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매기의 꿈

 

1. 소설
1.1. 줄거리
1.1.1. 4부 (2014년)
1.1.1.1. 이어지는 줄거리
1.2. 작품 해설
1.3. 기타
1.4. 등장인물
1.5. 패러디: 수탉 조나단
1.5.1. 줄거리
1.5.2. 원작과의 대조
2. 동명의 영화 제목


1. 소설


원제: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Jonathan Livingston Seagull)
저자: 리처드 바크(Richard Bach)[1]
1970년에 나온 뒤로 전 세계적으로 6천만 부 이상이 팔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다. 한국에선 1973년에 현문미디어(당시 이름은 현문문고)에서 처음으로 출판된 뒤 줄곧 계속 나오고 있다. 한국에서만 그렇게 부르는지 몰라도 어린 왕자, 예언자와 같이 세계 3대 소설로 평가된다고 국내 번역판에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세계 몇 대니 하는 평가가 보인다면 대부분은 국내 출판사나 언론에서 과장한 립서비스라고 보면 된다. 애초에 문학 작품에 작품성을 가지고 랭킹을 매길 수 있는 공신력 있는 기관이란 게 있을 수 없고, 그렇게 하려는 생각 자체가 어리석다.(물론 갈매기의 꿈이 나쁜 작품이란 소리는 아니다)
인기에 걸맞게 패러디 작품도 상당하고, 대중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1.1. 줄거리


날기를 좋아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은 언제나 비행 연습을 한다. 부모 말에 의하면 제대로 먹지 않아서 말랐다고. 그리하여 마침내 갈매기의 신체 한계를 넘어선 고속비행에 성공하지만, 그의 예상과 달리 갈매기 무리의 우두머리는 그를 "문책"하며 곧바로 무리에서 추방할 것을 명령하고, 조나단의 항변도 듣지 않은 채 곧바로 따돌려버린다. 이에 조나단은 그들의 무관심,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왜 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먹고 자는 것에만 매달리냐'''는 것에 슬퍼하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비행을 계속 연습한다.
'''보통은 여기까지만 알려져 있다.''' 여기까지는 꿈을 쫓는 갈매기의 이야기 같은 걸로 평범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뒤로는 얼핏보기에 완전히 '''정신나간 이야기'''가 되어간다. 이 앞까지의 '비행법'이 물리 법칙에 입각한 비행방법이라면, 이 이후부터는 어째 초능력과 워프의 영역으로 돌입한다.
어느 날 한 무리의 갈매기들이 자신을 찾아오는데, 자신이 그 전까지 가지고 있던 최고의 비행속력을 가볍게 뛰어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으며, 그 갈매기들과 함께 '초월적' 비행의 세계, 더 위대한 갈매기들의 세계에 도착한다. [2] 그들 역시 갈매기 떼 무리에서 추방당했으며(혹은 벗어났으며) 모두 비행을 즐기는 갈매기였다. 누구보다 나는 것을 즐겼던 조나단은 원로 갈매기인 치앙이 떠나가기 전에 그의 가르침을 받고 하나라도 더 깨치려고 한다.
원로 갈매기의 가르침을 받아서 정진한 결과, 초월적인 비행속도에 도달하게 된 조나단은 시공간을 넘어 비행하는[3] 등 많은 것을 배우고 비행의 세계에 되돌아오자마자 다른 갈매기들로부터 고수 취급을 받는다. 자신은 끝끝내 겸손해했지만 모두 인정하는 분위기. 원로 갈매기는 조나단의 성장을 보고 만족하다가 마지막 가르침-끊임없이 남에게 사랑을 베풀어라-을 남기고 '떠나간다'.[4] 이후 조나단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다가 "분명히 갈매기 무리 중에도 자기와 같은 존재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지금까지 자신의 스승이자 동료였던 설리반과 약간의 언쟁을 벌인 끝에 갈매기 무리로 돌아와 추방된 지 얼마 안 된 플레처 린드를 제자로 받아들인다.
그 후 비행의 세계에서 새로운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그들과 함께 갈매기들의 무리로 돌아가 그들과 직접 대면하게 된다. 물론 갈매기들 무리는 그들을 외면했지만 서서히 그들이 보여주는 비행의 예술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된다. 그중에서 추방 명령을 받지 않은 한 마리가 적극적으로 참여할 정도(물론 참여하자마자 바로 추방당했다). 다른 갈매기들 역시 알게 모르게 관심을 가졌다.[5]
그러나 갈매기들 무리가 그들, 특히 조나단을 신격화하는 것도 모자라 그저 비몽사몽 상태가 된[6] 플레처를 깨우는 걸 보고 "악마다!"라고 하며 적대시하자 조나단은 플레처와 함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곧바로 이세계로 날아가버린다.
그리고 이제 플레처가 "저 따위가 남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조나단은 "너는 이미 충분히 성장했다"라면서 원로 갈매기 치앙이 그랬던 것처럼 '''항상 날 보고 배우기보다 이제 너 스스로 성장해라'''라고 마지막 교훈을 준 뒤 빛과 함께 사라진다.
플레처는 잠깐 패닉을 겪지만 이후 자신의 제자들에게 돌아와 조나단이 그랬던 것처럼 강의를 시작하다가 '''자기도 조나단처럼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7] 웃음을 지으면서 소설이 끝난다.

1.1.1. 4부 (2014년)


2012년 8월, 작가 리처드 바크는 비행기 사고로 죽음의 문턱에 거의 다다를 뻔했다. 이후 2013년에는 작가가 과거에 줄거리에 포함하기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빼버린 후 그대로 잊어버린 '''4부'''의 원고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리처드 바크는 2014년에 4부를 포함한 완결판을 출판하였으며, 한국에서는 2015년에 공경희의 번역으로 42년전 한국어판을 처음으로 낸 현문미디어에서 한국어판을 출간했다.

1.1.1.1. 이어지는 줄거리


조나단이 떠나고 몇년 후, 조나단처럼 한계를 초월해 사라지는 갈매기들도 몇몇 등장하는 가운데 플레처와 동료들은 조나단의 가르침과 비행술을 갈매기들에게 가르치지만, 갈매기들은 조나단의 어록과 생김새 등 그에 대해 낱낱이 알려 하고, 플레처가 조나단 역시 결국 우리와 같은 갈매기였다며 반박함에도 불구하고 점차 조나단을 신격화하기 시작한다. 이후에는 갈매기들이 비행에 관심을 끊게 되고, 모래밭에서 거룩한 조나단에 대한 복잡한 말들만 읊어대는 지경까지 상황이 악화된다. 이후 조나단의 제자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고, 마침내 플레처가 조나단과 처음 만난 후 연습했던 긴 수직 완회전을 하던 중 몸이 사라졌다. 갈매기들은 아무런 말도 남기지 않고 순수한 비행 도중 사라진 플레처가 돌아오지 않자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고, 결국 이를 해소하기 위해 조나단이 내려와 플레처를 승천시켰다는 둥의 이야기를 거짓으로 꾸며 공표하였다.
이후 갈매기들은 맹목적인 신앙심을 품은 '고위 부족 제자' 라고 불리는 이들을 중심으로 한 종교집단으로 변모했다. 조나단의 가르침은 고위 제자들의 복잡한 암송이 정착되어 굳어진 단단한 교리로 전락했고, 비행은 신성한 행동으로 규정되어 아무도 감히 비행하려 하지 않았고, 몇몇 새들은 비행을 하면서도 스스로에게 이건 비행이 아니라며 부정하게 된다. 이러한 새들 중 앤서니라는 새는 조나단에 대한 신화를 믿지 못하겠다며 고위 제자에게 따진다. 고위 제자와의 대화 속에서, 조나단만큼 어마어마한 경지의 비행술을 선보이는 이가 있다면 그를 숭배하겠다는 결론을 내리지만, 동시에 삶이 허망하다는 것을 직시하게 된다.
어느 오후, 앤서니는 삶이 가치없고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바다로 강하해 익사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앤서니는 바다로 강하하는데….
'''갈매기로 보이는 뿌연 것이 그를 지나치며 공중에서 불가능한 어마어마한 비행술을 선보인다.'''
앤서니는 감탄하다가 그대로 실속하고,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잊고 다시 실속한다. 앤서니는 맹세컨대 저건 갈매기였다며 그 갈매기를 향해 있는 힘껏 소리쳤고, 갈매기는 엄청나게 빠른 몸놀림으로 불꽃같이 앤서니에게 돌아왔다. 그 갈매기는 앤서니를 쭉 지켜보았다며, 비행에 대하여 앤서니의 의견을 물어본다. 앤서니는 아름답다고 대답하며, 갈매기 부족 주위에서는 본 적이 없는 낯선 새에게 누구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낯선 새는 "'''존이라 부르게'''" 라고 대답하고 소설은 끝난다.[8]

1.2. 작품 해설


그냥 보면 갈매기가 날아다니는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소설 전반에 철학적 색채가 깊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동양철학을 서양식으로 가미한 뉴에이지 철학이 바탕이 되었다. 이것도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당시 사회분위기를 잘 탄 라이트 노벨이라 생각하면 딱이다. 서구인이 인도, 티벳, 중국, 일본같은 분위기를 짬뽕해 작품을 만들면 그 쪽에서는 신비할 지 몰라도 여기는 그런 면에서 어필하지는 못하고, 마치 스타워즈의 "포스"와 제다이마냥, 오히려 오리엔탈리즘이기에 어필하는 경우가 있다.
먼저 초반부에 모든 갈매기들이 먹고사는 일에만 집착한 데 반하여 비행을 추구하는 조나단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깊은 사색거리를 안겨주며, 나중에 조나단이 끊임없이 비행에 몰두하여 초월자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곳에 도달하는 것은 불교해탈과 겹치는 면이 있다.[9] 또 더 높은 경지로 가는 길의 입구에서 되돌아와 우매한 갈매기들을 가르치는 것 또한 보살도를 행하는 모습이다. 이어 조나단이 7명의 제자들을 거느리는 것이나 작중에서 계속적으로 '하느님 갈매기의 아들'로 지칭되는 점 등은 명실상부히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
이런 종교적 철학적 주제를 갈매기의 삶을 인용해서 질리지 않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상장한 수작으로 꼽을만 하다. 굳이 종교적인 해석이 아니더라도, 작중 인물들의 행동과 대사를 좀 더 생각해 보면 주제를 알 수 있다. 특히 원로 갈매기 치앙과 조나단의 대화, 그리고 작품 마지막에 나오는 조나단과 플레처의 대화에 집중하면 좋다.[10] 오히려 이러한 접근방식이 훨씬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기 쉽다.
덧붙여 갈매기의 꿈에 관한 지식전문기자의 칼럼에서 일종의 무협지처럼 읽힐 수 있다고 올라왔다.#[11]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책을 종교적 혹은 문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여 판타지나 무협지로 간주하면 혹여라도 숭고한 갈매기의 꿈을 전달하려는 작가의 진정한 메시지를 놓칠 우려가 있다.#

1.3. 기타


논리야 놀자에서는 "다른 갈매기들은 먹지 않고도 비행할 수 없으니 조나단처럼 꿈만 쫓을 수는 없다."는 식의 비평을 했다. 물론 현실의 갈매기는 당연히 먹지 않고 날 수는 없지만, 본문에서 노력 끝에 비행술을 터득한 조나단은 자기 나름대로 먹이를 획득하는 방법들을 얻어냈다.[12] 그러므로 이 소설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완전히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을 현실을 비유한 우화로 해석한다면 위와 같은 비평을 무시하기 어렵다. 작품 속에서야 작가의 의도에 따라 조나단(해석에 따라 조너선을 조나단 이라고도 한다 오히려 조나단 쪽이 더 많은 듯)이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나가면서 동시에 생활(또는 생존) 문제까지 해결하도록 만들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두 가지 목표를 모두 이루는 것이 어려운 상황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작품 속에서 덕업일치한 주인공을 만들어내기는 쉽지만, 실제로 덕업일치하기란 참 어려운 법인데, 덕질할까 취직할까 고민하는 젊은이들의 현실을 그런 작품으로 비유한다면, 그 비유가 적절하겠느냐… 정도면 이해하기 편할 듯. 위 비평의 취지부터가 작품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각도에서 비판적인 사고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보자는 것이므로 그 정도로 이해하자.
90년대 초등학교(혹은 국민학교)에서는 환경도서와 함께 이 책이 권장도서 혹은 방학숙제 독후감용 도서로 유난히 선정이 많이 되었다. 포털 사이트에 이 책의 제목을 검색할 경우에 나오는 연관검색어(독후감, 느낀 점)로 보아 이후에도 여전하다. 권장도서로 선정한 이유나 초등학생들이 이를 읽고 쓴 독후감 내용은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자' 이런 식이다. 근데 얘길 해 보면 이걸 독후감용으로 내 놓으는 선생들도 사실 정확한 메세지가 뭔지, 배경이 어떤건지 잘 모르는 경우도 많다.
여담인데 미국 개신교 보수적인 목사들은 이 소설을 사탄의 소설이라고 엄청나게 비난했다.한국도 마찬가지라서 레이디 가가 내한 공연 반대운동에 나서던 개신교 단체 <낮은 울타리>를 이끄는 목사 신상언은 뉴에이지 소설이라고 이 작품을 비난하며 이 작품을 청소년 추천도서로 선정한 것을 취소해야한다고 교과부에 항의했으나 교과부는 듣는 척도 안했던 바 있다. 참고로 신상언은 사탄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습니다라는 불쏘시개를 쓴 작자.
왜냐하면 깨달음을 얻은 갈매기인 조너선이 하계로 돌아와 제자들에게 자유롭게 날고 살아갈 것을 가르치는 구도는 예수의 공생활을 강하게 연상시키는데, 정작 조너선은 작중에서 자신을 위대한 갈매기, 혹은 위대한 갈매기의 외아들이라고 칭송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즉 소설 후반부 조너선의 행보가 그리스도교적인 구도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설 전반에 깨달음과 실천과 수행은 온전히 자력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선불교적인 이상을 도입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학과 결정적으로 척을 지게 되는 셈이다.
왜 이게 문제인지 궁금하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일이 쉽다. 보수적인 개신교 목사들이 보기에 이 소설은, 예수와 그의 삶을 갈매기 버전으로 치환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화이다. 그리고 이 관점에서 계속 나아간다면, 이 소설은 '''예수가 본인 입으로 "난 하느님의 외아들이 아니고 너희도 열심히 하면 나같이 될 수 있는 거야."'''라고 주장하는 기독교 이단적인 내용으로 파악되는 것이다.
사실 작가의 의도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안티테제라기보다 오히려 개별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보편 진리(생각으로 자신을 제약하지 않는 것, 자유롭고 즐겁게 노력하고 사랑할 것 등)에 대한 다소 이상주의적인 탐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적 요소가 함께 골고루 배어 있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그러나 공격적인 개신교 인사들이 바라보기에 이러한 통합적인 사고는 사탄의 공작이다(…).[13]
또 위와 같은 기독교 목사들의 비판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비판받은 사례도 있다. 이 경우 비판의 초점은 이 소설에서 꿈을 찾는 갈매기들(조나단, 조나단의 선배들, 조나단의 제자들)이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라는 점에 맞춰져 있다. 즉, 선각자로써 꿈과 이상의 추구자인 갈매기들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고 싶어하는 갈매기들의 지혜로움과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갈매기들의 어리석음을 지나치게 차별화 함으로써 꿈과 이상이나 깨달음이 현실적 욕구나 대중의 이해와는 완전히 분리된 소수의 선각자나 탐구자들만의 전유물처럼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하여 주인공인 조나단이 자신이 특별한 갈매기가 아니고, 자신의 깨달음 역시 누구나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작가나 팬들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대중을 꿈이나 이상을 바라는 사람들을 질투하거나 증오하는 집단으로 묘사하고 그 대중들의 욕망을 깨달음과 상반되는 비루한 것으로 묘사한 부분, 그럼으로써 대중과 완전히 유리된 지혜로운 이들만의 공동체 내에서의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다시 대중에게 돌아가 탄압과 적개심에 맞서며 그 깨달음을 전해야 한다고 보는 부분에서는 엘리트주의적이라는 비판에 정당성이 결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뭐, 이 비판을 심화시킨 견해 중에는 이 작품이 민중을 경멸하고 소수 엘리트가 주도하는 사회를 정당화한다는 것도 있긴 한데… 이건 좀 작품을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있어서 납득하기 어렵기는 하다.
그리고 위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이 작품 내에 미묘하게 내재된 차별주의적 요소들이 있다는 비판도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이 작품 내에서 여성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깨달은 갈매기들이 죄다 남성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차라리 작품 전체에서 성별이 드러니는 일이 전혀 없으면 아예 성(gender)문제와는 상관없는 작품이라고 해석하면 되는데[14] 딱 한명 여성 갈매기임을 알아볼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조나단 엄마다. 그리고 이 인물은 전통적인 여성상에 부합하는 가족주의로 조나단이 꿈을 좇는 것을 방해하는 인물로 나오는 터라… 작가가 수동적인 형태의 성차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한 면이 있지 않으냐는 비판 역시 어느 정도 유효한 면이 있다. 뭐, 이런 차별주의 비판을 더욱 심화시킨 것 중에는 왜 하필 깨달은 갈매기들은 죄다 하얗게 빛난다고 묘사하느냐, 이 부분에서 인종차별주의적인 의심이 든다는 수준까지[15] 발전하는 것도 있으니 뭐 판단은 알아서 하자.
그리고,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하는 데 참고가 될 점으로, 이 소설이 처음 세상에 알려진 것은 70년대 초반 미국 서해안의 히피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부분이 있다. 당시 미국에서는 68혁명의 퇴조로 히피문화가 크게 성행하고 있었고, 이 히피들이 해당 작품의 첫 독자였던 것이다. 당시 히피문화는 명백하게 반체제/반 권위주의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통상적인 반체제/반 권위주의적 세력을 대표하는 좌파들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고, 히피 특유의 신비주의가 정신적 엘리트주의로 발전한 면도 있으므로 참고할 만 하다.
더불어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가 있다! 그런데 이건 결국 어설픈 다큐멘터리가 될 수 밖에 없었다. 2번 항목 참조.

1.4. 등장인물


'''조나단 리빙스턴'''
소설의 주인공. 먹이만 찾는 갈매기들의 삶에 염증을 느끼고 멋진 비행을 하다 무리로부터 추방당한다. 허나 더 훌륭한 비행 기술을 갈고 닦아, 치앙에게 시공을 뛰어넘는 비행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사랑의 실천을 깨달아 다시 무리로 돌아와 갈매기들을 가르친다. 이후 플레처에게 다른 갈매기들의 교육을 맡기고 사라진다. [16]
영화판 성우는 배우인 제임스 프랜시스커스(1934~1991). KBS판 성우는 오세홍.
'''설리번'''[17]
조나단이 다른 갈매기들과 함께 도착한 위대한 갈매기들의 세계의 교사. 그에게 그 세계에 대해 설명해주고, 다른 비행법을 가르쳐준다. 조너선과 "사랑"에 대해 약간 언쟁을 빚기도 하지만 결국 그의 뜻을 인정해준다.[18]
'''치앙'''
조나단이 도착한 위대한 갈매기들의 세계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갈매기. 조나단에게 시공을 뛰어넘는 비행에 대해 가르쳐주고,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을 전해준 뒤 사라진다. 영화판의 성우는 안필립이다. KBS판 성우는 설영범.
'''플레처'''
조나단의 첫 번째 제자. 약간 성질이 급하지만 나는 걸 매우 좋아한다. 다른 갈매기들을 가르치다가 사고로 인해 바위에 부딪혀 죽을 뻔 하였으나, 조나단과의 대화 후 깨어난다. 그 때문에 그들을 시기하던 갈매기들에게 죽을 뻔 했으나, 갑작스럽지만 시공을 뛰어넘는 비행법을 깨달아 죽지 않는다. 이후 조나단을 대신하여 갈매기들을 가르치게 된다. KBS판 성우는 윤병화.
'''아버지'''
조나단의 아버지지만 아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족 장로들과 같이 아들을 무리에서 추방하게 만들었다. 원작에선 비중은 그리 없지만 영화 상에선 꽤나 비중이 높아졌고 영화 상에서 아버지 테마 노래까지 있다. 닐 다이아몬드가 부른 <아버지에게(Dear Father)>. 성우는 리처드 크레나(람보에서 트라우트먼 대령으로 알려진 배우), KBS판은 설영범.
'''갈매기 무리'''
위의 등장인물들이 모두 속해 있는/있었던 단체. 인간사회와 비슷한 면이 있다. 특히 우두머리 갈매기가 "넌 우리 규칙에 어긋나게 행동했으니 너 추방"이라고 선언하는 대목은 왕따 선언과 비슷한 면이 있다.[19] 중후반부에서 조나단 무리(예술가들?)를 보고 존중(내지 숭배)하거나 시기하는 점도 비슷하다.

1.5. 패러디: 수탉 조나단


1973년 솔 와인스타인에 의해 '수탉 조나단' 이라는 이름으로 패러디되었다. 가장 최근의 번역본에서 채택한 이름은 '수탉 조나단'이지만, 이전에는 장닭의 꿈으로 번역되어 들어온 적도 있었다. 기존 갈매기의 꿈은 철학적이고 관념적인 내용인 것에 반하여 이 갈매기 조나단은 세속적이면서도 직선적인 내용으로 패러디 되었다. 꼭 읽기를 추천한다.

1.5.1. 줄거리


미국 시골 마을 양계장에서 태어난 '조나단'이라는 수탉은 '날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는 다른 닭들과는 조금 다른 닭이다. 피나는 노력 끝에 조나단은 결국 비행에 성공하게 되지만, 신이 만들어주신 그대로 닭은 땅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양계장 닭들의 장로에게 밉보여 결국 고향을 떠나게 된다.
고향을 떠나 뉴욕으로 온 조나단은 즐거운 시간을 만끽한다. 뉴욕에서 비둘기, 참새 친구를 만난 조나단은 다른 '원래 날 수 있던' 새들보다도 더 화려한 비행 실력을 뽐내며 화려한 뉴욕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조나단은 길에 널린 음식을 먹던 중 한 음식을 발견하게 되고 부리를 가져다 대지만 비둘기 친구의 제지로 먹지 못하게 된다. 의아해 하던 조나단은 비둘기의 설명을 듣자 망연자실하게 되는데, 그 음식의 정체는 치킨이었던 것이다.
그 후 친구들의 설명에 의해 조나단은 미국에는 KFC라는 거대 치킨 체인점이 있으며 자신이 살던 양계장 역시 이러한 치킨에 사용될 육계와 계란을 위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던 중 조나단은 KFC의 신제품 개발 연구소를 엿보게 되는데 거기서 암탉의 산도에 네모난 관을 박아 사각형 달걀을 만들어 내려는 KFC의 야만스러운 행각을 보게 된다.
이런 참혹한 광경을 보게 된 조나단은 계권(鷄權) 향상을 꾀하고 닭의 학살을 막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하지만 성층권에서 비행하던 중 한 비행기와 같이 날게 되었는데, 그 비행기의 탑승객이 먹고 있던 치킨의 크기와 형태를 보았을 때 그 치킨은 과거 자신을 양계장에서 쫓아낸 장로로 만들어 졌음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슬픈 경험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조나단이지만, 고향에선 과거 추방당한 조나단을 데면데면한 분위기로 맞았고, 오히려 '비행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조나단을 다른 닭들은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희망은 있었으니. 양계장의 젊은 닭 중 몇마리가 비행을 배우겠다고 나선 것(원작의 플레처 역할). 그로 인해 일은 순탄하게 풀리고 조나단은 양계장 주인으로부터 양계장을 해방시키게 된다.
하지만 뉴욕에서 끔찍한 소식이 하나 전해지게 되는데 그것은 KFC에서 통조림 내에서 성장하는 닭을 개발한 것이다. 이 통조림은 기존의 사각계란보다도 더 비인간적인 것이었고, 많은 닭들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통조림 속에서 태어날 운명에 처했다. 때문에 조나단은 이를 더 이상 목도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조나단은 KFC 신제품 개발 연구소에 있던 통조림 제작 기계에 육탄 공격을 감행. 파괴하고 사망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조나단은 죽지만, 기형적으로 생산될 많은 닭을 구한 점이 감안되어 성인의 반열에 이르게 되고, 천국에 가게 된다. 거기서 천국의 가장 높은 성인인 석가, 예수, 무함마드사회주의를 극렬 주장하던 카를 마르크스를 논리로써 제압하고 만찬으로 자신의 몸(!)을 조리해 만든 치킨을 먹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 장면을 보던 조나단은
"신들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이래도 되는건지"
하면서 끝이 난다.

1.5.2. 원작과의 대조


능력의 필요성을 모르는 군집 속에서 한 개체(조나단)가 능력을 갈고 닦아 성장하는 것과 그 와중에서 조력자의 도움을 얻고 마침내 스승의 위치까지 오른다는 스토리는 매우 비슷하게 흘러간다.
하지만 갈매기의 꿈과는 달리 수탉 조나단에선 애초에 날 수 없는 닭이 난다고 하는 차이가 있다.[20] 그래서 애초에 날 수 있는 갈매기와는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오히려 갈매기의 꿈의 주인공보다 수탉 조나단의 주인공이 더 큰 어려움을 맞는 셈이다.
또한 개인의 성취가 강조되는 원작과는 달리 패러디에선 조나단의 희생정신이 강조되고 있다. 조나단은 닭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새보다 멀리, 빨리 날 수 있는 새로써 뉴욕에서 계속 거주했다면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비행, 친구들과의 삶, 맛있는 먹을거리 등 그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이 뉴욕에 있었지만, 결국 그는 닭들의 해방을 위해 고향에 돌아오고 결국 육탄 돌격을 통해 기계를 파괴하기에 이른다. 이는 원작에선 보이지 않은 가치로 엘리트 층의 사회적 의무 참여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 같다.

2. 동명의 영화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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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작. 할 버틀렛(1922~1993)이라는 감독이 자기 집까지 저당잡아 만든 돈 150만 달러로 각본과 감독을 맡은 영화이다.하지만 캘리포니아 바닷가에서 촬영 당시 기록적인 추위와 비, 눈보라가 들이닥쳐 촬영진들은 고생했고, 갈매기들이 촬영감독인 잭 쿠퍼를 공격하여 부상을 입히는 바람에 야구에서 쓰이는 얼굴 보호마스크를 끼고 촬영해야 했다.
영화는 어쩔 수 없이 갈매기들을 계속 찍고 거기에 내레이션과 목소리를 더빙하여 만들었지만, 평가는 극악이었다. 어설픈 다큐멘터리 같다는 평만 들었고 250만 달러로 배급권을 산 파라마운트 영화사는 극장 수익으론 160만 달러 흥행에 그쳐 흥행은 실패했다. 거기에 원작자 바크는 원작 왜곡이라고 불쾌하게 여겼으며, 음악과 같이 주제가를 부른 닐 다이아몬드는 자신이 맡은 음악을 안 썼다고 소송을 제기했으며 프랑스 제작자인 오베르 주벨이 자신이 1936년에 만든 리메르 바다라는 영화를 표절했다고 소송을 제기했다. 그나마 영상미적인 촬영은 호평을 받아 아카데미 최우수촬영상 및 편집상 후보에 올랐다.
이렇게 복잡한 문제와 같이 영화는 잊혀졌지만, 다이아몬드가 부른 주제가 <Be>(오래전 안성기가 나온 맥심(커피) 광고음악으로도 나왔다)는 크게 성공했다. 더불어 사운드트랙은 미국에서만 6백만 장이 넘게 팔렸다. 즉 OST는 좋았다. 주제가인 Be와 영화장면 그래도 당시에는 졸작으로 무시당했지만 이후에는 좀 낫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물론 걸작으로 재평가는 아니다.
1991년 광복절 오후 3시 30분, KBS-2에서 더빙 방영한 바 있다.
[1] 본인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비행기광으로도 유명하다. 실제 비행사이며 이 책의 세계적인 대박으로 상당한 부자가 되어 수십대 비행기를 보유하고 있다.[2] 이 부분부터는 이전까지의 '합리적 노력'보다 오히려 고행과 수양에 가까운 상당히 신비주의적인 요소가 짙어진다.[3] 단번에 지구를 떠나 초록빛 하늘과 태양 역할을 하는 두개의 쌍동이 별이 있는 어느 유성에 도달하는 경지가 된다(…)[4] 작중에서는 하얗게 빛나다가 사라지는데 이는 죽었다는 표현을 에둘러서 표현한 듯 싶다. [5] 저녁에 조나단의 무리가 휴식을 취하며 이야기를 나눌 때 주위에서 큰 원을 그리며 엿듣고 있다가, 서로 알아보고 밀고를 할까봐 모르는 척 몰래 사라졌다.[6] 새끼 갈매기가 어미 갈매기를 찾으려다 비행 경로에 끼어든 걸 보고 급회전했다가 '''바위에 제대로 부딪쳤다.''' 더 놀라운 건 '''그러고도 살았다.'''[7] 조나단이 처음에 자신을 가르칠 때 "먼저 수평 비행부터 시작해 보자"고 했는데, 어느새 '''자신도 자기 제자들에게 그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8] '존=조나단'이라면 빛이 되어 사라진 치앙, 조나단, 플레처 모두 죽은 게 아니라 정말로 우화등선했다는 얘기가 되는데…[9] 본문에 어떤 갈매기가 이 초월자 갈매기들이 날아다니는 땅에 오려면 몇천, 몇만번의 삶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이는 불교의 윤회설이다.[10] 두 대화에서 강조되는 부분은 '''넌 충분히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 믿어라, 그리고 행동하라.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나눠주어라'''이다.[11] 이 외에도, 주류는 아니지만, 갈매기의 꿈의 줄거리와 구성이 무협소설과 비슷하다는 주장이 있다. 다만, 현실의 부조리에 동의하지 않은 괴짜가 열심히 수련을 하고, 그 과정에서 스승을 만나 제자로 들어가고, 스승의 도움을 받으며 수련을 거듭한 결과 득도하여 극의의 경지에 든다는 것은, 굳이 무협이 아니더라도 장르를 초월하여 창작물 전반에서 자주 쓰이는 클리셰다. 즉, 비슷한 전개법이 사용되었을 뿐, 작가가 의도적으로 무협지처럼 쓴게 아니다.[12] 그는 하루하루 더욱 많은 것을 배웠다. 유선형으로 몸을 가다듬고 쏜살같이 날아 내려가면 수면에서 삼 미터 깊이에 떼지어 살고 있는 맛있고 진귀한 물고기를 잡을 수 있다는 것도 배웠다. 그는 이제 고깃배와 상한 빵 부스러기가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밤에 바다로 불어오는 바람을 가로질러 항로를 정하고, 해가 진 뒤부터 아침해가 뜰 때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날면서 허공에서 잠자는 법을 그는 익혔다. 그는 지극히 평온한 마음으로 짙은 바다 안개를 헤치며 날았으며, 안개를 뚫고 눈부시게 빛나는 푸른 하늘로 솟아오르기도 했다. 모든 다른 갈매기들이 안개와 비에 휩싸여 아무 일도 못하고 땅위에 서 있을 바로 그 시각에도 그는 공중 높이 불어가는 바람결을 타고 육지 깊숙이까지 들어가는 법을 배웠고, 거기서 맛있는 곤충들을 잡아먹는 것도 배웠다. - 본문 중 일부[13] 굳이 공격적으로 바라보지 않더라도 개신교계에서는 여러 종교의 공통점을 이야기하기보다 '다른 건 다른 거다'라고 구분을 뚜렷히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C.S. 루이스 역시 나니아 연대기의 마지막 권에 나오는 타쉴란의 우화를 통해 여러 종교를 동일시하려는 태도를 정면으로 공격한 바 있다.[14] 다만, 강경한 패미니즘 계열에서는 작품 내에서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통해 이미 성별이 드러나는 이상, 이야기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성 차별이라고 주장하므로 완전히 회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15] 사실, 현대 한국인 기준으로 보면 어째 좀 편집증적이라는 느낌을 받기 쉬운 이야기이긴 한데, 이 소설이 출간될 당시인 70년대 미국에서는 인종차별 문제가 그 시대의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였고… 그 시절에는 흰색과 검은색이라는 색깔 자체에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부여되는 이미지 문제가 상당히 중요한 화두였다는 점에서 완전히 억지는 아닌 셈이다.[16] 워프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일종의 득도에 가까운 표현이고(다만 "다른 갈매기들은 그것을 보았다"처럼 묘한 서술이 있다), 죽은 갈매기를 살려내는 건 플레처가 바위에 들이박고 나서(…) 혼수상태에 있자 말을 걸어서 깨우는 것이다. 하지만 날개가 부러진 새를 날게 해주는걸 보면…..[17] 헬렌 켈러의 스승 앤 설리번과 이름이 같다. 리처드 바크가 앤 설리번의 이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18] 설리번은 "어차피 맨날 권력투쟁하고 먹고 살기에 바쁜 애들인데 네가 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있겠냐?"라며 조나단의 의견(내가 배운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깨우쳐줘야 한다)에 반대했다. 이 점은 배운 자들의 오만함(=엘리트주의?)과 비슷한 면이 있다.[19] 물론 인간사회에서 추방되는 경우는 오해 말고도 정말 악의적인 짓을 했기 때문에 추방당하는 경우도 있으니 해석에 주의하자. 작중의 그것은 "예술탄압 및 몰지각"에 가깝다.[20] 원래 약간씩은 날 수 있는 닭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작중에선 '닭은 날 수 없다.'는 인식이 지배하고 있다.