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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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금주법이 실행되던 때에 술을 버리는 장면
1. 정의
2. 한국과 아시아권의 금주법
3. 가톨릭의 금주법
4. 개신교권의 금주운동과 금주법
5. 이슬람의 금주법
6. 캐나다의 금주법
8. 인도의 금주법
9. 러시아의 금주법

''''''
'''Prohibition'''[1]

1. 정의


법제화된 금주령. 말 그대로 '''을 제조 /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다. 술에 있는 알코올은 강한 진통, 마취 작용, 중독성으로 건강을 망치는 마약성 물질이며, 주로 식량을 재료로 만들다보니 낭비로 판단한 시선 또한 많았다. 그 결과 인류 역사상 이를 금지하려는 시도는 여러 번 있어왔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이슬람교에서 교리상 금지한 것이나 미국의 1920년대 ~ 1930년대의 금주법이 있다.

2. 한국과 아시아권의 금주법


아시아권의 경우, 금주법은 대개 식량 보존, 절약 등의 이유로 시행되었으며, 주로 식량이 부족해지는 기근이 들면 금주령을 시행했다. 아시아권 국가들의 전통주포도주같은 과실주보다는 이나 같은 곡물을 원료로 하는 곡주가 주류인지라 술을 빚는 만큼 지을 곡물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탁주가 아닌 소주 같은 증류 과정이 들어간 고품질의 술은 곡물이 훨씬 더 소모되기 마련이다. 당연히 이렇게 만들어진 술은 일반 백성들보다는 선비 같은 상류층들이 즐기는 기호식품이었으며, 유교 문화권에서의 금주법 시행은 상류층의 근검과 기강강조하려는 목적도 존재한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에서는 백제 때부터 다루왕이 금주령을 선포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시대에도 기근이 들었을 때 식량 절약 차원에서 종종 금주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후술할 미국의 경우처럼, 금주령에도 불구하고 쌀 꽤나 있다는 양반가에서는 몰래 소주를 만들어먹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러다 포도청 정모를 하였다는 기록도 종종 나온다. 그러나 술은 유교 제사에 있어서 필수적인 음식이라, 술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오랫동안 금주령을 실시하지는 않았다.[2]
문제는 영조 통치 시기인데, 영조는 '''즉위와 동시에 술을 절대 금지'''했다. 원래 전에도 즉위 초기에 금주령을 내리는 퍼포먼스를 하다 관두는 사례가 몇 번 있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똑같이 새 정권 퍼포먼스라고 생각한 신하들은 영조가 퍼포먼스 수준이 아니라 "'''아예 조선 팔도에서 술 자체를 영원히 없애버리겠다!'''"고 나오자 매우당황했고, 그 당시 조정을 장악했던 소론 신하들이 항의를 좀 했다고 한다. 거기에 아예 어명이 떨어져 술 먹다가 걸리면 신분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즉시 노비 신분으로 강등되며, 술을 빚었다가 걸리면 닥치고 사형이었다. 나중에는 관직 박탈이나 귀양으로 처벌이 약화되었지만, 그 나중이 거의 40년인지라... 40년 동안은 진짜 목숨 걸고 술을 마셔야 했다. 심지어는 '''당대조상에게 올리는 최고이자 기본적인 의식인 제삿상에조차 술을 올리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초기에는 신하들이 근성으로 밀어붙여 금주령을 거부하려는 낌새를 보이자[3] 속만 삭이면서 '''누구 한 놈 걸리기만 걸려봐'''하고 한껏 벼르고 있다가, 병마 절도사 윤구연이 술을 빚었다는 제보가 접수되자, "너 잘 걸렸어" 하고 '''2주일 만에 남대문에서 참수형에 처하기도 하였다'''.[4][5] 이때 영조가 직접 숭례문까지 나아가 참관했다고. 그리고 증거 불충분으로[6] 윤구연 처벌을 반대하는 모든 당파들을 막론하고 ''' 대신들도 모두 그 자리에서 줄줄이 파직해버렸다'''(영조 38년 9월 17일). 다만 세종대왕 같이 의정부서사제를 합리적으로 운영한 경우나, 왕권이 약했던 왕들을 제외하고, 태종, 숙종, 영조 등의 강력한 왕권을 쥔 군주들은 꽤나 자주 관료들을 파직시켰다가 '불쌍해서 봐준다', '언로(言路)를 막을 수는 없다'라며 복직시켜 주는 '''나는 관대하다''' 식의 처사를 반복했기에 파직은 '파면'이나 '해임'보다는 '정직(停職)'에 가까운 징계로 보면 된다.
그런가 하면 융통성 없이 한번 걸리면 바로 얄짤없이 모가지 소나기를 내리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었다. 한 일화로 유세교[7]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 술 같다 하여 영조에게 고발되었는데, 유세교는 그것을 식초라고 하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러자 영조는 그가 빚었다는 것을 직접 궁으로 가져오게 했는데, 좌의정에게 한 잔 마시게 하고는 "어떠냐"라고 물으니 "술인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영조는 이번엔 우의정에게도 한 사발을 내밀고 다시 질문했다. 그러자 영조의 마음을 알아챈 우의정은 사발을 들이킨 후 "틀림없는 초다"라고 대답하였고, 이에 영조는 유세교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며 그를 석방해주었다고 한다. '''영조는 아무리 국법이 지엄하다 한들, 가난한 백성들에게까지 이런 죄를 물어 벌주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기사 금주령을 내린 본인조차 후에 의심을 받았는데 오죽했겠는가. 게다가 영조는 금주령을 내리고도 차라는 빌미로 뒤로는 술을 즐겼었다는 말도 있으니...
이렇듯 고위 관리들의 음주는 엄금하였으나 평민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았다는 점에서 '''음주를 명목으로 관리들의 나태한 생활을 통제하고 궁극적으로는 왕권 강화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필이면 영조는 조선에서 가장 오래 즉위(52년)한 왕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사례에서 그렇듯, 이래도 만들어 먹을 사람은 결국은 또 만들어 먹었고, 능력 되는 사람은 사와서 먹었다. 사실상 영조 본인 빼고 다들 불만으로 가득했던 것… 결국 바로 다음 대 국왕인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시원하게 금주령을 바로 풀었는데, 정조가 술을 그렇게 좋아했다고. 그래서 정조 대에는 한양에 술집들이 많이 들어섰고 상당한 사회적 문젯거리로 떠오르다 보니까 사대부들이 상소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비슷하게 영조가 연애 소설을 좋아했는데, 정조가 즉위한 뒤에는 서고의 소설을 다 불태웠다는 기록이 있다.
여담으로 영조는 자기가 금주령을 내렸음에도 술을 계속 마신다는 소문이 있어 신하들이 영조에게 묻자, 영조는 '난 다만 오미자차를 마실 뿐인데 그게 소주로 의심받는다.'라고 답하기도 했다(영조 12년 4월 24일). 실제로 영조는 중종과 쌍벽을 이루는 조선조 최고의 근검절약형 군주. 수랏상의 찬을 줄이라는 명을 내리기도 했고, 고기보다는 채소 위주의 식단을 짜기도 했으며, 부마 되는 이들이 문안을 드릴 때, 식사로 잡곡밥을 주며 일반 백성들의 심정을 헤아리라는 말도 했다고.
이러면서도 식사는 정해진 시간에 꼬박꼬박 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회의 중 신하들은 밥 안 먹고 쫄쫄 굶는데 본인은 식사 때 되면 바로 밥 먹으러 갔다고 한다. 밥도 안 주면서 일 시키는 전형적인 악덕 상사의 위용. 이걸 정치적 전략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신하들이 쫄쫄 굶고 있으면 회의고 뭐고 빨리 끝내고 밥 먹으러 가고 싶을 테니,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일이 줄어든다는 것. 아예 세손 보고 정식으로 후계자가 되는 책봉식 때 쓸 옷을 자기가 쓰던 거 입으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중종은 자기만 검소했다면, 영조는 아예 검소함을 장려할 정도. 하여간 당시 금주령이 매우 철저히, 그리고 장기간 이어졌기 때문에 이 당시 몰래 술 먹다 걸리는 유의 야사도 많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조는 차례에서 쓰이는 로 대신 할 수 있게 했다고 한다.

다만 영조는 송절차라는 솔잎으로 만든 차를 즐겨 마셨는데, 이것이 실상 술과 같았다고 한다. 차를 마시고 취기가 돌았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 물론 곡식으로 빚은 술도 아니고, 하체가 좋지 않았던 영조의 체질상 무릎 관절에 좋은 솔잎으로 만든 술을 마신 것은 약용의 목적도 있었지만 어딘가 모양새가 빠지는 것은 사실이다.
특이하게 조선에서는 사간원 소속 관리는 업무 시간에도 음주가 되는데다 '''임금의 금주령을 무시할 수 있었다.''' 아마도 상소 올리는 업무와 전제군주제인 사회상을 감안하면 '''술기운이라도 돌지 않으면 감히 임금한테 개길 엄두도 못 낼거라''' 생각한 거 같다.[8] 또한 농사꾼과 군인들이 흔히 마시는 농주[9]맥주[10]는 금주법에서 제외되었다. 쌀을 많이 소모하는 청주는 사치라 금지하고 서민들이 고된 심신을 달래려 먹는 술은 아량을 베풀어 금지하지 않았다. 물론 흉년이 들면 모든 술이 금지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재정 고문으로 유명한 일본의 메가타 다네타로는 일찍이 일본에서 주세법 제정을 주도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도 일본에서 시행중인 주세법을 따라 세수 확보를 위해, 면허제를 실시하고 신고하지 않은 술에 대해선 밀주로 단속하였다. 면허는 개인과 기업 모두 존재했지만 개인 면허 소지자는 1920년대에 사실상 더 이상 발급되지도 발행하지도 않게 되어 사실상 정식 양조장(술도가)이 아닌 일반 민가에서 술을 빚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집약적 성격의 주조업 정책은 규모의 성장을 이루어 주세는 식민지 조선의 2번째로 큰 세수가 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주세법도 이에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 남게 된다.
20세기 전반기를 거치며 조선 시대 제사 문화의 한 틀을 담당했던 집집 마다의 제사주는 자본주의적 소비 양식이 활성화 됨에 따라 더 이상 술을 빚지 않아 대가 끊기게 된다. 하지만 술을 사는 것보다 빚는 것이 더 이로운 시장 친화적이지 못한 공간에선 여전히 밀주라는 이름으로 생존해갔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먹을 게 부족해 어쩔 수 없기도 했다. 조선 시대 기록에도 "사람들이 내일 굶어 죽을 건 생각도 않고 술만 빚어댄다!"는 식의 기록이 있고 특히 6.25 전쟁 이후의 삶은 시궁창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식량 문제는 1960년대 ~ 1970년대까지 이어져 쌀밥만 싸온 애들 단속하기 위해 아이들 도시락까지 검사했을 정도였으니 술이라고 어련했을까.
수탈을 위해 일제가 주세법을 시행하자, 여기저기서 술을 숨겨서 몰래 마시기 시작했는데, 충남 당진아산 지역의 농민들 가운데 일부는 두툼한 짚가리 속에 술을 숨겼다. 그런데 짚가리 속에서 익은 술 맛이 의외로 좋아 계속 담가 마셨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짚가리술'이다. 일부에선 짚동가리술이란 이름으로도 판매한다. 물론 이마저도 일제와 남한의 오랜 주세법 전통으로 인해 많이 실전(失傳)되어, 전통방식 그대로 만드는 집은 찾기 힘들다.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1961년 주세법이 개정되어 순수한 쌀을 술의 원료로 하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1965년부터 모든 알곡으로 술을 빚는 것이 금지되는 막걸리 금지법이 시행되었다. 그래도 술을 빚던 집은 몰래 만들어서라도 빚었다. 당시의 TV 영상을 보면[11], 개밥을 먹이는 것과 술을 집에서 빚는 것을 사치로 여기는 장면이 있다. 물론 이 경우는 모든 술을 금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시기엔 국민들이 지금처럼 와인이나 맥주 같은 '서양주'를 즐기던 시대가 아니었으니, 막걸리 금지 조치만 해도 제법 센 조치긴 했다.
이로 인해 증류식 소주 대신, 희석식 소주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증류식 소주 대신 희석식 소주가 대세가 된 것은 1930년대부터 있던 경향이다.[12] 식객에서도 이를 다루며 안타까워했다. 통일벼 보급 이후 수확량이 늘자 금주 조치가 풀린다.
중국의 삼국 시대 유비가 금주령을 내린 적이 있었는데, 간옹의 음담 패설로 금주령을 폐지한 사례가 있다. 또한 여포도 금주령을 내렸다가 명을 어기고 장형을 받은 부하들의 배신으로 조조에게 사로잡혀 최후를 맞았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고.
현재도 특정한 목적에서 금주령을 발령하는 경우는 있다. 대표적으로 투표일을 전후해서 며칠간 술판매를 금지하는 법인데, 의외로 상당히 많은 국가에서 체택하고 있는 법안이다. 술을 마시지 않은 멀쩡한 상태에서 투표하라는 의도에서 지정된 것. 브라질페루, 멕시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베네수엘라 등의 대다수 중남미 국가들과 인도, 필리핀, 터키[13], 몽골, 태국에서 체택하고 있다. 술판매 금지 기간에는 차이가 있지만, 어쨌든 선거일에 술집들은 문을 닫고 음식점에서 술을 팔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그래서 이들 나라에서 술집에서 모여서 개표방송을 보는 풍경은 있을 수 없는 풍경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술집이나 주류판매점에서 술을 팔지 못하도록 되어있는 법인지라 자기집에서 술먹으면서 개표방송을 보는것에 대해서는 뭐라 하는것은 아니며, 간간히 후보자들이 미리 준비해온 샴페인으로 선거결과를 축하하는 일도 있기는 하다. 파키스탄선거 투표시간까지는 술 섭취를 금지하지만, 투표 종료시각 이후에는 선거 다음날까지 24시간에 한하여 술을 허용한다. 그래서 파키스탄에서 '''술은 민주주의성수'''라 불린다.(...)
대한민국에서는 2021년 1월 4일부터 2주동안 코로나-19로 인하여 순천시에서 행정명령을 통해 낮술 금지령을 발령했다. 기사 일부 식당들이 영업제한 시간이 지난 뒤 술을 파는 등 변칙 영업을 하고 있다는 말이 있으며, 클럽 등지에서 변칙 영업을 하고 있다, 일부 청년들이 술을 마시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줄선다는 이야기도 있었기 때문에 강력히 한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여론은 그렇게라도 해서 코로나를 극복해야 한다는 찬성 측과 사생활 침해라는 반대 측으로 갈렸다.

3. 가톨릭의 금주법


예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시고 "이것은 너희들을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식후에'''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니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 예를 행하여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1고린도 11:23-25, 공동번역성서 -

예수께서는 "너희도 이렇게 알아듣지를 못하느냐?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느냐? 모두 뱃속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뒤로 나가버리지 않느냐? 그것들은 마음속으로 파고들지는 못한다." 하시며 '''모든 음식은 다 깨끗하다고 하셨다.'''

- 마르코 복음서 7:18~19, 공동번역성서 -

기독교권 중에 특히 가톨릭의 경우, 동아시아와 달리 '''거의 실행된 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유는 우선 양 지역의 의 원자재의 차이 때문인데, 서구의 경우 술은 거의가 과실주, 즉 '''주식으로 쓰지 않는''' 포도사과 등으로 담그는 술이었기 때문에, 술을 암만 많이 담가도 주식에 미치는 영향이 일절 없으니 담그는 게 문제되지 않았고, 게다가 과일을 장기 보존할 방법이 없었던 고대엔 술을 담그는 것만이 그나마 잘 보존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더군다나 서양 문명에 있어서 술은 단순한 즐길 거리가 아니라, 종교적 의미를 갖는 중요한 물건이기도 했다. 가톨릭 미사에는 포도주와 빵을 예수의 피와 살로 여기며 기도하는 성찬례가 존재한다. 다만 유럽의 물은 대부분 석회수로 마실 물이 없어 술을 대신 마셨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근거가 미약한 사실로, 술은 기호품으로 선호되었지 물 대신 술을 마시진 않았다.
게다가 시대가 흘러, 중세 유럽에서는 수도회가 부업으로 술을 담그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특히 포도주는 신약 성서의 맹물을 포도주로 바꾼 카나의 혼인잔치 같은 기적이나, 최후의 만찬에서 포도주를 자신의 피로 말하며 12사도들에게 먹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종교적으로 중요한 음료였기 때문이다.[14] 가톨릭은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반드시 포도주를 마셔야만 했고, 그런 성직자들에게 술을 빚지도, 마시지도 말라는 요구는 생존권 위협과 더불어 이단으로 간주당할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 문화권에서 포도주는 술 중에서도 매우 예외적인 취급을 받았다. 즉, 가톨릭에서는 술 한 방울도 입 못대게 하는 수준의 금주는 신학적으로는 성체성사 교리의 근간을 부정하는 이단 사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얘기다. 물론 포도주 그 자체를 신성하다고 본 건 아니고, 어디까지나 미사에서 성혈로 성변화한 것만이 신성한 것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유럽에서 술을 금지하려 했다간 성직자와 교황이 "창조주인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는 거냐?"이라며 성을 낼 게 뻔한데다가, 애초에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왕이나 영주도 가톨릭 신자였기에 술을 금지하는 건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종교재판소에 끌려갈 자살 행위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에 따라 가톨릭 교리의 경우, 과거부터 신학자들이 주로 언급해왔던 전통적 규정에 따르면, 음주 자체는 죄악시하지 않는다. 다만 이성과 도덕관념을 잃을 정도로 만취할 만큼 많은 음주를 하는 것은 10계명을 어기는 행위로써 고해성사를 보아야 할 대죄로 본다.[15] 사실, 이런 만취는 가톨릭을 떠나 어느 종교에서나 전부 악덕으로 본다.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서 방탕이 나옵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 에페소서 5:18(가톨릭 성경)

빛깔이 좋다고 술을 들여다보지 마라. 그것이 잔 속에서 광채를 낸다 해도, 목구멍에 매끄럽게 넘어간다 해도 그러지 마라. 결국은 뱀처럼 물고 살무사처럼 독을 쏜다. 네 눈은 이상한 것들을 보게 되고 네 마음은 괴상한 소리를 지껄이게 된다. 너는 바다 한가운데에 누운 자와 같고 돛대 꼭대기에 누운 자와 같아진다. "사람들이 날 때려도 난 아프지 않아. 사람들이 날 쳐도 난 아무렇지 않아. 언제면 술이 깨지? 그러면 다시 술을 찾아 나서야지!" 하고 말한다.

- 잠언 23:31~35(가톨릭 성경)

따라서 가톨릭에서는 평신도뿐만 아니라 사제수도자에게도 원칙적으로 음주를 금하지 않는다. 포도주맥주 중에서는 수도원 와이너리나 트라피스트 에일처럼 아예 수도원에서 직접 제조했음을 마케팅으로 삼은 제품들도 있을 정도다.
독일에서는 '파르잠의 콘라드'라는 수도자에 대한 성인 시성을 심사할 때 시성 대상자가 수도원을 방문한 손님들에게 맥주를 대접한 부분을 두고 악마의 대변인이 "여자들에게도 술 대접을 한 사람을 어찌 시성할 수 있습니까?"라고 지적하였다. 그러자 시성을 청원한 뮌헨 교구 주교가 "독일인에게 '''맥주가 술인가요?'''" 라고 했는데 악마의 대변인도 이를 수긍했다는 일화도 있다. 가톨릭에선 경건한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자도 술 대접한 것 가지고는 성인 자격에서 탈락하지 않을 정도로 술에 관대하다는 사례이다. 그리고 독일에선 맥주 한 두잔은 술로 보지 않을 정도로 맥주를 즐긴다는 것도 알 수 있다.

4. 개신교권의 금주운동과 금주법


영어로 'Temperance movement' 혹은 'Teetotalism'이라고도 부르는 서구 문화권의 금주운동은 대부분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개신교 문화권은 성찬식에 대한 해석이 교파마다 다르고, 전체적으로 봐도 포도주에 대한 중요성이 가톨릭보다 상대적으로 떨어졌다.
환경적 요인도 금주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북독일, 영국, 스칸디나비아 등 북부 유럽의 지리적 특성상 한여름에도 평균기온이 22℃를 밑도는 기후이며 일조량도 불량하여 포도 농사가 아예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극도로 춥고 습한 겨울 탓에 술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필수품처럼 여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들의 전통주는 호밀, 귀리, 옥수수, 감자 등 주식거리로 만드는 독한 증류주가 대부분이었고, 이러한 술들은 종교개혁 이전부터 사회적 문제를 일으켜왔다.
개신교의 시초인 마르틴 루터나 장 칼뱅은 처음부터 음주 자체를 금기시하진 않았다. 루터는 아예 맥주 애호가였고 아내인 카테리나 폰 보라도 맥주 양조장을 운영했다. 루터보다 더 꼬장꼬장한 이미지가 있는 칼뱅 역시 개인적으로는 포도주를 즐기는 편이었고 단지 적당히 마시는 '절제'를 주장했다.
본격적인 금주운동은 대항해시대산업 혁명을 거치면서부터 일어났다. 무역을 통해 홍차커피, 초콜릿처럼 안전한 기호품이 소개되고, 차차 서민층들에게까지 널리 퍼지면서 술에 의존하지 않고도 '몸을 데우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공장을 돌리는 기업주 입장에서는 근로자들이 술에 취하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일하기를 원했다.[16] 따라서 정부 차원에서든, 민간 차원에서든 금주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덴마크를 제외한 노르딕 국가들은 유럽권에서 가장 술에 엄격한 나라들로 알려졌다. 추운 기후 탓에 알코올로 인한 주폭 문제가 잦았고 그 반작용으로 알코올에 엄격해진 것이다. 일례로 스웨덴의 경우 1917년부터 1955년까지 '브라트시스템'(Brattsystemet)이라 하여 술을 배급제로 통제했다.[17] 1인당 술 구매량은 한달에 1.8리터로 제한되었고 여성과 실업자는 아예 술을 살 수 없게 했다. 그러다 1955년 이를 폐지하고 국영 주류 전매점인 '시스템볼라겟'(Systembolaget)으로 대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경우 덴마크령 시절인 1915년부터 금주법이 실시되었고, 1989년에 가서야 맥주를 포함한 모든 술이 해금되었다. 가장 금주법이 늦게 폐지된 지역은 페로 제도로 1908년부터 1992년까지 84년간[18] 이어졌다.
다만 모든 개신교가 강한 금주 의식을 가진 것은 아니고 교파마다 조금씩 정도의 차이는 있다. 특히 성공회의 경우 저교회파를 제외하면 가톨릭식 교리와 성격이 매우 강하게 남아 있다 보니 금주 의식이 매우 희박하다. 영국에서 금주 운동을 주도한 것은 대부분 비국교도(non-conformist) 개신교도들이나 성공회 중에서도 일부 저교회파쪽 인사들이었다.

5. 이슬람의 금주법


이슬람에서는 이슬람 성립 이전부터 물이 부족해서[19] 이미 자발적으로 술을 금기시하던 부족들의 전통도 있었고, 무함마드의 명령 이후 교리상 술을 엄금하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 많이 느슨해진 경우도 많지만, 와하비즘이나 살라피즘 등 근본주의적 종교관이 다수인지라 철저히 지키는 나라들이 더 많다. 바레인, 모로코, 튀니지, 터키처럼 이슬람권이면서 관광, 무역 등이 주(主) 산업이다보니 술을 허락하는 나라도 있는데, 술의 판매와 생산이 금지된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카타르등 주변 아랍 국가들의 부자들이 이 나라에 와서 술과 안주를 먹고 놀다 갈 정도이다.
즉, '''몇몇 국가는 21세기에도 술 먹으려고 해외까지 나가서 마셔야한다.''' 이런 국가들은 외국인에게도 금주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한국인 건설 회사 직원들이 입국시에 술 들고가다가 걸리면 뺏기고, 술을 몰래 담가먹다가 걸리면 꽤 문제가 되었다고한다. 그래서 무알콜 맥주나 마시곤 했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20]
그러나 또 몇몇 나라는 금주법이 꽤 약화되었다. 오만처럼 공개 장소에서의 음주는 법으로는 금지되어 있으나 술을 사서 집에서 마시거나[21] 바나 나이트 클럽에서 얼마든지 마시고 놀 수 있는 국가도 있다(원래는 외국인만 해당하나 현지인들도 와서 많이 마신다). 이집트모로코, 터키, 튀니지, 알제리, 레바논, 요르단,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알바니아 등 개방적이거나 어느 정도 개방화된 국가들에서는 맥주나 포도주 같은 술 제조 밑 수입을 법적으로 허용하거나 판매하고 있다.
이슬람권에서 세속적인 국가로 유명한 터키튀니지, 레바논에서는 오히려 술을 금지하자는 말을 하면 역으로 욕을 먹는다. 이란은 술 마시면 징역을 살아야 하는 나라이지만, 대신 '''술 배달 사업이 성업 중이다'''. 외국인의 경우, 남 보는 앞에서 대놓고 마시지만 않으면 묵인해 준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이나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1인당 술 소비량이 아시아 상위권에 속할 정도. 1980년대에 사우디로 일하러 간 한국인 노동자들도, 숙소의 발전실이나 기계실에서 몰래 증류기를 만들어 소주를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당시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비교적 관대하여 숙소나 현장 구역에서 술 마시는 것은 어느 정도 눈 감아 주었으나, 그 외의 다른 구역에서 적발되면 강제 추방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곳도 없잖아 있었다. 이란 같은 경우에는 이슬람 역사보다도 훨씬 오래된 페르시아 전통 포도주인 쉬라즈 지역의 특산물 쉬라즈 포도주가 있는데, 팔라비 왕조 때까지는 어느 정도 살아있었지만 호메이니 때[22] 죄다 없애버렸다. 오늘날 쉬라즈 이름으로 팔리는 포도주는 타 국가에서 제법을 재현한 것이든지, 혹은 이란과 상관 없는 프랑스 시라 포도주인 경우가 많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몇 천 년 동안 포도주맥주를 마셔왔는데, 종교 때문에 천년이 넘은 음식 문화가 많이 사라졌다.
여하튼 그래도 '공적으로는' 금지이다. 그러나 술을 금지하는 것에 대해서 이슬람 학파[23]부터 해석이 조금씩 다르다. 마시되 취하지 않으면 된다는 부류도 있고, 포도주[24]와 같은 특정 술만 금지하고, 대추야자[25]이나 우유나 염소유, 낙타유 등 동물의 젖으로 만든 술 등은 허락하는 부류도 있다. 게다가 학파를 막론하고, '''생존'''의 문제가 달린 경우에는 술을 마실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이를 포기하는 것은 자살로 보며, 이슬람에서는 기독교처럼 자살은 매우 큰 죄로 여긴다. 즉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일단 술 마시고 목숨을 구한 뒤 나중에 알라에게 용서를 구하는 게 낫다는 것. 이는 술 뿐만 아니라 돼지고기와 같이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음식인 '하람'에도 똑같이 적용한다. 한마디로 '음주, 하람 섭취 < (넘사벽) < 자살' 이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파키스탄은 공적으로는 금지이나 선거날에는 투표를 마치고 나온 사람들이 술을 먹는 걸 막지 않는다. '''그래서 파키스탄은 선거날이 되면 술집이 폭발한다.''' 파키스탄에서 선거날에 마시는 술은 "민주주의성수"라며 술로 보지 않는다.
물론 찾아보면, 분명한 중동계임에도 술 마시고 돼지 고기 구워먹고 할 거 다 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인데, 이 경우는 셋 중 하나이다. 하나는 중동계는 맞지만 여러 이유로 무슬림이 아니거나, 터키나 이집트처럼 세속주의가 강해서 처음부터 신경 안 쓰던 부류이거나, 아니면 어차피 빡빡하게 구는 사람이 없는 외국이니까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대놓고 씹고 다니는 케이스. 3번째의 경우 "너 그러면 안 되지 않냐"고 하면, "'''여긴 외국이잖은가 친구'''" 식으로 대답하는 사람도 있다. 또 다른 버전으로는, "저는 무슬림이긴 한데 나쁜 무슬림이라 괜찮아요"가 있다.
다만 이래보여도 공개적으로 이러한 '금기'들을 즐기는 모습을 남기진 않는다. 혹여나 나중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터키 출신''' 사진 작가인 '아리프 아쉬츠'는 전 세계를 떠돌며 사진 촬영을 하다가, 한국에 왔을 때 술과 돼지 고기를 대놓고 실컷 즐겼고, 나중에 자신의 사진집에서 한국에서 술과 돼지고기를 입에 댔다는 점을 언급하며, "알라께 용서를 구하겠지만 그래도 '''삼겹살에 복분자 맛은 죽여줬다'''"고 써놓기도 했다.
이슬람에서 술을 금하고 새로운 기호 식품으로 나온 것이 커피이다. 커피의 어원이 아랍어로 와인을 뜻하는 카화(qahwa)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또한 새로운 기호 식품으로 물담배가 있는데, 일반 담배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독하며, 중동 내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6. 캐나다의 금주법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쪽이 미국보다 먼저 금주법을 실시했던 나라이다'''. 다만 전국적으로 일제히 실시된 건 아니었다. 한 때, 1898년 전국적으로 금주법 실행에 대한 국민 투표를 실시하여서 찬성표가 많이 나왔지만 윌프리드 로리에 총리가 거부하였다.
지방마다 실시년도와 폐지년도가 다르다. 그래서 미국에서 금주법이 통과되자, 캐나다 지역의 술 산업이 '''엄청난 호황을 누렸던 것'''. 가장 금주법이 늦게 폐지된 주는 《빨간머리 앤》으로 유명한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1901년 금주법이 제정된 이후, 거의 반 세기 가까이 지난 '''1948년에야 금주법이 폐지되고 술이 허용되었다.'''
금주법 폐지 이후로도 술 판매를 제한하는 제도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온타리오 주의 LCBO가 대표적. 특이하게도 퀘벡은 가톨릭 문화 기반임에도 SAQ라는 주정부 공기업에서 술을 통제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이 위키피디아 문서를 볼 것. 상술한 리쿼스토어도 사실 금주법을 대체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7. 미국의 금주법




8. 인도의 금주법


구자라트, 나갈랜드, 락샤드위프, 마니푸르임팔, 미조람, 비하르에서 주류 제조 및 판매가 금지되어 있다.

9. 러시아의 금주법



1985년의 금주법을 풍자한 러시아 락 밴드 주파르크의 노래 'Трезвость — норма жизнь(금주를 생활화하자, 1987/88)'
단순히 보드카를 위시한 주류의 생산 및 배급 관련해서는 이전에도 몇 차례 제재가 있었으며, 금주 캠페인은 소련 시기 내내 끊이지 않았다. 보통 러시아의 금주령이라고 하면 러시아 제국 말기~소련 초기에 있었던 금주령과 고르바초프 시절 금주령이 유명하다.
우선 1914년 여름 당시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는 군 내 음주로 인한 문제를 없애고자 러시아 전역에 보드카 등 주류의 생산 및 판매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26]. 처음에는 동원령 기간에만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통계에 따르면 이동안 노동생산성은 약 15% 증가했으며, 이 외에도 예금이 증가하고 범죄 건수가 줄어들었다고 한다[27]. 허나 이 금주령으로 인해 미국처럼 음성적 주류 제조업자들이 활개를 쳤고, 이들 중 일부는 젊은 공산주의 혁명가들의 자금원이 되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볼셰비키들도 금주령을 철폐하지 않았고, 페트로그라트 혁명군사회의에서는 10월 혁명 직후인 1917년 11월 8일 "추후 지시가 있기 전까지 모든 주류 및 알코올성 음료의 생산을 금한다(впредь до особого распоряжения воспрещается производство алкоголя и всяких „алкогольных напитков“)"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1923년 8월 26일 최고인민회의 등에서 주류/알코올성 음료 생산 재개를 명할 때까지 계속된다[28]. 이 시기에 만들어진 선전물 중엔 보드카를 권하자 'нет'(싫어)라고 말하며 거절하는 사람이 그려진 포스터가 있는데, 2000년대 후반에 재발굴되어 지금까지도 인터넷 밈으로 쓰이고 있다.
그 이후에도 1929년, 1958년, 1972년 세 차례의 대규모 금주 캠페인이 실시되었다.
  • 1929년의 금주 캠페인은 '노동자들의 요구'에 기반하였으며 당시 많은 술집들이 카페로 바뀌었고 많은 양조장들이 문을 닫았다.
  • 1958년의 금주 캠페인은 중앙위원회 지시에 기반하였으며 "음주에 맞선 싸움을 강화하고 도수가 센 알코올성 음료의 거래에 있어 질서를 확보(Об усилении борьбы с пьянством и о наведении порядка в торговле крепкими спиртными напитками)"하고자 식당을 제외한 기차역/공항의 공공 장소 및 아동 시설 등의 장소에서 보드카 판매를 금지하였다.
  • 1972년 금주령은 361호 명령 "음주 및 주류에 맞선 싸움에 대한 조치(О мерах по усилению борьбы против пьянства и алкоголизма)"에 기반하였으며[29] 50/56도 독주 생산 금지, 30도 이상 독주의 판매 시간 제한, 보드카 가격 인상, 알코올 중독자의 교정 시설 격리 등의 조치가 시행되었다[30].
하지만 제정 시대나 스탈린 시대 다 합쳐봐도 1인당 한 해 알코올 소비량이 5리터를 넘지 못했는데 1950년대 중반 이후로 사회분위기가 풀어지고 소득수준이 증가하면서 보드카 소비량도 같이 증가했고, 결국 1960년대 중반 이후로 평균수명이 더 이상 증가하지 않고 침체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1984년 1인 소비량이 그 두 배를 초과하는 10.5리터를 찍는 등[31] 제대로 된 효과는 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1970년대 중반에 들어서는 소련의 국방비와 맞먹는 금액이 술값 지출에 쓰였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으며 소련중앙텔레비전과 프라우다같은 관영언론을 통해 계도갬페인을 펼쳤고, 여러차례 술값 인상도 단행했지만 어차피 남아도는것이 돈인지라 큰 효과를 보지 못했다.(...)[32]
이에 1982년 가을 소련 정부에서는 금주 관련 위원회를 창설했고, 위원회에서는 '어차피 술 못 마시는 건 불가능하니' 단순히 알코올 섭취량을 줄이는 데서 그치지 말고 사람들의 음주 패턴 자체를 프랑스 등 타국과 유사하게 바꾸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보드카 등 독주에서 상대적으로 도수가 덜한 맥주/크바스/포도주 등으로 돌리고 술집을 카페로 바꾸는 등의 정책이 실시되었고 이는 그럭저럭 성공적이라 1980년대 초반 소련의 보드카 소비량은 지속적으로 줄고 맥주/포도주의 소비량은 늘었다.[33].
2번째 금주법은 1985년 6월 1일 당시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서명 하에 시행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금주령까지는 아니고 단지 술의 구매[34]에 제한을 두었을 뿐이며 1972년의 사례처럼 전례가 없었던 일도 아니었지만, 안드로포프 시절과 달리 도수가 높든 낮든 주류 전체의 생산량이 줄어들었다는 차이가 있다.
법의 시행 목적은 알코올 의존증 문제로 인한 평균 수명 상승 적체 현상 해소[35]와, 을 만드는 데 쓰는 곡물을 줄여 소련의 고질적인 식량 문제도 일정 부분 해결하고, 의료 비용도 줄여 정부 예산을 아끼려고[36] 시행한 것이었다.
초기에는 효과가 없진 않았다. 합법적 주류 소비가 60%나 감소했는데, 소련의 남성 자살률이 감소했고, 평균 수명이 증가하고 범죄율이 감소하였다. 하지만 레닌 시절에 알코올 중독 문제를 줄이겠다고 민간에서의 보드카 제조를 금했다가 오히려 밀주가 성행하는 바람에 보드카 민간 제조 금지 법이 철폐되었듯, 고르바초프가 금주령을 시행한 뒤 '사마곤'(Самогон)으로도 불리는 밀주가 성행하는 문제점 역시 발생하였고, 기대했던 예산 절감도 주세 감소로 인해서 있으나 마나한 효과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고로 남자들 사이에서 고르바초프의 인기가 엄청나게 떨어져버린 건 당연지사.
결국 고르바초프도 버티지 못하고, 1980년대 말에 금주령이 철회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옐친 시절에 공공 의료 보건 시스템의 붕괴와 함께, 옐친이 인기를 위해서 보드카를 의도적으로[37] 값싸게 보급하는 정책을 펴면서 다시 평균 수명이 58세(남성 기준)까지 추락해버렸고[38], 이 여파는 2000년대 초반까지도 이어졌다. 러시아가 경제가 어느정도 나아지고 보드카의 소비량도 차차 줄어들어 2018년 현재 남성 평균수명은 67세로 러시아가 한창 막장을 달리던 시기보다는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러시아가 세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이나 전반적인 소득수준에 비하면 월등히 낮다는것은 변함이 없다.
맥주크바스 정도는 허용하면 되지 않냐는 의문을 가지는 경우도 있는데 '''러시아는 2011년까지 맥주를 음료수로 분류한 나라다.''' 그리고 이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아, 엄연한 주류인 크바스[39]도 그냥 애들 음료수 수준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소련 시절 어떻게든 술을 구하려던 남자들의 발버둥 사마곤 정도는 그냥 양반이고, 링크에 따르면 '''산업용 알코올, 향수, 로션, 광택제, 살충제, 접착제, 신발 크림''' 등 온갖 기상천외한 수단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물론 저런 위험한 대체품들을 마시고 실명하거나 아예 사망하는 경우도 흔했다[40].

[1] Alcohol prohibiton이 아니다! Prohibition 자체만으로도 문맥상 금지 또는 금주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2] 밑에서 보면 알겠지만 영조의 손자 정조는 술을 좋아했고, 영조도 금주령을 재위기간내내 실행했으면서 자기는 마셨다.[3] 여기에는 영조가 직접 창설한 금주령 실시 관청이라 할 수 있는 '금란방'이 하라는 술단속은 안 하고 뇌물이나 받아먹는 바람에, 당파 막론하고 신하들이 약점으로 잡은 탓도 컸다. 사실 이건 금주법의 한계라 할 만한데 미국 역시도 이랬다.[4] 이 일을 두고 '''영조가 직접 참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원문은 '上御崇禮門, 斬南兵使尹九淵'으로 '영조가 직접 참하다'로는 국역할 수 없다. 더구나 바로 몇 줄 밑에 親御南門라고 되어 있다. 이 구절은 '남문에 친히 납셨다'는 뜻이며, 윤구연을 '직접' 베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특히 斬의 의미는 단순히 '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참수형을 집행하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영조가 직접 베었다면 斬앞에 '親'자가 붙었을 것이다. 하지만 처형 장면에 직접 나타나는 건 역적 등 중범죄자인 경우가 상당하므로 왕이 직접 납셨다고 한 것만으로도 영조가 윤구연이 지은 죄를 중대한 범죄로 보았다고도 볼 수 있다.[5] 한편 후에 윤구연은 무죄로 판명이 나서 사후복권된다.[6] 증거가 술 냄새가 나는 항아리 1개 뿐이었다. 더구나 그 술 항아리도 금주령이 떨어지기 전에 사용했던 것이라는 논란이 있었다. 하지만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월척이 잡힌 상황인데 영조가 그런 걸 보고 봐줄 리는 없었다.(...)[7] 일반 백성이었다.[8] 다른 의미로는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했다는 의미도 있다. 사간원은 임금의 권위에 굴복해선 안 되므로 금주령을 어겨도 된다는 논리.[9] 農酒. 탁주(막걸리)에 물을 탄 술.[10] 현대에 흔한 라거에일은 아니고 그냥 보리로 만든 술이라서 맥주이다.[11] 오늘날의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집에서 술을 빚는 것은 빚을 내어 만들거나 하는 게 아니라면 사치라고 하긴 좀 곤란하다. 그러나 콩 한쪽이라도 나눠먹어야 한다는 식의 공동체 의식이나, 나쁘게 말하면 남 잘 되는 꼴은 못 보는 심리 등을 감안하면, 당시에는 그리 생각할 개연성도 없진 않았을 듯.[12] 그러나 막걸리 금지법과 어울리지 않게 박정희 본인은 상당한 애주가였으며, 측근인 김종필의 증언에 의하면 평소 막걸리시바스 리갈을 섞은 막걸리 폭탄주도 즐겨마셨다고 한다.[13] 다만 터키의 경우에는 2018년 이후에나 통과되었기때문에 그 이전에는 큰 제한이 없었다.[14] 한편 금주 교리를 가진 일부 보수 개신교에서는 포도주가 아닌 포도즙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긴 하다.[15] 현행 교회법에도 절제의 덕을 위해 과도한 음주를 피하라고 규정되어 있다. 흔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폭음이나 만취 등 술취함에도 관대해진 거 아니냐며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도 가톨릭의 윤리신학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이 규정도 일선 사목을 하는 사제들이 언급을 자주 하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현대 가톨릭에서도 지속적으로 유지된다.[16] 물론 현재의 관점으로는 산재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지만 당시의 기준으론 술을 마시고 일하면 그만큼 효율이 떨어지므로 당연히 술을 마시지 말라고 일하라는 것이다.[17] 1922년 8월 27일에 금주법을 놓고 국민투표가 벌어졌는데, 간발의 차로 무산되었다.[18] 1973년에 금주법 폐지를 놓고 국민 투표가 벌어졌으나 대다수가 반대하여 19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19] 술 빚는 데 물이 많이 필요하기도 하고, 알코올을 분해하는 데 수분이 엄청나게 필요해서, 증류주 같은 술은 마시면 갈증이 더 심해진다.[20] 게다가 돼지 고기, 개 고기도 금지인데, 지역에 들개들이 많아서 한국인이 차몰다가 우연히 치여죽인 개를 잡아먹은 이후 개 사냥을 벌이다가 들켜서 난리났다는 일화도 있다.[21] 개인이 술을 구입하려면 소득 수준을 증빙하는 자료를 갖춰 월 수입의 일정 비율만 주류 구입에 쓸 수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제약이 많다.[22] 1980년 이슬람 혁명을 찍은 기록 영상에서는 포도주를 병째로 죄다 폐기 처분하는 장면도 나온다.[23] 이슬람은 성직자가 없는 대신, 이슬람 교리를 연구하는 학자들과 학파의 중요도가 크다.[24] 굳이 포도주인 이유는, 유럽과 중동 지역에서는 포도주가 술의 대명사라고 할 정도로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악마가 돼지, 양, 원숭이, 사자를 잡아 만든 음료라는 설도 있어서다.[25] 무함마드의 행적을 기록한 하디스에서도, 무함마드는 생전에 대추야자술을 마셨다는 내용이 나온다.[26] 단 교회용 포도주 및 상류층들이 이용하는 식당/클럽은 예외였다.[27] 국가 두마의 농민 대표들이 차르에게 주류 판매를 영원히 금지해 달라고 청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28] 제정 러시아 말기처럼 소련에서도 이러한 제한 조치로 인해 밀주가 판을 치는 바람에 철폐했다는 말이 있다.[29] 당시 슬로건은 "음주에 맞서 싸우자(Пьянству — бой)!"였다.[30] 원래는 보드카 등 독주의 유통을 제한하려 하였으나 맥주 등 낮은 도수의 주류도 점차 제한 대상에 포함되었다.[31] 이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수치이며 수치를 잡기 힘든 밀주 소비량까지 포함하면 1인당 14리터까지 뛰어오른다고 한다. 이 정도면 소련의 성인 한 명이 연당 90-110병의 보드카를 비운다는 뜻인데, 실제로는 이 소비량 중 1/3만이 보드카고 나머지는 포도주, 맥주, 크바스, 밀주 등이라고 한다[32] 1970년대 당시 소련의 구매력은 매년 상승했던 데 반해서 상품생산량의 증가량은 구매력의 상승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에 남아도는것이 돈이었다.[33] 참고로 당시 소련 서기장이었던 안드로포프는 당시 소련 경기의 침체는 공산주의 정신의 쇠퇴와 만연한 알코올 중독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던 사람이었다.[34] 21세 미만 주류 구매 일절 금지, 주류 판매 시간 제한, 1인당 보드카 2병 초과 구매 불가, 술의 종류 축소 및 가격 대폭 인상[35] 지금도 러시아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평균 수명이 현저하게 낮은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주류로 꼽힌다. 물론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사는 거야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그런 것치고도 차이가 너무 크다.[36] 일단 술을 만들 곡물을 사들이기 위해, 미국이나 아르헨티나, 프랑스 등지로부터 식량을 수입해서 상당한 양의 외화가 낭비되는 데다가, 소련은 무상 의료 제도를 시행했기에, 알코울 중독증이나 성인병을 치료하는 데에도 상당한 재정이 지출되었다.[37] 마침 옐친도 애주가였다.[38] 이는 1960년대보다도 더 낮아진 거다![39] 알콜도수가 0.5~1%정도다.[40] 위 링크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소련 공군에서는 '''MiG-25기 엔진 냉각용 알코올'''까지 빼다 마셨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의 '어뢰 주스(torpedo juice)'와 달리 이 냉각용 알코올은 완벽한 에탄올이라 수고도 훨씬 덜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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