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설지왕
1. 소개
흔히 대가야로 알려진 반파국의 16대 왕이자 마지막 왕. 도설지는 시호가 아니고 금관국 왕들처럼 이름이 왕명이다. 도설(道設)이 이름. 지(智)는 삼국시대 공통으로 "님"과 같은 미칭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엄밀히는 이름의 일부가 아니지만 옛날 사람들의 이름이 흔히 그렇듯 미칭과 아예 결합해버린 케이스.
그의 이름은 삼국사기, 신증동국여지승람, 단양 신라 적성비와 창녕 척경비에만 등장한다.
2. 생애
우선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530년대 이후 후기 가야 소국들은 중앙집권적 영역국가로 발전한 지 오래인 백제와 신라 사이에 껴서 국력에 밀리고 분열과 쇠퇴를 거듭했고, 도설지왕이 재위했을 6세기 중반에는 이미 구야국, 탁순국 등 가야권의 다른 나라들이 하나하나 멸망하고 반파국은 안라국과 함께 마지막 남은 가야의 보루였다. 관산성 전투의 패배로 백제도 크게 위축되어 신라의 반파국 공격을 방해할 세력이 전부 사라졌다.561년 안라국 멸망 이후 이에 562년 9월, 반파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신라 진흥왕의 지시로 이사부와 사다함이 대군을 이끌고 반파국을 치게 된다. 이때 상황은 《삼국사기》 본기 진흥왕 32년 기록과《삼국사기》 열전 사다함편에 등장한다.
이 기록대로라면 도설지왕은 딱히 기록도 많지 않은 아주 평범한 고대 망국의 왕 정도로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비석 창녕 척경비, 1978년에 발견된 단양 신라 적성비에 도설지의 이름이 등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도설지는 '''신라의 관등을 가진 신라 장군'''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걸 이어붙이면
물론 국적을 넘나드는 전혀 다른 기록에 대해서 그냥 동명이인이라고 생각하면 깔끔하게 해결되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반파국왕 이뇌왕과 신라 여인 사이의 결혼동맹으로 태어난 아들인 월광태자와 동일 인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직접적으로 동일인이라는 기록은 없지만 두 인물의 행적에 상당한 교차점이 있고, 월광태자와 도설지왕이 동일 인물이라면 저런 행적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2.1. 월광태자와 동일 인물?
월광태자는 대가야국 9대왕인 이뇌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라의 고위 귀족인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이자 비지배의 딸이다. 해당 문서에 자세히 써 있지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 중반인 5세기경, 광개토대왕 이후 전성기를 맞은 장수왕의 고구려는 열심히 백제와 신라를 공격하고 있었고, 두 나라는 나제동맹을 맺어 겨우 버티는 중이었다. 이 때는 백제가 개로왕의 죽음과 수도 한성의 파괴 등 매우 혼란스런 상태였기 때문에 반파국은 그 틈을 타 후기 가야의 맹주로 올라서고 지금의 전라도 일부 지역까지 진출할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6세기 무령왕 즈음부터 백제가 정신을 차려서 반파국을 전라도 동부 지역에서 밀어내기 시작했는데 중앙 집권적 체제를 구축한 백제와 가야 소국들은 체급차이부터가 너무 심했다. 522년 3월, 당시 가야의 왕 이뇌왕은 백제에 맞서기 위해 신라에 혼인 동맹을 제안한다. 신라 역시 가야를 흡수할 야망이 있었기에 법흥왕은 이찬 비조부의 여동생을 보냈고 이뇌왕과 그녀 사이에서 월광태자가 태어났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서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후에 한 사건이 터진다. 앞서 신라 측은 비조부의 딸을 보낼 때 그녀를 따르는 종자(從者) 100명을 같이 보냈는데 반파국은 가야의 맹주격인 나라였으므로 신라와 친하게 지내겠다는 반파국의 뜻을 알리기 위해 이 종자들에게 신라 옷을 입혀 주변 다른 가야 소국에 나눠 보냈다. 그런데 케이타이 덴노 23년(529년) 3월에 다른 가야 소국[4] 의 왕 아리사등이 반파국의 친 신라 정책에 반발해 신라인들을 돌려보내는 사건이 발생했다. 신라 법흥왕도 수치심을 느껴 혼인 동맹을 취소하려고 했다.
반파국 이뇌왕은 부부가 되었고 자식이 있는데 어떻게 떨어질 수 있겠냐며 신라에 사정사정했지만 신라는 이미 혼인 동맹을 깨기로 마음먹은 상태였고 이뇌왕이 계속 버티자 결국 신라군이 가야 경계의 8개 성을 공격해 동맹은 강제로 깨졌다.“전에는 너희들의 요청을 받아 우리가 문득 혼인을 허락하였으나, 지금 이와 같으니 왕녀를 돌려 보내도록 하라.”
이후 반파국은 540년대 쯤부터 친 백제로 돌아선다. 이때 10대 중후반 쯤 됐을 신라 왕실의 핏줄을 이어 받은 월광태자는 친백제 정권에서 입지가 좁아졌고,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540년~550년 사이에 신라로 망명했다고 보고 있다. 이렇게 보면 단양 적성비와 창녕 척경비에 기록된 551년, 561년의 신라 장군 도설지도 가능해진다. 6두품 혹은 진골[5] 골품을 받았고, 551년에 급간지로 등장, 그리고 561년에는 승진을 해 사척간이 되어서 김무력[6] 등과 함께 진흥왕의 창녕 지방 순시에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름도 연관성이 있는데, 도설지왕의 도설지(道設智)라는 이름은 '''도열지'''라고도 읽을 수 있는데 이것이 달지 즉, 달(月)과 의미가 통하기 때문.[7] 월광태자가 10세손으로 기록되어 있고, 도설지왕은 16대 왕이라고 기록 되어 있지만 10을 16으로 잘못 기록하였거나, 10대는 직계이며 16대라는 수를 왕계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
반파국 쪽을 다시 보면, 반파국은 백제와 함께 관산성 전투에 참여해 신라와 싸웠지만 신라군의 대승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리고 신라의 가야 잠식을 견제하던 백제도 완전히 위축되었다. 이제 가야 소국들은 하나하나 신라 앞마당의 한 끼 식사가 된 것이다. 가야사의 권위자 김태식 교수는 562년 9월에 신라가 반파국을 무력 정복한 이후에 반파국 왕족 혈통이 있는 도설지를 허수아비 임금으로 잠시 앉혔다가 이후 자연스럽게 나라를 흡수했다고 보았다. 경순왕, 공양왕, 순종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혹은 561년 창녕 지방 순시 직후에 신라가 도설지를 반파국 임금으로 올렸는데(즉 반파국의 속국화), 562년 9월에 도설지가 신라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했다가 토벌당했다는 설도 있다.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562년 7월에 백제가 쳐들어오고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써있는데 '가야의 반란'이라는 구절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 직전 7월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고 그걸 쫓아낸 기록도 삼국사기 기록만 보면 그냥 쳐들어와서 격퇴했다 식으로 마치 반파국의 멸망과 별개의 사건처럼 보이지만, 일본서기의 같은 시기 기록을 보면 백제군과 왜군 연합군이 신라가 가야를 다 먹는 것을 막기 위해 신라에 복속된 가야 지방을 공격하는 사건이었고[8] 반파국의 반란도 이것과 연계됐다는 것.
이후의 행적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월광태자는 거덕사(擧德寺)에 가 스님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월광사(月光寺)에서 망국의 설움을 안고 마지막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져오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3. 기타
월광 태자와 동일인이라고 가정한다면 반파국의 왕은 총 10명이며 도설지왕은 10대왕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연대 상에 문제점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16대 520년으로 되어 있는데, 도설지왕과 월광 태자가 동일 인물이라면 10대 520년이 되는데, 대가야왕의 평균 재위 기간이 금관 가야와 같이 비정상적으로 늘어지게 되는 문제점이 있다.
4. 기록
4.1. 신증동국여지승람
석순응전(釋順應傳)에는 대가야국 월광태자(月光太子)는 곧 정견모주의 십세손으로 부는 이뇌왕이라 하는데 신라에 구혼하여 이찬 비지배의 딸을 맞아 태자를 낳았는데 이뇌왕은 뇌질주일의 팔세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고령현(高靈縣) 건치연혁조
4.2. 단양 신라 적성비
□□□□月中王敎事大衆等喙部伊史夫智伊干
□□□□豆彌智彼진干支喙部西部叱智大阿干
□□□夫智大阿干支內禮夫智大阿干支高頭林
□□□□等喙部比次夫智阿干支沙喙部武力智
□□□(鄒)文村幢主沙喙部'''導說智及干支'''勿思伐
□□□喙部助黑夫智及干支節敎事赤城也이次
□□년 □□ 월에 왕이 대중등(大衆等)인 탁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 이간지(伊干支),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두미지(豆彌智) 피진간지(彼진干支), 탁부(喙部) 출신의 서부질지(西夫叱智) 대아간지(大阿干支), 口부지(口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내례부지(內禮夫智) 대아간지(大阿干支), 고두림성(高頭林城)에 있는 군주(軍主)들인 탁부(喙部) 출신의 비차부지(比次夫智) 아간지(阿干支),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무력지(武力智) 아간지(阿干支), 추문촌(鄒文村) 당주(幢主)인 사탁부(沙喙部) 출신의 '''도설지(導設智) 급간지(及干支)''', 물사벌(勿思伐 : 城 幢主)인 탁부(喙部) 출신의 조흑부지(助黑夫智) 급간지(及干支)에게 교(敎)하시었다.
《단양 신라 적성비》 1면
4.3. 창녕 척경비
辛巳年二月一日立 寡人幼年承基政委輔弼智 行悉
事末□□立□赦□□□□□四方□改囚□後地土□陝也
古□□□不□□□□□□□□□□□□□□□人普□山□心□
除林□□□□□□□□□□□□□□□□此□□□□
而已土地彊時山林□□□□□□□□□也大等□軍主幢主道
使□外村主審□故□□□□□□□□□海州白田畓□□□
山□河川□敎以□□□□□□□□□□□□□□□□□□人
□之雖不□□□□□□□□□□心□□河□□□□于之
其餘少小事知古□□□□□□□者□□以上大等□古奈末典
法□人□上□□□□□□□□□□□□此以□□看其身受
□于時□□大□□□□□□智葛文王□□□□者漢只□□
屈□智大一伐干□喙□□智一伐干□□折夫智一尺干□□□
□智一尺干喙□□夫智□干沙喙□力智□干喙小里夫智□□
干沙喙'''都設智沙尺干'''沙喙伐夫智一吉干沙喙忽智一□□□
□□次公沙尺干喙□亡智沙尺喙述智沙尺干喙□□□□
沙尺干喙比□□□智沙尺本末□智及尺干喙□□智□□□
沙喙刀下智及尺干沙喙□□智及尺干喙鳳安智□□□□□
等喙居七夫智一尺干□一夫智一尺干沙喙甘力智□□干□
大等喙末□智□尺干沙喙七□智及尺干四方軍主比子伐
軍主沙喙登□□智沙尺干漢城軍主喙竹夫智沙尺干碑利
城軍主喙福登智沙尺干甘文軍主沙喙心夫智及尺干
上州行使大等沙喙宿欣智及尺干喙□叱智奈末下州行
使大等沙喙春夫智大奈末喙就舜智大舍于抽悉□□
西阿郡使大等喙北尸智大奈末沙喙須□夫智奈□
爲人喙德文奈末比子伐停助人喙□薩智大
奈末書人沙喙導智大舍村主□□智述干麻叱
智述干
신사년(辛巳年) 2월 1일에 세웠다. 과인(寡人)은 어려서 왕위에 올라 정사(政事)를 보필(輔弼)하는 신하에게 맡겼다. … 일의 끝에 … 사방(四方)으로 … 널리 … 이익(利益)을 취하고 수풀을 제거(除去)하여 … 토지(土地)와 강토(疆土)와 산림(山林)은 … 대등(大等)과 군주(軍主), 당주(幢主), 도사(道使)와 외촌주(外村主)는 살핀다. … 고로 … 해주(海州)의 전답(田畓)□□와 산림과 하천은 … 비록 … 그 나머지 사소한 일들은 … 상대등(上大等)과 고나말전(古奈末典), 법선□인(法選□人)과 상(上) … 이로써 … 몸이 벌을 받는다.
이때 □□대□(□□大□)는 □□□□□지(□□□□□智) 갈문왕(葛文王)이고, □□□□자(□□□□者)는 한지□□(漢只□□)의 굴진지(屈□智) 대일벌간(大一伐干)이고, □탁(□喙)의 □□지 (□□智) 일벌간(一伐干)이고, □□절부지(□□折夫智) 일척간(一尺干)이고, □□□□지(□□□□智) 일척간(一尺干)이고, 탁(喙)의 □□부지(□□夫智) 잡간(□干)이고, 사탁(沙喙)의 무력지(武力智) 잡간(□干)이고, 탁(喙)의 소리부지(小里夫智) □□간(□□干)이고, '''사탁(沙喙)의 도설지(都設智)사척간(沙尺干)'''이고, 사탁(沙喙)의 벌부지(伐夫智) 일길간(一吉干)이고, 사탁(沙喙)의 홀리지(忽利智) 일□□(一□□), □진리□차공(□珍利□次公) 사척간(沙尺干)이고, 탁(喙)의 이망지(□亡智) 사척(沙尺)이고, 탁(喙)의 소술지(所述智) 사척간(沙尺干)이고, 탁(喙)의 □□□□ 사척간(沙尺干)이고, 탁(喙)의 비협□□지(比□□□智) 사척간(沙尺干)이고, 본피(本彼)의 말□지(末□智) 급척간(及尺干)이고, 탁(喙)의 □□지(□□智) □□□이고, 사탁(沙喙)의 도하지(刀下智) 급척간(及尺干)이고, 사탁(沙喙)의 □□지(□□智) 급척간(及尺干)이고, 탁(喙)의 봉안지(鳳安智) □□□이다. □□등(□□等)은 탁(喙)의 거칠부지(居七夫智) 일척간(一尺干), □□부지(□□夫智) 일척간(一尺干), 사탁(沙喙)의 감력지(甘力智) □□간(□□干)이다. □대등(□大等)은 탁(喙)의 말득지(末得智) □척간(□尺干), 사탁(沙喙)의 칠총지(七聰智) 급척간(及尺干)이다. 사방군주(四方軍主)로서 비자벌군주(比子伐軍主)는 사탁(沙喙)의 등□□지(登□□智) 사척간(沙尺干)이고, 한성군주(漢城軍主)는 탁(喙)의 죽부지(竹夫智) 사척간(沙尺干)이고, 비리성군주(碑利城軍主)는 탁(喙)의 복등지(福登智) 사척간(沙尺干)이고, 감문군주(甘文軍主)는 사탁(沙喙)의 심맥부지(心麥夫智)급척간(及尺干)이다. 상주(上州)행사대등(行使大等)은 사탁(沙喙)의 숙흔지(宿欣智) 급척간(及尺干), 탁(喙)의 차질지(次叱智) 나말(奈末)이다. 하주(下州) 행사대등(行使大等)은 사탁(沙喙)의 춘부지(春夫智) 대나말(大奈末), 탁(喙)의 취순지(就舜智) 대사(大舍)이다. 우추실□□서아군(于抽悉□□西阿郡) 사대등(使大等)은 탁(喙)의 북시지(北尸智) 대나말(大奈末), 사탁(沙喙)의 수정부지(須□夫智) 나□(奈□)이다. □위인(□爲人)은 탁(喙)의 덕문형(德文兄) 나말(奈末)이다. 비자벌정(比子伐停) 조인(助人)은 탁(喙)의 멱살지(覓薩智) 대나말(大奈末)이다. 서인(書人)은 사탁(沙喙)의 도지(導智) 대사(大舍)이다. 촌주(村主)는 망총지(□聰智) 술간(述干), 마질지(麻叱智) 술간(述干)이다.
《창녕 척경비》앞면.
4.4. 삼국사기
본래 대가야국(大加倻國)【김해부(金海府) 산천(山川) 하(下)에 자세하다.】[9]
은 시조 이진아시(伊珍阿豉) 왕【한편으로 내진주지(內珍朱智)라고 한다.】부터 도설지왕에 이르기까지 범(凡) 16세(世) 520년을 지냈다. 신라 진흥왕이 이를 멸하였다.
《삼국사기》 지리지 고령군
二十三年 秋七月 百濟侵掠邊戶 王出師拒之 殺獲一千餘人 九月 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先馳 入栴檀門 立白旗 城中恐懼 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 論功 斯多含爲最 王賞以良田及所虜二 百口 斯多含三讓 王强之 乃受 其生口放爲良人 田分與戰士 國人美之
23년(562)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9월에 가야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이사부에 명하여 토벌케 하였는데, 사다함(斯多含)이 부장(副將)이 되었다. 사다함은 5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앞서 달려가 전단문에 들어가 흰 기(旗)를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이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사부가 군사를 이끌고 거기에 다다르자 일시에 모두 항복하였다. 전공을 논함에 사다함이 으뜸이었으므로, 왕이 좋은 토지와 포로 200명을 상으로 주었으나 사다함이 세 번이나 사양하였다. 왕이 굳이 주므로 이에 받아 포로는 풀어 양인(良人)이 되게 하고 토지는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니,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아름답게 여겼다.
眞興王命伊湌異斯夫 襲加羅一作加耶國 時斯多含年十五六 請從軍 王以幼少不許 其請勤而志 遂命爲貴幢裨將 其徒從之者亦衆 及抵其國界 請於元帥 領麾下兵 先入旃檀梁 旃檀梁 城門名 加羅語謂門爲梁云 其國人 不意兵猝至 驚動不能禦 大兵乘之 遂滅其國 洎師還 王策功賜加羅人口三百
진흥왕이 이찬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하여 가라국(加羅國)을 습격하게 하였다. 당시 사다함은 나이가 15세 ∼ 16세였는데, 종군하기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아직 어리다 하여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나 여러번 진심으로 청하고 뜻이 확고하였으므로 드디어 명하여 귀당(貴幢) 비장(裨將)으로 삼았는데, 그 낭도(郞徒) 중에서 따르는 자 또한 많았다. 그 나라 경계에 이르자 원수(元帥)에게 청하여 그 휘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전단량(旃檀梁)【전단량은 성문 이름이다. 가라(加羅) 말로 문(門)을 양(梁)이라 했다고 한다.】으로 들어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뜻밖에 군사가 쳐들어옴을 보고 놀래어 막지 못하였으므로, 대군이 승세를 타서 드디어 그 나라를 멸하였다. 군사가 돌아오자, 왕은 공을 책정하여 가라(加羅) 사람 300명을 사다함에게 주었다.
《삼국사기》 사다함 열전
4.5. 필사본 화랑세기
위의 내용은 위서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에도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의 내용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진흥왕이 이사부랑 사다함을 보내서 가야군을 다 때려잡고 왕을 잡고 반파국을 멸망 시켰다는 것. 하지만 화랑세기는 위서 논란이 있어 확실치 않다.(전략) 개국(開國) 11년(561년)…양화공주(兩花公主)가 죽었다. 왕위를 이은 임금 도설지가 야녀(野女)인○○, 월광(月光)과 더불어 영토를 다투어 야인(野人)을 많이 거느리고 왔다. 제(帝)가 태종공(苔宗公)에게 명하여 진압하도록 하였다. 사다함이 선봉이 될 것을 청하였으나, 제(帝)는 사다함이 어리기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사다함은 사사로이 낭도를 거느리고 몰래 갔다. 금진[10]
이 설성[11] 에게 "당신은 무품(無品)인데 여러 차례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이때에 나의 아이를 지켜 주지 않으면 나의 남편이 아니다"하니, 설성이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하였다. 이에 (설성은) 사다함의 휘하에 나아갔다. 야인을 대파하니 제(帝)가 기뻐하며 사다함을 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삼았다. 그 때 (사다함의) 나이가 16살이었다. 정병 5천을 거느리고 전단문으로 달려들어가 백기를 세웠다. 가야○○ 그 성을 ○○하고 도설지와 야녀를 사로잡았다. ○○군이 계속하여 이르러 가야군을 대파하였다. 공으로 전(田)을 내려 주자 부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포로로한 생구(生口)는 모두 풀어 주어 양인(良人)으로 만들었다.(후략)
《화랑세기》 4세 사다함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