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TP

 



1. 제원
2. 개요
2.1. 개발
2.2. 파생형
2.2.1. 2포탑형
2.2.2. 단포탑형
2.3. 개전 직전
3. 실전
3.1. 제1경전차대대
3.2. 제2경전차대대
3.3. 잔여 전차
4. 평가
5.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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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이 기관총탑재 2포탑형, 아래가 37mm 주포 장착 단포탑형.

1. 제원


'''7TP'''
구분
2포탑형
단포탑형
중량
9.4t
9.9t
전장
4.56m
전폭
2.43m
전고
2.15m
2.19m
승무원
3명
엔진
사우러 6기통 디젤엔진 (110마력)
노상최고속도
37km/h
차내연료 행동반경
160km
무장
7.92mm wz.30 기관총 2정
37mm wz.37 보포스 대전차포 1문/동축 7.92mm wz.30 기관총 1정
최대장갑두께
17mm

2. 개요



7TP[1]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37mm 주포를 탑재한 폴란드경전차로서, '''빅커스 Mk. E를 발전시켜 최종완성한 모델'''이다.
당시 주적이었던 독일의 기관총 2정으로 무장한 1호 전차와 20mm 기관포 1문과 7.92mm 기관총 1정을 장비한 2호 전차보다 우수한 무장을 갖춘 경전차였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 육군 최강의 전차였지만, 개전 시점까지 132대 이상은 생산되지 못했고 폴란드의 패배로 사라진다. 차체는 C7P 화포견인차의 기반이 되었다.

2.1. 개발


7TP는 폴란드가 영국제 비커스 Mk.E 6톤 경전차 면허생산권을 획득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발했다. 하지만 비커스의 한계가 그 당시에도 분명했으므로 폴란드 설계자들은 늦어도 1936년까지 개량형을 만들고자 했는데, 그 결과물이 7TP였다.
7TP의 주요 특징은 더 강력하고 신뢰성이 좋은 디젤 엔진의 채용과 37mm 대전차포, 그리고 약간 두꺼워진 차량 장갑이었다. 원래 비커스 MK. E에 장착된 암스트롱-시들리 엔진 대신에서 스위스제 사우어 디젤 엔진을 면허 생산하여 교체했다. 차체 전면의 경우, 비커스 MK. E는 13mm였지만, 7TP는 17mm로 두꺼워졌다. 이외에 자잘한 부분들이 개량되고 군들라흐 전차 잠망경, 다른 공기 조절 시스템, 무전기 같은 몇가지 장비가 추가되었다.

2.2. 파생형



2.2.1. 2포탑형


비커스 Mk.E처럼, 7TP도 2가지 파생형이 생산되었다. 우선 폴란드는 영국 비커스 암스트롱사에 38량의 6톤전차 Mk.E를 발주해 1932~1934년 사이에 수령했다. 이 전차는 포탑이 두 개 달린 기관총 탑재전차로 이들 차량을 폴란드가 수령한 후 1934년에 폴란드 PZInż사에서 47mm 속사포와 기관총으로 무장한 단포탑형으로 22량을 개수한다.
폴란드는 비커스 전차를 수령한 직후 바로 양산에 들어가지 않고 해당 전차의 개량형 개발에 착수하여 2가지 파생형을 제작했는데, 2개의 포탑을 갖추고 7.92mm wz.30 기관총 2정을 장착한 형과 1개 포탑에 37mm wz.37 보포스 전차포를 탑재한 형이 존재했다. 초기 시험 후 기관총만 탑재한 2포탑형은 쓸모가 없고 화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명확해지자 현대적인 단일 포탑형에 집중한다는 결정이 내려져 양산이 포기되었다.
일단 2포탑형의 7TP는 1934년에 개발되어 1935년 봄에 양산 승인을 받았다. 2포탑형은 7.92mm 기관총 2정을 장착했지만, 일부에는 13.2mm 기관총 1정과 7.92mm 기관총 1정이 탑재되기도 했다. 이 형식은 임시 방편으로 여겨져 22대만 생산되었다가 이후 다시 7.92mm 기관총 2정으로 무장을 바꾸었다. 초기 생산분은 비커스 전차로부터 떼어낸 포탑 22개를 장착했다.

2.2.2. 단포탑형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단포탑형이다. 많은 설계자들이 20mm, 40mm, 47mm, 55mm 등의 당시 전차포 기준으로는 중포를 시험했고, 최종적으로 37mm 보포스 대전차포를 탑재하기로 결정했다. 37mm 포를 장착한 단포탑형은 1937년 말부터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 차량은 1936~37년에 수립된 폴란드 육군 근대화계획에 따라 개발된 강화형으로 당시 폴란드의 공업기술여건상 라이센스 생산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웨덴 보포스 사로부터 포탑째로 직수입해 조립생산했다.
그러나 당시 복잡한 국제정세와 스웨덴의 자국내 여건 때문에 폴란드는 충분한 수량을 구입할 수 없었고, 이 때문에 보포스 포탑장착 7TP 경전차는 110량에 불과한 상태에서 개전을 맞는다. 참고로 1938년말부터 생산이 시작된 전차들은 2N/C 무전기를 탑재했다.

2.3. 개전 직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2포탑형의 대부분은 단일 포탑형으로 개조되었다. 개조되지 않은 22대는 바르샤바 근처 훈련소에서 훈련용으로 운용되었으며 나중에 바르샤바 공방전에 투입되었다. 2포탑형과 단일 포탑형은 분명한 명칭이 기록되지 않았다. 최근에 발간된 몇개 자료에서는 "7TP dw."와 "7TP jw."라는 단축형 이름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명칭들은 정식 명칭은 아니었으며, 단지 간단하게 표기하고자 사용할 뿐이다.
그래서 총보유량은 수입한 비커스 Mk. E를 개량한 것을 합쳐서 170대로, 그 중 132대가 1935년부터 전쟁이 시작된 1939년 사이에 생산되었다. 이 수량에는 단포탑형과 기관총만을 장비했던 2포탑형이 모두 포함된다. 1939년에는 장갑을 강화한 개량형의 개발이 시작되었으나 계획은 전쟁 발발로 무산되었다.
마지막으로 7TP란 이름의 뜻은 폴란드어로 7톤이란 뜻이지만, 사실 시제품이 만들어지고 무게는 조금씩 늘어나서 양산형의 중량은 대략 9톤에 이르렀다.[2]

3. 실전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 모든 7TP 전차들은 전선에 투입되어 침략자와 맞서 싸웠다. 이건 TKS를 비롯한 다른 모든 기갑차량도 동일했는데 그만큼 폴란드의 상황이 다급했던 것이다.
하지만 7TP는 얼마 안되는 폴란드의 정예기갑병력이었으므로 그들 중 대부분은 2개 경전차대대(제1경전차대대 및 제2경전차대대)에 배치되었으며 이 경전차대대들은 폴란드군 차량화여단의 일부로 편성되었다.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1대를 포함하여 나머지 전차들은 바르샤바 방위전 당시 급조된 전차 부대에 보내져 전투를 치렀다. 당시 독일의 경전차보다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7TP는 전쟁의 결과를 바꾸기에는 너무 수가 적었다.

3.1. 제1경전차대대


37mm 주포 탑재형 49대로 편성된 제1경전차대대는 폴란드 육군의 전략 예비대 일부로서 프루시 군(Armia Prusy)에 배속되어 싸웠다. 1939년 9월 4일 전투에 투입되어 다양한 역할로 구분되어 싸웠는데, 대부분은 후퇴를 엄호하기 위한 기동 예비 역할이었다.
여러 전투에 참가했지만, 유명한 전투로는 프셰드부스 전투(Battle of Przedbórz), 술레유프 전투(Battle of Sulejów), 이노브워츠 전투(Battle of Inowłódz), 오드지부 전투(Battle of Odrzywół)와 드제비차 전투(Battle of Drzewica) 등이었다. 9월 8일, 폴란드군 주력부대가 독일군의 진격을 그럭저럭 저지했지만, 다음 날 주력부대로부터 분산되어 후방으로 철수해야 했다. 대대 일부는 그워바추프 전투(Battle of Głowaczów)에서 괴멸되었고, 그 사이 9월 13일에 잔여 전차들이 비스와 강 다른 쪽을 통해 돌파하는 데 성공하여 루블린 군에 합류, 스테판 로베츠키(Stefan Rowecki) 대령의 바르샤바 차량화기갑여단에 배속되었다. 여단의 일부로서, 대대는 유제푸프 전투(Battle of Józefów)에 참가했으며, 르부프(Lwów;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리비우(Львів; L'viv))와 루마니아 교두보로 탈출을 시도하는 폴란드군의 선봉대 일부를 이루었다.
9월 21일 토마슈프 루벨스키 전투(Battle of Tomaszów Lubelski) 이후, 잔여 전차들은 전차병이 파괴했고 부대는 독일군에 항복했다.

3.2. 제2경전차대대


37mm 주포 탑재형 49대로 편성된 제2경전차대대는 우치 군의 피오트르쿠프 트리부날스키 작전 그룹(Operational Group)에 소속되어 9월 4일 베우하투프 지역의 프루트카(Prudka) 강 근처에서 전투에 투입되었다.
다음 날, 제2경전차대대는 피오트르쿠프에서 폴란드군의 반격에 앞장서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고 부대는 큰 손실을 입었다. 대대는 재집결하여 바르샤바로 철수했으며, 다시 브제시치(Brześć; 오늘날의 벨라루스 브레스트(Брэст; Brest))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폴란드 제60 보병사단의 동원을 엄호하였다. 9월 15일, 이틀 간 길게 계속된 브워다바 전투(Battle of Włodawa)에 참가했으나,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고 남서쪽으로 철수했다.
살아남은 전차들은 연료부족 때문에 전차병들이 파괴했으며, 소비에트 연방이 독일과 연합하여 폴란드를 침공한 9월 17일에 전차병들과 부대 지휘부는 루마니아 국경을 넘었다.

3.3. 잔여 전차


바르샤바에서 남은 전차들은 바르샤바 방어 사령부 예하에 제1경전차중대 및 제2경전차중대로 편성되었다.
1중대는 이전에는 훈련용으로 사용되던 2포탑형 11대로 편성되었다. 바르샤바 공방전 시작 단계에서 1중대는 바르샤바 교외에서 격렬한 전투에 참가했다. 그곳에는 주요 공항이 있었다. 대전차 무장이 부족했기 때문에 1중대 소속 전차들은 막심한 피해를 입었고, 9월 12일에 후방으로 물러나 잔여 병력 및 전차들은 2중대에 합류했다.
2중대는 37mm 탑재형 11대 뿐만 아니라 숫자 미상의 기타 기갑 차량을 운용했다. 2중대는 독일군 보병 및 기타 기갑 차량에 맞서서 볼라(Wola) 지구에서 성공적인 방어전을 치렀으며, 바브쥐세프(Wawrzyszew) 사이에서 전술적 반격 작전에도 투입되었다. 그곳에서 중대는 공격을 준비하는 독일군을 방해하려고 했다. 9월 15일, 중대는 브주라 전투(Battle of Bzura) 후 바르샤바 북쪽 캄피노 숲을 지나 후퇴하고 있던 포즈난 군과 연결할 목적으로 준비하고 있던 공격 작전의 최선봉 부대를 편성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루프트바페의 공중 폭격으로 병력과 전차에 큰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 공격은 작은 성공을 거두는 것으로 끝났다.
남은 7TP 전차들은 9월 27일에 바르샤바가 항복할 때까지 전선 여기저기에서 전투에서 싸웠으며, 그 날 전차병들은 자신들의 전차를 자기 손으로 파괴했다.
TKS가 개전 당시 폴란드가 보유한 1040여량의 전차중 693량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한 운용량에도 불구하고 빈약한 기록을 가진 것에 비해 7TP가 상세한 기록이 남은 이유는 일단 정예병력이 집중적으로 운용했으며, 전과도 많았고, 해당 기록을 가진 병력이 상당수 탈출에 성공했으며, 상대방인 독일군도 그 위력을 경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평가


7TP에 탑재된 37mm 보포스 wz.37 주포는 4호 전차를 포함하여 당시의 모든 독일군 전차의 장갑을 충분히 관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전으로 입증했다. 다른 한편으로 7TP는 장갑이 너무 얇았으며 특히 항공기 폭격에 취약한 면을 드러냈다.
사실 이 점은 폴란드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며, 7TP의 개발동기가 사실상 '''땜빵'''이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참고로 폴란드의 안습했던 상황을 살펴보면, 이미 미국 호일 트랙터 레이야사라고 하는 크리스티가 경영하는 회사에 1931년에 2량의 전차를 발주했지만 같이 주문했던 미국이 추가발주형식으로 나꿔채버려 폴란드에는 전차가 제공되지 않았다. 1937년에는 프랑스와 협상을 벌여 소뮈아 S35 전차 2개 대대분 100량을 발주하려고 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제동을 걸어 결국 르노 R35/40 시리즈 중 구형인 R35 전차 100량으로 계약이 변경됐고 그나마 독일의 침공 이전에 도입된 것은 1개 대대분이었던 53량[3]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렇게 들여온 르노 전차는 개전 후 후방에 머무르고 있다가 9월 17일 소련군의 침공 이후 대부분 루마니아로 후퇴했기 때문에 실제 전쟁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국 미국에서 크리스티 전차를 도입하는 것이 좌절되자 대안으로 수입한 것이 빅커스 Mk. E이며 6톤 경전차인 이 전차를 토대로 국산화한 것이 7TP였다.
이런 유형무형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1938년에 여러 경로를 통해 입수한 크리스티 방식의 현가장치를 장착해 장륜, 장궤병용 주행이 가능했던 10TP 전차나 장갑강화형 14TP 전차가 1939년에 개발된 것을 생각해 보면 1931년에 크리스티 전차가 폴란드에 제공됐을 경우 폴란드가 7TP 대신 13톤에 가까운 10TP나 14톤급의 14TP 전차를 더 일찍 양산해 전력화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역사에서 가정은 금물.

5. 말로


폴란드 침공 당시 폴란드의 전차중 가장 우수한 전차였지만, 생산량이 적어서 전쟁의 향방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다. 전투가 끝난 후 살아남은 전차들의 운명은 아래와 같다.
  • 독일은 폴란드 침공 당시 7TP를 완전한 상태인 20대를 포함해 상당량을 노획해서 폴란드군 장비 중 유일하게 1선급 장비라는 판정을 내린 후 2선급 부대에서 사용했다. 독일군이 붙인 7TP의 제식 명칭은 Panzerkampfwagen 7TP 731(p)였다. (p)는 폴란드를 뜻하는 독일어 철자 "Polen"의 약자이다.
  • 소련은 폴란드 침공 당시 1대를 노획했다.
  • 폴란드가 개전 당시 보유하고 있던 110대의 1포탑형과 22대의 2포탑형 중 20대가 루마니아헝가리로 탈출했지만 40여대는 엔진 문제와 연료 부족으로 버려져야 했다.
오늘날까지 온전한 상태로 남은 7TP는 없지만, 바르샤바 폴란드 육군 박물관에서 이 전차의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비커스 Mk. E 계열 차량 중 최고의 성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7TP에 흥미를 보인 국가는 여럿 있었다.
  • 1937년 1월에 스웨덴이 단포탑형(7TP jw.)을 시험 목적으로 20대~60대 가량의 비무장 차체와 C7P 구매의사를 보였으나 폴란드는 이를 거부했다.
  • 1937년 4월에는 불가리아에스토니아가 역시 7TP jw.형에 관심을 보였다. 에스토니아는 4대의 7TP jw.를 구매하고자 했으나 폴란드는 2포탑형(7TP dw.)만 판매하려 했다.
  • 1937년 11월에는 네덜란드에서 7TP에 관심을 보였지만 역시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 터키도 이 전차에 관심을 보였고, 1938년에 폴란드 정부는 7TP jw.형의 기술 문서를 제공하기도 했지만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다.

[1] 폴란드어로 "Siedmiotonowy Polski."[2] 시간부족으로 페이퍼플랜으로만 남아있던 다른 폴란드 전차들도 이 전통(?)을 잘 지켰다. 예를 들어 9TP는 실제 중량이 10.6톤 정도였으며, 10TP는 실제 중량이 12.8톤 정도였다.[3] 정확히는 주문한 100량 중 50량의 R35와 테스트용으로 같이 구입한 호치키스 H35 3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