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
1. 개요
1993 WTC Bombing. 1993년에 알 카에다가 세계무역센터에 가한 '''첫번째'''[1] 테러.
미국을 대상으로 한 첫 번째 중동발 테러이기도 하며, 이 테러 후 알 카에다는 1998년 케냐 미 대사관 폭탄 테러, 2000년 USS 콜 테러사건 등의 크고 작은 테러를 자행해오다가, 2001년 '''9.11 테러'''라는 전세계구급 테러 사태를 일으켰다.
1.1. 배경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냉전 체제 하에 있던 미국은 소련에 대항하는 위치에 있던 반군(무자헤딘)을 대량 지원했고, 이 지원으로 엄청난 무자헤딘이 생겨났다. 근데 전쟁 끝나고 이들이 전부 실업자가 되어버리는 상태가 발생한다. 이를 보고 오사마 빈 라덴은 무자헤딘의 새로운 구심점이 되는 알 카에다를 창설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미국은 중동 지역에서 몇몇 사건을 터뜨리게 되는데, 걸프 전쟁 당시 이슬람의 성지 메카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짓을 저질렀고, 덧붙여 1차 인티파다 때 팔레스타인에서 벌인 이스라엘의 행패를 그대로 본 무자헤딘 단체들이 극대노하며 알 카에다를 위시로 하여 반미로 전향, 이 테러를 시작으로 엄청난 수의 테러를 저지르게 된다.
1.2. WTC가 표적이 된 이유
세계무역센터(WTC)는 세계 자본주의의 상징이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자유의 여신상, 할리우드 등과 함께 미국의 상징이기도 했다. 반미주의의 표적이 되기 충분하다는 요건도 두루 갖추고 있었다.[2]
이 조건은 반미주의 쪽에서 상당한 어그로를 끌기 충분한 점도 있었거니와, 이 건물이 없어졌을 때 미국의 체면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했다. 후에 알 카에다는 미국 대사관을 테러하고, 구축함도 테러하지만 크게 어필이 안 되자 '''아예 작정하고 세계무역센터를 파괴한다.'''
2. 사건 진행
2.1.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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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대장 람지 유세프.
알 카에다의 수석요원 람지 유세프와 테러범들은 1990-91년경 트레이닝 캠프에서 훈련을 받았고, 1992년 9월부터 차례로 밀입국하기 시작한다.
입국을 하자마자 람지 유세프는 테러에 쓰일 대형 사제폭탄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그 와중 한 대원은 입국검사 도중 폭탄 설계도가 발견되어 추방당하기도 했다. 일당들은 뉴저지에 거주지를 잡고, 테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1993년 2월 중순, 테러 예정일을 약 10~15일 남겨둔 상태에서 유세프는 폭탄 제작을 완료한다. 그리고 라이더 밴을 한 대 렌트하여 그 차에 폭탄을 장착했다.[3]
2.2.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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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26일 12시, 람지 유세프와 대원 에야드 이모일은 세계무역센터 지하2층 주차장에 밴을 주차, 12시 6분에 실려있던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도주하였다. 12시 17분 폭탄이 폭발하였다. 하지만 천우신조로, 주차공간이 없어 건물들의 무게중심점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차를 주차했기 때문에 건물들이 무너지지는 않았다.
2.3. 참상
우선, 멀리 떨어져 있던 7번 타워를 제외하고 모든 타워가 구조적 손상을 입었다. 사망자는 총 6명[4] 이며 부상자는 1042명. 사망자 중 임산부[5] 와 태아가 있었던 게 밝혀지면서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지상 사망자는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6] 다행히 항상 붐비는 랜드마크 특성상 주차공간이 없었던지라 상당히 미미한 사망자 수가 나왔을 뿐이지, 위치 선정을 잘 했다면 1/2번 타워도 무너뜨리는 게 가능했다. 눈 깜짝할 새에 폭파당했을 게 뻔하며, 이 경우 약간의 탈출에 대한 여지라도 있었던[7] 9.11 테러와는 달리 사망자도 몇만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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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 당시, 세계무역센터 앞 대로변.
기타 피해로는 지하주차장에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는 것과, 차 4백여 대가 전소된 것, 일대에서 당분간 TV 송출과 통신이 안되었다는 것[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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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피해로 세계무역센터는 폐장했다. 이어 보수공사와 대책 마련 끝에 1995년 재개장하였다.
2.4. 일당 검거
사건 초기에만 해도 FBI는 지하 5층에 있던 변압기의 폭발을 의심했지만, 조사 도중 폭탄 성분이 검출되면서 명백한 테러로 규정짓고 수사를 시작했다. 이어 FBI는 테러 당시 쓰인 차의 일부를 발견해내고, 그 차의 렌트 기록과 CCTV 기록 등을 토대로 일당 중 한 명이었던 모하메드 살라메흐의 신원을 밝혀낸다.
테러범 일당은 테러를 일으키고 수 시간 내에 파키스탄으로 도주한다. 하지만 미국 내에서 잔류한 일당들도 있었다. 한편 테러범 중 차를 렌트했던 모하메드 살라메흐는 묵었던 아파트의 보증금을 받지 못했고, 3월 초 재입국을 했다가 체포당했다. FBI는 모하메드를 취조하여 미국 내에 남아있던 테러범들을 모조리 잡았다. 그들은 같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1994년 5월 미 연방법원은 구속된 테러범들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고, 모하메드 살라메흐의 경우 그간 수사에 도움을 준 점을 고려해 불구속 석방 조치하였다. 그는 석방 후 이라크로 달아났다.
1995년 보진카 계획이 발견되고, 그것을 주도하던 람지 유세프는 미처 달아나지 못하고 체포되었다.[9] 그런데 람지 유세프는 체포 후 조사관들에게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다.
당시 이 말을 들었던 조사관들은 이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하였으나, 이후 '''제대로 알게 되었다.''''''"이건 단지 시작일 뿐이야!"'''
("This is only the beginning!")
유세프는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지 않았으며, 1997년 11월 재판에서 판사는 유세프에게 '''240년 형'''을 선고, ADX 플로렌스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2.5. 이후
테러 당시, 경찰과 소방관들 사이에서 상당한 혼선이 있었던지라, 이 혼선을 최소화하기 위해 1/2번 타워 로비에 커맨드 센터가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정작 9.11테러 때는 세계무역센터 자체가 공격받아서 커맨드 센터가 대피하는 와중에 더 큰 혼란이 생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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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1월 1일 세계무역센터가 재개장하며 광장에 추모 조형물이 건립되었다. 하지만 이 조형물은 9.11 테러로 인해 파괴되었다. 테러 사망자들은 이후 9.11 메모리얼 파크에 함께 이름이 새겨졌다.
3번 타워의 소유주였던 힐튼-비스타 인터내셔널은 이후 건물을 메리어트에 매각했고, 3번 타워는 9/11 테러 당시 1, 2번 타워의 잔해에 깔려 사라지게 된다.
9/11테러의 충격과 인지도가 워낙 높기에 이 테러를 모르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언급하는 글이나 사람들 앞에서 헷갈려하는 일이 있다. 예컨대 고질라(1998)에서 세계무역센터 테러 이후 최대의 피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영화는 2001년 이전에 개봉했기 때문에 2001년 이후에 고질라를 본 사람들 중에서 세계무역센터 폭탄 테러를 모르는 사람들이 당황하는 일도 있었다.
3. 같이 보기
[1] 2번째는...[2] 실제로도 반미주의 쪽에서의 악감정은 상당해서, 9.11 테러 당시 많은 반미주의 국가/단체에서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3] 폭탄이 상당히 컸는데, 위키백과 설명 상 폭탄의 중량은 약 590 킬로그램이라 나와있다.[4] 태아 포함시 7명[5] 모니카 스미스. 사무실 여비서. 당시 임신 '''7개월째''' [6] 제일 큰 피해를 입은 3번 타워만 해도, 호텔이라 많은 사람들이 투숙하고 있었으며, 이 건물이 무너졌다면 몇백의 사망자는 나왔을 것이다.[7] 비행기가 타워에 충돌한 이후에도 한 동안 건물 자체는 그대로 서 있었기 때문에 두 타워 모두 고층에 있던 사람들은 꼼짝없이 갇혀서 사망했지만 저층에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 구사일생으로 탈출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8] 1번 타워의 안테나가 로워 맨해튼과 미들 맨해튼 일부지역에의 방송 송출과 통신을 책임지고 있었다.[9] 사실 필리핀발 도쿄행 항공기 테러후 수사관들의 수사에 따라 본국에서 검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