파와 움직임을 같이 하지 않았던 쉬충즈가 서산회의파에 확고히 합류하게 되었다.
쩌우루는 미국에서 7월 12일 독일로 이동했고, 27일에는 스웨덴으로 떠났는데 이때 쉬충즈가 먼저 중국으로 귀국했고 쩌우루도 1년 동안의 여행 끝에 11월 26일 상하이를 통해 귀국했다. 이후 쩌우루는 한동안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정부를 경솔히 공격하지 말 것을 주변에 주문하면서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이는 위정자들에게 노력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쩌우루의 상당히 대국적인 인식이 작용한 결과였다. 이후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로 베이징이 함락되고 12월 동북역치가 선포되면서 만주의 봉천군벌까지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중국통일이 일단 완성되었다. 하지만 난징 국민정부의 정치분회 폐지 결정, 편견회의를 통한 군 감축 정책에 군벌들이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먼저 펑위샹이 반장운동을 위해 서산회의파의 북상을 요청했는데 서산회의파는 펑위샹이 소련과 긴밀하였던 전력 때문에 펑위샹을 공산당으로 간주하여 이에 호응하는 것을 꺼렸지만 결국 쩌우루가 장제스의 태도가 전과 다르지 않다고 비판하면서 펑위샹과 합작을 결정했다.
일본에 머물던 쥐정도 일본의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다가 중국에 귀국하고 한동안 상하이에 칩거하며 반장여론을 조성하며 셰츠와 제휴했다. 1929년 2월 1차 장계전쟁이 터질 위기가 발생하자 쥐정은 중앙집행위원이자 서산회의파와 관계가 밀접한 장지본과 연락하여 무력충돌을 막으려 했으나 장제스가 리쭝런, 바이충시를 토벌해버리자 분노하여 적극적으로 반장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장제스의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복직을 권력지향적 태도라 비난하던 셰츠도 광저우를 방문하여 상하이 당중앙의 일원이었던 중산대학 교수 황계륙, 계승기 등과 회동하며 이들을 반장세력에 끌어들이려 했지만 이들 모두 서산회의파와 단절하여 난징 정부에서 일하기로 하였다. 1928년 11월 7일 난징 정부는 셰츠를 사천성정부위원 겸 건설청장에 임명하면서 회유하려 했지만 셰츠는 취임을 거부하고 반장운동에 나섰다.

3.4. 반장전쟁 시기


그러던 중 1929년 3월 15일 국민당 3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기로 결정했다. 당시 당원의 직접선거로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곳은 난징, 상하이, 광저우, 광동 4개 당부 뿐으로 이들 당부는 반장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장제스는 광동파와 서산파를 배제해버리고 80%에 가까운 대표들을 선거법을 통하지 않고 선출했다. 이에 반장세력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반목하던 광동파와 서산파가 합작하게 되었고 군사실력가들과의 적극적인 제휴를 꾀하게 되었다.
1929년 2월, 우한정치분회과 호남성 정부주석 노척평을 해임하면서 발생한 1차 장계전쟁에서 서산회의파가 계계군벌과 연합하여 반장전선을 형성할 것이고 쉬충즈가 광동에서 군사지휘를 맡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서산회의파가 주목받았다. 1929년 5월, 쥐정, 쉬충즈, 셰츠가 광저우에 집결하여 광서파와 합작을 결정하고 5월 18일 장제스의 국민정부주석 취임 반대, 국민회의 소집, 3전대회 불인정, 쉬충즈의 도장총사령 추대를 합의했으나 광서파는 장제스에게 곧 진압당했다. 장제스는 서산회의파가 광서파와 연계했다는 사실에 그동안 서산회의파를 국민당의 원로로서 예우하며 그들의 반장활동에도 탄압하지 않았던 기존의 정책을 철회하고 쩌우루, 셰츠, 쥐정을 체포하여 그 즉시 총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이에 서산회의파는 평진 지역으로 이동하여 펑위샹, 옌시산, 장쉐량과의 합작을 추구했다. 북평의 서산회의파는 반장선언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반장세력들의 합작을 호소했다.
1929년 5월, 1차 장풍전쟁이 발발하자 쉬충즈가 펑위샹과의 합작 의사를 타진했다. 펑위샹도 이에 호감을 보였고 쩌우루가 펑위샹, 옌시산과 회담하여 기본법 제정을 촉구했고 펑위샹과 옌시산 모두 동의했으나 1차 장풍전쟁에서 옌시산이 장제스의 편에 서면서 1차 장풍전쟁도 장제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타이위안에서 반장운동을 후원하던 서산회의파도 평진으로 철수했다. 결국 국민당 중앙은 1929년 12월 12일, 쉬충즈, 쩌우루, 셰츠, 쥐정의 당적을 박탈하고 지명수배를 결정했다. 12월 13일 서산회의파는 굴하지 않고 장제스의 하야와 출국을 요구했으며 리례쥔을 비롯한 국민당 원로들이 다수 동참했다. 이에 국무회의는 공식적 지명수배를 하달하고 서산회의파와 난징 국민정부의 관계는 최악의 국면에 치달았다.
서산회의파는 장쉐량, 펑위샹, 옌시산의 합작을 도모하며 펑위샹과 옌시산의 화해를 주선했고 장쉐량의 반장 동참이나 최소한의 중립을 촉구했다. 장쉐량이 중립고수를 주문하는 셰츠의 의견에 절대찬성을 보이자 펑위샹과 옌시산은 1930년 중원대전을 일으켰다. 서산파는 마침내 앙숙이었던 왕징웨이의 개조파와도 합작하여 베이핑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태원약법을 제정하여 장제스 타도를 도모했으나 장쉐량이 장제스의 편에 서면서 중원대전도 장제스가 승리했고 서산회의파는 다시 한번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3.5. 탕산 사건1차 양광사변


군사실력가들의 도전을 모두 분쇄한 장제스는 약법제정 문제를 놓고 동지인 후한민과 충돌하다가 1931년 2월, 후한민을 감금시키는 탕산 사건을 일으켰고 이는 중국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즉각 국민정부 문관장 구잉펀이 사직을 요청했고 철도부장 쑨커를 비롯한 광동파들이 대거 잠적했다. 장제스의 의형제인 다이지타오조차 이 조치는 불만을 품고 난징을 떠나버렸다. 4월 30일 린썬, 구잉펀, 등택여 등 4명의 감찰위원이 장제스의 6가지 죄상을 거론하며 탄핵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장악한 감찰위원회의 우징헝, 차이위안페이, 장런제, 리스쩡 등은 탄핵 논의 자체를 포기해버렸고 감찰위원들은 장쥐와 연명하여 구잉펀에게 이번 사태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장제스를 적극 옹호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쑨커, 구잉펀 등 광동파는 개조파, 서산회의파와도 합작하여 본격적인 반장에 나서게 되었다.
5월 1일, 왕징웨이가 공개통전으로 장제스를 비판하며 장제스 타도를 주장하면서 개조파가 들고 일어났고 광동파의 실력자 천지탕이 5월 3일 탄핵안에 동참했다. 5월 11일 근성넘치게도 세차례나[1] 장제스에게 박살났던 광서파 리쭝런이 제1방면군 총사령 명의로 장제스 탄핵과 반장통전에 호응했다. 서산회의파도 여기에 참여, 쉬충즈, 쩌우루 등이 광저우에 속속 도착하여 5월 27일 중국국민당중앙집행위원-감찰위원 비상회의를 성립하고 광저우 국민정부를 선포했다. 광저우 국민정부는 난징 국민정부와의 군사적 일전을 겨루려 했으나 공산당을 상대로 하는 제3차 초공작전과 더불어 9월 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장제스와의 거국적인 합작에 동의하게 되었고 장제스 하야를 조건으로 광저우와 난징이 통합하였다. 하지만 장제스의 뒤를 이었던 쑨커는 답이 없는 헬게이트인 상황을 직면하자 한달만에 견디지 못하고 하야했고 장제스는 광동파에게 냉대를 받아 빈정상안 왕징웨이와 합작하여 장왕합작을 통해 1932년 1월 복직했다. 이후 서산회의파는 대부분 반장운동을 중단하고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후한민 유폐 이후 국민당의 분열은 탕산 사건 문서에서, 반장파의 신속한 결합과 광저우 국민정부의 수립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1차 양광사변 문서 참조.

4. 관련인물


  • 쩌우루(鄒魯 1885~1954): 광동성 대포현 사람. 1905년 흥중회에 가입하여 1911년 신해혁명 이후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고 1913년 계축전쟁에도 참여했다. 1923년에 재정부장, 1925년 국민정부 수립 이후 중국 국민당 청년부장, 광동대학 총장 등을 지냈다.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이후 화북으로 추방되자 서산회의 소집을 주도했다. 영한합작 기간 중 서산회의파가 배제되자 장제스를 독재자라고 비판하며 반장파가 되었고 반장전쟁 기간 중 가장 열렬히 활동했다. 펑위샹옌시산의 합작을 끌어내어 중원대전 발발에 일조한 것도 이 사람. 하지만 중원대전이 장제스의 승리로 끝나자 교육활동에 전념했고 국공내전 이후 타이완으로 건너가 탐캉대학 설립 후 교육 활동을 하다가 사망했다.
  • 다이지타오: 좀 애매한 케이스로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극우파 청년들에게 폭행당한 후에는 거리를 두며 광저우 중앙과 상하이 중앙 사이에서 중립을 취했다.

5. 참고문헌


  • 西山會議 召集에 대한 各界의 反應, 김영신, 동국사학.
  • 黨務에 관한 결의를 통해 본 西山會議의 본질, 유지원, 김영신, 중국학연구.
  • 국민혁명 초기 국민당 우파의 현실인식과 대응, 김영신, 동양학.
  • 국민당 3전대회 전후의 반장운동, 김영신, 중국학연구 30권, 중국학연구회.
  • 訓政時期約法 제정 논란과 ‘蔣·胡合作’의 파국, 김영신, 동양학 42권, 단국대학교동양학연구원.
  • '湯山事件' 後의 政局과 蔣介石의 對應, 김영신, 중국학연구 50권, 중국학연구회.
  • '湯山事件' 후의 정국과 '反蔣派'의 動態, 김영신, 중국학연구 53권, 중국학연구회.
  • 광주국민정부의 北伐과 蔣介石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55권, 중국학연구회.
  • 9·18 사변 전후의 정국과 南京政府의 대응, 김영신, 중국학연구, 61권, 중국학연구회.

6.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