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G 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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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3전투항공단(Jagdgeschwader 53 Pik As)'''
1939년 1월 5일에 비스바덴(Wiesbaden-Erbenheim)을 모기지로 두고 창설된 JG 53은 훗날 '''스페이드 에이스(Pik As)'''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된 전투기 부대였다.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과 1차 대전 시절 친구이자 전우 브루노 로에르처 대령이 초대 지휘관을 대신해 창설된 이들은 1940년 5월 14일에 프랑스 전역에서 실전에 데뷔했는데, 작전 첫날에 43대의 프랑스, 영국 공군기를 격추시키는 맹활약을 펼쳐 괴링을 기쁘게 했다. 같은 해 6월까지 이들은 275대를 격추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이와 같은 전과가 모두 사실은 아니었더라도, 이들과 맞서게 된 영국 공군성의 제60호 정보 요약 보고서에도 새롭게 전선에 출몰하는 전투기 부대를 언급하고 있어 이들을 매우 주목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괴링은 또한 JG 53의 3번째 지휘관을 맡은 한스-위르겐 폰 크라몬-타우바델(Hans-Jürgen von Cramon-Taubadel : 1901~1985) 소령의 아내가 유태인이며 즉각 해임해야만 한다는 게슈타포의 보고를 받고 나서 그의 탑승기에서 스페이드 마크를 지우고 대신 붉은 띠를 그려넣는 조치로 처벌을 대신할 정도로 JG 53을 감싸고 돌았다. 그러자 본부비행대원들은 이 조치에도 반발해 꼬리날개의 스바스티카 위에다 붉은 스트라이프를 덧칠해 지워버리는 것으로 무언의 항의를 했다.
1941년 4월에 부대는 전부 러시아 침공에 대비하여 동쪽으로 전진 배치된다.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의 제2항공함대(Luftflotte 2) 휘하로 배속된 이들은 신형인 메서슈밋 Bf 109F를 지급받고 바르샤바(Warsaw-Bielany)에 전개했다. 이들은 6월 22일에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후 7월 31일까지 40일 동안 소련이 보유한 공군기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물경 1,000대나 격파하는 엄청난 맹위를 떨쳤다. 연말에 실제로 전과를 확인해보니 6월 22일부터 12월 5일까지 762대를 격추했던 것으로 드러났지만, 대단한 활약임에는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항공단은 그 대가로 35대의 기체를 공중전에서 잃고 2대는 공습으로 완파당했지만, 전체적으로 피해는 경미했다.
JG 53 항공단에게는 운도 따라주었다. 동장군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그 해 연말에 지중해의 몰타 항공전을 지원하기 위해 따뜻한 시실리 섬으로 옮겨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3비행단(III. Gruppe) 같은 경우는 열사의 북아프리카로 파견을 가기도 했다. 시실리에서 1942년 5월까지 주둔하던 이들은 여름에는 판텔레리아(Pantelleria) 섬으로 건너가 몰타섬에 보급품을 실어나르는 영국 수송선단을 공격하는 대함 임무에 종사했다.
JG 53은 이후에 휘하의 비행단이 모두 흩어져 각각 다른 전선에서 싸우게 된다. JG 53의 3비행단(III./JG 53)은 카이로에서 영국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던 롬멜 장군을 지원했고, 본부비행대와 제2비행단(II./JG 53)은 시실리에 남아 지중해의 제공권을 지키게 된다. 반면, 제1비행단(I./JG 53)은 남부 집단군의 여름 공세를 위해 해빙기가 시작된 동부전선으로 돌아가 코카서스 지방과 스탈린그라드를 오가며 지옥과도 같은 전투를 거듭하게 된다.
제2비행단은 1943년 10월에 이탈리아에서 철수했고, 독일 서부로 이동하기 전인 1944년 3월까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근처에 주둔하면서 독일 본토 항공전에 참가한 첫 번째 전투기 부대였다. 그러다보니 1944년 6월에 연합군이 오버로드 작전을 발동했을 때 해일처럼 밀려오는 상륙부대를 맞은 거의 유일한 전투기 부대이기도 했다. 교두보를 세운 연합군은 프랑스 해안가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영국 제4전술공군의 호커 타이푼과 호커 템페스트가 맹공을 가했고, 해협 건너에서는 미 육군항공대의 전폭기들이 오가며 합세하자 루프트바페의 전투기 부대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으며 제2비행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고작 한 달 동안의 작전에서 비행단은 42대의 기체를 공중전에서 잃고 18대는 이런저런 사고로 못쓰게 되었고 20대는 그대로 버려졌다.
제3비행단 또한 1944년 6월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연합군의 거친 공세를 막기 위해 분전을 펼쳤다. 연합군이 사상 최대 규모의 마켓 가든 작전을 개시했을 때에도 두 비행단은 버티고 섰으나, 이미 밀려오는 파도를 널빤지로 막아보려는 것과 다름없었다. 루프트바페 수뇌부는 1944년 가을에 신규 편성된 제4비행단(IV. Gruppe)을 JG 53에 추가시켰지만 전황에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제1비행단은 추축군의 귀중한 연료 공급처인 유전 지대에 가해지는 연합군의 공습을 막기 위해 루마니아로 이동했고, 그후로는 독일 본토로 시시각각 죄어드는 붉은 군대의 공세를 늦추기 위하여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까지 헝가리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이들이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로 퇴각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4월에 부대는 해산되었다. JG 53에서 계속 임무 수행이 가능한 대원은 다른 부대의 조종사들과 통합되고 필요가 없어진 지상 요원들은 육군에 배속되지만, 실제로 부대의 공식 해체 명령은 연합군의 승전 기념일과 같은 날에 떨어졌다.
'''제53전투항공단(Jagdgeschwader 53 Pik As)'''
1. 창설과 실전 투입
1939년 1월 5일에 비스바덴(Wiesbaden-Erbenheim)을 모기지로 두고 창설된 JG 53은 훗날 '''스페이드 에이스(Pik As)'''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지게 된 전투기 부대였다. 제국 원수 헤르만 괴링과 1차 대전 시절 친구이자 전우 브루노 로에르처 대령이 초대 지휘관을 대신해 창설된 이들은 1940년 5월 14일에 프랑스 전역에서 실전에 데뷔했는데, 작전 첫날에 43대의 프랑스, 영국 공군기를 격추시키는 맹활약을 펼쳐 괴링을 기쁘게 했다. 같은 해 6월까지 이들은 275대를 격추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이와 같은 전과가 모두 사실은 아니었더라도, 이들과 맞서게 된 영국 공군성의 제60호 정보 요약 보고서에도 새롭게 전선에 출몰하는 전투기 부대를 언급하고 있어 이들을 매우 주목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괴링은 또한 JG 53의 3번째 지휘관을 맡은 한스-위르겐 폰 크라몬-타우바델(Hans-Jürgen von Cramon-Taubadel : 1901~1985) 소령의 아내가 유태인이며 즉각 해임해야만 한다는 게슈타포의 보고를 받고 나서 그의 탑승기에서 스페이드 마크를 지우고 대신 붉은 띠를 그려넣는 조치로 처벌을 대신할 정도로 JG 53을 감싸고 돌았다. 그러자 본부비행대원들은 이 조치에도 반발해 꼬리날개의 스바스티카 위에다 붉은 스트라이프를 덧칠해 지워버리는 것으로 무언의 항의를 했다.
2. 동부전선
1941년 4월에 부대는 전부 러시아 침공에 대비하여 동쪽으로 전진 배치된다.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의 제2항공함대(Luftflotte 2) 휘하로 배속된 이들은 신형인 메서슈밋 Bf 109F를 지급받고 바르샤바(Warsaw-Bielany)에 전개했다. 이들은 6월 22일에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후 7월 31일까지 40일 동안 소련이 보유한 공군기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물경 1,000대나 격파하는 엄청난 맹위를 떨쳤다. 연말에 실제로 전과를 확인해보니 6월 22일부터 12월 5일까지 762대를 격추했던 것으로 드러났지만, 대단한 활약임에는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항공단은 그 대가로 35대의 기체를 공중전에서 잃고 2대는 공습으로 완파당했지만, 전체적으로 피해는 경미했다.
3. 지중해 전역
JG 53 항공단에게는 운도 따라주었다. 동장군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인 그 해 연말에 지중해의 몰타 항공전을 지원하기 위해 따뜻한 시실리 섬으로 옮겨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3비행단(III. Gruppe) 같은 경우는 열사의 북아프리카로 파견을 가기도 했다. 시실리에서 1942년 5월까지 주둔하던 이들은 여름에는 판텔레리아(Pantelleria) 섬으로 건너가 몰타섬에 보급품을 실어나르는 영국 수송선단을 공격하는 대함 임무에 종사했다.
JG 53은 이후에 휘하의 비행단이 모두 흩어져 각각 다른 전선에서 싸우게 된다. JG 53의 3비행단(III./JG 53)은 카이로에서 영국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던 롬멜 장군을 지원했고, 본부비행대와 제2비행단(II./JG 53)은 시실리에 남아 지중해의 제공권을 지키게 된다. 반면, 제1비행단(I./JG 53)은 남부 집단군의 여름 공세를 위해 해빙기가 시작된 동부전선으로 돌아가 코카서스 지방과 스탈린그라드를 오가며 지옥과도 같은 전투를 거듭하게 된다.
4. 본토 방어전
제2비행단은 1943년 10월에 이탈리아에서 철수했고, 독일 서부로 이동하기 전인 1944년 3월까지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근처에 주둔하면서 독일 본토 항공전에 참가한 첫 번째 전투기 부대였다. 그러다보니 1944년 6월에 연합군이 오버로드 작전을 발동했을 때 해일처럼 밀려오는 상륙부대를 맞은 거의 유일한 전투기 부대이기도 했다. 교두보를 세운 연합군은 프랑스 해안가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영국 제4전술공군의 호커 타이푼과 호커 템페스트가 맹공을 가했고, 해협 건너에서는 미 육군항공대의 전폭기들이 오가며 합세하자 루프트바페의 전투기 부대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으며 제2비행단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고작 한 달 동안의 작전에서 비행단은 42대의 기체를 공중전에서 잃고 18대는 이런저런 사고로 못쓰게 되었고 20대는 그대로 버려졌다.
5. 종전
제3비행단 또한 1944년 6월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연합군의 거친 공세를 막기 위해 분전을 펼쳤다. 연합군이 사상 최대 규모의 마켓 가든 작전을 개시했을 때에도 두 비행단은 버티고 섰으나, 이미 밀려오는 파도를 널빤지로 막아보려는 것과 다름없었다. 루프트바페 수뇌부는 1944년 가을에 신규 편성된 제4비행단(IV. Gruppe)을 JG 53에 추가시켰지만 전황에 끼친 영향은 미미했다.
제1비행단은 추축군의 귀중한 연료 공급처인 유전 지대에 가해지는 연합군의 공습을 막기 위해 루마니아로 이동했고, 그후로는 독일 본토로 시시각각 죄어드는 붉은 군대의 공세를 늦추기 위하여 1944년 말부터 1945년 초까지 헝가리에서 전투를 계속했다. 이들이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로 퇴각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5년 4월에 부대는 해산되었다. JG 53에서 계속 임무 수행이 가능한 대원은 다른 부대의 조종사들과 통합되고 필요가 없어진 지상 요원들은 육군에 배속되지만, 실제로 부대의 공식 해체 명령은 연합군의 승전 기념일과 같은 날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