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언위

 


'''나말여초의 지식인
최언위
'''
'''시호'''
'''문영공(文英公)'''
'''향직 품계'''
'''정광(政匡)'''[1]
'''본관'''
경주 최씨(慶州 崔氏)
'''이름'''
신지(愼之) → 언위(彦撝)
'''아들'''
최광윤, 최광원, 최행귀, 최행종
'''출생'''
868년 신라국(新羅國) 금성(金城)
'''사망'''
944년 고려국(高麗國) 개경(開京) 개주(開州)
1. 개요
2. 상세
3. 기타
3.1. '대고려왕답견훤서'의 저자?
4. 가족 관계
5. 매체


1. 개요


후삼국시대의 인물. 신라고려의 문인 겸 관료. 통일신라 말기 최치원, 최승우와 더불어 신라삼최로 불렸다.

2. 상세


6두품 최치원의 11살 어린 사촌동생으로 경주 최씨 가문 출신이다. 886년 18살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895년 중국 당나라에서 빈공과에 응시해 급제했는데 신라와 발해의 은근한 경쟁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당나라 빈공과 수석은 신라 출신 학생들이 거의 싹쓸이를 하는 수준이었는데 1번은 발해 출신 오소도(烏炤度)가 신라 학생 이동(李同)보다 높은 등수를 받아 신라를 이겼다.[2] 이후 오소도의 아들 오광찬(烏光贊)도 당나라 빈공과에 응시했는데 최언위가 오광찬보다 등수가 높았다. 마침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던 오소도는 오광찬의 등수를 최언위보다 높여줄 것을 당나라에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짓밟혔던 신라 학생들의 자존심을 최언위가 살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909년 귀국하여 효공왕에게 집사성시랑(執事省侍郞)[3] - 서서원학사(瑞書院學士)[4] 직위들을 받아 역임한다. 최언위는 일찍이 벼슬을 버린 사촌형 최치원과 달리 오랫동안 벼슬을 지냈는데 특히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의 아들과 최언위의 딸이 혼인을 맺어 사돈 관계였을 정도로 크게 출세했다.
918년 태봉의 시중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다. 최언위는 경주 최씨 가문을 이끌고 왕건에게 항복했는데 왕건은 최언위를 크게 우대해 태자사부(太子師傅)[5] 벼슬을 제수했다.[6]
성품이 온후하고 신라 삼최로 일컬어질만큼 문장이 뛰어나 따르는 사람이 많았으며 당시 고려의 많은 호족 가문들이 최언위를 존경했다고 한다. 궁원(宮院)의 액호[7]를 모두 썼으며 높은 직위로 승진했다.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를 썼는데 당시 관작은 대상(大相) - 검교상서좌복야(檢校尙書左僕射)[8] 겸(兼) 어사대부(御史大夫)[9] - 상주국(上柱國)[10] -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11]였다.
이후 944년 천수를 다하고 죽을 때까지 관직에 있었으며 관직이 평장사(平章事)[12]에 이르렀다. 최언위의 최종 관작은 대상(大相)[13] - 원봉대학사(元鳳大學士)[14] - 한림원령(翰林院令)[15] - 평장사(平章事)[16]였다.
사후 혜종에게서 정광(政[17]匡) 향직 품계와 시호 문영(文英)을 추증받았다.

3. 기타



3.1. '대고려왕답견훤서'의 저자?


견훤과 왕건이 주고받았다는 국서는 '대견훤기고려왕서(代甄萱寄高麗王書, 견훤을 대신하여 고려왕에게 보내는 글)' 및 '대고려왕답견훤서(代高麗王答甄萱書, 고려왕을 대신하여 견훤에게 답하는 글)'로 알려진다.
간략한 고대사 기록에서 본 문장은 상대적으로 아주 자세히 사료에 전해지는데, 그만큼 두 글이 명문임을 반증한다.[18]
다만 삼국사기와 고려사에는 상세한 내용과는 달리 필자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고, 그나마 동문선 제57권에서는 대견훤기고려왕서의 필자를 최승우라 명시한 반면, 대고려왕답견훤서의 필자는 '''무명씨'''로 소개하고 있으니 최언위 집필설은 불명확한 실정이다.

4. 가족 관계


  • 아들
    • 최광윤(崔光胤): 후진(後晉)으로 유학을 가다가 거란에 붙잡혔는데, 그 재주가 뛰어나 오히려 거란에서 관직을 주어 등용하였다고 한다. 후일 거란의 고려 침공을 예측하여 본국에 서신을 보냈는데, 이는 정종의 광군 설치에 일조하였다.
    • 최행귀(崔行歸): 오월(吳越)에서 유학하여 벼슬을 지냈다. 고려로 귀국해 관직을 제수했지만 광종의 대호족 숙청에 휘말려 죽었다.
    • 최광원(崔光遠)
    • 최행종(崔行宗)
  • 손자
    • 최항(崔沆): 8대 현종의 배향공신. 최광원의 아들이다.

5. 매체


대중적으로 유명한 최치원, 최승우와는 달리 인지도가 낮다. 오히려 최언위를 대신해 최응 혹은 최지몽을 신라 삼최로 착각하는 경우도 많은데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최승우, 최응, 최지몽이 비중있는 역할로 나왔고 최언위는 신라 삼최로 이름만 간간이 언급되기만 해서 그런 듯하다. 태조 왕건 16화 17분 30초 무렵에는 '이 작품에서 최언위는 나중에 등장을 한다'라며 직접 등장할 것처럼 소개하기도 했는데 끝내 나오지 않았다. 최언위 정도라면 최승우의 라이벌이거나 모시는 주군은 다르지만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의 정도의 비중을 가져야 할텐데 이 포지션을 최응이 가져갔고 그렇다고 명색이 신라 삼최 중 1명을 그냥 일반 신료 정도로 묘사할 수도 없으니 나오지도 못한듯.
태조 왕건의 후속작인 제국의 아침에서도 이름만 언급 되었다. 장남이 최광윤도 거란에 억류되어있던터라 언급만 되는 정도이며, 차남인 최행귀(임병기 분)가 직접 등장하였다.
대고려왕답견훤서는 누가 썼는지는 나오지 않으며 고려는 최치원이 썼다는 거짓말로 백제조정을 당황케하려는 술수를 부린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함께 신라 3최로 불렸던 최승우가 백제 조정에 중신으로 있는지라 효과는 없었다.

[1] 사후 추증. 2품 2등위.[2] 최치원은 이를 가리켜 신라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깠다.[3] 집사성의 차관. 집사성은 신라 13부 정부 기관 중 하나.[4] 서서원 소속 직위. 서서원은 신라 국왕의 명령을 문서화하는 부서.[5] 고려 초기 태자부의 직위로 보인다.[6] 당시 고려의 태자왕무였다.[7] 額號 : 대문에 걸어놓는 현판.[8] 검교는 해당 직위에 이름만 걸쳤다는 걸 명시하기 위해 붙힌다.[9] 어사대의 장관.[10] 최고위 훈위. 훈위는 실무직이 아닌 명예를 치하하기 위한 훈장에 가깝다.[11] 원봉성 소속 직위.[12] 고려의 문산계 품계로는 정2품 직위이며 향직 품계로는 몇 품인지 알 수 없다.[13] 향직 품계. 4품 1등위.[14] 원봉성 소속 직위. 원봉성은 신라의 서서원과 같은 부서.[15] 한림원의 장관. 한림원도 원봉성과 비슷한 부서.[16] 내의성의 차관. 내의성은 중서문하성의 전신.[17] 正의 오기로 보인다. 고려사 선거지에는 바를 정 자로 나오기 때문.[18] 출처는 삼국사기 열전 견훤편, 고려사 세가 태조 10년(927), 11년(928)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