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이즈미트 대지진
1. 개요
1999년 8월 17일, 터키 이즈미트에서 발생한 규모 7.6의 대지진. 진원의 깊이도 얇은 데다가[1] 내진 설계가 적용된 건축물이 거의 없다는 점, 이즈미트 그리고 이즈미트 인근의 '''이스탄불이 터키의 주요 경제-산업 중심지라는 점'''때문에 터키에 막대한 피해를 가하게 되었다.
2. 발생 및 피해
북아나톨리아 단층대가 동부아나톨리아 단층대를 따라 스트라이크 슬립(두 단층이 미끄러짐) 현상이 발생하면서 막대한 파열 에너지가 방출되었고 150km에 달하는 넓은 구간에서 이런 현상이 발생했다. 거기다가 재수없게도 지진파가'''초음속의 속도로 이즈미트 일대를 강타했고''' 안그래도 지진 발생시간도 새벽이었는데 지진파가 곧바로 일대를 강타하는 바람에 사람들은 제대로 대피할 틈도 없이 그대로 붕괴되는 건축물에 깔려 죽게 되었다. 마르마라 해에선 높이 2m 이상의 쓰나미가 발생했고 155명이 쓰나미에 의해 사망하게 되었다.
특히 이스탄불 서쪽은 연약한 신생대 퇴적암으로 구성되어서 지진에 매우 약했고 그 위에 건설된 수 많은 산업 및 공공시설들이 붕괴되거나 파손되는 큰 피해가 발생되었다. 여러 개의 정유공장과 자동차공장들이 파괴되어 터키에 경제적 피해가 속출했다. '''연간 1100만 톤의 정유를 생산할 수 있는''' Tüpraş(터키 석유기업)의 정제소가 파괴되는 바람에 대규모 화재가 발생되어 몇 일동안 반경 3마일 이내에 출입이 금지되었고 거기다가 수도 시스템이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덕에 제대로 된 화재 진압도 못하다가 노력 끝에 겨우 5일 만에 화재 진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산업 시설 외에도 인프라 시설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많은 육교와 터널들도 붕괴되었고 유럽 횡단 고속도로도 무너져 내려 교통 시스템도 마비되었다. 터키 해군 본부와 무기고도 붕괴되었으며 '''12만 가구의 집이 수리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붕괴되어''' 25만 명의 이재민도 발생되었다.
터키 측에선 공식 사망자가 1만 7000여명이라 집계했지만 '''실제 사망자는 그보다 훨씬 많은 4만 5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측하는 소식통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터키의 민주주의는 형식적이었을 뿐 실제론 터키군이 아타튀르크가 만든 세속주의 국가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터키의 모든 것을 자기 입맛대로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터키가 막대한 피해를 입자 각국에서 구조대를 파견하고 지원금을 주었는데 '''특히 그 앙숙 그리스도 구조대를 파견했다.'''
터키의 형제국인 아제르바이잔은 물론이거니와 대한민국, 독일, 러시아, 이스라엘, 영국, 스페인, 폴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헝가리, 프랑스, 일본, 오스트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 이집트, 스위스, 아이슬란드도 구조대를 파견해 한 마음으로 잔해속에 고립된 터키인들을 구조했고 터키인들은 이들 국가들의 노고에 감동을 느꼈다. 이외에도 인도도 터키에 막대한 지원금을 제공했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직접 지진 피해 지역을 방문해 애도를 표했다.
이러한 각국의 노력 끝에 지진 피해지역은 제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고 지진 이후 급락하던 경제와 도시 인구도 회복되었다.
3. 여파
안그래도 경제적으로 침체되었던 터키였는데 이즈미트 대지진으로 인해 제대로 타격을 받아 GDP는 자그마치 3.4%나 역성장하게 되었다.
이 지진을 계기로 터키 내에서 부실공사 문제가 대두되었고 터키 정부는 내진설계를 의무화했다. 특히 아파트와 같은 거주공간들이 불법 건축, 기준 미달 건축, 부적합한 지반 위 건축, 건축비용 절감을 위한 자재 횡령 등 부실공사 종합세트로 지어진 덕에 사상자가 더 많이 발생하게 되었고 건설사에 집단 소송이 제기되었다. 그래서 일부 건설업체 관계자들은 징역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었지만 상당수가 법집행이 연기된데다가 2007년, 공소시효가 만료된 덕에 '''대부분의 책임자들은 책임도 지지 않은 채로 계속 사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야말로 터키인들 입장에선 분노가 치밀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