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본토 항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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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1942년 당시 유럽전선에서의 추축국 및 연합군 세력. (붉은 색은 연합군, 푸른색은 추축국.)
먼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의 작전 목표는 어디까지나 영국 공군의 제압이었다. 따라서 실제 작전 수행 때는 영국 공군과 직접 교전을 벌이고 공군 기지와 항공기 생산공장 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도심지에 대한 폭격의 경우, 영국의 산업 시설 및 군사 시설을 폭격해서 파괴한다는 목적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이는 엄밀히 따지면 부차적인 형태였다. 그보다는 영국 국민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다는 상징적인 측면과 함께 영국 공군에게 방어전을 강요하는 전술적인 측면에 주목해 실행한 것이었다. 즉 전술 공군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본토 폭격은 독일 공군의 제압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영국이 막 독일을 공습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독일 공군 전력의 주력은 동부전선으로 몰려가 있었으므로 제압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한데다가[3] , 영국 공군에는 일종의 폭격기무적론에 가까운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이에 걸맞는 대형 장거리 폭격기를 꾸준히 개발하고 있었다. 즉 적 공군의 방어를 뚫고 폭격기를 본토 깊숙이 밀어넣어, 직접 산업 기반을 파괴하여 전쟁수행 '''능력''' 자체를 감소시키는 것을 첫번째 목표로 삼았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세계 최초로 제플린과 고타 G IV에 의한 폭격에 노출되었던 영국이 이제 진정한 의미의 전략폭격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1944년 부터 연합군 역시 무스탕 등 호위 전투기를 제대로 갖추고 독일 공군 자체에 대한 제압도 병행하기 시작했지만 적어도 본토 폭격을 시작할 때는 전략폭격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연합군은 전략 폭격을 통하여 독일의 전쟁수행 역량을 파괴하고자 하였으며 독일 공군은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연합군의 폭격기를 저지하기 위해서 독일은 엄청난 숫자의 대공포와 전투기를 서유럽에 배치해야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 시설에 막대한 손실을 입어야 했다. 댐 파괴로 수몰된 루르 공업 지대라든지, 뤼벡, 쾰른, 함부르크, 드레스덴이 그 예시. 그리고 연합군 폭격기 부대가 입은 손실도 끔찍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종군기자들이 '''지옥은 바로 지상으로부터 5마일 상공에 있다'''고[4] 표현할 정도로 폭격은 혹독하고 괴로운 임무였다. 이들의 고난은 P-51 머스탱이 개발되어 폭격의 전 과정을 호위하게 되면서 비로소 잦아들었다.
2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은 가짜 전쟁으로 시작해 프랑스 침공으로 이어졌고, 프랑스가 조기항복한 뒤에는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확대되었다. 독일 공군은 폭격으로 영국 공군을 일소시킴으로서 제공권을 장악하여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영국 해군을 견제하고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보유한 폭격기의 성능 한계와 잘못된 전략 수립으로 인해 영국 공군 제압에 실패했고, 반면 영국 공군은 레이더와 그에 기반한 효과적인 방어 작전으로 제공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이에 지친 영국 본토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중단하고 독소전쟁의 개전과 함께 독일 공군은 전력을 동부전선으로 돌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항공전은 방어측인 영국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이제 공격의 주도권은 영국으로 넘어오게 된다. 물론 독일 본토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작전은 독소전쟁 이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폭격은 아니었으나 휘틀리를 위시한 구세대 폭격기들이 끊임없이 독일 본토를 넘나들며 선전 삐라를 살포[5] 해댔으며 베를린에 대한 폭격은 영국 본토 항공전 중 런던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이미 시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폭격 작전은 단순히 보복 이상의 전략적 의미가 있었다. 1940년 당시에 나치 독일에 제대로 맞서고 있던 국가는 오직 영국 뿐이었으며, 1941년 독소전쟁 개전 이후에도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이 참전하기 전까지 몇달 이상 영국은 홀로 싸워야만 했다. 소련은 독일의 기습적인 공세에 무방비로 노출되었기에 방어에 급급해 제대로 독일군에 타격을 줄 수가 없었다. 물론 동유럽에서 독일군 또한 꾸준히 손실을 입고 있었으나 소련의 손실은 그 몇배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의 기세를 조금이라도 저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독일에게 피해를 줄 필요가 있었으며 이때 영국이 조금이라도 독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폭격을 통해서 독일의 전쟁 수행 역량을 파괴하는것. 거기다 폭격으로 점차 항공전력이 서유럽으로 돌려지는 효과(?)도 있었다.
MMORPG식으로 말하면 소련이 탱킹을 하니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반드시 누군가는 독일에 딜을 넣어 조금이라도 피를 깎아 어그로를 끌어야 하는 상황인데 그걸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본토가 무사한 영국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43년 이후로는 소련이 독일을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이 패퇴했으므로 폭격으로 만족하는 대신 더 큰 규모를 가진 공격을 결심하는데 그것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포함한 오버로드 작전이다.
초기에 영국은 주간에 공습을 시도하지만 성과에 비해서 폭격기의 피해만 큰 상황이었다. 결국 야간폭격으로 전환을 하게 되고 이전에 비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한편 독일은 이에 대응해서 야간전 능력을 향상시켰고 42년이 될 즈음에는 Bf 110같은 전투기를 야간전투기로 활용하고 영국의 체인 홈과 비슷하게 레이더 기지를 활용하는 등의 대응을 하게 된다.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1941년 12월 11일에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때 폭격을 어떻게 수행할것인지를 두고 영-미간의 갈등이 있었다. 하나는 주간vs야간의 문제였다. 영국 공군은 이전에 주간폭격을 시도했으나 성과에 비해서 손실만 크게 입은 경험이 있었고 야간폭격으로 전환하는것이 폭격기의 손실을 훨씬 감소시킬 수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합중국 육군은 B-17과 같은 중폭격기의 방어력을 과신하고 있었고 승무원들이 주간훈련만 받았기에 야간 폭격에는 재훈련이 필요한데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을 들어서 주간 폭격을 해야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정밀폭격과 지역폭격의 대립이었다. 영국 공군은 지역폭격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정밀도가 떨어지지만 더 넓은 범위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과 야간폭격에는 현실적인 문제로 지역폭격이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 육군이 주장한 정밀폭격은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핵심시설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조준하는건 어려운 일이지만 미국의 노든 폭격조준기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명중률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주간은 미국이 야간은 영국이 각각 분담하고 각자 자신들의 방법으로 폭격을 하는 쪽으로 적당히 타협이 이루어지게 된다.
일단 참전하게 되자 미 8공군과 미 15공군은 B-17과 B-24를 운용하여 독일을 공습하게 된다. 하지만 미군은 아직까지 장거리 호위기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이는 대전 초기에 영국의 폭격기 사령부가 폭격기에 별다른 호위기가 필요없다고 믿은것과 동일하다. 물론 아예 호위기를 붙여주지 않은것은 아니라서 기존에 운용하던 P-38 라이트닝이나 영국의 스핏파이어가 이들을 호위하지만 항속거리의 문제로 중간에 돌아와야 했다.
한편 독일도 상황이 썩 좋은것은 아니었는데 소련과의 전쟁으로 적지 않은 항공기와 대공포들이 동유럽에 배치된 상황이었기에 서유럽에 배치된 항공기과 대공포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특히 대구경 대공포들은 대지상 공격까지 담당하게 되며 필요수명 이상의 소모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보유중인 항공기들은 폭격기를 상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Bf109는 고고도에서의 성능은 괜찮으나 건팩 없이는 폭격기 상대로 화력이 다소 부족했고, 비교적 신예기인 Fw190A는 화력은 강력하지만 고고도에서의 공랭식 엔진의 성능 저하로 인하여 폭격기를 요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덕분에 미 공군의 폭격기 부대는 별 다른 호위기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럭저럭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영국은 독일의 야간 방공능력이 강화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것이 캄허버 라인(Kammhuber Line)이라고 이름을 붙인 방공 체계였다. 이는 레이더와 탐조등을 장비한 일련의 통제구역과 야간 전투기들을 연계시킨 방어 체계였다. 영국은 이러한 방어 체계에 대응해서 폭격기 열(Bomber Stream)이라는 전술로 대응하게 된다. 이 전술은 대규모 폭격기를 최단시간내에 투입하는 방법인데 미국의 컴뱃 박스 대형과 달리 종전까지도 사용되었다.
독일이 폭격기를 요격하기에 알맞게 항공기를 개량해서 독일의 폭격기 요격능력은 점차 향상된 반면에 여전히 미군은 별다른 호위없이 폭격기들을 투입하고 있었다. 덕분에 미국의 폭격기 손실률은 점차 증가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미군은 컴뱃 박스 대형을 도입하게 된다. 이 대형은 폭격기들이 서로를 보호해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되었으나 독일 전투기들은 폭격기들이 장착한 12.7mm 기관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30mm가 넘는 구경의 기관포나 로켓을 퍼부어서 폭격기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했다. 요격에 나선것은 독일 전투기만이 아니라 폭격기들도 기관포등을 장착하고 요격을 하곤했는데 별 다른 호위전투기가 없었기에 미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결국 검은 목요일이라고 불리는 2차 슈타인푸르트 공습에서 291대의 B-17과 60대의 B-24를 투입하지만 그중 77대가 격추되고 121대가 손상을 입으면서 미육군항공대는 잠정적으로 주간폭격을 중단하게 된다. 이들이 다시 주간폭격에 나서게 되는것은 P-51 머스탱이 도입된 이후가 된다.
한편 영국 폭격기 사령부는 이 기간동안 어느정도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43년 초에 최초의 항공기 탑재 지상관측 레이더인 H2S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야간폭격에 좀 더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루르 공습을 통해서 독일의 생산을 어느정도 방해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는데 강철의 생산량은 180,000톤이 감소하게 된다. 특히 3월 16~17일에는 19대의 아브로 랭커스터가 투입된 야간 공습에서 댐 2개를 파괴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루프트바페를 위한 항공기 생산에도 상당한 차질이 생기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943년 7월의 함부르크 폭격은 함부르크의 산업능력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으며 이때 영국 공군은 최로로 초기형 체프인 윈도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연합군은 새로운 장거리 호위기인 P-51 머스탱을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아귀먼트 작전을 통해서 독일 공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힌다. 한편 이런 연합군의 전술의 변화는 독일 공군의 대응 또한 바뀌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모든 항공기가 폭격기에게 달려들면 되는, 비교적 단순한 상황이었으나 이제는 호위기에 대한 대책도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이에 독일은 각 기체에게 역할을 분담하게 된다.
그리고 5월부터는 석유 생산시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1945년 5월 8일에 나치 독일이 항복하면서 독일 본토 항공전은 종료된다.
현대 공군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본 기술은 이 독일 본토 항공전과 관련이 있을 정도이다. 영국은 폭격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 최초로 항공기에 탑재된 지상관측 레이더를 개발하게되며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의 야간 폭격에 대응해 레이더를 탑재한 Bf110G를 투입했고, 반면 영국 공군은 레이더를 기만하는 채프의 조상인 윈도우를 이때 처음 사용했다. 독일은 강력해져가는 연합군 폭격기에 맞서기 위해 제트 엔진을 탑재한 Me262를 만들었고, 실패작이지만 로켓 전투기 Me163 코메트 역시 독일 본토 항공전의 산물. 그 외에 지대공 미사일이나 공대공 로켓 같은 무기체계 역시 이때 태어났다. 끝으로 방어에 급급한 나머지 영국 본토를 공격할 방법이 없자 순항미사일의 조상인 V1과 탄도미사일의 조상인 V2를 만들었다.
영어로는 Defence of the Reich라고 부르는듯 하다. 영문 위키에서 독일 본토에서 벌어진 공중전에 대한 내용을 담은 문서의 제목이 Defence of the Reich다.
전략폭격은 당시에도 생소한 전쟁 개념이었기 때문에 전쟁 직후부터 여러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국내에선 '정오의 출격'이라는 오역으로 소개된 1949년작 12 O'clock High라든가 1954년작 댐버스터즈 같은 작품들이 지금도 회자된다. 근데 명작까진 아니고, 냉전 시대 초기라서 그런지 선전영화 삘이 심하다.
좀더 최근의 영화로는 멤피스 벨이 있으며 몇몇 고증오류가 있긴 하지만 당시 폭격기 운용과 승무원들의 처절함을 엿볼 수 있는 수작. 다른 작품으로 터스키기 에어맨과 레드 테일 정도가 있지만 이는 호위 전투기 조종사들의 입장이라 전쟁 후반기의 모습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2014년(예정)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독일 본토 항공전에 투입된 미 제8공군의 이야기가 HBO 드라마화된다고 한다. 제목은 마이티 에이트.
1941년 ~ 1942년 당시 유럽전선에서의 추축국 및 연합군 세력. (붉은 색은 연합군, 푸른색은 추축국.)
1. 개요
'''지금 우리 독일공군의 전면적인 붕괴가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 아돌프 갈란트
'''"졌어, 우리는 이미 전쟁에 진 거야."''' - 헤르만 괴링
전투기는 우리 국토를 구원해주겠지만, 궁극적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은 폭격기다. - 윈스턴 처칠
제2차 세계 대전의 서부전선 전역 중 하나. 연합군의 독일 본토에 대한 폭격과 이에 맞선 독일 공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다른 공중전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었다.'''독일인들은 누구든지, 제복을 입었든지 않았던지를 가리지 않고 모두 합법적인 표적이다.''' - 아서 해리스[2]
먼저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의 작전 목표는 어디까지나 영국 공군의 제압이었다. 따라서 실제 작전 수행 때는 영국 공군과 직접 교전을 벌이고 공군 기지와 항공기 생산공장 등을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도심지에 대한 폭격의 경우, 영국의 산업 시설 및 군사 시설을 폭격해서 파괴한다는 목적이 아예 없지는 않았으나 이는 엄밀히 따지면 부차적인 형태였다. 그보다는 영국 국민의 전쟁 수행 '''의지'''를 꺾는다는 상징적인 측면과 함께 영국 공군에게 방어전을 강요하는 전술적인 측면에 주목해 실행한 것이었다. 즉 전술 공군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 본토 폭격은 독일 공군의 제압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영국이 막 독일을 공습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독일 공군 전력의 주력은 동부전선으로 몰려가 있었으므로 제압하는 것 자체도 불가능한데다가[3] , 영국 공군에는 일종의 폭격기무적론에 가까운 아이디어가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이에 걸맞는 대형 장거리 폭격기를 꾸준히 개발하고 있었다. 즉 적 공군의 방어를 뚫고 폭격기를 본토 깊숙이 밀어넣어, 직접 산업 기반을 파괴하여 전쟁수행 '''능력''' 자체를 감소시키는 것을 첫번째 목표로 삼았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세계 최초로 제플린과 고타 G IV에 의한 폭격에 노출되었던 영국이 이제 진정한 의미의 전략폭격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1944년 부터 연합군 역시 무스탕 등 호위 전투기를 제대로 갖추고 독일 공군 자체에 대한 제압도 병행하기 시작했지만 적어도 본토 폭격을 시작할 때는 전략폭격 자체에 초점을 맞췄다.
연합군은 전략 폭격을 통하여 독일의 전쟁수행 역량을 파괴하고자 하였으며 독일 공군은 이를 저지하고자 하였다. 결과적으로 연합군의 폭격기를 저지하기 위해서 독일은 엄청난 숫자의 대공포와 전투기를 서유럽에 배치해야 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업 시설에 막대한 손실을 입어야 했다. 댐 파괴로 수몰된 루르 공업 지대라든지, 뤼벡, 쾰른, 함부르크, 드레스덴이 그 예시. 그리고 연합군 폭격기 부대가 입은 손실도 끔찍하기 이를데 없었으며, 종군기자들이 '''지옥은 바로 지상으로부터 5마일 상공에 있다'''고[4] 표현할 정도로 폭격은 혹독하고 괴로운 임무였다. 이들의 고난은 P-51 머스탱이 개발되어 폭격의 전 과정을 호위하게 되면서 비로소 잦아들었다.
2. 배경
2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은 가짜 전쟁으로 시작해 프랑스 침공으로 이어졌고, 프랑스가 조기항복한 뒤에는 영국 본토 항공전으로 확대되었다. 독일 공군은 폭격으로 영국 공군을 일소시킴으로서 제공권을 장악하여 세계 최강이라 불리는 영국 해군을 견제하고 영국 본토 상륙작전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독일 공군은 보유한 폭격기의 성능 한계와 잘못된 전략 수립으로 인해 영국 공군 제압에 실패했고, 반면 영국 공군은 레이더와 그에 기반한 효과적인 방어 작전으로 제공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다. 이에 지친 영국 본토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중단하고 독소전쟁의 개전과 함께 독일 공군은 전력을 동부전선으로 돌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항공전은 방어측인 영국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이제 공격의 주도권은 영국으로 넘어오게 된다. 물론 독일 본토에 대한 연합군의 폭격작전은 독소전쟁 이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폭격은 아니었으나 휘틀리를 위시한 구세대 폭격기들이 끊임없이 독일 본토를 넘나들며 선전 삐라를 살포[5] 해댔으며 베를린에 대한 폭격은 영국 본토 항공전 중 런던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이미 시도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폭격 작전은 단순히 보복 이상의 전략적 의미가 있었다. 1940년 당시에 나치 독일에 제대로 맞서고 있던 국가는 오직 영국 뿐이었으며, 1941년 독소전쟁 개전 이후에도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이 참전하기 전까지 몇달 이상 영국은 홀로 싸워야만 했다. 소련은 독일의 기습적인 공세에 무방비로 노출되었기에 방어에 급급해 제대로 독일군에 타격을 줄 수가 없었다. 물론 동유럽에서 독일군 또한 꾸준히 손실을 입고 있었으나 소련의 손실은 그 몇배에 달하고 있었다. 이러한 독일의 기세를 조금이라도 저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독일에게 피해를 줄 필요가 있었으며 이때 영국이 조금이라도 독일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폭격을 통해서 독일의 전쟁 수행 역량을 파괴하는것. 거기다 폭격으로 점차 항공전력이 서유럽으로 돌려지는 효과(?)도 있었다.
MMORPG식으로 말하면 소련이 탱킹을 하니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반드시 누군가는 독일에 딜을 넣어 조금이라도 피를 깎아 어그로를 끌어야 하는 상황인데 그걸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본토가 무사한 영국 뿐이었던 것이다. 물론 43년 이후로는 소련이 독일을 밀어붙이기 시작했고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독일이 패퇴했으므로 폭격으로 만족하는 대신 더 큰 규모를 가진 공격을 결심하는데 그것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포함한 오버로드 작전이다.
3. 전개
3.1. 1939년 ~ 1941년
초기에 영국은 주간에 공습을 시도하지만 성과에 비해서 폭격기의 피해만 큰 상황이었다. 결국 야간폭격으로 전환을 하게 되고 이전에 비해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한편 독일은 이에 대응해서 야간전 능력을 향상시켰고 42년이 될 즈음에는 Bf 110같은 전투기를 야간전투기로 활용하고 영국의 체인 홈과 비슷하게 레이더 기지를 활용하는 등의 대응을 하게 된다.
3.2. 1942년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1941년 12월 11일에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이때 폭격을 어떻게 수행할것인지를 두고 영-미간의 갈등이 있었다. 하나는 주간vs야간의 문제였다. 영국 공군은 이전에 주간폭격을 시도했으나 성과에 비해서 손실만 크게 입은 경험이 있었고 야간폭격으로 전환하는것이 폭격기의 손실을 훨씬 감소시킬 수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합중국 육군은 B-17과 같은 중폭격기의 방어력을 과신하고 있었고 승무원들이 주간훈련만 받았기에 야간 폭격에는 재훈련이 필요한데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을 들어서 주간 폭격을 해야한다는 입장을 유지하게 된다. 또 다른 하나는 정밀폭격과 지역폭격의 대립이었다. 영국 공군은 지역폭격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정밀도가 떨어지지만 더 넓은 범위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과 야간폭격에는 현실적인 문제로 지역폭격이 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 육군이 주장한 정밀폭격은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 하면서 핵심시설에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 있었다. 물론 그렇게 조준하는건 어려운 일이지만 미국의 노든 폭격조준기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명중률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주간은 미국이 야간은 영국이 각각 분담하고 각자 자신들의 방법으로 폭격을 하는 쪽으로 적당히 타협이 이루어지게 된다.
3.2.1. 미국
일단 참전하게 되자 미 8공군과 미 15공군은 B-17과 B-24를 운용하여 독일을 공습하게 된다. 하지만 미군은 아직까지 장거리 호위기의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이는 대전 초기에 영국의 폭격기 사령부가 폭격기에 별다른 호위기가 필요없다고 믿은것과 동일하다. 물론 아예 호위기를 붙여주지 않은것은 아니라서 기존에 운용하던 P-38 라이트닝이나 영국의 스핏파이어가 이들을 호위하지만 항속거리의 문제로 중간에 돌아와야 했다.
한편 독일도 상황이 썩 좋은것은 아니었는데 소련과의 전쟁으로 적지 않은 항공기와 대공포들이 동유럽에 배치된 상황이었기에 서유럽에 배치된 항공기과 대공포는 충분하지가 않았다. 특히 대구경 대공포들은 대지상 공격까지 담당하게 되며 필요수명 이상의 소모를 거듭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보유중인 항공기들은 폭격기를 상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상황이었는데 Bf109는 고고도에서의 성능은 괜찮으나 건팩 없이는 폭격기 상대로 화력이 다소 부족했고, 비교적 신예기인 Fw190A는 화력은 강력하지만 고고도에서의 공랭식 엔진의 성능 저하로 인하여 폭격기를 요격하기가 쉽지 않았다. 덕분에 미 공군의 폭격기 부대는 별 다른 호위기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럭저럭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3.2.2. 영국
영국은 독일의 야간 방공능력이 강화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중 대표적인것이 캄허버 라인(Kammhuber Line)이라고 이름을 붙인 방공 체계였다. 이는 레이더와 탐조등을 장비한 일련의 통제구역과 야간 전투기들을 연계시킨 방어 체계였다. 영국은 이러한 방어 체계에 대응해서 폭격기 열(Bomber Stream)이라는 전술로 대응하게 된다. 이 전술은 대규모 폭격기를 최단시간내에 투입하는 방법인데 미국의 컴뱃 박스 대형과 달리 종전까지도 사용되었다.
3.3. 1943년
3.3.1. 미국
독일이 폭격기를 요격하기에 알맞게 항공기를 개량해서 독일의 폭격기 요격능력은 점차 향상된 반면에 여전히 미군은 별다른 호위없이 폭격기들을 투입하고 있었다. 덕분에 미국의 폭격기 손실률은 점차 증가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서 미군은 컴뱃 박스 대형을 도입하게 된다. 이 대형은 폭격기들이 서로를 보호해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되었으나 독일 전투기들은 폭격기들이 장착한 12.7mm 기관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30mm가 넘는 구경의 기관포나 로켓을 퍼부어서 폭격기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강요했다. 요격에 나선것은 독일 전투기만이 아니라 폭격기들도 기관포등을 장착하고 요격을 하곤했는데 별 다른 호위전투기가 없었기에 미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결국 검은 목요일이라고 불리는 2차 슈타인푸르트 공습에서 291대의 B-17과 60대의 B-24를 투입하지만 그중 77대가 격추되고 121대가 손상을 입으면서 미육군항공대는 잠정적으로 주간폭격을 중단하게 된다. 이들이 다시 주간폭격에 나서게 되는것은 P-51 머스탱이 도입된 이후가 된다.
3.3.2. 영국
한편 영국 폭격기 사령부는 이 기간동안 어느정도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43년 초에 최초의 항공기 탑재 지상관측 레이더인 H2S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야간폭격에 좀 더 이점을 얻을 수 있었다. 루르 공습을 통해서 독일의 생산을 어느정도 방해하는 성과를 거두게 되는데 강철의 생산량은 180,000톤이 감소하게 된다. 특히 3월 16~17일에는 19대의 아브로 랭커스터가 투입된 야간 공습에서 댐 2개를 파괴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루프트바페를 위한 항공기 생산에도 상당한 차질이 생기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1943년 7월의 함부르크 폭격은 함부르크의 산업능력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으며 이때 영국 공군은 최로로 초기형 체프인 윈도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3.4. 1944년
연합군은 새로운 장거리 호위기인 P-51 머스탱을 본격적으로 운용하기 시작하였으며 아귀먼트 작전을 통해서 독일 공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힌다. 한편 이런 연합군의 전술의 변화는 독일 공군의 대응 또한 바뀌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모든 항공기가 폭격기에게 달려들면 되는, 비교적 단순한 상황이었으나 이제는 호위기에 대한 대책도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이에 독일은 각 기체에게 역할을 분담하게 된다.
그리고 5월부터는 석유 생산시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3.5. 1945년
1945년 5월 8일에 나치 독일이 항복하면서 독일 본토 항공전은 종료된다.
4. 기타
현대 공군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기본 기술은 이 독일 본토 항공전과 관련이 있을 정도이다. 영국은 폭격의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 최초로 항공기에 탑재된 지상관측 레이더를 개발하게되며 독일 공군은 영국 공군의 야간 폭격에 대응해 레이더를 탑재한 Bf110G를 투입했고, 반면 영국 공군은 레이더를 기만하는 채프의 조상인 윈도우를 이때 처음 사용했다. 독일은 강력해져가는 연합군 폭격기에 맞서기 위해 제트 엔진을 탑재한 Me262를 만들었고, 실패작이지만 로켓 전투기 Me163 코메트 역시 독일 본토 항공전의 산물. 그 외에 지대공 미사일이나 공대공 로켓 같은 무기체계 역시 이때 태어났다. 끝으로 방어에 급급한 나머지 영국 본토를 공격할 방법이 없자 순항미사일의 조상인 V1과 탄도미사일의 조상인 V2를 만들었다.
영어로는 Defence of the Reich라고 부르는듯 하다. 영문 위키에서 독일 본토에서 벌어진 공중전에 대한 내용을 담은 문서의 제목이 Defence of the Reich다.
5. 대중매체
전략폭격은 당시에도 생소한 전쟁 개념이었기 때문에 전쟁 직후부터 여러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국내에선 '정오의 출격'이라는 오역으로 소개된 1949년작 12 O'clock High라든가 1954년작 댐버스터즈 같은 작품들이 지금도 회자된다. 근데 명작까진 아니고, 냉전 시대 초기라서 그런지 선전영화 삘이 심하다.
좀더 최근의 영화로는 멤피스 벨이 있으며 몇몇 고증오류가 있긴 하지만 당시 폭격기 운용과 승무원들의 처절함을 엿볼 수 있는 수작. 다른 작품으로 터스키기 에어맨과 레드 테일 정도가 있지만 이는 호위 전투기 조종사들의 입장이라 전쟁 후반기의 모습 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2014년(예정)에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에 의해 독일 본토 항공전에 투입된 미 제8공군의 이야기가 HBO 드라마화된다고 한다. 제목은 마이티 에이트.
6. 관련항목
- 관련 개념 및 작전
- 관련 장비
- 관련 인물
- 기타
[1] 지상파괴 18,000대 포함. 독일측 자료가 상당부분 소실되어 확인되지 않은 전과가 많아서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 자료에 따라서는 55,000대 이상으로 추정하기도 한다.[2] 이 말도 중요하지만, 태평양 전선에서 다른 추축국을 두들겨 패던 모 석기시대 매니아의 말도 총력전의 개념으로는 역시 같은 맥락이다.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3] 물론 폭격이 시작된 1942년 10월 이후에는 독일 공군의 주력이 서부에 배치되었다. 특히 전투기는 서부에는 1400대 이상이 배치된 반면 동부에서는 400여대가 배치된 수준으로 차이가 컸다.[4] That hell is 5 miles above earth[5] 물론 이 선전물 살포는 그 자체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임무를 수행한 승무원들도 이에 대한 자괴감에 시달려서 '게슈타포 머리에라도 떨어지면 그게 어디냐'라며 선전물 종이뭉치의 끈을 풀지 않고 그대로 떨어뜨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선전물을 살포하기 위해 독일 상공을 다녀오면서 쌓은 경험은, 이후 제대로 된 폭격 작전을 수행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