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매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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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제25대 대통령. 19세기 후반~20세기 초 미국의 제국주의 대외 팽창 노선을 확립시킨 시발자로 평가받으며, 덕분인지 임기 도중 암살당했다.
2. 생애
2.1. 출세가도를 달리다
리즈시절
오하이오주 닐스 출신이다. 턱 끝이 갈라진 걸로 나름 유명하다. 앨러게니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신병으로 중도에서 학업을 포기했고 우체국 직원과 공립학교 교사 등을 여러 직업을 거쳤다.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19세의 나이로 오하이오 민병대에 자원 입대했다. 남북전쟁의 분수령이 된 전투 중 하나인 앤티덤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소위가 되었으며 훗날 19대 대통령인 러더퍼드 헤이스 대령의 부관으로 종사하여 1865년 23세로 소령을 달았다. 의용군 사병이 일약 소령이 된 정말 대단한 군 경력인데 이런 경력은 훗날 그의 정치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뉴욕 올버니의 로스쿨을 다녔는데 1867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오하이오주 캔턴에서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고 곧 미국 공화당에 입당, 1869년에는 지방 검사가 되었으며 7년 뒤에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된 후 하원의원에 이후 6번(12년)이나 당선되는 등 계속 출세가도를 달렸다.
벤저민 해리슨 시절인 1890년에는 이른바 매킨리 관세법을 입안했는데, 이 법은 수입 상품에 매기는 관세를 크게 올려 가격을 높여서 가격 경쟁에서 미국 상품을 유리하게 하는 것이 그 의도였다. 하지만 이 법안으로 수입 상품 가격이 폭등하자 다른 상품의 가격도 같이 뛰어올라서 미국경제는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경제법안 입안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인망이 있었는지 1891년에는 오하이오 주지사가 되어 두 차례 역임했다. 주지사 시절에는 당시 과격화되던 노동운동을 막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고 기업에 소비세를 부과했으며, 대신 수송 노동자들의 안전을 위한 법안을 제정하고 고용주들의 노동조합 반대활동을 막았다.
2.2. 대통령 선거
화려한 경력과 명성으로 1896년 대선이 다가올 당시 그는 가장 강력한 공화당 대권주자로 떠올랐다. 당시 민주당에서는 윌리엄 J. 브라이언이 경쟁자로 나섰다. 매킨리는 당시 그로버 클리블랜드 정권의 자유무역이 실패했다고 까면서[1] 보호무역과 함께 화폐 단위의 가치가 일정한 금 가치와 결부되어 있는 금본위제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브라이언은 이 제도가 경제가 어려울 때 (금의 유출에 따라) 화폐값이 올라가 임금이나 가격이 떨어져서 오히려 부유층에게만 유리하게 된다는 점을 주장하며 필요할 때마다 자유롭게 새 돈을 찍어낼 수 있는 은화제도를 핵심 현안으로 삼았다. 이 제도는 돈의 양이 불어서 인플레이션을 초래할 수 있지만 농민과 노동자의 빚 가치도 줄어들어서 오히려 빈민 노동자층에게 유리하고 부유층에게는 불리한 제도였다.
1896년 대선은 이런 경제정책이 주요 쟁점이 되었는데 브라이언은 연설을 통해 월가의 은행업자들을 경제 악화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고, 역사에 길이남을 연설이라 평가되는 '금십자가 연설' [2] 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공화당은 브라이언을 기업을 파괴시킬 과격파라고 비난했다. 선거 초반에는 엄청난 박빙이었다. 각 주별로 여론조사가 시행되지는 않아서 당시에는 후보간의 유세장 인원 동원력을 가지고 선거 추세를 비교했는데, '''선거 초반까지는 민주당의 브라이언이 훨씬 사람을 많이 모았다'''.
그러다보니 자본가들은 이런 브라이언에게 위기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고, 당시 공화당을 지지한답시고 엄청난 선거 자금을 후원한다. 가장 많은 돈을 후원한 곳은 J. P. 모건, 앤드루 카네기, 존 데이비슨 록펠러 3명으로, 이 세명이 매킨리한테 후원한 돈만 1,200만 달러를 넘었다. 1896년 대선 때 사용한 매킨리의 총 정치자금은 1,500만 달러 수준으로, 당시 경쟁자인 브라이언은 55만 달러만 선거자금으로 지출[3] 했다. 후원을 주도한 사람은 J. P. 모건인데, 그는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과 이미 1896년 대선 이전부터 상당한 충돌을 겪어왔고, 브라이언이 당선되면 손해볼게 뻔한지라 카네기와 록펠러를 끌어들여 1896년 대선의 대규모 물량공세를 주도하게 된다.
예를 들어 브라이언이 사람들을 많이 모았다는 기사가 쏟아지자, JP모건은 자사 은행들의 거래처를 모조리 압박하여 거래처의 임직원들을 매킨리 대선 유세장에 총동원했다. 그리고 심지어, 일부 주에서는 매킨리를 찍으라고 '''J. P. 모건 소속 임원들이 대놓고 선거 당일날 투표소 앞에서 유권자들을 겁박했다'''(...). 공화당이 직접 하지는 않았다지만, JP모건이 대놓고 부정선거를 저지른 것. 그리고 어찌됐든 정성(?)이 통했는지 매킨리는 브라이언을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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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상으로는 민주당이 더 넓지만 북부 공화당 지지주들의 인구와 선거인단이 더 많아서 최종 선거인단 투표 결과는 271:176이 나왔다.
2.3. 재임기
대통령이 된 매킨리는 공약대로 높은 관세장벽으로 보호무역을 펼쳤고 금본위제를 정착시켜 나갔다. 하지만 매킨리 정권 시절 최대의 사건은 바로 1898년 쿠바를 둘러싸고 스페인과 벌인 이른바 미국-스페인 전쟁(미서전쟁)이었다.
당시 쿠바에서는 혁명가들이 식민 통치를 벗어나기 위해 한창 봉기하고 있었는데 미국은 클리블랜드 정권 시절부터 중립 정책을 펼쳤고, 갓 당선된 매킨리 역시 전임 클리블랜드처럼 중립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당시 미국의 대중 여론은 쿠바 혁명가들에 대한 지지가 강했으며 상원의 주전론자들도 쿠바 혁명가들을 지지했다.
이러던 중 1898년 2월 15일 아바나 항에 정박한 미국 군함 메인 호가 폭발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수십 명의 미국 수병이 죽거나 다쳤는데 언론과 대중 여론은 이를 스페인군의 소행으로 단정하는 분위기였고, 연장선상에서 스페인과의 개전 여론이 거세게 타올랐다.[4] 매킨리는 스페인에 최후통첩을 보냈는데 스페인은 무력 충돌을 원치 않았기에 의외로 미국의 요구 사항을 고분고분하게 대부분 수용했다. '''하지만''' 기업가를 등에 업은 매킨리는 사실 첨부터 협상에 나설 의지가 없었고 의회에 전쟁 선포 문서를 보냈으며 곧 의회는 전쟁을 선포한다. 이 전쟁은 5개월 남짓 계속되었는데, 아무래도 위치상 보급선 위치도 훨씬 가까운 미국의 승리로 끝난다.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소풍같은 전쟁(War like a Picnic)'이라고 부를 정도.
하여튼 전쟁의 승리로 미국은 쿠바를 장악했고, 거기에 대해 스페인으로부터 푸에르토 리코, 괌, 필리핀을 할양받았다.[5] 메인 호의 폭발로 인해 미국의 식민지가 이렇게 늘어난 것. 하지만 당시 독립운동을 벌이던 필리핀인들은 자신들의 정부를 세워 미국 지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매킨리는 이를 사뿐히 무시하고 무력으로 제압했다. 필리핀 뿐만 아니라 새로 얻은 식민지 주민들에 대해서도 일부 공화당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1900년 대선에서 대통령 후보로 재출마했고 부통령 호바트가 이미 사망했기에, 당시 한창 명성을 얻고 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부통령 후보로 삼아 대권을 노렸다. 민주당은 다시 브라이언을 후보로 내세워서 매킨리의 고압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비난했다. 하지만 공화당은 "우리는 수천만에 달하는 식민지인들을 에스파냐 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해방시켰다" 고 선전했는데 이 선전이 먹혀서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다. 표차는 훨씬 커졌고, 다행이라 할 지 미국 재벌들의 후원은 많이 줄었다. 실제로도 초반 박빙이었던 1896년과 달리 1900년 대선은 선거 초반부터 꽤나 여유있게 매킨리가 앞서 나갔기 때문에 공화당 측에서 이전만큼 선거운동을 많이 하진 않았다고 한다.
2.4. 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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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당하는 매킨리. 레온 촐고스가 오른손에 리볼버를 수건으로 싼 채 그를 저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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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범 레온 촐고스.
저격 15분 전에 찍힌 매킨리.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1901년 9월 6일, 매킨리는 버팔로에서 개최된 범미국산업박람회의 공개 리셉션에 참가하고 있었다. 기차에서 내린 후 매킨리는 현장에 나온 시민들과 주요 요인들에게 일일이 악수를 하고 있었는데, 그 인파 속에는 아나키스트인 레온 촐고스(Leon Czolgosz)도 있었다. 그리고 매킨리가 그에게 손을 내밀자 촐고스는 손수건으로 감싼 오른손에서 리볼버를 꺼내 그의 가슴을 향해 두 발을 발사했다. 매킨리는 그 자리에 쓰러졌고 촐고스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다.[6]
매킨리는 즉사하진 않아서 구급차로 병원에 이송되었고, 다소 회복 증세도 보였지만 결국 8일 후인 9월 14일에 사망한다. 숨이 끊어지기 전 한 말은 "이제 나는 틀렸소. 목사를 불러 기도를 할 시간인 듯 합니다."였다고 한다. 참고로 암살자인 레온 촐고스는 재판을 받고 1901년 10월 29일 뉴욕 어번의 감옥에서 전기의자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그리고 그의 암살로 대통령직은 당시 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승계했으며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도 루스벨트에 의해서 계속 펼쳐지게 된다.
윌리엄 매킨리가 암살되기 직전 필리핀에서는 발랑기가 학살 사건이 일어났는데, 직후 매킨리가 암살당하는 묘한 장면이 연출된다.
3. 평가
미서전쟁에서 보듯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적 팽창 정책을 펼쳐 미국의 영향력을 확대했지만, 그 과정에서 원성을 샀고 지금까지도 미 제국주의의 원흉이라는 식으로 국내외에서 비판을 제법 받는다. 내부적으로는 주로 친기업적 정책을 펼쳤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만연하던 기업독점(트러스트)의 위험성을 느끼고 재선될 무렵에는 트러스트 반대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암살됨으로써 실행되지 못하고, 후임인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셔먼 독점금지법을 내세워 대기업을 통제하게 된다.
매킨리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긴 했지만, 종교적으로 꽉막힌 인물이라서 필리핀 침공을 해방이라고 둔갑하며 '''하나님이 명령하셨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웃기게도 당시 필리핀은 이미 320년에 이르는 스페인 지배 속에 인구 대다수가 가톨릭을 믿고 있는 상태였다(...). 그나마 자기도 유럽의 반발이 거세질 것을 우려했는지 가톨릭 지역은 좀 살살 다루긴 했다. (다만 여기도 저항하는 일부 지역은 가차없이 학살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와 대조적으로 이슬람이 대다수인 민다나오 섬은 그야말로 쓸어버렸는데 이때 미군이 저지른 학살[7] 때문에 지금도 이 지역은 매킨리하면 아돌프 히틀러급으로 취급한다고 한다.
미국의 유명 작가 마크 트웨인은 "매킨리 저 작자는 남북전쟁 이래 미국에 내린 최악의 재앙. 그는 정치계의 톰 소여이며 무게 잡을 기회가 50%면 캐나다까지 가고, 그 기회가 100%면 지옥까지도 갈 작자이다."라는 증오어린 평가를 내렸는데, 사실 미서전쟁 초기만 해도 마크 트웨인은 매킨리가 스페인에게서 필리핀을 독립시키려고 전쟁을 하는 것으로 여기고 이를 지지했다. 그러나 나중에 미군이 저지른 짓에 매킨리의 하나님 드립을 보니 어이가 없을 만 했다. 미국에 대한 자부심을 무너뜨린 인물로 보였을테니.. 게다가 마크 트웨인은 광신을 경멸했던 인물이어서 더욱 매킨리가 못마땅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어느 목사가 쓴 <기독교 죄악사>라는 책자에서 십자군전쟁과 같이 기독교(가톨릭,개신교 모두)의 위신에 먹칠을 한 쓰레기 인물이었다고 분노어린 비난을 가했다.
허나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적인 도덕성이나 청렴함은 호평받았고(...) 사교적인 성품으로 주변인들과 대화 나누는 것도 좋아했다고 한다. 후술되어있듯 애처가이기도 했다. 실제 별로 모진 성격이 아니었는지 목표 과제를 하급자들이 달성하지 못했을 때는 이를 질책하지 않아서 '약한 대통령, 우유부단한 인물'이라는 평도 받았다고 한다. 매킨리 정권 시절 해군장관과 부통령을 지낸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매킨리를 가리켜 '''"초콜릿 케이크처럼 흐물거리는 인물. 중심이 되는 지지대가 되지 못하는 작자."'''라고 신랄하게 까기도 했다.
4. 기타
'오하이오의 우상(the '''Idol''' of Ohio)'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이 별명이 붙은 이유는 오하이오 출신에 오하이오에서 기반을 닦았고, 오하이오주의 상징 꽃인 붉은 카네이션을 양복 재킷 가슴주머니에 끼고 다녔기 때문이라고 한다. 상술한 이 붉은 카네이션은 매킨리 본인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행운의 상징이었는데, 어느 날 매킨리는 그 붉은 카네이션을 떼어 어린 소녀에게 선물했다. 헌데 공교롭게도 이 일은 다름아닌 1901년 9월 6일, 범미국산업박람회장에서 있었던 일이었고, 그날 그곳에서 매킨리는 촐고스에게 두 발의 총탄을 맞아 결국 '''사망한다'''. 이 사연은 비정상회담에서 타일러 라쉬가 소개하기도 했다. 2015년 9월 13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다루었다.
애처가였다. 영부인 아이다 매킨리는 간질을 앓았는데, 1871년 결혼 직후인 1873년 아이다의 어머니가 죽었고, 얼마 안가 둘째 딸이 어린 나이에 숨졌으며, 딸 케시도 4살 되던 해 병사하여 연달아 가족을 잃은 충격으로 정신이 많이 쇠약했다고 한다. 덕분에 원래 백악관 행사 준비와 접객은 영부인이 했지만, 건강상에 문제가 있던 영부인 아이다 때문에 대통령이 손수 행사 준비를 진두 지휘해야만 했으며, 공식 석상에서 부인이 간질로 발작을 하면 손수건을 부인의 얼굴 위에 덮어주고는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를 계속했다고 한다.
암살 당시 아이다는 건강 상태가 나빠서 호텔에 있고 매킨리 혼자 행사장에 갔는데, 총에 맞은 후에도 "아내와 함께 오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코르텔유(비서), 내가 총에 맞은 걸 아이다가 충격을 받지 않게 해 주게"라고 했을 정도였으며,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도 '내가 죽으면 아내는 누가 보살피나'하며 부인 걱정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실제로 아이다는 건강 때문에 매킨리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다. 매킨리가 사망한 후 아이다는 백악관을 떠나서 고향인 오하이오 캔튼으로 돌아가 생활했는데 몸이 더욱 나빠지는 와중에도 매일 매킨리의 묘지를 참배했다. 아이다는 매킨리 사망 6년 뒤인 1907년 5월 26일에 사망했으며, 매킨리와 두 딸이 묻힌 기념 묘지에 매장되었다.
죽음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스스럼없이 국민들과 악수하는 것을 좋아해서 당시엔 '매킨리 악수(Mckinley Grip)'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알래스카의 매킨리 산(해발 6,118m)은 매킨리 대통령의 이름을 따 붙여졌었다. 다만 명칭 논쟁이 이어지다 2015년 현지어인 데날리 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매킨리 대통령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는 총 7곳이 있다고 한다. 하와이, 뉴욕, 워싱턴 D.C., 루이지애나에 각각 1곳씩 있고, 오하이오에 세곳이 있다.[8]
한반도에서는 그의 재임기에 조선 왕조가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으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키가 170cm로 존 애덤스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작은 대통령 공동 3위다.
바이오쇼크 인피니트의 세계관에서는 재커리 헤일 컴스탁이 공중도시 컬럼비아를 건설할 수 있도록 후원한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의화단 사건 이후 컴스탁은 컬럼비아의 미 연방 탈퇴를 선언한다.
레드 데드 리뎀션 2의 배경은 이 사람의 대통령 임기인 1899년이다. 다만 작중에서는 이름이 '알프레드 맥칼리스터'라고 변경되어서 묘사되는데, 작중의 신문들을 읽어 보면 이 사람 임기에 있었던 미서전쟁이나 매킨리 세법(이 역시 대통령의 이름이 바뀌어서 다른 이름으로 나온다) 등에 대해서 언급된다. 게임 내의 초상화도 실제 매킨리 대통령 얼굴에 수염만 그려놓은 얼굴이다. 게임 후반에는 매킨리처럼 암살당해서 상원의원이었던 왁스맨이 에필로그 시점에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는 소식을 작중 신문에서 볼 수 있다.
[1] 다만 상기되어있듯 본인도 보호무역을 장려하는 매킨리법을 밀어붙였다 불황을 초래한 바 있었다.[2] '''"당신들은 노동자의 이마에 가시면류관을 씌울 수 없습니다! 인류를 금 십자가에 못박을 수도 없습니다!"'''[3] 1896년 이후로도 특정 재벌 기업가가 특정 정치인을 후원하는 방식으로 정치자금 격차가 극단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이 반복되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시절에 대선 선거자금 총액을 제한하는 제한적 선거공영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이 제도는 2008년 미국 연방 대법원의 슈퍼팩 허용 판결 때, 선거자금의 상한선을 두고 있는 제한적 선거공영제도 같이 위헌 판결을 받고 폐지됐다. 그리고 그 이후 미국의 선거자금은 미친듯이 불어나는 중이다.[4] 흔히 보일러실 폭발이 진짜 원인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1998년 메인호 폭발 100주년 기념으로 이루어진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조사에서는 선체가 안쪽으로 휜 것이 확인되었으며 여러 면에서 기뢰로 추정되는 외부충격에 의한 침몰로 추정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즉, 뭐라 속단할 수 없는 미스테리다.[5] 이때 메킨리는 변명이랍시고 백악관 복도에서 필리핀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전한다. [6] 이 장면은 역대 대통령 암살범들을 주인공으로 다룬 뮤지컬 어쌔신에서 The Ballad of Czolgosz라는 넘버로 나온다.[7] 20만에서 60만 정도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그것도 상당수가 노약자 및 아이들로 마을을 통째로 불바다로 만들거나 함포 사격으로 어촌 마을을 몰살했다. 다만 민다나오 섬 학살은 매킨리 사후라는 말도 있다.[8] 글리(미드)에 나오는 고등학교도 이 이름을 따서 만든 가상의 고등학교이다. 물론 실제 촬영지는 전혀 다른 이름의 LA 소재 학교들이고, 오라토리엄은 전혀 다른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