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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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탄생 배경
2. 생산과 일선 배치
3. 스페인 내전에서 데뷔
4. 실전에서
5. 형식

전간기 나치 독일에서 등장하여 스페인 내전제2차 세계 대전까지 사용된 복엽 전투기.

1. 탄생 배경


하인켈 He 51은 전간기 독일 공군이 처한 특수한 상황이 낳은 복엽 단좌 전투기로, 나치가 정권을 잡은 독일이 재무장을 선언한 직후 신생 루프트바페 최초의 주력 전투기가 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군은 항공기의 보유와 운용이 금지당했었다. 따라서 하인켈 사는 로스토크에 있는 공장에서 스포츠기라는 명목으로 전투기를 개발하고 프로토타입을 만들었다. 하인켈 사는 HD37 , HD38 , HD43에 이어 1931년에는 튀링겐 출신의 쌍둥이로 항공기 설계에 뛰어난 재능을 지닌 귄터 형제를 새로이 영입하여 불과 1년만에 높은 잠재 능력을 품은 복엽 전투기 He 49a를 개발했다.
그즈음, 1933년에 설립되어 공군 재건을 추진하던 제국 항공성은 He 49a에 주목하고 여기에 개량을 더한 He 51의 개발을 추진했다. He 51은 이미 생산되어 배치된 아라도 Ar 65를 대신하는 주력기로 예상됐다. 1933년 항공성은 선전 기체의 명목으로 He 51A를 발주하기에 이른다. 1935년 3월 1일, 독일이 재무장 선언을 하자 He 51A는 신생 독일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대대적으로 선전되었다.

2. 생산과 일선 배치


He 51A에 대한 조종사들의 평가는 Ar 65에 비해 조종이 어렵고, 속도는 빠르지만 기동성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다루기 쉽고 조종이 편한 Ar 65에 익숙한 조종사들은 He 51A의 취급에 고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기체의 성능이 아니라 조종사 훈련인 것으로 밝혀져 He 51A의 생산은 계속되었다. 선행형 He 51A에 뒤를 이어 낙하식 연료탱크를 추가한 장거리형 He 51B과 10kg 폭탄 6발을 탑재할 수있는 랙을 추가한 전투 폭격기형인 He 51C도 만들어졌다. 1936년 10월 생산이 종료될 때까지 이 복엽 전투기는 458대가 생산되었다. 또한 플로트를 설치한 수상기형 He 51B-2도 해군에 납품되었으나 이때는 이미 복엽기는 구식화된 이후여서 공군 원수 헤르만 괴링독일 해군에 대한 유화성 제스쳐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46대가 만들어진 이 수상기 버젼은 순양함이나 포켓전함 같은 함선에는 거의 탑재되지 않고 근해 초계 임무에만 투입되었으나 엄연히 초기 독일 해군의 주력 정찰기이자 초계기, 전투기였다.

3. 스페인 내전에서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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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에 참가한 아돌프 갈란트의 He 51C
프로파간다를 통해 대대적으로 선전된 He 51이었으나 그 실체는 이미 구식이 된지 오래인 파라솔 윙의 복엽기에 불과했고, 무장도 1차 대전의 전투기와 같은 기관총 2정에 속도도 시속 330 km로 같은 시기 다른 나라의 복엽 전투기와 비교해도 별 다를 것이 없었다. He 51은 아무것도 특별히 뛰어난 점이 없는 평범한 복엽 전투기의 하나일 뿐이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독일은 이에 개입하고 1936년 7월에는 신속히 6대의 He 51A를 보냈다. 먼저 팔랑헤군 조종사가 이 기체를 몰고 공화국군의 구식기를 여럿 격추하는 전과를 올렸다.
스페인 내전의 탑 에이스이자 복엽기 탑건인 호아킨 가르시아-모라토는 이 내전에서 이탈리아제 CR.32 전투기를 몰며 비공인 기록이지만 40대 격추로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격추 기록을 세웠는데, 그중 4대는 He 51로 거둔 것이다. 17대의 격추 기록을 세워 공동 2위에 올라있는 아리스티데스 가르시아 로페즈도 3대는 하인켈 복엽 전투기로 격추한 전과였다. 그밖에도 쥴리오 살바도르 디아즈-벤주미, 앙헬 살라스 라르자발, 바스케즈 마뉴엘, 그리고 콘도르 군단의 베르너 묄더스아돌프 갈란트 같은 스페인 내전의 쟁쟁한 에이스들은 거의 모두 He 51를 몰아 본 경험이 있었다.

4. 실전에서


그후로도 He 51들이 차례로 배치되면서 11월에는 콘도르 군단에 4개 중대(48대)의 He 51로 구성된 제88 전투비행대대(J/88)가 편성되었다. 구식기들이 투입된 스페인 내전 초기에는 꾸준히 전과를 올리던 He 51이었으나, 공화국 측이 소련에서 폴리카르포프 I-15를 도입하자 금새 약점을 노출하게 된다. I-15은 속도와 기동성, 무장까지 뛰어나 He 51은 고전했다. 구식 폭격기들도 당대 최강으로 평가받던 투폴레프 SB들로 재편성되었는데, 이 쌍발 폭격기는 독일의 복엽 전투기보다 최소한 110km/h는 더 빨라 거의 요격이 불가능했다. 콘도르 군단의 주력 폭격기인 융커스 Ju 52보다 두 배나 빠른 이 고속 폭격기를 격추하려면 미리 고공에서 매복해 급강하 기동으로 속도를 붙인 다음에야 겨우 한번의 공격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단엽 날개에 인입식 착륙장치까지 갖춘 폴리카르포프 I-16까지 등장하자 He 51은 도저히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독일 공군은 최신예기 Me 109의 투입을 서두르게 된다. 공중전에서 이길 가망이 없어진 He 51은 근접 지상 지원 임무에 사용되었는데, 오히려 이 측면에서 적지 않은 전과가 있었다. 루프트바페에서 근접 지원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지상 공격 전술을 고안했던 볼프람 폰 리히트호펜[1] 대령은 콘도르 군단에서 근무하던 시절, 휘하의 He 51을 능수능란하게 지휘하며 공화국 육군을 공포에 떨게 했다. 스페인 내전을 통해 He 51은 각 형식 합계 135대가 공급되었고 46대가 살아남았다.
독일 본국에서는 Ar 68 및 Bf 109가 도입되기 시작하자 He 51은 서서히 2선급으로 물러나며 훈련기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훈련기로 사용되던 He 51들은 2차 대전이 개전하자 후방에서 파르티잔에 대한 전술 공격기로 다른 낡은 기체들과 함께 투입되기도 했고 잉여 기체들은 불가리아 공군에 군사 원조물자로 함께 보내지기도 했다.
1940년 3월 시점에서도 상당수의 He 51이 남아있었는데, 이 복엽 전투기가 정확히 언제 모두 퇴역했는지는 루프트바페의 기록에도 남아있지 않아 확신할 수는 없으나, 몇몇 파일럿들의 증언을 참고하면 2차 대전 개전 후 3년이 지난 뒤에도 훈련기로 사용중인 낡은 기체를 목격한 예가 있다고 하니 적어도 후방에서는 오랜기간 남아있었던 셈이다. 1944년 1월의 기록에는 35대의 기체가 비행학교에 남아있었다 한다.

5. 형식


  • He 51A-0 : 프로토타입 기체.
  • He 51A-1 : 초기 양산형으로 75대 생산.

  • He 51B-0 : A-1의 강화형.

  • He 51B-1 : B-0의 양산형으로 계획되었으나 12대만 제작됨

  • He 51B-2 : 수상기 버전. 단좌 수상정찰기 및 전투기형으로 46대 생산. He 51W, He 51B-2W라는 제식 명칭으로도 불렸다.

  • He 51C-1 : 폭탄 랙을 추가한 지상 공격기 버젼으로 거의 대부분이 스페인 내전에 투입된 콘돌 군단에 인도됨. 50kg 폭탄 4기 탑재.

  • He 51C-2 : C-1에 무전기를 추가한 개량형으로 21대가 생산되어 스페인에 보내졌다.

[1] 1차 대전의 톱건 에이스인 붉은 남작의 사촌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