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게돈(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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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기타


1. 개요



주제곡 김신우 - 마리
국산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 열풍이 한창이던 1996년 1월 20일 서울극장 등 전국 56개관에서 동시 개봉한 한국극장판 애니메이션. 이현세의 만화 아마게돈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원작자인 이현세가 작품의 총감독을 맡았다. 그리고 우리 애니 역사상 최초로 제작위원회를 만들어 제작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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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호 게임챔프 기사. 저기서 이뤄져 성공한 건 OST 하나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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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1월호 게임챔프 기사. 한국 영상산업의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지금 보면 헛소리로 끝난 글이....
1994년 3월부터 블루시걸보다 한달 먼저 일간지에 제작 소식이 처음 나와 그해 6월호 게임챔프에도 소개된 이후, 2년의 제작 기간과 25억원이라는 제작비를 투입했으며 이병헌, 최불암 등 톱배우들을 성우로 기용했다. 여기에 이현세의 네임밸류까지 더해지며 언론의 주목과 설레발을 한 몸에 받았으나 '''깔끔하게 흥행에 실패하고 만다.'''
결국 기획에서 한발 늦었던 블루시걸 못지 않게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에 있어 하나의 흑역사가 되었다.

2. 상세


'''블랙홀 속에 조난당한 <아마게돈>''' - 송락현

당초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대다수의 관객들도 아마게돈에 대해 지적한 문제점이 애니메이션격인 테크닉이 아니라 시나리오 설정상의 오류라고 지적한 점을 감안하여 볼 때, 제작 그 자체만의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 <아마게돈 제작과정> - 김혁 저. 하늘소. 1997.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한국 애니메이션 부흥의 시발점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되었던 이 작품의 실패는 도약하려던 우리 애니메이션계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같은 해에 개봉한 아기공룡 둘리의 극장판 얼음별 대모험 같은 성공작도 있었지만 아마게돈의 실패 후폭풍을 홀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000년 이후에는 본전 회수를 위해서인지 TV에서 심심찮게 틀어주기도 했다.
애니 제작에 참여했던 송락현 선생은 <송락현의 애니스쿨> 1권에서 아마게돈의 실패 요인을 일목요연하게 분석했는데, 우선 아마게돈은 개봉이 늦었긴 하였지만 제작에 착수한 시기는 블루시걸보다 한 달 먼저였다는 것이었다. 기획에서 후발이었던 블루시걸이 아마게돈보다 무려 1년 2개월 먼저 개봉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블루시걸이 아마게돈의 컨셉을 모방/급조하여 새치기로 개봉한 것밖에 안 된다.
이와 같이 아마게돈은 극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아이디어를 도둑맞고 그나마 정정당당히 승부를 겨루어야 할 경쟁작들이 모두 일본 기술을 앞세워서 관객들을 유린하여 차와 포를 잃고 개봉해야만 했다. 거기에 포스트 프로덕션 도중 미국에서 4채널 돌비 서라운드로 녹음한 효과음 및 사운드가 국내 필름 현상기술의 문제로 오른쪽 부분이 날아가는 등 돌발 사태와 직배 영화들과의 힘겨루기로 인한 극장 섭외 등이 맞물려 예정보다 한 달 늦어진 것이다. 이런 지각 개봉은 하필 같은 시기에 개봉한 '''토이 스토리'''와의 정면 대결로 이어져 흥행에 난제가 형성되었다.
우선 흥행 실패 문제에서는 상황 문제 이전에 기획상의 결함과 각본상 불찰이 더 컸는데, 전년도에 개봉한 헝그리 베스트 5가 경기장을 찾는 농빠들 위주로 관객 대상을 찾다 망한 작품이라면, 아마게돈은 그보다 범위가 넓지만 실제 관객 동원에 도움이 안 되는 청소년층을 주 타깃으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문제가 따른다.
애시당초 만화잡지나 TV애니, 비디오 애니를 주로 찾는 고객층 중 5할 이상이 중~고등학생이긴 하나,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매체가 아닌 극장 관람용 애니라면 사정이 다르다. 이는 입시 위주로만 일방통행되는 우리 청소년들이 처한 사회 여건상 청소년들의 하루짜리 영화관람 문화가 형성이 안된 게 문제이며, 이로 인해 1970년대 우리 영화계의 트렌드였던 하이틴 영화가 쇠락한 것이었다.[1]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보면 우리 극장가에서 청소년은 오든 말든 상관없는 대상이며, 그러면 관람객은 20세 이상의 성인이나 보호자를 동반하는 어린이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2] 똑같이 욕을 먹은 블루시걸이나 돌아온 영웅 홍길동이 실질 소비층인 어른과 어린이들을 각각 공략하여 흥행에 성공한 반면, 그렇지 못한 아마게돈은 어른들에게 기대 이하, 어린이에게 난해함을 각인시켰다.
그러나 위와 같은 모든 변명을 차치하더라도 아마게돈은 그 어떤 해명으로도 실드칠 수 없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실패 이유는 개봉 뒤부터 무수히 지적된 스토리 전달력 부족이었다. 이 애니는 원작자인 이현세 총감독 본인이 애착을 지닌 채로 제작에 임한 프로젝트였다. 다시 말해 이현세 화백이 전작처럼 타 제작사에 판권을 맡기고 의뢰해서 만들어진 게 아닌, 자신을 중심으로 한 제작위원회를 만들어 실제 제작에 부분 참여하며 제작한 작품이란 것이었다.
개봉 직후 이 작품을 감상한 업계 관계자들이 놀란 이유는 바로 어지간해선 애니화가 어렵다고 악명 높은 '''이현세의 그림이 움직인다'''는 사실이었다. 그 전에 애니화된 떠돌이 까치 시리즈의 경우 엄밀히 따져서 이현세 화백 자신의 그림체라 할 수 없다. 카메라의 각도에 따라 일그러지고 변질돼 버린 설까치와 최엄지의 모습이 시종일관 화면을 메꾸었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전문 캐릭터 관리자의 부재로 인해 누적된 우리 애니계의 고질적 문제인데 그런 부분을 아마게돈이 커버한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애니메이터들 스스로가 이현세의 그림체를 연구하고 자기화시키려는 노력이 강했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이런 노력에 동조한 총감독 이현세도 자신의 그림체에 대한 사명감을 지니고 원화 작감 부분에 상당 부분 할애하였다.
그러나 스토리 전개에 급급했던 탓에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당최 무슨 내용인지 못 알아먹겠다'며 손사래를 쳤다고 한다(...) 물론 11권 분량에 달하는 원작 만화의 방대한 스토리를 제한된 시간 안에 재현하기는 역부족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쓰잘 데 없는 씬(대표적으로 판도라의 목욕 장면이나 오혜성의 회상에서 나타나는 판도라의 서비스신 등)은 기다랗게 늘어놓는 등 기본적인 진행 구도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이상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원작을 모르고 보면 무슨 내용인지 이해할 수 없게 만들어 놓았고 원작을 아는 이들조차 내용 전개를 못 따라가고 허파가 뒤집어질 정도로 왜곡해 놓았으니... 굳이 비슷한 케이스를 찾자면 역시 원작을 과도하게 압축하여 비판이 일었던 AKIRA 극장판인데, 이쪽은 그나마 볼거리는 풍부했기 때문에 해외에서는 그 부분으로 장사가 되었지만 아마게돈은 그것마저 힘든 결과물이었던 것. 그러나 이는 애니 제작에서 중요한 게 화려한 그래픽이나 그림 이전에 스토리와 구성이라는 교훈을 우리 애니계에 남기기도 했다.
또한 이 영화 이전에 개봉한 돌아온 영웅 홍길동이 합작이라는 특성을 감안해도 원작의 고유색을 살려내지 못했다는 점과 동시에 발성훈련이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배우들을 성우로 기용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흥행에 성공했어도 지금도 욕먹고 있다면, 아마게돈은 덜하지만 이와 같은 맥락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애니 제작이 끝날 적인 1996년 1월 29일자 조선일보에서 이례적으로 낸 사설 <만화영화는 산업이다>를 통해 원작에서부터 콘티 연출, 원화, 채색, 촬영, CG까지 우리 손으로 해결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우호적으로 평가받았으나, 작화 등의 그래픽 부분도 비판을 받았다. 당시로서는 최초로 디지털 색지정 작업을 했지만, 정작 원화 작업에 들어가서 실제 사용 물감에 대응하지 못해 임시방편으로 비슷한 색으로 바꾸는 등(애니메이션 물감은 종류도 많을 뿐더러 같은 공장에서 같은 물감이라고 구입해도 생산분에 따라 색감이 달라지는 경우도 있다) 작업 전반에서 어이없는 실수를 연발했다고 하니, 제작진의 경험 미숙이 작품에 얼마나 큰 타격이 되는지 알 수 있다.
게다가 예고편이나 언론매체에 공개한 몇 장의 샘플 사진 등에선 일본 애니메이션이 부럽잖은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는데 정작 본편 내에 쓰여진 대부분의 원화나 배경미술 등은 당시 기준으로 고액 제작비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질이 낮았던지라 한동안 고위 스태프들의 제작비 유용/횡령설 떡밥이 돌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실제로 제작비의 90% 가까이가 애니메이션 제작진 식비 및 월급 등으로 사라진 데다 몇몇 증언에 따르면 '이대로는 작업 못한다' 라고 반 파업 상태에 들어간 애니메이션 스탭들 기분을 풀어주러 단란주점에도 자주 갔는데 여기에 들어간 비용만 해도 수천만원 어치라고. 그래서 '제작비로 단란주점 갔다 왔다!' 라는 악명까지 떨쳤다. 사실상 '제작비=회식비' 영화의 시초.
쥬라기 공원에 사용되었던 실리콘 그래픽스의 '인디고' 같은 컴퓨터 장비들과 소프트웨어 '웨이브 프론트' 등 당시로서는 첨단으로 불리는 기술을 차용했지만, 스태프들의 소프트웨어 숙련도 부족에 작화의 색감이 저열하게 보이는 문제까지 겹쳐 별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 부분은 지금이라면 문제가 안 되는 부분이라 더 아쉽다.
더구나 하기와라 카즈시의 판타지 만화 바스타드에 등장하는 '용전사' 의 메카닉 디자인과 매우 흡사한 메카닉이 최종보스로 등장해서 그 당시 PC통신 커뮤니티에서 여러가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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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김신우가 불렀던 주제가인 "마리" 는 상당히 좋았다.[3] OST 속지사진은 이곳을 참고할 것.
애니는 망했어도 되려 OST가 더 좋았다는 평가를 받으면서(솔직히 전체 OST보다 "마리" 하나가 지배적으로 좋았다는 평가[4]지만) 애니 OST로 드물게 당시 15만 장이 넘는 엄청난 판매를 기록한 바 있다. 참고로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OST 역사상 판매기록 10만 장을 넘긴 경우가 좀처럼 없던 걸 생각하면 작품이 개판으로 망하는 판국에 이런 성과는 대단한 것이며, 서브컬처가 꾀죄죄하기 그지없던 20세기의 대한민국에서는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시도였다는 점만큼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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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총감독인 이현세가 제작비 내역과 여러 가지 제작 이야기, 실패 원인 등을 분석하여 <아마게돈 백서>를, 1997년에 김혁이 <아마게돈 제작과정>을 책으로 각각 출판했는데, 여기까지만 보면 이현세는 자신의 실패를 깔끔히 인정하고 차기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한 타산지석으로 삼을 것을 당부한 대인배의 이미지로 남았겠지만 실은 이후 TV 방송에 출연해서 이런 결과는 '''자신의 무능 탓이 아니라 운이 안 따라 줬다'''는 졸렬한 자기 합리화를 늘어놓으면서 '(다른 작품으로) 복수해야죠' 라는 요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뭐, 아직까지 새로운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냥 허세였는지도 모르지만.

3. 기타


  • <아마게돈 백서>에 나온 수익 대차대조표에 따르면, 당시 제작에 소요된 경비 25억 3백만 원에 비해 수입은 13억 8700만 원에 불하여 순 손실 금액이 11억 1600만 원에 달했다.
  • 애니메이션 평론가 송락현이 해당 작품의 프로듀서였다.
  • 이 작품의 프로듀서였던 김혁은 1999년 개봉한 극장판 애니메이션 철인사천왕의 총 감독을 맡았는데 공교롭게도 철인사천왕 역시 깔끔하게 흥행에 실패했다. 김혁은 나중에 회고하길 이때 달라는 대로 돈 주고 회식도 하면서 기분 풀어주고자 대우했건만, 애니메이터들은 투잡스로 해외 애니 하청까지 하면서 이거 만드느라 다른 애니 원화가 그 모양이 되었다고 이를 갈았던 바 있다.
  • 이 작품에는 원래 이병헌이 아닌 한석규가 출연하기로 하였으나 당시 영화 은행나무 침대 촬영일정과 겹쳐 막판에 고사하여 이병헌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사실 한석규는 성우 출신의 배우여서 그 당시 성우 출신 배우라는 꼬리표를 겨우 끊어냈는데 또다시 성우를 한다는 건 잘못된 생각이 들어서였다고 한다.
  • 디자이너 이신우가 등장인물들의 복식이나 장신구를 많이 만들었고, 여전사들 일부는 비녀를 형상화한 액세서리를 머리에 꽂는 등 한국 전통 문양이 많이 채용되었다. 주인공 등 등장인물 머리스타일은 헤어디자이너 박준이 맡았다.
  • 사족이지만 당시 거리엔 극장개봉 영화를 위한 포스터 게시판이 존재했다. 수많은 수입외화와 실사영화 포스터들 사이에서 이 아마게돈의 포스터는 단연 눈에 띄었다. 포스터에 나온 글귀가 가관인데 맨위 이미지를 봐도 알겠지만 바로 고품격 애니메이션, 그리고 "출구는 하나... 그는 가고 나는 남는다" 하는 헤드카피도 인상적이었다(...) 문제는 그 헤드카피가 스토리 진행에서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대사였다는 것.[5]
[1] 당시는 아직 IMF도 오지 않은 1996년으로, 2000년대 이후의 멀티플렉스 시대와는 극장 문화가 현저히 달랐다. 제대로 된 영화 한 편 보려면 너도나도 서울 종로로 갈 수밖에 없었고, 지방 동시 상영이라는 건 상상도 못 할 시대. 입시열풍이 절정에 달해 청소년들이 아무리 영화에 흥미가 동하더라도 영화 한 편 보자고 하루를 할애하기는 쉽지 않던 때이다. 이는 비디오 대여 문화 형성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2] 그래서인지 당시 애니 등급에는 고교생 이상 관람가가 없이 연소자 관람가 내지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만 받았다.[3] "마리"는 1999년에 발표한 김신우의 4집 "귀거래사"에 재편곡해서 수록하였다. 1996년에 나온 김신우의 3집 수록곡인 "태양"은 "마리"와 멜로디만 같고 가사는 다르다.[4] 게이머즈같은 잡지에서도 2000년 초반에 한국 애니 관련 기사를 쓰며 아마게돈을 보고나니 남은 건 주제가 마리 하나 뿐이었다...라는 글이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20년 후 극장에서 보고나니 주제가만 남은 애니가 일본에서도 등장하는데..[5] 원작의 분량으로 따지자면 엘리시온에서 빠져나올 때, 즉 초반부를 겨우 벗어날 시점이다. 중요도가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