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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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규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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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대상 대상
고현정
(2010년)

한석규
(2011년)


손현주
(2012년)
주원
(2015년)

한석규
(2016년)


지성
(2017년)

역대
[image]
남우주연상
제17회
(1996년)


제18회
(1997년)


제19회
(1998년)

문성근
(꽃잎)

한석규
(초록물고기)


박신양
(약속)


역대
[image]
남우주연상
제34회
(1996년)


제35회
(1997년)


제36회
(1999년)
[56]
최민수
(테러리스트)

한석규
(초록물고기)


최민식
(쉬리)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이경영
(1996년)

한석규
(1997년)


박중훈
(1998년)






<colbgcolor=#424242><colcolor=#FFFFFF> 한석규
韓石圭

출생
1964년 11월 3일 (59세)
서울특별시 성북구 종암동[1]
국적

신체
178cm, 64kg, AB형
직업
배우
배우자
배우자 임명주[2]
자녀
슬하 2남 2녀
학력
서울숭례초등학교 (졸업)
용문중학교 (졸업)
용문고등학교 (졸업)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 / 학사)
종교
무종교
소속사
클로버컴퍼니
데뷔
1990년 KBS 성우극회 22기
1. 개요
2. 활동
2.1. 데뷔 전
2.2. 1990년대 초반 MBC 공채 시절
2.3. 1990년대 중, 후반 전성기
2.4. 하락세
2.5. 2000년대 초반 휴식기
2.6. 2000년대 중, 후반 슬럼프
2.7. 2011년 화려한 부활, 그 후
2.8. 2020년 ~
3. 기타
3.1. 명대사
4. 출연
4.1. 영화[3]
4.2. 드라마[4]
4.3. CF
5.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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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배우. 199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배우였다.

2. 활동



2.1. 데뷔 전


"넌 성우도 어울리지만, 내가 보기엔 배우가 더 어울린다."

배우에서 성우로 전향했던 선배 성우 장세준이 배우 "한석규"에게 한 말.

지금은 배우로 유명하지만 한때는 가수였고 성우 활동도 한 적이 있다.[5] 콧소리 섞인 미성에 성우 출신다운 정확한 발음과 발성이 트레이드마크.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목소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다. 광고 내레이션으로 많이 노출된 탓도 있지만…
1984년 제5회 MBC 강변가요제에 대학 동기들과 함께 '덧마루'라는 그룹을 짜서 '길 잃은 친구에게'라는 노래[6]를 불러 장려상 입상도 하였다.영상▶ 이후 육군 병으로 입대하여 제27보병사단에서 박격포 주특기로 복무하며 강변가요제 입상경력 덕분에 분기에 한번씩 문선대 단원으로 차출되었다가 허리부상으로 의병 제대를 하였다.
원래 배우가 꿈이었으나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포기했다고.[7] 1990년 KBS 성우로 입사했다가 이듬해 1991년 MBC 공채 탤런트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된다. 라디오 드라마에서 활약하던 성우 한석규를 기억하는 몇몇 오래된 성우팬들은 그를 ‘소년과 청년 역에 잘어울리는 높고 부드러운 미성을 가졌던 젊은 성우’로 회고하기도 한다. 1999년 씨네 21과의 인터뷰를 보면, 성우로 입사했을 당시 절친한 선배인 장세준 성우가 "넌 성우도 어울리지만 내가 보기엔 배우가 더 어울린다."는 말에 도전하여 배우의 길을 걸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장세준은 TBC 공채 배우 출신이었다가 KBS 공채 성우로 전향한 케이스이다.[8]
김승준 성우가 전속 시절 일화를 말하길(2019년 3월 30일 홍쇼), 정형식 PD가 '사랑으로 크는 나무' 배역에 김승준을 넣을려고 했다가 동기인 한석규를 넣었는데, 굉장히 잘해서 김승준이 놀랐다고 한다. 한석규는 작품 중에 MBC 탤런트 공채 시험이 붙고 성우를 그만두고 김승준 성우가 배역을 이어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홍쇼에서 홍시호가 언급하길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고, 자신이 이 길을 계속 가도 될지 등의 고민을 털어놓았다하며 문선희는 한석규에게 연기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는데 친절하게 잘 가르쳐줬다고 회고했다.

2.2. 1990년대 초반 MBC 공채 시절


데뷔는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이었는데 큰 비중은 아니었고 지금으로 치면 시즌 1 마지막 부분에 잠깐 나왔다.
그 후 여명의 눈동자에서 서북청년단 역으로 단역으로 잠깐 모습을 비춘 한석규는 1993년에 역대 최고 시청률 7위 (61.1%)를 기록한 드라마 아들과 딸에서 부드러운 남자 이미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극중 여주인공 김희애에게 의지가 되는 역할로 큰 인기를 끌었고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게 되면서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9]
아들과 딸 직후, 최수종, 채시라와 드라마 파일럿에 캐스팅, 이 드라마 역시 4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며 확실하게 최고 스타로 군림한다. 파일럿의 대성공 이후 당시 MBC의 가족극이었던 한지붕 세가족의 출연진들이 교체되면서 새로 투입되었고[10] 다음 해 1994년, 학교 선배이자 한때는 최고의 파트너였던 최민식과 드라마 서울의 달에 캐스팅되어 자체 최고 시청률 48.7%를 기록, 연타석으로 성공하며 자리를 굳힌다.[11]
그러는 도중 마지막 승부 후속드라마로 편성된 박형준, 이시은[12]의 미니시리즈 '도전'의 시청률이 영 나오지 않자 오연수와 함께 시청률 상승 카드로 중간에 투입된다. 요즘 같으면 한석규, 오연수 같은 스타들이 시청률 상승을 위해 중간 투입되는 경우는 없으나, 이 때는 공채 시스템이었고 스타여도 방송국에서 하라고 하면 해야 하는 신세였다.
그 뒤에는 1994년 SBS모래시계에 대항하기 위해 제작된 까레이스키라는 드라마에 단역중에 단역으로 나왔다.[13] 당시 한석규처럼 상한가를 쳤던 많은 스타들은 공채 시스템이라 이렇게 중구난방으로 투입됐다.
이후 호텔을 둘러싼 형제 간의 갈등을 그린 MBC 미니시리즈 호텔을 끝으로 한석규는 영화계로 진출한다. 영화계로 진출한 그가 한동안 드라마판으로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는 "닥터봉호텔과 함께 찍으면서 체력적으로 상당히 힘들었고, 서로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게 쉽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고, 그 이전에도 주말극 서울의 달, 일요아침드라마 한지붕 세가족, 수목미니시리즈 도전에 출연하며 무려 3작품이나 겹치기 출연을 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14]

2.3. 1990년대 중, 후반 전성기


한석규처럼 되고 싶은 게 롤모델이었고, 오롯이 혼자서 한국영화를 짊어졌던 시절이 있었거든요. 투자가 되는 배우는 한석규만 되던 시절이 있었어요. 꽤 길게

-설경구, 씨네 21 인터뷰 중[15]

-

이 때는 1950년대부터 내려오던 전통적인 충무로의 질서가 해체되고, 영화계 외부에서 수혈된 새로운 인력들과 대기업과 금융권의 참여로 제작과 유통환경이 개선되면서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모두 한국 영화가 한 단계 도약하던 시기이다.[16] 이 시기를 거치면서 한국 영화는 주먹구구식 가내수공업에서 문화 산업으로 환골탈태한다. 그리고 이 흐름의 최선두에 흥행과 비평 모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인 한석규가 있었다.
드라마의 연속 성공으로 충무로에서도 한석규한테 상당한 관심을 보였고, 10여개의 시나리오가 한석규한테 전달되었다. 그리고 로맨틱코미디 닥터봉을 영화 데뷔작으로 선택한 한석규는 홀아비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 내며 당시 서울 관객 기준 376,443명을 동원, 그 해 한국영화 관객수 1위를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한다.[17] 한석규가 데뷔작을 가벼운 코미디로 선택한 까닭은 너무 심각한 주제보다 본인에게 맞는 장르로 무난하게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닥터봉'과 함께 출연을 검토했던 영화는 심혜진, 진희경이 출연하는 스릴러물 손톱이었다.[18] 데뷔작 '닥터봉'의 성공으로 한석규는 단숨에 충무로 최고의 흥행 배우로 떠오르면서 무려 40여 개의 시나리오가 그에게 몰린다.
그 다음해인 1996년, 배우 박성미의 남편인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이자 CG 및 특수효과가 화제로 비극적인 사랑이야기를 그린 은행나무 침대에 출연하여, 서울 기준 68만 5천명을 동원하며 확실한 관객 동원력과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영화배우로서의 입지를 넓히게 되지만, 캐릭터의 화제성은 다른 배우에게 모두 빼앗긴, 유일한 영화이기도 하다.[19]
1997년에는 무려 세 작품에 출연했다. 이창동 감독의 데뷔작인 초록물고기(서울 기준 163,655명), 조폭연기가 인상적이었던 블랙 코미디 넘버 3(서울 기준 297,617명), 당시 유행하던 PC통신 채팅을 소재로 꽤나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냈던 접속(서울 기준 674,993명)을 연달아 히트시켰으며, 느와르(초록물고기), 블랙코미디(넘버 3), 멜로(접속)[20]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캐릭터에 완벽히 녹아들며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었다. 서울의 달 이후 슬럼프를 겪고 있던 학교 선배 최민식초록물고기에서 같이 출연하며 주목받기 시작한 송강호넘버 3에 출연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는 등 능력있는 배우들을 밀어주기도 했다.[21]
1998년에는 한석규가 출연한 최고의 작품이자 많은 영화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최고의 멜로작품으로 꼽히는 8월의 크리스마스에 출연했다. 어찌 보면 뻔한 신파 멜로이지만 허진호 감독은 세련된 화법과 형식미로 신파조 멜로를 뛰어넘었다는 극찬을 받았고, 한석규의 연기력, 자연스럽게 잔잔한 일상을 표현하는 연기력도 호평을 받았다. (네이버 영화 홍성진의 영화해설 인용) (서울 기준 422,930명) 참고로 한석규는 이 영화 OST 앨범에 들어가는 주제곡도 직접 불렀다.
다음 해인 1999년 강제규 감독의 쉬리로 전성기의 정점과 티켓파워의 정점을 찍는다. 남북한을 소재로 순 제작비 24억원과 각종 특수효과와 총격전 등 많은 화제를 불러모은 이 영화는 타이타닉이 가지고 있던 대한민국 영화 관객 동원 1위의 기록을 깨면서 580만이 넘는 관객[22]을 동원, 110억원의 수익을 올리는 기록을 남겼다.[23]
그 해 말,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호흡을 맞췄던 심은하와 함께 미스터리 스릴러물인 텔 미 썸딩에 출연했다. 서울 기준으로 73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흥행은 성공시켰으나 앞뒤가 뚝뚝 끊기는 스토리와 영상이 너무 형편없었다. 다만 석연치 않은 결말이 나름 당대에는 충격적인 반전인지라 결말에 대한 입소문이 좋았다. 미술도 좋은 평을 받았다.
1995년 닥터 봉을 시작으로 1996년 은행나무 침대, 1997년 초록물고기, 넘버 3, 접속, 19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1999년 쉬리텔 미 썸딩까지 8편 연속 대흥행을 기록하면서 1990년대 후반 한국영화계를 완벽하게 지배했던 한석규는 그러나 1990년대 마지막 작품인 텔미썸딩을 끝으로 서서히 하락세를 타게 되었다. 전성기는 짧았으나 그 장악력은 한국 영화사상 전무한 수준. 현재의 탑배우들의 존재감을 오롯이 혼자 보유하고 있었다고 보면 된다.

2.4. 하락세


한석규의 하락세는 사회적인 문제나 스캔들 때문이 아니었다. 충무로 진출 이후 단 한번도 실패작에 출연하지 않았고, 비평에서도 실패한 작품[24]이 거의 없다시피하여 1990년대 중, 후반은 독보적인 원탑이었다.
1997년 ~ 1999년 씨네21에서 조사한 '충무로 파워 50인'에서도 한석규는 최소 10위권을 벗어나 본 적이 없다. 최고 순위는 1998년에 조사한 2위. 웬만한 유명 제작자와 감독도 한석규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할 정도로 그가 영화계에 끼친 영향력은 2000년대 배우들 중에서도 전무후무할 정도였다. 이 때 대한민국의 모든 시나리오의 99%가 한석규에게 맨 먼저 갔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 시기 왕성한 활동을 했던 탑배우들보다 한석규에게 먼저 시나리오가 갔고, 그가 거절하면 다음 순서로 받아보는 건 업계에서도 당연시 여겨졌다.[25] 물론 배우가 시나리오를 선별하는 능력은 중요하지만, 그 까다로움이 너무 지나친 것은 문제였다. 거기다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리고 CF에 전념하는 모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게 되자 "8월의 크리스마스"가 개봉하는 1998년부터 한석규 자체를 고깝게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그의 행동마저 조금씩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매니저를 맡은 친형 한선규 때문이었는데, 한석규에게 들어오는 시나리오를 1차 검토하는 역할도 맡았다.[26] 시나리오를 판단하는 역할만 했으면 좋으련만, 매니저의 행동을 넘어 영화 제작에까지 신경쓰다 보니 정작 한석규 본인이 하고 싶었던 작품은 시나리오 선별작업에서 퇴짜를 놓거나[27][28] 충무로 입성 초기 닥터봉이 크게 성공하여 수많은 시나리오가 들어올 무렵에는 사전에 한석규와 상의없이 무조건 출연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출연 번복을 하거나 개런티가 적다며 퇴짜를 놓기도 했다. 이 당시 발매된 영화잡지와 각종 신문들에 실린 한석규 관련기사가 "어느 영화에 출연 확정되다." 이런 식이었다. 한석규에 대한 기자들의 평이 안 좋게 나온 시기가 1996년 무렵이라고 생각하면 될 듯.
심지어, 그동안 한석규가 벌어준 돈 수십억 원을 날리기도 했고[29] 1990년대 후반 영화잡지 월간 스크린에서 주최한 핸드프린팅 행사 제의도 단칼에 거절하는 등[30] 오지라퍼 행동으로 한석규를 기피하는 제작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동안 한석규의 공백기가 길어지면서 하락세가 되자, 빛을 보지 못하던 다른 배우들이 조금씩 도약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굳이 한석규가 아니더라도 연기나 흥행 면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만한 배우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31] 한석규로서는 조금씩 설 자리를 잃게 된 셈이다.

2.5. 2000년대 초반 휴식기


2002년 영화 이중간첩으로 복귀하기까지 3년이라는 공백기를 지난다. 하지만 3년 동안 마냥 쉰 것만은 아니었다. SF물인 제노사이드,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차우, 그리고 소금인형이라는 작품에 출연하기로 되었었고 소금인형의 경우 4~50% 정도 촬영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투자 문제로 무산되어 본의 아니게 3년 동안 쉬게 된 것.[32]
그 3년 동안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가 한석규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송강호는 반칙왕으로 씬 스틸러 조연급을 넘어 주연 데뷔에 성공적으로 안착, 공동경비구역 JSA로 자리를 확실하게 잡았으며 최민식은 쉬리를 통해 슬럼프를 완전히 씻어내고 해피 엔드파이란으로 정상의 자리를 공고히 다졌다. 설경구는 99년 박하사탕으로 혜성같이 등장하여, 2002년에는 1997년의 한석규처럼 공공의 적, 오아시스, 광복절 특사를 연속으로 히트시킨다. 3년의 공백기동안 세대교체가 순식간에 이뤄지게 된것이다.

2.6. 2000년대 중, 후반 슬럼프


3년 간의 공백 끝에 2002년 영화 이중간첩으로 복귀한다. 사실상 한석규라는 이름은 흥행불패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에 굉장한 주목을 받았지만.. 한석규는 첫번째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된다. 69억이라는 제작비가 들었으나 흥행 기록은 서울 361,580명 전국 1,025,928명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사실 영화적인 완성도가 아주 낮은 것도 아니고 차후 어느 정도 재평가되긴 했지만 상대 여배우인 고소영연기력이 해도 해도 너무 할 정도로 부족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발연기 배우들도 연기 연습을 제대로 하고 나오는 시대인지라 아주 심각하게 떨어진다 느끼는 경우는 드문데 이중간첩 고소영의 연기는 2010년대인 요즘 보자면 정말 손발이 오그라들 정도로 형편없었다. 여주인공이라는 사람의 연기가 극악한 수준이니 영화가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것도 욕심이었을 듯. 이로 인한 실패라고 보는 것이 맞겠다.
흥미로운 인터뷰, 이중간첩 복귀 전 공백기간 동안 한 기자는 왜 공백기를 가졌냐고 묻자 답하길 지금은 한국영화의 거대한 거품이 낀 시기고 이 거품이 다 빠져나간 후에서나 진짜 작품 활동을 해야 할 것이라고 답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2001년 ~ 2003년은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어 가는 감독, 작품, 배우들이 봇물 터지듯이 터져나온 시기였다(…). 특히 2003년은 박찬욱올드보이, 봉준호살인의 추억, 김지운장화, 홍련이 한꺼번에 출현했던 한국 영화 최고의 황금기였다. 그리고 2014년 12월 손석희 사장과의 인터뷰에선 부흥기였지만 거품이 굉장히 많은 시기였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지만 영 틀린 말도 아닌 것이 봉준호, 박찬욱을 위시한 몇몇 한국 영화계의 대표적인 거장들과 많은 걸작들이 탄생한 시기였지만 사실 그들의 존재는 한국 영화계에서 지극히 일부였고 그 당시에는 오직 수익만 노리는 개그 + 신파 + 조폭이라는 코드로 묶을 수 있는 2000년대 초중반의 B급 이하의 영화들이 양산된 시기이기도 했다.[33] 개그+조폭+신파라는 장르마저 새로 만들어도 될정도로 영화들이 양산되었고 이런 작품의 주연들이 온갖 예능에 출연해서 개봉 1~2주간 후딱 벌어먹고 빠지는 식의 쓰레기스러운 현상이 지속되었던 시기였다. 특히 상술한 명작들도 많았지만, 망작의 대명사인 긴급조치 19호,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주글래 살래, 클레멘타인 모두가 한석규의 휴식기 ~ 복귀 시점인 2002년 ~ 2004년에 나온 작품이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현재 2010년대에도 이러한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는게 문제.[34]
여튼 한석규는 결국 2003년 프리미어에 손예진과 함께 과대평가된 배우에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는다. #[35] 아이러니하게도 1996년 6월 프리미어에서 선정한 한국배우 평가에서는 한석규가 당시 최고의 배우로 평가를 받았던 안성기, 박중훈, 문성근, 이경영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이후, 형과는 결별했는지 과작(寡作)의 대표적인 배우였던 한석규는 다작(多作)배우로 거듭나게 된다. 2004년에는 스릴러물인 영화 주홍글씨와 2005년 블랙코미디 작품인 그때 그 사람들에 출연한다. 주홍글씨의 경우 첫 주에 흥행 1위를 기록하는데 초반의 흥행을 이어나가지 못하면서 하락세가 대폭 심해졌고 영화 역시 흥미진진한 초반과는 다르게 후반으로 갈수록 뚝뚝 끊기면서 영화 내적인 면이나 흥행면이나 용두사미적인 작품으로 끝났다. 서울 489,254명, 전국 1,437,549명으로 대흥행까지는 아니지만 겨우 손익분기점은 넘겼다. 한 때의 흥행의 제왕이었던 한석규의 위상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대중들에게 다가오는 느낌은 흥행 실패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로 주홍글씨 개봉시기에 평론가 하재봉은 이제 한석규의 시대는 갔다. 그는 한물 간 배우가 되었다고 대놓고 깠다.
그때 그 사람들은 좋은 소재를 제대로 끌고 나가지 못한 면이 있었고[36] 서울 338,025명, 전국 1,083,962명(제작비 60억)을 동원하는 데 그치면서 두번째 영화 실패작으로 남게 된다.
3년이 공백의 무색하도록 2005년에는 또 다른 작품에 출연했는데 초심을 찾기 위한 것인지 안전해보여서 택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닥터 봉 이후 10년만에 코미디 영화 '미스터 주부퀴즈왕'에 출연했다. 하지만 배급사에서도 버린 카드라고 생각했던지 제대로 홍보도 안 되었고[37] 개봉 얼마 후에 케이블에서 볼 수 있었다. 서울과 전국 합해 50만 명도 기록 못한 처참한 실패작.
복귀 이후 세 작품을 실패했지만, 그래도 한석규라는 이름에 기대를 많이 했는지 절치부심하는 심정으로 도전했는지 2006년에는 세 작품에 연달아 출연한다. 그것도 단독주연이 아닌 공동주연으로..
영화 스캔들의 시나리오를 집필했던 김대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음란서생'은 서울 868,692명, 전국 2,576,022명을 동원했으며, 관객들로부터 작품성 역시 인정받았다. 이로써 그도 침체기에서 벗어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다음 작품인 영화 구타유발자들은 서울과 전국 관객 합쳐 20만 명도 기록하지 못하여 역대 한석규 출연작들 중 최저의 흥행스코어를 기록한 영화로 남게 되었다.[38] 그러나 구타유발자들은 상영한지 10여년이 넘었어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숨겨진 명작으로 회자되고 있다. 다만 구타유발자들의 경우 영화를 실제 보면 알겠지만 포스터에 한석규가 나올 뿐 실제 한석규는 특별출연에 가까운 느낌이다.[39] 원래 제안받은 역할은 이문식이 맡았던 봉연 역할이었지만 시나리오를 곰곰히 검토한 한석규는 문재 역할이 자신에게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고 역으로 제안한다. 다만 한석규 외의 다른 출연배우들의 이름값이 조연에 불과했던 이문식이나 당시에는 올드보이의 감옥사장 정도로나 기억되던 오달수나 신인이었던 차예련, 김시후 등이었기 때문에 크레딧이나 포스터에 얼굴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영화 전체의 흐름을 보면 초반과 막판을 제외하고는 한석규는 얼굴조차 안 비친다. 그런 영향이 흥행에 영향을 준 것도 적지 않다.
그 해 가을 개봉한 8년만의 멜로작품인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은 현실적이고 공감이 간다는 평과 지나치게 밋밋했다는 평 두 가지가 크게 갈리는 작품이었고, 흥행에 실패했다.
2006년에 세 작품이나 출연하며 다작을 했던 한석규는 2007년에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2008년 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컴백했다. 당초 감독을 맡기로 했던 안권태 감독이 촬영 중반 곽경택 감독으로 교체되면서 대본이 수정되었고, 비중 문제로 안 좋은 말이 나왔던 작품으로 촬영 자체가 험난한 작품이었다. 더구나 같이 개봉했던 작품이 다크 나이트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미이라3로 상당히 불리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그 틈바구니 속에서도 나름 선전, 26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성공했고, 손익분기점도 간신히 넘기고 그나마 중박은 쳤다.
2009년에는 주연으로 영화 백야행에 출연한다. 원작소설도 3권씩이나 되고, 영화가 아니라 드라마로 나왔어야 할 분량을 2시간 짜리로 압축했으니. --작품 완성도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2010년, 한석규는 코미디 영화인 이층의 악당을 통해 다시 도전했다. 특히 닥터봉을 통해 서로에게 윈윈이었던 김혜수와의 합작이어서 많이 기대했고 그 전과는 달리 이번엔 2005년 '달콤 살벌한 연인'으로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한 손재곤 감독과의 작품이었는데 촬영 전부터 좋은 시나리오라며 호평을 들었고 또 평론가들 역시 호평을 아끼지 않으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기대도 컸지만 흥행에는 실패했다.[40]
한석규는 1990년대와 2000년대의 위상이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몰락하게 된 이유는 4년간의 공백으로 한석규의 역할을 대신 할 배우들인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황정민 등이 급성장했고, 한석규 역시 2000년대 선택한 작품들이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이며 많이 밀리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선구안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사실 선구안도 문제지만 한석규 외에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들이 많이 있는데 굳이 그 개런티 줘가면서 한석규를 쓸 이유가 없으니 시나리오가 애초에 잘 가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41]
한석규의 부진에 대해 너무 검증되지 않은 신인감독과 작품을 한다는 것을 원인으로 꼽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 타당한 이야기. 대부분의 흥행배우들을 보면 감독과 배우들이 인맥으로 같이 가는 경우가 많은데, 한석규의 경우 신인감독과의 작품을 고집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박찬욱, 김지운, 이창동, 봉준호 감독 등 검증된 감독과 작품을 하는 최민식, 송강호라든지, 강우석, 윤제균 감독 및 그 연출부 출신들과 작업을 하는 설경구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한석규의 경우 데뷔작을 같이 했던 이광훈 감독은 닥터 봉 이후 패자부활전, 자귀모, 천년호라는 영화 팬들은 알만한 최악의 작품을 연속으로 연출하며 2003년을 끝으로 영화계에서 자취를 감췄고 현재 뉴욕에 거주중이다. 그리고 은행나무 침대와 쉬리를 같이했던 강제규는 현재 제작에만 전념하며 가뭄에 콩 나듯 연출하다가 마이웨이의 실패와 한중합작영화 제작 실패 등등의 악운이 겹쳤으나 다시 영화연출을 하게 되었다. 한편 초록물고기의 이창동 감독과 8월의 크리스마스의 허진호 감독은 활발하게 작업을 하는 감독이 아니고 접속과 텔 미 썸딩을 같이 했던 장윤현 감독은 그 후 썸, 황진이, 가비가 연속으로 실패해버렸다. 거기에 넘버 3의 송능한 감독은 아예 영화계를 떠났다. 즉, 8편 연속 흥행으로 1990년대 전성기를 가져다 준 감독 중 현재에도 활발하게 작업을 하고 있는 감독들이 거의 없는 게 사실이다.
이처럼 2002년까지 티켓파워 1위를 기록했던 그가 2000년대 침체기 이후에는 언론에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으며, 가끔 하는 설문조사 순위권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었다.

2.7. 2011년 화려한 부활, 그 후


이층의 악당까지 실패하자 한석규는 15년 간 하지 않았던 TV 드라마 영역에 발을 들이게 된다. 2011년 하반기 SBS 수목 드라마인 뿌리깊은 나무세종 역으로 복귀. 욕쟁이 세종(…)장난끼, 그리고 진지한 역할을 깊이 있게 선보이면서 열연하여 역시 한석규 어디 가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명실상부한 배우의 입지를 다시금 드러내 보인 것.
뿌리깊은 나무 15회에서 밀본의 하수인이자 집현전 학사들을 의문사시킨 윤평(이수혁 분)을 직접 추궁하며 강직, 비굴, 냉소를 담은 3단 폭풍열연을 펼쳤다. 영상 20:18
눈물을 머금은 채 "광평과 소이의 털끝이라도 건드린다면 의금부, 내금위, 우림위, 별시위, 겸사복뿐 아니라 모든 병력을 총동원하여 네놈들을 모조리 소탕하고, 저자거리, 모든 백성들 앞에서 사지를 거열한 뒤, 그 시신을 조선 팔도에 나눠 걸어 국본을 바로 세우겠다"며 강직한 모습을 선보였다.
그러다 이내 그는 "제발 알려다오. 우리 광평만 살려다오. 내 모든 것을 포기할 것이야"라는 대사와 함께 비굴한 모습으로 변신했다. 이도 잠시, 그는 "둘 다 아니다. 난 네 놈들이 누군지 관심 없다. 또한, 네 놈들이 뭘 원하건 상관치 않는다. 너희들이 뭘 원하건, 네 놈들은 원하는 걸 하나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라며 "반드시 그리 만들 것이다. 하여 네 따위 놈들과 협상은 없다. 또한! 네 놈들에게 피로써 되갚지도 않을 것이다! 너희들이 어찌 실패하게 되는지 똑똑히 두고 보거라"라며 냉소적이면서도 힘주어 말하는 3단 열연을 선보였다.
방송 직후 시청자의견 게시판은 "명불허전, 카리스마 연기란 바로 이런 것. 한석규씨의 연기에 전율이 느껴졌다", "실제 세종대왕도 이런 상황이면 한석규처럼 말하고 행동하셨을 것 같다" "SBS 연기대상은 맡아놨다" 한석규 연기 보고 있으면 숨이 멎는 것 같다"며 호평 일색이었다. 신들린 연기력에 만장일치의 찬사가 쏟아졌다.

한석규 3단 연기 - 뿌리깊은나무
그 결과, 예상대로 2011 SBS 연기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 전에 드라마 스페셜 남자 최우수상 후보에도 올랐으나, 정작 상을 타게 된 건 젊은 두 후배들. 제작진이 노렸는지 소감 발표 중 수상자와 전혀 상관없는 한석규에게 잠깐 카메라 단독샷이 잡혔다. 이에 본인은 그저 대인배의 뿌듯한 미소만 지을 뿐.
뿌리깊은 나무의 성공으로 화려한 부활을 하면서 모처럼 CF를 2편이나 계약했고, 많은 시나리오를 받으며 다시 영화에서 명예 회복의 기회를 노리게 되었다. 2013년 류승완 감독과 하정우, 전지현과 함께한 영화 베를린이 개봉 3일 만에 100만, 개봉 14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손익분기점 450만 명을 넘기면서 710만 명을 동원하는데 성공, 영화 쪽에서도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했다. 현재 이 수치는 2000년대 이후 한석규의 최고 흥행성적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아니라서 최고 흥행이라고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다.
뒤이어 개봉한 파파로티이제훈의 군입대 및 7번방의 선물의 흥행 호조 등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주연배우로서 성실하게(평소 거들떠보지도 않던 예능 출연 혹은 언론 노출 등) 홍보한 덕에 간신히 손익분기점을 넘기게 되었다. 전성기처럼 원톱 주연으로 나오기는 힘들어졌지만, 선후배 배우와의 투톱으로 출연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는 주조연급으로 수요가 많을 것으로 전망되었다.
덤으로 베를린에서 필모그래피 사상 최초로 크레딧 둘째 줄에 이름을 올렸다. 데뷔작 닥터봉부터 시작해서 한 번도 크레딧 첫째 줄을 놓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여러 가지로 의미심장하다. 그만큼 한석규가 극의 중심이 아니어도 극이 돌아가게 하는 배우들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한석규 스스로도 주연만 고집하지 않는다는[42]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43]
2012년 11월 영화 파파로티 촬영 이후 휴식을 취하던 한석규는 황우석 교수 사건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제보자에 출연을 제의받았으나 검토 후 거절하였다. 그리고 2013년 11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집필했던 김영현 작가의 제의를 받아 드라마 파천황에서 정도전 역을 제의 받았다. 2014년 4월 경에 방영 예정이었으나 KBS 드라마 정도전과 시기가 비슷하고, 정도전의 경우 먼저 방영한 데다가 오랜만에 정통 사극이라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게 호평을 받은 반면, 파천황은 퓨전 사극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MBC가 편성을 보류했다. 이후 파천황은 SBS로 이동하여 육룡이 나르샤로 방영되었다.
그 이후 2013년 12월, 영화 '상의원' 출연을 확정지었다. # 동시에 비밀의 문에도 캐스팅되자 한석규가 사극만 너무 고집한다는 평이 조금씩 나왔다. 물론 '상의원'과 비밀의 문 모두에서 한석규는 절정의 연기력을 선보였지만, 그러한 평에도 불구하고 두 작품은 시청률과 관객수에서 모두 참패를 거두었다. 영조 임금을 연기하고 싶어서 출연한 비밀의 문에서조차 초반에는 발음 문제까지 지적받은 데다 '뿌리깊은 나무'에 이어 또 왕 역할을 맡아 질린다는 혹평도 받은지라 당분간 사극 출연은 자제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살펴보면 한석규의 연기력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지만 두 작품 모두 다 각본에 크게 하자가 있었다. 특히 비밀의 문은 과연 2010년대의 작품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지루한 전개와 밋밋한 연출로 2010년대의 배우와 장비를 가지고 만든 80~90년대 KBS 대하드라마 느낌이었으니 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2015년 두 편의 영화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김훈 중위의 의문사 문제를 다룬 '아버지의 전쟁'은 투자자가 없어서 제작이 엎어졌고, 김래원과 함께 출연하는 영화 '더 프리즌'은 2016년 3월에 제작에 들어가 어느정도 흥행에 성공했다.(총관객 293만명)
2017년 1월까지 방영됐던 SBS 월화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21화까지 방영된 이 드라마는 첫방부터 막방까지 전체 월화드라마 중 시청률 1위를 차지하고, 최고 시청률 27.6%를 기록하며 2016년 SBS 드라마 시청률 1위[44]에 등극했기에 '뿌리깊은 나무' 이후 또 다른 그의 히트작이 되었다. 극중에서 타이틀롤 김사부 역을 맡아 명실상부한 연기력과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 드라마로 5년만에 다시 2016 S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뿌리깊은 나무부터 시작해서 드라마에서 맡는 캐릭터가 전부 비슷비슷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세종부터 김사부까지 모두 뛰어난 능력을 갖췄고 심지도 굳지만 아웃사이더 기질로 이해자가 적고 입이 걸은 캐릭터다.
2019년 3월 20일 개봉한 우상에서는 시민들에게 지지를 받는 유력 도지사 후보이지만, 아들의 뺑소니 사고로 위기에 몰리자 정치적 야욕을 위해 폭주하는 정치인을 연기했다. 시민들 앞에서는 온화하지만, 궁지에 몰리자 비겁하게 변하는 야누스적인 연기를 보였다. 영화의 작품성은 호불호가 갈리고, 특히 대사가 안 들린다는 불만이 상당히 많이 제기되었다.
2019년 7월 OCN 드라마 WATCHER에 출연하면서 3년만에 드라마로 복귀했다. 감찰반이라는 공간을 무대로 한 수사물이며, 비극적인 사건으로 인해 인생이 무너진 세 남녀가 경찰 내부 비리조사팀이 되어 권력의 실체를 파헤치는 심리스릴러 드라마다. 누구를 믿어야할지 분간할 수 없게 치밀하고 짜임새 있는 스릴러적 구성을 보여주어, 시청률 6.6%로 보이스 2에 이어 OCN 역대 시청률 2위를 기록했다.
2019년 12월 26일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 개봉되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과 관노로 태어나 종3품 대호군이 된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행간을 채운 영화로 관객 200만명을 불러들였다. 쉬리 이후 최민식과 20년 만에 호흡을 맞추었다.

2.8. 2020년 ~


2020년 낭만닥터 김사부 2에 출연했다. 시청률 20%를 뛰어넘으면서 호평받고 있다. 여기서도 무르익은 연기를 펼쳐주고 있다. 13회에서 돈 때문에 다리를 포기하고 수술 의지가 없는 환자를 향해 "돈 때문에 다리를 포기하나. 그렇게 알아서 포기해 주는 사람은 세상도 별로 관심이 없어. 당신 아들도 그렇게 보고 기억하고 배운다. 팔자 탓, 재수 탓이나 하고, 자포자기하는 아버지로 그렇게!"라며 환자를 질타하며 설득했다.

[슬픔 주의] 한석규, 돈 때문에 수술을 거부하는 환자에 설득
14회에서는 불법 시술을 하는 병원에 스카우트 하려는 박종환에게 "돈 때문에 가족도 팔고 양심도 팔고 이제 동료의사까지 팔아먹느냐, 그래도 절대 타협하지 말아야 할게 있어. 그게 바로 양심이야"라며 분기탱천하는 흡인력 있는 연기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돈 때문에 시리즈를 화통하게 완성했다.

한석규, 불법 시술 병원 소개하는 박종환에 분노!
첫 방송을 시작한 이후 연일 자체 최고 시청률 행진을 이어가며 시청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최종회는 닐슨코리아 기준, 수도권 시청률 27.2%, 전국 시청률 27.1%, 2049 시청률 11%를 기록했고, 순간 최고 시청률 28.4%를 돌파하며, 또 다시 자체 최고 시청률을 다시 썼다.

3. 기타


흔히 말하는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외모라서 선한 연기를 할 때는 정말 선량해 보이고 반대로 성질 더러운 연기를 할 땐 정말 그렇게 보인다. 스펙트럼이 꽤 넓다고 할 수 있는데, 요즘 들어 어둡고 지독한 연기를 많이 선보인다.
본인의 원래 성격은 내성적이고 가라앉아 있는 성격이라고 하는데 젊었을 때는 본인의 그런 성격에 굉장히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날고 기는 끼 많은 사람들이 넘치는 연극영화과에서 조용한 성격으로 버텨 내려니 비교도 많이 되었을 듯. 그래서 폭발적인 연기를 할 때 나름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약간의 우울증이 있다고도 한다. 남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차분히 가라앉은 정도.
인터뷰를 꺼리고 SNS도 하지 않는다. 작품 외적으로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몹시 싫어한다. 철저히 배우로 남고 싶어 하는 듯 싶다. 배우는 행동으로 말해야 하는 직업인데 인터뷰를 하면 말만 번드르하게 하는 것 같아 자괴감이 느껴진다고. 오죽했으면 뿌리깊은 나무 종영 뒤 인터뷰가 쇄도했을 때는 아예 도망다녔다고 인증했다. 덕분에 이미지는 굉장히 좋지만 팬들 입장에서는 눈물이 날 지경. 영화 내려가면 떡밥 좀 달라고 아우성치는 팬이 부지기수.
JTBC 뉴스룸에서 단독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
한국 영화계에서의 영향은 1990년대 한국영화의 흥행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면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이다.[45] 1999년 사비를 털어 총 3,000만원의 상금을 걸고 시작해서 2010년 12회까지 이르고 있다. 영화배우가 자신의 사비로 이런 공모전을 하는 것은 국내외적으로 전무후무한 일이다. 씨네21과 손잡고 진행한 막동이 공모전을 통해 많은 시나리오와 작가들이 배출되었고, 몇몇 수상작의 영화화에는 직접 주연을 맡기도 했다.[46] 평소에도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고 한다. 좋은 시나리오에 명연기가 더해지면 명작이 되지만, 나쁜 시나리오로는 아무리 명연기, 명연출을 해도 졸작이 된다고. 이런 평소의 지론을 실천에 옮긴 것. 그러나 아쉽게도 2011년부터는 열리지 않았다.

산사에서 찍은 광고로, 휴대폰 광고인 주제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라는 독특한 콘셉트으로 인해 유명해졌다. SK텔레콤의 잘 터진다는 이미지를 확고히 한 광고. 이는 2010년에 엄기준이 재현했다.
계약 기간 끝나자 LG텔레콤에서 귀신같이 영입해서 광고를 찍었다.만남편 늘 가던 길만 가다가 다른 길로도 가보자는 콘셉트. 즉, 예전부터 쓰던 SK텔레콤만 쓰지 말고 LG텔레콤도 써보라는 의도. 영상 말미에 김주혁이 나온다. 만남편, 동행편 2편을 찍었다.
광고 내레이션도 간혹 맡는데(커피, 통신사, 금융 관련 등) 성우 출신이라 그런지 전혀 위화감이 없다.
전성기가 1990년대 후반 즉, 지금처럼 영화관의 수가 많지 않았고 멀티플렉스에 의한 와이드 릴리스 개봉이라는 것 자체가 없었던 시절이라 관객수가 송강호, 최민식 같은 라이벌 배우들에 비해 많이 적다. 또한 당시에는 전국관객은 집계하지 않았고 서울 관객만 집계하던 시절이어서 한석규의 전성기 시절을 접하지 못한 세대들에겐 본의 아니게 폄하 당하는 부분이 있다. 미국의 경우 관객수가 아닌 흥행수입을 기록하고 또 인플레이션을 감안한 흥행 순위를 계산하여 1930년대에 개봉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2013년 현재 물가와 비교했을 때 어느 정도의 수입을 거뒀는지 비교라도 할수 있지만 우리나란 그런 체계조차 없다. 한석규가 전성기 시절 거뒀던 흥행 기록은 지금으로 치면 거의 300~500만 관객 정도 되는 기록이고 당시에 500만 명이 왔던 쉬리는 지금으로 치면 1000만 관객 정도 되는 작품이다. 더 이전에 개봉한 은행나무 침대, 접속은 멀티플렉스 방식이 아닌 단관 상영 형식이었으므로, 지금수치로 환산하면 각각 서울 240만, 200만 명이고 전국적으로는 1000만 명에 가깝다.
시나리오를 주의 깊게 보는 만큼 캐릭터 연구에도 공을 들이는 편이라 현장에서 독자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경우가 꽤 많다고 한다. 실제로 채택된 예도 꽤 많은데, 뿌리깊은 나무이만원신, 광평대군 사망 신, 구타유발자들문재가 침 뱉는 버릇[47],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백성찬 반장의 백발[48]
정신세계가 상당히 비범하다. 어릴 때 낚시를 하다가 비가 왔는데 옷을 죄다 벗고 비를 맞으면서 낚시를 했다거나, 자기 영화 시사회에서 요즘 관심사에 대한 질문을 받자 진지하게 영조는 왜 사도세자를 뒤주에서 죽였을까라는 말을 하거나, 버라이어티에 나와서 자기가 받은 질문을 역으로 MC에게 하거나 하는 식. 본인도 자각은 있는 모양으로, 버라이어티에 나올 때마다 왜 자신은 말할 때마다 진지해지는지 모르겠다며 자책하는 풍경이 꽤 자주 보인다.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를 반쯤 한석규의 철학캠프로 만들어 버린 것은 반쯤 전설급이다(…).자신이 연기하는 배역에 대한 깊은 연구, 나아가서 인간의 감정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얼마나 좋은 연기로 나타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이게 10년 만의 예능 출연이었다. 예능 출연이라고 해도 '이소라의 프로포즈' 같은 음악 프로가 전부였다.
2016년 SBS 연기대상에서 두 번째 대상을 차지했는데, 최근 가장 큰 화제가 되고있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수상소감으로 남겨 다시 한번 화제가 되고 있다.

신인시절 때 ‘하얀 도화지가 되어라’ 그런 말 많이 듣지 않나. 바탕이 하야면 자기 색깔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겠다 해서 그런 말을 많이들 하는데, ‘검은 도화지가 될 수는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다. 상상해봐라. 밤하늘에 별을 생각할 때 그 바탕은 어둠, 블랙이다. 그런 암흑이 없다면 별은 빛날 수 없다. 어쩌면 어둠과 빛, 그런 블랙과 스타는 한 몸이다, 란 생각을 해본다.

우리들을 큰 틀에서 문화계에서 일하는 문화종사자라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이 쪽에 있는 우리들은 조금 엉뚱하고 다른 생각들을 하는 사람들이다. 제가 2011년도에 ‘뿌리깊은 나무’로 대상을 받았었는데 그때 제가 맡았던 게 세종대왕역 이었다. 아마 그 분도 엉뚱하고 다른 생각을 했었기 때문에 소중한 한글이란 걸 창제하셨고, 그걸 우리가 소중하게 쓰고 있지 않나 싶다. 다르다고 해서 그걸 불편함으로 받아들이면, 그 불편함은 우리들의 배려심으로 포용하고 어울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걸 위험하다고 받아들이면, 그건 분명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고 같이 어우러진, 좋은 개인, 한 사회, 국가가 될 수 없을 거다.

제가 ‘낭만닥터 김사부’에 출연한 가장 큰 계기였던 강은경 작가의 기획의도, 그걸 마지막으로 읽어드리고 수상소감을 마치고 싶다. 가치가 죽고 아름다움이 천박해지지 않기를, 시인 고은이 쓴 편지글에 있는 말이다. 촌스럽고 고리타분하다고 치부되어가는, 그러나 실은 여전히 우리 모두 아련히 그리워하는 사람다운, 사람스러운 것들에 대한 향수들.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는지. 난 지금 왜 이러고 살고 있는지. 길을 잃은 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위로와 용기를 전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은근히 입이 걸다고 한다. 사석에서 친근감을 표시할 때 편하게 육두문자를 쓰고는 한다고... 처음 피해를 본 배우는 은행나무 침대신현준. '은행나무 침대'를 신현준과 같이 하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그에게 배우로서 호감을 많이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약간 여성스러운 분위기가 보였고 드라마 촬영과 겹쳐서 함께 출연하는 배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 까닭에 일부러 한석규가 같이 친해보려고 '이 가시나야~'라고 놀렸다고. 처음엔 많이 상처받았지만[49], 시간이 지날수록 둘은 많이 친해졌다고 한다. 최근에는 하정우. 하정우는 만나자마자 한 시간 정도 육두문자를 들었다고 인터뷰 등지에서 거하게 인증했다. 하정우 왈 고급스러운 욕이라고. 실제로 연기할 때 보면 욕을 상당히 찰지게 한다.
커리어를 보면 알겠지만 첩보물 주인공을 세 번이나 맡았다. 쉬리-이중간첩-베를린.
연기 활동 및 CF 외에는 그 흔한 화보 촬영이나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 원래 매체 노출에 관심이 없는 성격이기도 하고, 4명의 자녀들과 아내가 모두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지라 휴식기에는 주로 미국에 머문다고 한다. 그래서 동료 배우 및 유명인들의 결혼식 등에는 몰래 참석하는 정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출연작 중 최고의 영화로 8월의 크리스마스를 꼽았다. 작품에 점수를 매기자면 80점 정도라고. #[50]
말투가 상당히 구수하다. 사실 그의 말투는 서울 토박이 말씨이며[51] 부모님도 서울 출신인지라 부모님이 평소 쓰던 말투에 의해 습관화된 거라고. 성우 시절에도 이러한 말투 때문에 조금 고생하기도 했다.[52]

3.1. 명대사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 큰성이야?, 큰성, 나야, 막둥이~ 엄마는?''

''엄마 어디갔어???''

''응, 나 잘있어. 괜찮아, 큰성, 전화 끊지마, 전화 끊지마...''

''큰성. 생각나???...''

''빨간 다리, 빨간색 철교, 우리 어렸을 때 빨간 다리 밑에서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갔다가 쓰레빠 잃어버려가지고,''

''큰성이랑 형들이랑 쓰레빠 찾는다고, 놀지도 못하고...''

''순옥이 그 병신은 벌에 엉덩이 쏘여가지고, 엉덩이 세개 됐다고 둘째형이 놀리고 그랬었잖아~~~...''

''큰성, 생각나???...''

- 막동(초록물고기)

에이씨!! 어떤 새키가 넘버3래! 내가 넘버2야 이씨..

서태주(넘버 3)

지랄하고, 자빠졌네

세종(뿌리 깊은 나무)

살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살린다.

이거를 전문용어로 개멋부린다고 하지. 다른말로는, 낭만이라고 하고

김사부(낭만닥터 김사부)

보이즈 비 앰비셔스~~

김홍식(서울의 달)

그 새키가 나보다 무서워?? 그 새.키.가. 나보다 무서워????

백성찬(눈에는 눈 이에는 이)

나 오늘 못 들어가. 너 오늘 기도 좀 많이 해야되겠다. 나 니 기도빨 엄청 필요하다 오늘

주과장(그때 그사람들)

선위하겠따!!

영조(비밀의 문)

영실이, 자네가 고생이 많았네

세종(천문: 하늘에 묻는다)

당장 꺼져 이 개새끼들아 여기 내 구역이야 내가 만든 내 세상이야 이 개새끼들아

정익호(프리즌)

"난 나쁜 경찰을 잡는다."

도치광(WATCHER)

그 사람이 누구든 수술방에 들어온 사람은 나에게는 환자다.

김사부(낭만닥터 김사부 2)


4. 출연



4.1. 영화[53]


Filmography
주연}}} {{{#000000,#ffffff 1995. 4. 29
이광훈 감독 / 봉준수 역
주연}}} {{{#000000,#ffffff 1996. 2. 17
강제규 감독 / 수현/종문 역
주연}}} {{{#000000,#ffffff 1996. 2. 7
이창동 감독 / 김막동 역
주연}}} {{{#000000,#ffffff 1997. 8. 2
송능한 감독 / 서태주 역
주연}}} {{{#000000,#ffffff 1997. 9. 13
장윤현 감독 / 권동현 역
주연}}} {{{#000000,#ffffff 1998. 1. 24
허진호 감독 / 정원 역
주연}}} {{{#000000,#ffffff 1999. 2. 13
강제규 감독 / 유중원 역
주연}}} {{{#000000,#ffffff 1999. 11. 13
장윤현 감독 / 조민석 역
주연}}} {{{#000000,#ffffff 2003. 1. 23
김현정 감독 / 림병호 역
주연}}} {{{#000000,#ffffff 2004. 10. 29
변혁 감독 / 이기훈 역
주연}}} {{{#000000,#ffffff 2005. 2. 3
임상수 감독 / 주 과장 역
주연}}} {{{#000000,#ffffff 2005. 9. 30
유선동 감독 / 조진만 역
주연}}} {{{#000000,#ffffff 2006. 2. 23
김대우 감독 / 김윤서 역
주연}}} {{{#000000,#ffffff 2006. 5. 31
원신연 감독 / 이문재 역
주연}}} {{{#000000,#ffffff 2006. 11. 30
변승욱 감독 / 심인구 역
주연}}} {{{#000000,#ffffff 2008. 7. 31
곽경택, 안권태 감독 / 백성찬 역
주연}}} {{{#000000,#ffffff 2009. 11. 19
박신우 감독 / 한동수 역
주연}}} {{{#000000,#ffffff 2010. 11. 24
손재곤 감독 / 강창인 역
주연}}} {{{#000000,#ffffff 2013. 1. 30
류승완 감독 / 정진수 역
주연}}} {{{#000000,#ffffff 2013. 3. 14
윤종찬 감독 / 나상진 역
주연}}} {{{#000000,#ffffff 2014. 12. 24
이원석 감독 / 조돌석 역
주연}}} {{{#000000,#ffffff 2017. 3. 23
나현 감독 / 정익호 역
주연}}} {{{#000000,#ffffff 2019. 3. 20
이수진 감독 / 구명회 역
주연}}} {{{#000000,#ffffff 2019. 12. 26
허진호 감독 / 세종대왕 역

개봉 연도
제목
배역
비고
관객수
2019
천문: 하늘에 묻는다
세종대왕[54]
주연
200만명
우상
구명회
주연
18만명
2017
프리즌
정익호
주연
293만명
2014
상의원
조돌석
주연
79만명
2013
파파로티
나상진
주연
170만명
베를린
정진수
주연
710만명
2010
이층의 악당
강창인
주연
40만명
2009
백야행 - 하얀 어둠 속을 걷다
한동수
주연
140만명
2008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백성찬
주연
205만명
2006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
심인구
주연
21만명
구타유발자들
이문재
주연
16만명
음란서생
김윤서
주연
257만명
2005
미스터 주부퀴즈왕
조진만
주연
33만명
그때 그 사람들
주 과장
주연
108만명
2004
주홍글씨
이기훈
주연
143만명
2003
이중간첩
림병호
주연
102만명
1999
텔 미 썸딩
조민석
주연
123만명
쉬리
유중원
주연
580만명
1998
8월의 크리스마스
정원
주연
42만명
1997
접속
권동현
주연
67만명
넘버 3
서태주
주연
29만명
초록물고기
김막동
주연
16만명
1996
은행나무 침대
수현/종문
주연
68만명
1995
닥터봉
봉준수
주연
37만명

4.2. 드라마[55]


방영 연도
방송사
작품명
배역
비고
시청률
2021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주연

2020

낭만닥터 김사부 2
김사부/부용주
주연
27.1%
2019

WATCHER
도치광
주연
6.6%
2016~17

낭만닥터 김사부
김사부/부용주
주연
27.6%
2014
비밀의 문
영조
주연
10.0%
2011
뿌리깊은 나무
세종
주연
25.4%
1995

호텔
임형빈
주연
36.5%
1994
까레이스키

단역
7.5%
베스트극장 - 그들만의 방
재현
주연

도전

조연

서울의 달
김홍식
주연
48.7%
1993
한지붕 세가족

조연

폭풍의 계절

파일럿
박상현
주연
46.2%
1992
아들과 딸
한석호
주연
61.1%
1991
여명의 눈동자
서북청년단 단원
단역
58.4%
우리들의 천국
현철
조연


4.3. CF


연도
기업명
브랜드명
공동출연
2017~18
한국인삼공사
정관장(천녹)

2015
한국야구르트
헬리코박터 윌

2012~13
LS네트윅스
몽벨(아웃도어)

2012~14
메리츠화재
메리츠화재(보험)
조여정
2009~10
한국증권금융
한국증권금융

2010
던롭 코리아
젝시오(골프용품)
김희애
2010
SK에너지
엔크릭솔룩스

2006
삼성화재
올라이프(보험)

2006
LG유플러스
LG텔레콤
김주혁
2005
교보생명
교보생명(보험)

2004~2007
기탄교육
기탄교육

2002
SK텔레콤
IMT 2000(통신)

2002
SK텔레콤
모네타(통신)
이요원,비
2000~2004
LG전자
엑스켄버스

1999~2003
KEB 외환은행
외환은행

1999
SK텔레텍
스카이(휴대전화)

1998
SK텔레콤
넷츠고(PC통신)
강성연,한고은
1998~2000
동서식품
맥심
황수정(1999년),안성기-심은하(2000년)
1998~2002
SK텔레콤
스피드011
장진영(1998년),황인영(1999년)
1998
한국화장품
파메스

1997
GS칼텍스
보너스카드

1996
제일모직
갤럭시

1996
대우전자
대우입체냉장고 탱크2
유인촌
1996
LG 텔레콤
시외전화 082

1994~1995
진로
하이트

1994
쌍용제지
비바

1994
LG생활건강
죽염

1993
해태음료
썬키스트 훼미리주스
김혜수
1993~1997
선창산업
선우드가구

1993
현대자동차
엑셀GS

1993
삼성전자
그린컴퓨터

1993
제일모직
빈폴


5. 수상


연도
수상
작품
2019
제23회 판타지아 국제 영화제 최고 배우상
우상
2016
SBS 연기대상 대상
낭만닥터 김사부
2016
SBS 연기대상 10대 스타상
낭만닥터 김사부
2012
제3회 대한민국대중문화예술상 대통령 표창
-
2011
SBS 연기대상 대상
뿌리깊은 나무
2011
SBS 연기대상 10대 스타상
뿌리깊은 나무
2000
제37회 대종상 남자인기상
텔 미 썸딩
1999
제7회 한국최고인기연예대상 영화배우부문 남자연기상
쉬리, 텔 미 썸딩
1999
제20회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쉬리, 텔 미 썸딩
1999
제36회 대종상 남자인기상
8월의 크리스마스, 쉬리
1998
씨네21 영화상 올해의 남자배우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제1회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연기자상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제19회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8월의 크리스마스
1998
제3회 여성관객영화상 여성관객이 뽑은 최고의 남자배우상
8월의 크리스마스
1997
제18회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초록물고기
1997
제18회 청룡영화상 인기스타상
초록물고기, 넘버3, 접속
1997
제35회 대종상 남우주연상
초록물고기
1997
제35회 대종상 남자인기상
초록물고기, 넘버3, 접속
1997
제17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초록물고기
1997
제20회 황금촬영상 최우수 인기남우상
초록물고기
1997
제3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최우수연기상
초록물고기
1996
제1회 씨네21 영화상 신인연기상
닥터 봉
1996
제32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남자 신인연기상
닥터 봉
1995
제6회 이천춘사대상영화제 신인남우상
닥터 봉
1994
MBC 연기대상 최우수 연기상
서울의 달
1994
TV저널 올해의 시상식 탤런트부문 우수상
서울의 달
1993
MBC 연기대상 신인상
아들과 딸, 파일럿
1984
MBC 강변가요제 장려상
길잃은 친구에게

[1] 참조.[2]한국방송공사 21기 성우. 1967년 2월 7일생이다.[3] 2000년대 이전에는 제대로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2000년대 이전 관객수는 서울기준으로 작성.[4] 최고시청률 기준.[5] KBS 성우극회 22기로 김승준, 김일, 홍성헌, 문선희 등과 동기.[6] 훗날 '휘파람공주'라는 영화를 만든 이정황 감독 역시 한석규와 같은 대학 출신으로 이 노래의 가사를 썼다.[7] 힐링캠프에서 한 얘기에 의하면 군대에서 허리 부상으로 의병제대를 한지라 몸을 많이 움직여야 하는 배우를 할 수 있을지 회의가 들어 성우 공채를 본 거라고. 시간이 지나면서 몸 상태가 꽤 많이 회복되어 본래 꿈이었던 배우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꽤 지난 지금까지도 그 때 부상 당한 허리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고. 체중이 늘면 바로 생활이 불편해져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체중을 비슷하게 유지해 온다고 한다.[8] 하지만 장세준은 1997년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로 일가족과 함께 사망했다.[9] 원래 이 역할을 문성근이 할 예정이었으나, 연극과 영화 스케줄 때문에 하차했다.[10] 지금으로 치면 산 너머 남촌에는 같이 1기, 2기 출연진들이 바뀐 경우를 생각하면 된다.[11] 한석규가 맡은 역할은 원래는 유인촌이 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본인이 거절해 한석규가 대신 캐스팅 되었다.[12] 이 당시만 해도 유망주로 꼽혔지만 드라마의 실패 이후 오랜 세월 잊혀져 있다가 부부 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단골 출연자로 다시 이름을 알리게 된다.[13] 극 중 김희애검열삭제 하려다 눈알이 빠지는 일본 앞잡이 역. 그나마 김희애러시아로 망명 후에는 드라마에서 퇴갤. 어차피 시청률 한자릿수를 기록하며 실패했다. 1990년대 초반에는 20%는 기본이던 시절에 시청률 한자릿수였으니 지금으로 따지면 소수점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된다.[14] 1995년 호텔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드라마로 복귀하지 않았다가 16년 만인 2011년 10월에 뿌리깊은 나무로 복귀했다.[15] 당시 인터뷰는 영화 우상에 관한 것으로 설경구 외에 한석규, 천우희가 함께 했는데, 한석규는 해당 발언을 듣자마자 "중요한 건 다 날아가버린 과거의 일이다."하며 웃었다. 설경구도 최초의 천만관객을 달성한 인물이자 2000년대 충무로를 대표했던 대배우임에도 불구하고 한석규의 전성기를 온 몸으로 느껴본 후배로서 해당 의견을 가감없이 남긴 것이다.[16] 이런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꼰대질로 애니깽 사태 같은 해프닝도 일어났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17] 이 시기 TV에서 인기를 얻은 배우들이 충무로에 진출했다 하면 흥행 성적이나 작품성 모두 실패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TV에서 많은 인기를 얻었던 이병헌, 심은하를 포함한 톱스타부터 TV 드라마로 조금이나마 인기를 얻었던 배우들마저 충무로에 가면 추풍낙엽 신세가 되어 하락 테크를 타기도 했지만 유일하게 한석규는 충무로 진출에 성공하여 배우로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었다. 이 당시의 톱 탤런트와 한석규의 차이점은 연기력 자체로도 화제를 모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었는데, 한석규는 특히 '서울의 달'로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충무로에 진출해서도 연기력부터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닥터봉이 작품성에서는 평이 갈리지만 관객 동원에 성공한 건 한석규의 탄탄한 연기력이 영화 관객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었다.[18] 결국 이 작품의 남주인공은 이경영이 맡게 되었지만, 여주인공들은 다음 영화이자 강제규 감독의 데뷔작 은행나무 침대에서 다시 만난다.[19] 이 상황은 3년 후 <쉬리>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지만, <쉬리>가 제작된 시점에서는 한석규가 확실히 대세였던 점도 있고, 그 자체가 화제성이 컸기 때문에 은행나무 침대처럼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았다.[20] OST는 70만 장이 팔려나갈 정도로 웬만한 대중가요보다도 인기가 많았다. 이 영화로 한석규 신드롬이 본격화된다.[21] 다만, 이때 송강호최민식은 한석규의 형인 한선규가 운영하는 회사 소속이기도 해서... 요즘도 자주 하는 대형기획사의 유명스타+회사 소속의 신인을 출연시키는 끼워팔기 식으로 보면 된다. 하지만 한선규의 이러한 행동이 너무 지나친 게 동생의 앞날을 가로막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밑에서 자세하게 후술한다.[22] 2009년 이 영화 10주년을 기념한 씨네 21 기사에 따르면 당시 제작진들이나 배우들조차도 150~200만 전국관객을 예상했는데, 서울 관객만으로도 230만이 넘었다.[23] 당시 한석규는 대한민국 배우로서는 최초로 러닝 개런티 계약을 체결했다. 기본 출연료 2억 5천만원+관객당 500원으로 계약했는데 그로 인해 12억원의 수입을 올렸다.[24] 닥터봉은 예외로 작품성보다는 배우에게 호평이 쏠린 작품이다. 초록물고기는 흥행에 실패했다는 사람들이 많지만, 당시 단관개봉 시스템이었던 서울에서 20만명에 가까운 흥행스코어를 기록했다.[25] 하지만 다른 남자배우들이 "한석규의 티켓파워는 인정하지만, 같은 배우로서 참 서글프더라."는 불만을 토로했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26] 이 당시 한석규가 시나리오 보는 눈이 탁월하다는 평도 많은데, 사실 이것은 형 한선규의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2000년 들어 한석규 본인이 고른 영화들 중 흥행과 작품성에서 어긋나는 작품이 좀 있다. 한석규가 거절한 대표적인 작품이 2000년에 개봉된 영화 박하사탕 이다.[27] 그래서 좋은 작품들을 다른 배우들에게 빼앗겨버려 한동안 형과 많이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1996년에 개봉한 '악어'와 '채널69', 그리고 2000년에 개봉한 박하사탕.[28] 참고로 1997년에 개봉했던 영화 '인샬라'의 주인공으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었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이승재 대표와는 '은행나무 침대'로 인연을 맺어 이승재 대표가 점찍었기도 했었으나, 형 한선규가 상대 여배우 캐스팅 및 제작에도 간섭을 하는 바람에 제작진 내부에서 불만을 표출하여 결국 최종 캐스팅에서 탈락되었다. 결국 차기 후보로 물망에 올랐던 최민수가 낙점. 이 외에도 한선규의 만행이 연예계에서도 많은 소문을 불러 일으켰으나, 결과적으로는 한석규가 너무 잘 나가버리는 바람에 수면 위로 올라오진 못했다.[29] 2001년 제노사이드와 2004년 소금인형.[30] 처음엔 한석규가 '형과 상의해서 제게 말씀해주세요'라고 해서 형 한선규에게 제의했더니... 이런 건 박신양같은 애들이나 해야 한다며 실명 거론까지 하는 통에 안 좋은 소문이 퍼지면서 그 덕분에 한석규가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른 적도 있었다. 참고로 언급한 박신양은 당시 최고의 멜로배우였고, 톱스타였다. 해당 기사는 실제로 1999년도 영화잡지 '스크린'에 게재되기도 했다.[31] 송강호, 최민식, 설경구, 김윤석, 황정민, 이병헌 등등으로 거론할 수 있다.[32] 이 때 한석규의 형인 한선규와 함께 본인이 영화 제작을 하려다가 투자 문제가 여의치 않아 쉬게 된 탓도 있다.[33] 그나마 두사부일체, 신라의 달밤, 조폭 마누라 등은 어느 정도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두사부일체와 조폭 마누라, 가문의 영광 등은 시리즈화되면서 퇴화됐다.[34] 아이러니한 점은 이런 B급 조폭코미디 장르 영화들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있는 작품이 바로 한석규가 주연한 넘버 3이다. 물론 이 작품은 배우들의 연기력은 물론이고 흥행, 비평면에서도 인정받은 수작이지만 넘버3의 성공 이후 이를 비슷하게 베끼거나 콘셉트과 B급 분위기만 따온 채로 나온 수준 이하의 양산형 작품들이 넘쳐나면서 영화계에 거품이 끼게 된 것이다.[35] 그 이전 2001년도에 조사한 설문에서도 한석규가 과대평가받은 배우 상위권으로 뽑혔으며 기자들끼리 선정한 최악의 배우 순위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했다. 참고로 이 분야 1위는 같은 영화에 출연했었던 신현준. '최고의 배우'순위 1위는 바로 최민식.[36] 이 점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데 정통 역사극이라기보다는 블랙코미디 풍자극이자 미시사를 다룬 작품이었고 이 측면에서 훌륭한 성과를 이뤄냈다. 한 유명 평론가는 이 작품을 걸작이자 임상수 감독의 최고작이라 칭했다. 한석규의 연기도 훌륭했고.[37] 이 영화의 배급사는 '쇼박스'다. 추석연휴에 개봉시킬 영화로 '미스터 주부 퀴즈왕'과 '가문의 위기'를 선정하여 두 편 모두 개봉시키려고 했으나, 시사회 결과 '가문의 위기'가 흥행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아, '미스터 주부 퀴즈왕'은 '가문의 위기' 상영이 끝나면 바로 개봉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나 의외로 '가문의 위기'가 흥행 대박을 터트려 쇼박스에서 이 영화를 장기간 밀어주는 바람에 사실상 '미스터 주부퀴즈왕'은 찬밥신세가 되었다.[38] 제작비가 21억.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영화의 99%가 계곡에서 진행되고 기껏해야 오토바이 5~6대, 자동차 1대가 끝인데 어디에 돈이 들어갔는지. 21억이나 쓸 이유가 있나. 그 자동차 1대가 벤츠였다.[39] 물론 영화 흐름상의 비중은 높지만 결국 화면에 나오는 분량으로는 분명 특별출연이다.[40] 함께 개봉한 외국영화 홍보사 알바들의 공격과 연평도 포격 사태로 인해 나라 분위기가 다운되어 개봉시기를 잘못 잡은 게 주 원인이었고, 영화 데뷔작 '닥터봉'을 기억하는 지금의 영화관객들이 많지 않은데(그것도 1995년 개봉작인데..), '닥터봉'의 커플이었다고 병맛 홍보로 밀어부친 것도 실패의 원인이었다. 닥터봉이 흥행했던 시장은 한국영화의 파이가 2010년의 10분의 1도 되지 않을 시점이었으니 흥행했다 한들 널리 알려졌다고 보긴 어려웠다. 2010년대 주요 영화관람 연령층이 2,30대인데 닥터봉 개봉당시엔 어린아이었으니 알 리가 있나.[41] 흥행 실패를 여러 번 겪었다고 하더라도 90년대의 최고 영화배우이자 연기력 및 캐릭터 분석등으로는 당대의 배우임에 분명하고 경력 또한 적지 않아 개런티를 낮게 받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42] 백야행에서는 예외적으로 조연이었지만 크레딧 맨 윗줄. 감독이 출연을 부탁했을 때 고사했다가 감독의 정성어린 설득으로 수락한 유일한 작품이었다고 한다.[43] 그렇다고 베를린에서 주인공은 아니기 때문에, 즉, 자신이 90년대 최고 배우였다는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놨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44] 평균, 최고 시청률. 닐슨코리아 전국 기준[45] 막동이는 1997년 출연작 초록물고기에서의 작중 이름으로 본인이 가장 애착을 가지는 캐릭터라고 한다. 1회 당선작이 김지운조용한 가족이다.[46] 위에 언급된 검증되지 않는 신인 감독과의 작품 활동도 사실 이 부분과 연관이 있다.[47] 호흡기가 좋지 않다는 설정이라고 한다.[48] 이것 때문에 백발로 염색하고 집에 갔더니 자녀가 갑자기 왜 이렇게 늙었느냐며 놀라서 아빠 돈 벌어야 해서 힘들어라고 응수했다고…[49] 일례로 '은행나무 침대'에서 진희경과 도망가는 장면을 촬영할 때 NG가 너무 잦아 체력적으로 지친 와중에 혹시나 드라마 촬영 때문에 늦을까봐 서둘러 영화 촬영장으로 온 신현준을 보고 '왜 일찍 왔어 가시나야…'라고 놀렸다 한다.[50] 더 높은 점수를 준 인생 영화로는 '일 포스티노' 를 꼽았다.[51] 가끔 나이 드신 분들 말투를 생각하면 된다. 신구, 이순재 등.[52] 같은 성우 출신인 장세준도 이같은 말투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고 한다.[53] 2000년대 이전에는 제대로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2000년대 이전 관객수는 서울기준으로 작성.[54] 2011년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 이어 또 다시 세종대왕을 연기했다.[55] 최고시청률 기준.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