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후삼국시대

 




'''신라
新羅
'''
[image]
▲ 후삼국시대의 지도. 청록색이 신라이다.
'''900년[1] ~ 서기 936년 1월 8일[음력] (36년)'''
'''시대 구분'''
사로국
삼국시대
신라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신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진한'''
'''고려'''
'''위치'''
한반도 동남부 및 부속도서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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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년 견훤 칭왕
900년 견훤 후백제 건국
901년 궁예 고려 건국, 대야성 전투[8]
899년 원종·애노의 난, 대야성 전투
916년 대야성 전투
920년 대야성 함락
927년 후백제 서라벌 점령
936년 신라 경순왕, 고려에 투항. '''신라 멸망'''

'''수도'''
서라벌
'''종족'''
신라인
'''언어'''
신라어 (고대 한국어)
'''문자'''
한자(이두, 향찰, 구결)
'''종교'''
불교[2]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왕)[3]
'''주요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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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대 효공왕,(897~912),
53대 신덕왕,(912~917),
54대 경명왕,(917~924),
55대 경애왕,(924~927),
56대 경순왕,(927~936),

'''국성'''
(金) · (朴)[4]
'''현재 국가'''
대한민국, 북한
1. 개요
2. 역사
3. 영토
4. 정치
5. 외교
6. 역대 군주
7. 대중매체
8. 관련 문서
9. 비슷한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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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삼국시대의 주역을 대부분 궁예의 태봉과 쿠데타로 나라를 세운 왕건고려견훤후백제에 관심이 주로 많고, 이 시기의 신라에 대해서는 대중과 매체의 관심이 적고, 주로 후백제와 고려의 쟁패를 주로 다룬다. 그러나 신라가 마냥 아무것도 안하고 계속 축소된 것만은 아니었다. 920년까진 대야성에서 후백제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방어했고, 신라에게 우호적인 세력들도 상당히 있었다. 후삼국시대에는 신라뿐만 아니라 후삼국 모두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점차 국가로 성장해 나갔기 때문에 태봉국이 망하고도 친태봉세력이 고려에 대항한 기록도 있다. 이를 보면 후삼국 삼국간 싸움이 아니라 후삼국 삼국에 속한 호족세력들 사이의 이합집산으로도 볼 수 있다.

2. 역사



남북국시대 통일신라나당전쟁 이후 200년 이상 한반도를 지배했으나 8세기 후반에 들어서 국가 내에서 왕위를 놓고 권력 투쟁이 심해지고 지역 민심을 돌보지 않으면서 점차 지방의 통제력이 약해져 신라의 지배력은 나날이 쇠퇴하고 있었다. 그런 차에 결정적으로 원종·애노의 난을 계기로 신라 중앙군이 약한 모습을 보이자, 해볼 만한 싸움임을 직감한 지방세력들은 동시다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 도적이나 군벌에 불과하던 반란 세력들은 비뇌성 전투 등 크고 작은 전투를 거쳐 크게 궁예견훤이 부상하게 되며 이들은 옛 삼국을 부흥시키겠다는 명분으로 왕에 오르고 나라를 세우게 된다. 옛 통일신라의 북쪽은 궁예태봉을 세웠고, 남서쪽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워 신라는 진흥왕 이전처럼 다시 경상도 일부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국가로 전락했다.

3. 영토


후삼국시대 지도에서는 보통 신라가 통일 이전 영토 정도를 갖고 있는 걸로 그려지지만 그건 후고구려와 후백제가 막 생겼을 때다. 후삼국시대 시기별로도 꽤 차이가 나는데, 우선 경상도를 다 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어서 대강 지금의 경상남도 대부분 지역과 경상북도 서쪽 절반은 후삼국시대 초기부터 신라 조정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울산 지역에는 호족 박윤웅이 반독립상태였고 김해의 김인광은 가야의 부활을 기도했으며 진주왕봉규는 아예 중국에 독자적으로 조공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적고적의 거점도 있었으니 경남 지역은 전부 사실상 독립국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5]
다만 옛 가야 영역인 경남은 그렇다 쳐도, 경북 서북부가 고려에게, 경북 서남부는 후백제에게 꽤 일찍부터 이탈하고만 건 상당한 치명타였다. 경북 서북부는 그나마 광개토대왕-장수왕 시기의 '고려'가 50년 동안 실효지배했던 과거가 있고 이후에도 한동안은 신라 왕실로부터 의심 어린 눈초리를 받은 바 있으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신라 융성기의 기틀을 다진 자비 마립간-소지 마립간-지증왕이 역시 50년 동안의 적지 않은 세월, 인력, 물자를 기울여서 거의 왕실 직할령 수준으로 키워놓았던 경북 서남부가 후백제에게 넘어간 건 매우 의아한 결과. 경북 서남부 같은 경우 고구려는 물론이고 백제도 거의 넘볼 엄두를 내지 못했던데다, 나당 전쟁 시절에도 뚫린 적이 없었다. 견훤이 아무리 명장이었어도 신생국 후백제가 군사력만으로 그걸 얻어냈다곤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6]
후백제의 공격을 막을 요충지 대야성과 동해로 통하는 경북 지역은 그나마 신라의 충신들이 남아있어 후백제의 공격을 수 차례나 자력으로 막아내고 왕건에게 원군을 보내기도 할 정도로 아직 완전히 영향력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러나 후백제에게 920년 대야성이, 927년에 서라벌이 함락당하고 경애왕이 살해당하는 과정을 거쳐, 우호적인 세력들도 궤멸당하거나 고려와 후백제에 줄지어 항복한다. 이후로는 후백제고려신라를 어느 정도 대우하며 10여년 정도 그래로 두었다가 고려의 압박으로 고려에 투항해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사실 경애왕 시절에도 지금의 영천인 고울부가 고려에 귀순을 청할 정도로 엉망이긴 했고, 경순왕 때는 그나마 명목상 받던 상전 대우도 완전히 사라져 귀부 이전에도 고려대왕 왕건을 모시는 신하로 사실상 격하되고 만다.
견훤에게 경남 합천의 대야성을 잃고, 고창 전투(930) 이후 안동 주변부까지 고려 땅이 된 이후엔 멸망까지 약 5~8년 정동의 기간 동안에는 신라의 영토가 신라 건국 초기 수준으로 축소되었다. 마지막에 수도 주변 직할영토만 남은 주나라동로마 제국, 무굴 제국의 말기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삼국사기만 봐도 왕건이 직접 일어진으로 행차해 성을 쌓고, 경순왕은 경주와 그 주변만 겨우 다스린다고 할 정도였다. 일어진은 지금의 포항으로, 경주시에서 차로 30분이면 간다. 고려군이 맘만 먹는다면 대군을 이끌고 바로 오늘이라도 내 눈 앞에 나타날 수 있는, 말 그대로 내 앞마당까지 남의 땅이 된 것.

4. 정치


여느 나라들의 말기가 그렇듯 상당히 혼란했다. 나라가 무너지는 시기에 진성여왕효공왕은 기록상 사치향락을 계속했으며, 이후 박경휘가 신덕왕으로 즉위하면서 이후 8대 아달라 이사금 이후 728년만에 박씨 왕조가 부활했다. 다만 단순히 박 VS 김으로만 보는 건 단견이다. 경명왕은 헌강왕의 사위로서 즉위한 것이지 수백 년전 죽은 아달라 이사금의 원손으로서 즉위한 건 아니었으며, 신라는 사위에게도 왕위 계승권이 분명히 있었다. 918년에는 김씨의 복위를 주장하는 김현승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모든 김씨가 김현승의 의견에 일치단결했다면 경명왕이든 경애왕이든 왕위 유지는 불가능했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으니, 어느 정도 정치적 식견과 능력이 있음을 입증한 경명왕과 경애왕의 존재를 당시의 신라 왕실이 승인하고 국론을 모은 것이다. 특히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 경애왕포석정의 삽질로 암군으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정황상 균형외교를 하면서 나름대로 망해가는 국운을 살려보려고 애썼던 왕으로 재평가받는 편이다. 경애왕 문서 참조. 태조 왕건 등 창작물에서는 견훤서라벌 기습공격도 김씨 일부 간신들이 왕위를 되찾기 위해 박씨 왕을 해치워달라고 사주해서 일어난 일이라는 식으로 연출하기도 했다.

5. 외교



태봉와의 관계는 궁예태봉국이 시종일관 신라를 '''멸도'''라고 부르고, '''신라에서 귀순해오는 자들은 모두 죽였다고''' 할 정도로 상당히 적대적으로 대해왔던 만큼 교류는 사실상 없었다.
태봉을 쿠데타로 무너트리고 즉위한 왕건고려는 비교적 신라를 떠받들어주고 시종일관 존중하며 우호적으로 대한 편이었다. 다만 신라가 여력을 완전히 잃고 서라벌로 축소된 시기에 가서는 대등한 위치, 혹은 관계가 역전되어 버린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후백제와의 관계는 견훤후백제도 내내 신라를 공격했던 것이나 경애왕을 잔혹하게 처단한 사례 때문에 극단적인 반신라파로 여기기 쉽지만, 의외로 신라의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것은 아니어서, 삼국사기의 견훤전에 실려 있는 견훤과 왕건이 서로간에 주고받은 국서의 내용에서 간접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견훤왕건은 '존왕의 의(義)', '왕실을 높인다'는 식으로 신라 왕실을 형식적이나마 주군과 같은 위치에 놓고 있다. 칭왕하고도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신라도 대왕, 제(帝) 같은 형태로 표현되는 부분적인 외왕내제적인 면모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애왕 처단 후 그것이 신라 멸망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김씨 왕 경순왕을 다시 세운 것도 견훤의 목적이 무조건적인 반신라정책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과는 당나라 멸망 이후 5대10국과도 관계를 유지했는데 후삼국시대 말기 영토들을 다 고려에게 빼앗기고 서라벌만 지배하는 소국으로 전락해 점점 약화되어가고 있는 과정 속에서도 후당 등 중국의 5대10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해보려고 했다. 다만, 후당은 신라를 망국으로 인식하고 책봉사를 보내지 않았고 오히려 신라가 아닌 고려를 한반도의 진정한 국가로 인식했다. 공교롭게도 후당 역시 후삼국시대가 끝이 나는 같은 시기에 멸망하고 말았다.

6. 역대 군주





7. 대중매체



8. 관련 문서



9. 비슷한 사례


중국 삼국시대후한 정부에 빗대지만 이는 완전히 틀린 생각이다. 그러기엔 차이가 너무나도 크다. 후한 정부는 꼭두각시인 기간이 대부분이었지만 신라 정부는 경순왕이 왕건에게 귀부를 청하는 순간까지 그 기능을 정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적떼나 후백제의 침공으로부터 방어전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경애왕처럼 독자생존을 위한 외교노선을 견지하기도 했고, 서라벌 함락 이후에도 왕이 교체되었다 뿐이지 서라벌 자체에 대한 행정, 군사, 외교력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 신라는 국력이 심각하게 약해지면 약해졌지 후한의 헌제 때처럼 아예 황제의 직할령이 소멸하고 권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사는 꼭두각시 역할은 하지 않았다. 고려왕건 역시 경순왕을 강압이 아니라 회유로 일관했으며 결국 귀순 선택도 신라 조정이 내부의 찬반회의 끝에 스스로 하게 됐다. 다만 실질로 보면 후한 정부보다 훨씬 사정이 나았다 해도, 국가간 순위나 국위적인 면에선 보면 오히려 정반대. 후한은 실질은 허수아비라고 해도, 선양을 통해 완전 소멸하기 전까지는 어쨌든 조위의 상국이었고 조위는 선양 이전엔 후한이란 나라 내부에 있는 후한 승상의 봉국이었지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외교를 주고받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 같은 경우는 신라와 대등하게 외교 사절을 주고 받은 별도의 국가였고, 왕건의 천사옥대 강탈 사건을 전후로 해선 나중엔 아예 고려대왕이 신라왕의 상전으로 상하 관계가 완전히 역전되고 만다. 이런 점에서 보면 후한말보다는 춘추전국시대 주나라의 상황이 훨씬 더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며 통일신라의 시대가 끝난 해.[음력] 을미년 (서기 935년) 12월 12일. 신라의 멸망연도를 일반적으로 935년이라고 하지만, 고려사에 의하면 사실 왕건이 공식적으로 신라 합병을 결정하고 경순왕과 신라 왕족이 이웃나라의 손님 신분에서 고려의 신하로 편입된 날은 음력 935년 12월 12일, 양력으로 환산하면 936년 1월 8일이다. 즉 신라가 공식적으로 멸망한 날은 따지자면 양력으로는 936년이다. 그러나 실제 항복과 경순왕의 개성 입조는 935년 11월에 이뤄졌고 이게 936년 1월까지 미뤄진 건 경순왕이 귀순을 요청하고 왕건이 거절하기를 반복하는, 보여주기식 선양쇼를 한 달 동안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935년에 사실상 멸망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2] 그 외 도교, 샤머니즘 등. 비록 불교 이외의 다른 신앙을 탄압하지는 않았지만 국교는 불교였다. 애초에 불교 문화재의 양과 질을 비교하면 어떤 시대도, 심지어 현대까지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3] '황왕' 이라는 군주 칭호는 사서에는 안 나오고 오직 신라의 금석문에서만 나온다. 황제와 왕의 복합어로 외왕내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영어로 직역하면 'emperor-king'.[4] 통일신라기에는 경주 김씨의 독점 세습이 고착화되었지만 신라가 후삼국으로 다시 쪼개진 뒤 박씨가 다시 왕에 오르기도 했는데 신덕왕, 경명왕, 경애왕이 그들이다. 경애왕(박위응)이 후백제 견훤에 의해 죽고 56대 경순왕(김부)이 왕이 되면서 국성이 되었다[5] 다만 김인광 세력은 지나치게 독립노선을 걷다가 소충자 소율희 형제에게 밀려났고, 소씨 형제는 신라 조정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남쪽은 다시 신라 세력권에 들었다.[6] 사실 김헌창 때도 해당 지역은 생각보다 쉽게 중앙으로부터 이반했던 만큼, 견훤도 비슷한 수법을 썼을 거라고 짐작은 되지만 명확한 근거는 없다.[7] 후삼국의 시작은 효공왕대 시작되었다. 후백제는 900년, 태봉은 90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