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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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별 선거인단 선거 결과

1916년 11월 7일
1916 대선

1920년 11월 2일
'''1920 대선'''

1924년 11월 4일
1924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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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율'''
49.2%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
'''대통령 제임스 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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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대통령 워런 G. 하딩
{{{-2 부통령 캘빈 쿨리지'''
'''선거인단'''

127인
'''404인'''
'''전국 득표'''

34.1%
9,139,661표
'''60.3%
16,144,093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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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와 배경
2. 각 정당별 후보
2.1. 공화당
2.2. 민주당
3. 결과
3.1. 접전지
3.2. 공화당
3.3. 민주당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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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와 배경


미합중국의 제 29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20년 11월 2일 열린 선거다. 전 세계를 뒤흔들었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여성의 투표권을 연방 차원에서 보장한 수정헌법 19조가 통과된 뒤 처음으로 열린 선거이자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연방 상원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된 선거이기도 하다.

2. 각 정당별 후보



2.1. 공화당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미국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8년 집권에 따른 국민들의 피로감과 전세계에 물질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상흔을 입힌 전쟁 후유증 인한 상실감이 극에 달해 비로소 정권 교체의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었다.
놀랍게도 전직 대통령이자 1912년 공화당의 대선 패배의 주역(...) 중 한명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공화당에 복당한 후 3선에 도전하려 했다. 당시에는 명시적인 3선 연임 제한 규정이 없긴 했지만 조지 워싱턴 이후 암묵적 관습법 형태로 대통령직을 최대 두번까지만 하고 퇴임하는걸 그동안 불문율로 두고 있었는데, 그걸 깨고 다시 한번 3선에 도전하려 한것. 비록 한번의 큰 트롤링이 있긴 했지만 워낙 국민적 인기가 좋았던 재선 대통령에다가 우드로 윌슨을 적극 공격해 1918년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이 상, 하원을 동시에 장악하도록 기여했기 때문에 1920년 공화당 경선에서도 유력 주자로 분류되고 있었다.[1] 그러나 본격적인 선거가 치뤄지기 전인 1919년 1월 6일 사망함으로서 공화당은 경선을 주도할 '프론트 러너'가 사라졌다.
이후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공화당 내 계파들의 이전투구로 매우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 레너드 우드 장군, 일리노이 주지사 프랭크 로덴, 진보당 출신으로 캘리포니아 연방 상원의원을 역임 중이던 하이럼 존슨 의원 3파전으로 진행되었는데 누구도 과반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당 대회로 공이 넘어갔다. 6월 8일부터 일리노이 시카고에서 열린 전당 대회에서 부통령 후보는 캘빈 쿨리지로 비교적 쉽게 낙착된데 비해, 대통령 후보는 무려 9차례에 걸친 당원 투표가 열렸지만 누구도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하면서 혼란에 빠져들었다.
일반 당원들에게 인기가 많지 않던 '''워런 G. 하딩'''은 경선 당시도 실적이 시원치 않았던데다가, 1차 당원 투표에서 6.67% 득표로 후보들 중 5위에 그쳤으나 끝없이 반복되는 투표 속에서 9차 투표 때 처음 1위(38.06%)에 올랐고 이제 이 투표 지옥을 벗어나길 원한 각 계파 대표들의 합의 끝에 '어차피 승리는 확실한 상황이니, 우리가 부리기 가장 만만한 사람을 백악관에 보내자.'는 생각으로 '''하딩에게 후보 자리를 선사'''한다. 이때 계파 대표들이 모였던 방이 담배 연기가 가득한 방이었던 지라 이후 '''Smoke-filled room'''이란 표현이 밀실회합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딩은 '''정상으로의 귀환(Return to normalcy)'''이라는 표어 속에 선거 운동을 진행했는데, 대외적으로는 이전 윌리엄 매킨리 이후 지속된 개입주의 외교, 윌슨이 주도했던 국제주의적 대외 정책을 전환해 미국 본연의 고립주의로 회귀한다는 것을 뜻했고 대내적으로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후 계속된 진보 시대(Progressive Era)[2]를 마감하겠다는 뜻이었다. 선거 기간 동안 하딩은 콕스와 맞대결은 최대한 피하고 윌슨 행정부를 공격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2.2. 민주당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하딩-쿨리지 조의 상대 후보는 민주당 제임스 M. 콕스-프랭클린 루스벨트 조였다. 1920년 대선 출마자 중에서 콕스를 뺀 하딩, 쿨리지, 루스벨트는 대선에서 당선돼 대통령직을 해봤다. 사실 전당대회 막장은 민주당이 더 했는데, '''1920년 민주당 대선 후보 지명대회는 무려 44번이나 투표를 한 끝에 콕스로 결정났기 때문이다'''. 공화당은 '''고작 9번''' 투표였는데..(...) 공화당과 마찬가지로 민주당은 부통령 후보는 루스벨트로 빨리 당첨됐으나 대통령 후보는 양보하는 사람이 없어서 투표가 반복됐다. 원래 민주당 후보로는 우드로 윌슨 정권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William Gibbs McAdoo가 가장 유력했으나 '''38차 투표'''에서 콕스로 역전되어 콕스가 후보로 뽑혔다.
바이블 벨트라는 든든한 기반을 바탕으로 '''우드로 윌슨'''이 공화당의 분란을 틈타 당선에 재선까지 성공하긴 했지만 여전히 남북전쟁의 원죄로 민주당의 전국적 인기는 좋지 못한 편이었다. 거기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승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민들에게 엄청난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입힌 '''전쟁 후유증''' 탓에 염전(厭戰)사상이 확대되며 전쟁 개입을 결정했던 윌슨 행정부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변했고 그 외에도 '''국제연맹 가입 실패, 극우 단체를 이용한 노동운동에 대한 강력한 탄압''' 등 임기 중 몇가지 실책으로 인해 임기 말부터 엄청난 레임덕을 겪고 있었다.
현직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이 1919년 10월 3일 반신불수가 되어 사실상 직무 불능 상태에 빠졌고, 영부인 이디스 윌슨이 국정 수행을 대신하는 상태에서 경선이 진행되었다. 6월 28일부터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전당대회 투표 초반에는 윌슨 대통령의 사위이자 전 재무장관이었던 윌리엄 맥아두가 앞서나가 무난히 후보 지명을 받는듯 했지만 갑자기 반신불수에 빠진 윌슨이 당이 자신의 3선 도전을 요청해주길 기대(...)하며 맥아두의 지명을 막아버린다. 결국 7월 6일까지 무려 44차례나 투표가 이루어진 끝에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콕스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이때, 정치적으로는 아직 신인급에 가까웠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콕스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 후보 자리를 얻었다. FDR은 부통령 경선 첫판에서 부통령으로 지명됐으나 대통령 후보는 계속해서 결판을 내지 못했다.
콕스는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성격을 '국제연맹 가입에 대한 국민투표'로 규정하였으며[3] 그와 별개로 국내 36개 주에 방문해 394회나 연설을 펼치면서 1차 대전 직후 심해진 실업과 인플레이션 문제 해결을 위해 소득세와 사업 이익세를 동시에 낮추자고 주장했으며 국가 차원에서 노조의 단체교섭권을 도입하는 동시에 악명 높은 금주법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부통령 후보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대외적 아젠다 홍보에 나서 국제연맹 가입에 대한 범국가적 지지를 주장했지만 미 국민들은 이에 대해 냉담했다.

3. 결과


'''최종 선거 결과'''
투표 시간
1920년 11월 2일
투표 결과
후보자
워런 G. 하딩
제임스 콕스
'''선거인단 수'''
'''404 / 531명'''
'''127 / 531명'''
전국 득표 수
16,144,093표 (60.3%)
9,139,661표 (34.2%)
당선인
[image]
'''워런 G. 하딩 '''
'''주별 결과'''
정당
승리한 주
선거인단
민주당
앨라배마(12), 아칸소(9), 플로리다(6), 조지아(14), 켄터키(13), 루이지애나(10), 미시시피(10), 노스 캐롤라이나(12), 사우스 캐롤라이나(9), 텍사스(20), 버지니아(12)
127
공화당
애리조나(3), 캘리포니아(13),콜로라도(6),코네티컷(7), 델라웨어(3), 아이다호(4), 일리노이(29), 인디애나(15), 아이오와(13), 캔자스(10), 메인(6), 매사추세츠(18), 미시간(15), 미네소타(12), 미주리(18), 몬태나(4), 네브래스카(8), 네바다(3), 뉴햄프셔(4), 뉴저지(14), 뉴멕시코(3), 뉴욕(45), 노스 다코타(5), 오하이오(24), 오클라호마(10), 오레곤(5), 펜실베이니아(38), 로드아일랜드(5), 사우스 다코타(5), 테네시(12), 유타(4), 버몬트(4), 워싱턴(7), 웨스트 버지니아(8), 위스콘신(13), 와이오밍(3)
'''404'''
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되고 명실상부 제1강대국이 된 직후였지만, 종전 후 여러가지로 터진 사회 문제로 인해 윌슨과 민주당에 대한 평가가 곤두박칠치고 있었다. 하딩이 60%가 넘는 놀라운 득표율로 제임스 콕스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 이유는 앞에서 말한 미남이었던 것도 있지만, 아무 정치적 성과도 없이 바로 대통령 선거에 나온 하딩이 오히려 유권자들에게 신선함을 주었고, 이와 함께 윌슨 등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환멸 등 여러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image]
1889년 워런 G. 하딩이 처음 정치권에 데뷔했을 때(오하이오주 상원의원) 사진.
60.3% 득표율은 남부주와 민주당이 사실상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했던 재건 시대(1865년~1877년)에도 나온 적이 없었던 기록으로 양당제가 자리잡은 이후 최고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세계 대공황뉴딜 정책을 통해 잘 수습하고 있었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1936년 대선 에서 60.8% 득표율을 기록할 때까지 16년간 유지되었다. 지금도 역대로 치면 4위 기록.
득표율 26.2%p, 선거인단 수 277명 차라는 당시까지 사상 초유의 역대급 참패를 당한 제임스 콕스는 이후 어빙 스톤의 연구 등에서 하딩보다 정치적으로나 인간적으로나 더 진보적이고 깨끗한 인물로 평가 받았지만 선거는 후보 개인의 능력보다 정당과 시운이 더 크게 작용한다는 점을 반면교사로 증명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 당시 부통령 후보로 나섰던 루스벨트가 이후 다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한 후 무려 연속 4선에 성공하며 민주당 시대를 열었다는 점이 조금은 위안이 됐을지도 모른다.

3.1. 접전지


'''19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접전지'''
'''주 이름'''
'''선거인단수'''
'''승자 득표율'''
'''패자 득표율'''
'''득표율 차이'''
'''지난 승리자'''
'''이번 승리자'''
'''결과'''
'''켄터키'''
'''13명'''
49.69%
49.25%
0.44%
'''우드로 윌슨&
토마스 마셜'''

'''제임스 콕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민주당 수성'''
'''테네시'''
'''12명'''
51.29%
48.19%
3.10%
'''우드로 윌슨&
토마스 마셜'''

'''워런 하딩&
캘빈 쿨리지'''

'''공화당 탈환'''
'''오클라호마'''
'''10명'''
50.11%
44.61%
5.50%
'''우드로 윌슨&
토마스 마셜'''

'''워런 하딩&
캘빈 쿨리지'''

'''공화당 탈환'''
워낙에 큰 득표율 격차 탓에 접전지가 많지는 않았다. 테네시에서 접전 끝에 3.10%p 차로 워런 하딩이 승리하면서 재건 시대 이후 처음으로 공화당이 남부주에서 승리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 정도가 특기할만한 점.

3.2. 공화당


하딩은 어떠한 개인의 정치적 성과도 없이[4] 바로 공화당의 정치적 선택으로 인해 백악관까지 입성한만큼 하딩이 정권을 잡자마자 공화당 각 계파끼리 자기가 관직에 올라야 한다는 등 극심한 내분이 일어났다. 거기다 자신들의 친구들로 구성된 오하이오 갱(Ohio Gang) 내각이 티포트 돔 스캔들로 대표되는 엄청난 부패 사건들을 연속으로 저지르면서 하딩 개인도 엄청나게 힘들어했다. 아예 본인이 자신이 대통령 직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고.
그래도 대통령 본인에 대한 국민의 인기는 떨어지지 않았고, 재임 2년 3개월만에 사망하고 캘빈 쿨리지가 대통령 직을 계승한 후 '재즈 시대(Jazz Age)'로 불리우는 1920년대 미국의 호황기가 열리면서 공화당에 대한 국민들의 우호적인 분위기는 그의 후후임인 허버트 후버가 경제 대공황으로 망할 때까지(...) 지속된다.

3.3. 민주당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지만 종전 군인들에 대한 대우 문제, 인종 차별 문제, 여성인권 문제 등 전후 문제들에 대해 대처를 못하면 민주당의 지지도는 곤두박질친 반면 하딩이 죽고 나서 승계받은 쿨리지가 적어도 당대에는 비교적 안정적으로 국정 수행을 했다는 평을 받았고, 후버도 대공황 전에는 나름 능력있는 대통령으로 칭송받았기에 1929년 세계 대공황을 겪게 된 후에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당선되기까지 민주당은 12년 동안 숨죽여지낼 수 밖에 없었다.[5]

4. 관련 문서



[1] 재밌는 점은 이때 루스벨트가 러닝메이트 부통령 후보로 고려했던게 바로 워런 G. 하딩이다.[2] 독점금지법 입법, 선거권 확대 등 여러 진보적 아젠다의 입법이 이 시기에 이뤄졌다.[3] 이때문에 윌슨 지지자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4] 연방 상원의원 경력이 있지만, 그것도 해리 도허티의 후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5]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잘나가던 미국 민주당이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 지지층에서 열세였던 이유는 남북전쟁의 원죄가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지금의 민주당과는 성향이 많이 다른, 노예제를 지지했던 친남부 성향을 띄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화당은 지금과 달리 북부를 텃밭으로 두고 소수인종을 대변하던 정당이었다.) 덕분에 남북전쟁 이후 70여년 동안 민주당은 반란자들의 정당이라는 빨간 줄이 그여있었다. 결국 이것을 역전시키는데는 대공황으로 인한 공화당의 몰락+민주당의 노선 변경으로 인한 진보 주류화가 컸다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