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데 세르반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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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소설가, 군인, 시인, 극작가, 세금 징수원.
'''서양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한 명'''이자 '''스페인어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다. 그의 대표작인 돈키호테는 '최초의 근대 소설'이며 세르반테스에게 불멸의 명성을 얻게 해준 걸작이다. 그의 영향력은 언어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근대 이후의 스페인어 자체를 '세르반테스의 언어(La lengua de Cervantes)'라고 불러버릴 정도다. 멕시코의 대표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는 세르반테스를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건국의 아버지"라고 평했다.
2. 생애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1547년 9월 29일에 태어났다고 알려졌으나 이 날짜는 고향 마을 성당에서 보관하던 세례 기록부[3] 에 적혀 있던 날짜에서 가톨릭 관습 상 태어나서 유아세례를 받는 기간을 역산해서 계산한 것이라,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드리드 북쪽에 자리잡은 카스티야 지방의 작은 도시인 알칼라 데 에나레스(Alcalá de Henares)에서 몰락한 이달고[4] 집안을 뿌리로 둔 이발사 겸 외과의사인 로드리고 세르반테스의 아들[5] 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종교재판소 변호사였다. 오늘날 변호사, 의사 집안이라고 하면 대단하다 생각하겠지만, 이 시대에는 변호사라는 게 문서 작성 업무를 보는 수준이었다. 의사도 피를 뽑거나 땀을 흘리게 해서 환자를 고치는 수준이었다. 그런 일은 이발사도 했다. 당시 스페인은 순수 기독교 집안 혈통을 중시했다. 따라서 의사나 변호사, 세금 징수원 같은 일은 주로 개종한 유대계가 했다. 보수는 적고 사회적으로 멸시를 받았다. 아버지는 청각에 문제가 있었던 데다, 경제적으로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왕실을 옮겨 다니느라 가족들이 스페인 여러 곳을 떠돌았다. 빚 때문에 옥살이도 했다. 세르반테스의 유년 시절은 가난과 비참함과 부끄러움으로 얼룩졌다. 세르반테스의 학력은 불분명하다. 대학은 밟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1568년 당대 최고 지식인 후안 로페스 데 오요스가 낸 수필집에 그의 시 4편이 실린 적이 있다. 돈키호테 전편 제 9장에 나오는데,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찢어진 종이라도 주워 읽는 열렬한 독서광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554년 빚 때문에 전 재산을 차압당하여 가족들은 13년 동안 스페인 전역을 떠돌아 다녔다. 유년 시절과 청소년기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는 것이 없지만, 마드리드로 집안이 이사한 1560년대부터 저명한 인문학자인 로페스 데 오요스(López de Hoyos) 아래에서 학문을 배웠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후 1569년이 되자 교황청에 특사로 파견된 스페인 추기경의 종자로 선발되어 로마 물을 좀 먹고, 이후 나폴리로 가서 그곳에 주둔해 있던 스페인 해군에 지원하게 된다. 당시 세르반테스가 왜 난데없는 군 입대를 선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9월에는 "왕이 머무는 궁정이나 성채 등에서 싸우면서 무기를 꺼내서는 안 된다"는 법을 위반해, 오른손이 잘리고 10년 간 마드리드에서 추방당하는 벌에 처해지자 이를 피해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이탈리아로 도망갔다. 로마에서 먼 친척뻘 되는 고위급 사제의 도움을 받고, 훗날 추기경이 되는 다른 사제의 수행원으로도 일하면서 르네상스 문학을 섭렵했다.
그러다 1571년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이 터키군에 맞서 결성한 전투함대 휘하 부대에 자원 입대한다. 스페인과 교황청, 베네치아, 제노바가 중심이 된 신성 동맹의 연합함대와 오스만 제국 함대가 맞붙은 레판토 해전이 벌어질 즈음에 재수없게 열병에 걸렸다. 레판토 해협에서 대승했지만, 이 때 총상을 입고 왼손이 불구가 되어 ‘레판토의 외팔이’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그때가 24세였다. 군 생활을 계속하다가 1575년 9월에 귀국하는데 탄 배가 태풍에 휩쓸리고 튀르크 해적의 습격까지 받아 포로가 된다. 노예 신분으로 5년간 포로 생활을 하다가, 가족이 모은 돈으로 몸값을 지불하고 천신만고 끝에 간신히 풀려났다. 그때가 33세였다. 그때 자유의 중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돈키호테의 주제 중 하나가 자유다.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구속할 수 있나 묻는다. 집에 돌아왔지만 가세는 더 기울어 있었다. 1569년 첫 번째 소설 ‘라 갈라테아’를 출간했지만, 생계를 위해 포르투갈로 가서 왕실 업무를 봤다. 당시 꿈의 대륙인 중남미 파견을 청원했지만 불발에 그쳤다. 아마 집안이 개종 유대인이라서 그랬을 걸로 추측한다.
그 후 황제가 써준 표창장을 받고 제대하면서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오던 길에 악명 높은 알제 해적들에게 형 로드리고와 함께 포로로 잡히고 그 후 5년 동안 알제리에서 갇혀 지내게 되었다. 이 때 마드리드에 있는 트리니타리아스 수녀원에서 그를 위해 해적들에게 몸값을 지불해줬고[6] 세르반테스는 풀려난 뒤 군사식량을 납입하는 식량조달원으로 안달루시아 지방을 떠돌아다니는 직책을 맡았으나, 그런 중에도 교회 소유 밀을 징발했다고 파문당하고, 당국 허락 없이 밀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풀려난 뒤로 그라나다에서 세금 징수원을 했는데, 책임자의 먹튀와 기타 억울한 과정으로 인해 다시 세비야 감옥에 7개월 동안 갇힌다.[7]
갇혀있던 동안에 그는 돈키호테를 구상했다. 그리고 풀려난 뒤 바야돌리드에 가정을 꾸렸고 거기에서 돈키호테 1권을 탈고하며 1605년 돈키호테 1권이 출판된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될지 몰랐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이 되었고 문학사를 대표하는 걸작에 반열에 오른다.''' 이 때의 나이가 58세. 라 갈라테아 이후 무려 20년만에 내놓은 소설이다. 돈키호테는 당대 유럽 최고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 어마어마한 인기로 끌었고 1614년에 다른 작가가 무단으로 돈키호테 속편을 출간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런 광경을 본 세르반테스는 1615년 정식 돈키호테 속편을 낸다. 그 뒤 마드리드로 거주지를 옮기고 1616년 4월 22일 당뇨병과 간경변으로 한편의 영화같은 생을 마감한다. 향년 68세. 숨질 때까지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의 일을 도왔다고 한다. 결국 사후에 그 수녀원에 묻혔다.
이때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에 묻혔으나, 수녀들 및 수녀원 관계자들만이 참석한 채 장례미사가 치러졌고, 그후 4세기가 지나 누구도 그가 묻힌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게 되었다. 약 400년 만인 2014년, 스페인 정부에서 10만 유로(약 1억 4천만원)가까이를 들여 트리니티 탁발 수녀원 내의 세르반테스의 유해를 찾았다. 이 수녀원 지하에는 세르반테스와 그의 부인 등이 묻혀 있었다. 세르반테스는 생전에 이 수녀원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발굴팀은 유골의 손상이 심해 세르반테스의 유골을 다른 것과 분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세르반테스의 묘지는 그의 사망 이후 수녀원이 확장되고 여러 차례 재건축되면서 400년 동안 잊혔다. 발굴팀은 작가 사망 기록에 따라 2014년 4월부터 이 수녀원에서 세르반테스의 유골을 찾아왔다. 발굴팀은 앞서 2014년 1월에는 수녀원 지하에서 'MC'라고 적힌 나무 관 일부를 발견했다. 'MC'는 미겔 데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의 첫 글자들이다. 이후 수녀원 지하에서 일그러진 왼팔 뼈과 총알에 손상된 가슴뼈, 치아 등을 수습했다. 위에 서술한 대로 군인으로도 활동한 세르반테스는 1571년 스페인이 이끄는 연합함대와 오스만 제국 함대가 맞붙은 레판토 해전에서 3발의 총탄을 맞아 왼팔을 못 쓰게 되었기에 정확히 그라는 증거가 된 셈. 하지만 DNA 검사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세르반테스의 유해라고 확신하느냐는 반론이 있어서 새 무덤을 만드는 것은 흐지부지 된 듯 하다.
20세기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문학 평론가 해럴드 블룸은 "단테 이후 서양의 중심 작가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였으며 그 이후에 나온 톨스토이나 괴테, 디킨스, 프루스트, 조이스도 그에 못미친다"고 평했다.# 현대 스페인에선 당연히 자국을 대표하는 대문호로 추앙하고 있다. 마드리드의 중심부인 에스파냐 광장에는 그와 돈키호테, 산초의 동상이 있으며 스페인 심장부에 동상이 있다는 의미로 국가의 아이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3. 문학적 특징
세르반테스는 당대 거의 모든 문학 장르를 섭렵했다. 소네트가 발달한 르네상스 시대의 탁월한 시인이기도 했으며, 연극의 시대를 비판적으로 극복한 극작가이기도 했다. 또 산문가로 목가소설, 기사소설, 비잔틴소설 등 로망스 장르를 다양하게 편력했다.
하지만 단연 돋보인 것은 소설가 세르반테스였다. 운문 연극 시대에 극작가로 출세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그만큼 타고난 불세출의 산문가요 소설가였음을 증명한다. 단 한 편도 무대에 올리지 못하고 책으로 묶어내는 데 만족해야 했던 『여덟 편의 코메디아와 여덟 편의 막간극』 서문에서도 연극을 볼 관객이 아니라 읽어서 감상할 독자를 향해 작품의 이해를 구하고 있었다. 관객에게 공연으로 호소하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산문적이었다. 자신이 스페인어 최초의 소설가라고 자부하게 만들었던 12편의 모범소설집은 이탈리아 노벨레 형식을 받아들여 한층 도덕적이면서 사실적으로 발전시킨 소설 실험이었다. 마침내 과거와 당대의 다양한 스토리텔링 양식을 실험하고 융합해 시대 변화를 통찰한 창의적 문학 지평을 열었다. 독창적으로 창조한 주인공 돈키호테의 방랑과 대화에 민담, 고전 우화와 노벨레 등 모든 형식의 이야기들을 망라해 녹여낸 서양 최초의 근대 소설 『돈키호테』를 탄생시킨 것이다. 그전의 기사 소설은 전지전능한 3인칭 시점에서 이야기를 묘사해 나갔다. 반면 돈키호테에서는 등장인물이 대화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그전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정해져 있었다. 그 사람의 운명이 알려져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돈키호테는 작중 주인공이면서 자신을 창조해 나가며 자신이 신의 입장이 된다. 작품 도입부에 라만차 마을에 이달고가 살고 있었다고 소개하고는, 그의 이름이 불분명해 ‘키하다’ ‘케사다’ ‘케하나’ 여러가지로 불렸다고 나온다. 주인공이 기사로 나서기로 결심하면서 열흘 간 고민 끝에 스스로 지어준 이름이 돈키호테다. ‘돈’은 경칭이고, ‘키호테’는 갑옷의 허벅지 보호 장비 이름이다. 자기가 말 이름도 정한다. 로시난테다. ‘그 전에는 비쩍 말랐지만 지금은 어느 말보다 뛰어난’ 말이이라는 뜻이다. 기사에게 필요한 귀부인도 이웃집 여인 알돈사를 상상의 여인 ‘둘시네아’로 부른다. 자기가 자기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해 이름을 부여한다. 유대인 스콜라 철학에 보면 호칭이 정체성을 바꾼다고 나온다. 이름이 불명이던 사람이 자기 삶을 살기 위해 자기 이름을 정한다. 그리고 행동한다. 인간은 가문이나 혈통의 자식이 아니라, 자기 행위의 자식이라고 선언한다. 실존이 기능을 결정짓는 게 아니라 기능이 실존을 결정한다는 거다.
책을 읽다 미치는 주인공도 문자 그대로 열린 근대 사회를 그럴 듯하게 웅변한다. 책에 박식한 돈키호테와 구전 속담에 능통한 산초가 맞서 펼치는 풍부한 유머와 넘치는 재담, 그리고 수많은 일화들은 후대 문학과 예술에 무한한 사색과 영감의 원천이 됐다. 도스토옙스키는 세상에 『돈키호테』만큼 심오하고 강렬한 것은 없으며 인간 사유의 궁극적이고도 가장 위대한 표현이라고 예찬했다.『돈키호테』는 중세 기사 로망스를 패러디해 현실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리얼리즘 소설의 효시로 꼽혀왔고, 오늘날 소설 이론 일반의 시금석이 됐다.『돈키호테』에서 가장 많이 쓰인 단어가 ‘진리/진실’이었음은 의미심장하다. 인쇄술 발명으로 도래한 활자 문명 시대에 언어에 갇힌 이성중심주의의 본질과 한계를 되새기게 한다는 점에서 세르반테스는 책은 인문주의로 빛난다.
4. 대표작
그가 쓴 희곡은 약 30여 개에 이르지만 가난 속에 헐값에 판권을 팔고[8]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은 <돈키호테>와 <알제리에서 삶>, <누만시아>, <라 갈라테아>이다. 참고로 기사도 문학을 싫어했다고 단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 세르반테스야말로 진정 기사도 문학 덕후라는 의혹이 있다.[9]
또 다른 대표작으로 <모범 소설집>이라는 단편집도 있다. 수작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으니, 읽어보기 바란다. 한국어로 번역도 되어 있다.[10] 1613년에 출간된 모범소설집은 크게 귀족을 주인공으로 이상주의적 교훈을 담은 소설과 도시 서민과 날품팔이, 떠돌이 악사, 건달, 도둑 같은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로 나뉜다. 두 부류의 문체와 소설의 짜임새 및 완성도에서 보이는 차이는 이들이 긴 시간에 걸쳐 쓰인 작품들임을 알려준다. 여러 우여곡절이 얽혀 전개되며 르네상스적 사랑을 주제로 하는 전자에 비해 리얼리즘적 시각에서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펼쳐지는 후자가 더 나중에 쓰인 작품들이다. 이는 세르반테스가 작가로서 보이는 발전 양상일 뿐 아니라 소설이라는 장르의 발전상을 드러내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5. 세르반테스에 대한 평가
'''모든 소설가는 어떤 형식으로든 모두 다 세르반테스의 자손들이다.'''
'''최초의 근대 소설인 돈키호테는 여전히 가장 훌륭한 소설로 남아 있습니다. 셰익스피어만이 세르반테스의 천재성에 근접합니다. '''
'''거의 동시에 죽은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적어도 단테 이후 서양의 중심 작가이며, 그 이후로는 톨스토이나 괴테, 디킨스, 프루스트, 조이스도 그들에 근접하지 못했습니다. 세르반테스와 셰익스피어는 문맥에 속할 수 없습니다: 스페인의 황금 시대와 엘리자벳-자코베안 시대는 우리가 주어진 것을 충분히 이해하려고 시도할 때 부차적인 것입니다.'''
'''돈키호테의 미학적 진리는 다시 단테나 셰익스피어처럼 우리가 위대함과 직접 대면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돈키호테의 탐구와 그것의 동기, 그리고 원하는 목적을 완전히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쁨에 굴복하는 동안에도 우리를 놀라게 하는 반사 거울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세르반테스는 항상 우리 앞에 있고, 우리는 결코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헨리 필딩, 로렌스 스턴, 괴테와 토마스 만, 플로베르와 스탕달, 허먼 멜빌과 마크 트웨인, 도스토옙스키, 이 작가들은 세르반테스의 숭배자이자 제자들 중 하나입니다.'''
'''세르반테스의 삶은 온갖 사건과 불행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에, 마치 에스파냐어권의 뛰어난 작가가 쓴 소설처럼 드라마틱하다. 그의 명성은 서양 언어권에서 단테, 셰익스피어, 몽테뉴, 괴테와 톨스토이가 보여주었던 탁월함처럼 영원한 것이다. (중략) 세르반테스는 글 쓰는 방법을 알았고, 돈키호테는 행동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오로지 서로를 위해 태어난 하나다.'''
'''아! 세르반테스의 문체가 어떤 것이며, 사물에 접하는 그의 방식이 어떠한 것이지 분명히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얻을 텐데. 언제가 될 것인지는 몰라도 만일 누군가 와서 세르반테스가 지니고 있는 문체의 신비로움을 폭로해 낸다면, 그래서 그 사실이 다른 여러 문제들로 연계되어 간다면, 단지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새로운 삶으로 깨어날 수 있을 텐데!'''
―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스페인 철학자)#
'''가장 위대한 천재적인 창작은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홀로 만들어낸 것이다.'''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와 산초라 불리는 밭에 사상의 씨앗을 뿌렸을 뿐인데, 그 땅과 씨앗이 워낙 풍요한 것이라서 대대손손 열매를 맺어 가고 있다.'''
― 살바도르 데 마다리아가 (스페인 작가, 외교관)#
아, 그 세르반테스라는 친구는 오래전부터 나와 아주 절친한 사이지. 내가 알기로는 그 사람은 '''시 쓰는 일보다는 불행에 더 이력이 난 것 같아.''' 그 친구 책은 무언가 독창성이 보이긴 해. 하지만 시작만 해놓고 무엇 하나 끝내놓은 게 있어야지.
6. 창작물에서
- 대항해시대 5에서는 에스파냐에서 성실한 징수관이었지만 공금을 맡긴 은행이 도산하고 야반도주하면서 돈이 전부 사라지자 공금횡령죄로 체포되었으며, 세르반테스의 친구가 그를 석방하기 위해 주인공 일행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세르반테스의 친구는 석방하기 위해 20만 정도의 보석금이 더 필요하지만 친척, 지인에게 돈을 얻지 못해 후원자를 찾은 것이라고 한다. 주인공 일행이 보석금을 내서 풀려나자 감사하다고 하면서 나폴리에 간다고 하며, 에스파냐 해군에 입대해 오스만의 군사와 싸울 것이라고 한다. 주인공 일행의 도움으로 나폴리까지 가며, 포르투갈 왕궁에서 주인공 일행을 찾고 있다는 정보를 주고 해군에 입대하러 떠난다. 해군에 입대해 아프리카 방면으로 출장갔다가 총탄이 박힌 고대인의 유골을 발견했으며, 이 유골을 발견한 일은 잉글랜드 왕궁에서 화제가 되었다. 주인공 일행이 이 유골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아프리카 남단의 아프리카 대폭포 거점을 조사했는데, 총알이 박힌 유골이 아닌 땅속의 유골을 발견하자 세르반테스에게 그 유골에 대해 듣기 위해 다시 런던으로 돌아갔는데, 집무관이 세르반테스는 에스파냐 선박으로 지중해를 항해하다가 오스만 함대에게 공격받아 실종된 사실을 전하면서 세르반테스를 찾아낼 것을 부탁하고 나폴리에 있는 에스파냐 주둔 함대의 사령관인 페르난도 로아이사를 찾아가라고 한다. 오스만 함대의 공격으로 나포되어 포로가 되었는데, 런던에서의 명성, 사관 추천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인해 엄청난 거물로 오해받아 알제에서 포로로 지내게 되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에서 세르반테스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100만을 요구했지만 에스파냐에서는 세르반테스는 그런 막대한 금액을 지불할 수 없었기에 니나가 나서서 보석금을 내서 석방된다. 석방되자 주인공 일행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답례로 소설의 등장인물로 출연시켜 주겠다"는 말을 하지만 니나가 사양하는데, "이스탄불에서 어떤 왕족의 공주가 모험담을 듣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는 어떠냐"고 하자 니나는 세르반테스가 말한 사람이 에미나 압둘라인 것을 깨닫고 정보에 대해 감사하다면서 이스탄불에 가기로 한다. 세르반테스는 자신은 걱정하지 말라면서 여기 있는 사람이 배웅해준다며 마음대로 배에 타고 오스만 병사가 자신의 분위기에 말려들게 한다. 주인공 일행이 이스탄불에 가서 에미나 압둘라로부터 그 유골에 박힌 총 자국이 처음부터 있었는지 만들려고 한 것인지에 대해 지적하고 총은 지금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총흔도 만들 수 있다고 지적당하자 런던으로 왔는데, 주인공 일행은 세르반테스가 앨런 블랙에게 금화 50만으로 가짜 유골을 받아 세르반테스가 사기당한 것을 알게 된다. 주인공 일행이 진상을 확인하고 런던에 이를 보고하자 선의의 실수이지만 위작을 왕실에 반입해 그 신뢰를 훼손한 죄를 갚아야 한다면서 잉글랜드 왕실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다.
7. 기타
- 세르반테스의 이름을 딴 '미겔 데 세르반테스상'은 스페인어 작가에게 수여되는 문학상으로 스페인어권의 '노벨문학상'이라고 불리는 최고 권위의 상이다.
- 현재 그의 집과 출생지는 1965년, 스페인 정부에서 사들여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고, 매년 10월 9일이면 그의 고향 알칼라 데 에나레스는 세르반테스의 탄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세르반테스 축제를 연다.
- 멕시코에도 그의 이름을 딴 축제 ‘세르반티노 국제 페스티벌(Festiva Internacional Cervantino)’이 있다.해마다 10월 멕시코 과나후아토(Guanajuato)에서 열리는 중남미 최대의 문화 예술 행사다. 인구 10만여 명이 살고 있는 소도시에 축제 기간 동안 전 세계 예술가 3000명이 찾아와 연극·음악·춤 등 다채로운 공연을 펼친다. 도심 곳곳의 역사 유적이 축제 무대로 활용된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던 덕분에 과나후아토 시민은 문화적인 관심과 욕구가 높았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다양한 문화 예술 공연이 열렸는데, 1952년 과나후아토 대학생이 대학교 광장에서 개최한 연극 무대도 그중 하나였다. 대학생은 근대소설의 시초라 평가받는 『돈키호테』의 저자 ‘미구엘 드세르반테스’ 희곡을 바탕으로 연극 무대를 올렸고, 바로 이 행사가 과나후아토 예술 축제 ‘세르반티노 국제 페스티벌’의 효시가 됐다. 연극 축제가 춤 공연, 클래식 공연, 영화제 등 다양한 문화 행사를 포괄하면서 1972년부터는 아예 멕시코 정부가 나서 행사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세계 각국 3000여 명의 예술가가 댄스·연극·콘서트·전시회 등 다채로운 이벤트를 통해 세르반테스의 삶과 작품을 공연한다. 세르반테스의 대표작 『돈키호테』는 오페라 · 뮤지컬 · 영화 · 퍼포먼스 등으로 재해석된다.
- 동시대의 활동한 작가로 또 다른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있다. 또 동시대 인물인 두 사람이 같은 날(1616년 4월 23일)에 죽은 걸로 알려져 있다.[12] 현재 학계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었는지를 놓고 아직도 치열한 논쟁을 벌이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정설은 셰익스피어가 생전에 마드리드 근처를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하는 얘기다. 셰익스피어가 영국 사절단의 일원으로 스페인을 방문했다는 거다. 당대에 이미 명성을 얻은 두 문호가 한 번쯤은 조우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있다. 2014년 말 런던에서는 셰익스피어 작품이 하나 발견됐는데, 돈키호테의 내러티브를 각색한 극작품이었다. 제목이 '거만한, 지나친 호기심을 갖고 있는 신부들'이란 뜻인데, 세르반테스의 서사 작품을 드라마로 옮긴 것이다. 이것은 셰익스피어가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읽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 두 작가가 개인적으로 서로 알았든 몰랐든 더 중요한 사실은 동시대의 두 사람이 서양 문화사의 근대를 열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 모두 작품 속에서 근대적 인물상을 그려냈다. 세르반테스는 근대 소설의 신기원을 열었고, 셰익스피어는 희곡과 연극의 근대성을 확보했다.
- 지금도 스페인에서는 책의 날인 4월 23일이면 돈키호테 읽기 대회가 열린다. 마을마다 릴레이로 독회를 한다. 스페인 대도시나 시골 구석구석 마을에도 타일(아랍에서 전수받은 전통 문화)에 돈키호테의 명문구가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다.
- 당대에 그려진 세르반테스의 공식적인 초상화는 없다. 모든 세르반테스의 초상화는 어디까지나 상상도다.
- 머리카락은 금발이었다.
- 베이징대학의 교내 공원에 세르반테스의 전신 동상이 놓여있다. 1986년에 마드리드와 베이징이 자매 도시 결연을 맺을 때 마드리드 시에서 보내준 것. 2.35m로 앞으로 한 걸음 내딛는 자세를 하고 있어 제법 역동적이다. #
- 세르반테스의 이름을 딴 '세르반테스 문화원'은 스페인어의 홍보와 교육, 그리고 스페인·라틴아메리카의 문화보급을 위해 1991년 스페인 정부가 세운 공공기관이다.[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